|
출처: 豊 柳 마 을 원문보기 글쓴이: 류현우(연천)
修巖 柳袗과 愚川 그리고 達美
柳 賢 佑
눈이 시리도록 파란 우천(愚川)의 가을하늘. 멀리 나각산(螺角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와 있다. 어느 곳을 둘러봐도 먼지 한 점 보이지 않는 깔끔한 세상. 군데군데 뭉게구름 둥실 떠 있으니 1년을 통 털어 이런 청명한 날이 며칠이나 되랴. 들판의 곡식은 종택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오늘도 좋은 소식이 들려오려나 보다. 잘 닦여진 도로를 달려 수암종택(修巖宗宅) 앞에 서니 어릴 적 내가 뛰어 놀던 곳이다. 손님들이 끊임없이 찾아들고 글 읽는 소리가 건너 우리 집까지 들리던 종택이다. 깨끗하고 따사로운 愚川의 햇살은 무척 포근하다.
그러나 고요함 속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다. 넓은 주차장엔 자동차 한 대 보이지 않다. 대문이 반쯤 열려있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우편함 속에는 종택 안내카다록 몇 장이 뒹굴고 있을 뿐. 언젠가부터 종택은 비었고 찾아오는 길손에게 물 한 사발 건네며 愚川의 내력을 말해 줄 사람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조선조 400年에 이르는 동안 벼슬이 끊이지 않고, 가족들의 발길이 멈추지 않았던 愚川의 옛 영화는 어디로 가고 이렇게 적막강산으로 변했을까. 아무리 ‘들을 愚川이지 볼 愚川은 아니다’라고 하더라도 훌륭했던 류대감댁의 인걸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愚川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이다. 우물리는 크게 큰마을, 작은마을과 가실(가사리)로 구분되며 남원양씨, 김해김씨와 풍 산류씨 우천파가 함께 살았다. 그러 나 좁고 척박한 땅에 후손들이 하나 둘 떠나고 고향을 지키는 족친이라 고는 몇 집 되지 않았다. 급기야 근 처의 공군사격장에서 과녁을 빗나간 포탄이 마을 주변에 종종 떨어지는 피해가 발생하는 탓에 수년 전부터 정부에서 농토며 가옥을 매입하여 모두 떠나버리고 지금은 오직 수암종택 하나만이 풍산류씨 우천파의 옛 영화를 지키고 있다.
愚川은 서애(西厓)의 제3子인 수암(修巖,1582~1635, 柳袗) 후손들의 세거지이다. 修巖이 36세에 가사리(佳士里)에 터를 잡은 데서 비롯되며 강고(江皐, 1762~1834,柳尋春), 낙파(洛坡, 1798~1875, 柳厚祚), 계당(溪堂, 1813~1872, 柳疇睦)등 석학과 명공의 터전이기도 하다. 修巖은 일천(逸薦)으로 봉화현감, 영천(지금의 榮州)군수, 청도군수, 합천군수를 역임하고 최종관직으로는 한성서윤에 이어 사헌부지평에 이르렀다. 올바른 관료란 후세에 온전하게 이름을 남길 수 있음을 자랑해야 한다. 목민관으로써의 修巖은 가는 곳마다 선정을 펼쳐 지역민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지금도 합천(陜川)의 함벽루(涵碧樓)와 의성 다인 양서리에 그의 유애비(遺愛碑)가 전하며 후세에 인자한 이름을 남기니 修巖이야말로 이 시대가 배워야할 으뜸관료의 표상이 아닐까.
겸암(謙菴)과 서애(西厓) 형제를 배출한 하회(河回)는 낙동강이 하회마을을 S자형으로 휘돌아 흐른다하여 태극형이고 중앙에서 볼 때는 연꽃이 물위에 떠 있는 형상이라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다. 연화부수형은 꽃과 열매를 한꺼번에 갖추어 유종의 미를 이루고 그 위에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이므로 자손이 번성하고, 청사에 빛나고 향기로운 위인을 배출한다는 것이다.
河回에 못지않게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 愚川이다. 愚川은 태백산, 일월산, 그리고 팔공산의 끝자락이며 또 낙동강, 위강의 합류하는 곳이라 예부터 삼산이수(三山二水)가 만나는 지점, 매화락지의 명당이라 했다. 매화는 땅에 떨어지면 향기를 내 뿜기 때문에 발복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1617年 修巖은 河回에서 愚川으로 옮겨왔고 지금의 종택이 아닌 가사리에 삶의 터를 잡았다. 이 곳 이름이 시리(柴里), 시상촌(柴桑村), 가사리 등으로 변한 것을 보면 처음에는 가시덤불을 헤쳐 집을 짓고 점차 개간하여 살아 온 듯하다. 修巖이 가사리에서 살던 집은 허술한 초가였다고 전한다.
修巖이 우천으로 이거한 기록은 여러 군데 남아있다. 그 중 류시복씨가 쓴 “풍산류씨 연원에 대한 가설”(『풍류회지』제 7호)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河回 땅은 많은 지손과 종들이 살기에는 좁기 때문에 서애(西厓)는 입암(立巖 ,柳仲郢)의 종손(宗孫)만 살고 지손(支孫)들은 河回를 떠나라고 했다. 愚川과 존도리는 이미 西厓 생전에 땅을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만약에 西厓의 유훈(遺訓)을 후손들이 잘 지켰더라면 현재의 충효당(忠孝堂)은 河回가 아닌 愚川이나 상주 근처의 어딘가에 지었을지도 모른다. (중략) 河回를 떠나야 하는 修巖은 가기 싫어 차일피일 했다는 말이 설화로 전한다. (후략)】
修巖은 1582年 서울에서 西厓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효우가 남다른 修巖은 장성 후 하회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1589年(8세)에 어머니(全州李氏)가 他界하시고 1597年(16세)때 충재(冲霽, 權橃)의 증손녀(현감 采의 따님)과 혼인을 했다. 1601年(20세)에는 백부상과 조모상을 입었고 1605年(24세)에는 맏형 여(袽)가 28세로 요절한데 이어 1607年(26세)에는 河回에 와 있던 아버지 西厓의 별세를 맞았으며 1612年에는 중형 단(道巖,衤耑 )이 서울에서 33세의 나이로 요절하니 남자로는 어린조카 원지(元之, 拙齋), 아들 천지(千之), 세 숙질이 고적하게 남았기 때문에 修巖은 대소가의 어려운 살림을 혼자 돌보게 되었다. 修巖이 河回에서 愚川 가사리로 옮겨갈 때 본인은 36세, 장조카 元之(拙齋)가 20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修巖이 愚川으로 이거 후에도 여전히 졸재(拙齋)는 가사리에서 숙부를 스승삼아 학문을 익혔으니 충효당(忠孝堂)이 愚川에 세워질 만도 했다.
최근 계암(溪巖,1577~1641,金玲)의 『계암일록(溪巖日錄)』이 출간되어 많은 유학 후예들의 이목을 끈 바 있다. 『계암일록』은 안동 오천 광산김씨(光山金氏) 溪巖이 고향 예안지역에 기거하며 39년간 작성한 생활일기다. 溪巖은 1612年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올랐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벼슬한 기간은 5개월 남짓하다. 『계암일록』은 그의 눈에 비친 당시의 굵직한 역사적 사건에서부터 한 개인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 임금과 정승에서부터 일반 백성들에 이르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진솔하게 담고 있다. 특히 溪巖은 벗으로써의 修巖과 돈독한 우의를 자랑했는데『계암일록』에 나타난 修巖의 移居, 他界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본다.
【(초략) 광해 9年 1617年 9月 20日
季華(修巖 柳袗의 字)가 달미(達美)로 이거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말이 과연 그러한지 나는 갑자기 믿을 수가 없다. 궁핍하여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고향땅을 버리기까지 한다니 이 어찌 그의 마음에 하고 싶어서 가는 것이겠는가, 참으로 부득이해서 일 것이다. 선비가 가난한 것도 병통이라 할만하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같은 세상에 이만한 사람은 겨우 있지만 다시 얻기는 어려운 사람이란 것이다. 이웃에서 올바름을 보고 배우며 또래 사람들이 의지하고 중시하는 이는 오직 季華뿐인데 하루아침에 버리고 타향으로 가서 아득히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다니 쓸쓸하고 외로운 우리가 더욱 외롭고 되었다. 옥연(玉淵)의 강산풍월인들 어진 주인이 멀리 떠나는데 또 어찌 무정할 수 있겠는가.(중략)
광해 12年 1620年 1月 22日
季華는 지난겨울에 가솔들을 데리고 達美에서 다시 천성(川城)으로 들어갔는데~ (중략)
광해 12年 1620年 9月 1日
川城에서 종이 와서 계화와 효중(忘窩 金榮祖) 두 친구의 편지를 보았다. 季華는 장차 가까운 시일에 가족을 이끌고 다시 達美로 갈 것이라 하니 작별의 안타까운 뜻이 편지 속에 가득하였다. (중략)
광해 12年 1620年 9月 10日
이날 季華가 가족을 이끌고 達美로 돌아갔다.(중략)
인조 13年 1635年 1月 14日
季華가 지난밤에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랍고 통탄스럽고 애석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서로 만난 지 이제 겨우 열흘이 지났는데 갑자기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인사가 헤아릴 수 없음이 진정 이와 같단 말인가. 영남 사람들이 불행하고 벗들이 불행하다.(중략)
인조 13年 1635年 1月 18日
季華의 상여는 오늘 龜鶴亭(栢巖 金玏의 本家, 修巖의 따님宅)에서 발인하여 달미에 있는 옛날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중략)
인조 13年 1635年 5月 6日
류지평(柳持平)의 초상은 9일에 발인하고 11일에 선산 해평에 장사지낼 것이므로 큰아이를 보내서 전을 올리려고 한다. (후략)】
지금까지 우리는 1617年 하회를 떠난 修巖이 가사리에 이거했다는 기록을 보았다. 그러나 가장 친한 벗 溪巖은 修巖의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향을 버리며 이거한 곳이 ‘달미(達美)’라는 곳이라고 전한다. 곳곳에 ‘達美’라는 지명을 거론했고 1635년 修巖이 타계한 후에도 達美로 돌아갔다고 적고 있다. 우리가 그 동안 숙명처럼 기억해 온 修巖의 이거지는 ‘愚川의 가사리’가 아닌 ‘達美’라는 곳으로 못 박고 있다. 후손에게 선조의 기록이 더없이 소중하며 기록을 모아 역사를 만든다. 여태껏 豐柳의 역사에서 ‘達美’라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修巖 이거(移居) 400年이 다가오는 지금 최초 이거지가 우천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達美’라는 이름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당시 修巖을 가장 잘 이해하고, 修巖을 잘 아는 분이 溪巖이라면 溪巖의 단 한마디도 돌려듣거나 무시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없지 않을까. 達美는 어디일까?
의성 단밀면 팔등리
수소문 끝에 ‘達美’라는 지명을 알려주신 분은 상주문화원의 금중현부원장이었다. 琴부원장의 제언에 의하면 ‘達美’란 곳은 ‘의성군 단밀면 팔등리의 주변마을’이라고 한다. 팔등리는 修巖이 최초 터를 잡았다는 가사리와는 2km 남짓 떨어진 곳이다.
溪巖日錄에 따르면 修巖은 54세로 타계할 때까지 愚川으로 이거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達美가 愚川의 가사리와는 지척이지만 같은 곳은 아니다. 修巖이 達美로 이거하고 愚川으로 옮겨왔다는 기록 또한 현재까지는 밝혀진 바 없다. 우리는 修巖이 河回에서 愚川으로 이거한 것으로만 알았다. 그렇다면 풍류(豐柳)의 역사는 修巖이 達美로 이거했다는 기록을 왜 전하지 않았을까? 행여 당시에는 愚川과 達美가 한 마을이었고 그래서 대표이름이 達美로 통하지는 않았을까? 그게 아니라면 愚川 가사리라는 작은 마을을 達美라는 큰 마을로 함께 부른 건 아닐까? 溪巖이 ‘愚川’이나 ‘가사리’라는 地名을 한 번도 거명하지 않은 점으로 미뤄 당시에는 ‘愚川’이라는 地名이 생기기 이전은 아닐까? 만약 達美에 정착했다면 愚川으로 이거해 온 시기는 언제쯤일까?
修巖이 쓴 『유청량산기(遊淸凉山記)』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修巖과 망와(忘窩, 金榮祖,1577~1648), 그리고 溪巖은 1614年 9月 12日부터 엿새 동안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하며 우의를 나눈다. 이들이 온계동(溫溪洞)에서 마지막 헤어지면서 忘窩(망와의 字는 孝仲)는 천성(川城)으로 가고 修巖과 溪巖은 오천 방잠재사에 가서 함께 묵었다(至溫溪洞。孝仲往川城。余與子峻入烏川。宿芳岑齋寺). 이로 미루어 忘窩가 산 곳은 川城이었다. 그런데 溪巖은 그의 일기에서 ‘1620年 正月 季華는 가솔들을 데리고 達美에서 다시 천성(川城)으로 들어갔는데~’ 라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川城은 또 어디일까?
여기서 우리는 修巖과 溪巖, 그리고 忘窩의 상호관계를 알아보자. 修巖은 하회에 있을 때부터 溪巖, 忘窩와 벗으로 어울렸다. 그러나 그들에겐 벗과 함께 또 다른 世誼가 있으니 이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修巖의 비위(妣位)는 안동권씨로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증손녀이다. 충재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청암(靑巖,1518~1592,權東輔)과 석정(石亭,1525~1585,東美)이다. 맏이 靑巖은 자식이 없어 石亭의 次子 석천(石泉,1562∼1617,權來)으로 하여금 靑巖의 후사를 이었고 맏아들 송암((松巖,1557∼1599,權采)은 石亭(權東美)의 대를 이었다 修巖은 松巖(采)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으니 松巖의 사위가 된다.
忘窩는 오미동 유연당(金大賢:1553∼1602,悠然堂)의 둘째 아들이다. 悠然堂의 여덟 아들은 모두 소과에 급제하고 그 중 다섯 형제가 대과에 급제한 것으로 유명하다. 忘窩는 학봉(鶴峯, 金誠一)의 따님과 혼인했으나 의성김씨가 29세를 일기로 졸하니 안동권씨 충재(冲齋)의 손자인 石泉(來)의 따님을 재취부인으로 맞이했다. 修巖이 松巖(采)의 따님과 혼인하고 忘窩가 石泉(來)의 따님과 혼인하니 修巖과 忘窩는 종동서지간이다.
溪巖은 남양홍씨(南陽洪氏)에 장가들었다. 장인은 홍사제(洪思濟)로 외조부가 충재(冲齋)이다. 즉 溪巖은 忘窩와 修巖이 공히 처진외육촌이다. 더욱이 溪巖과 忘窩는 1577年生 동갑(同甲)으로 1612年 大科에 동방급제(同榜及第)한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졌다. 또한 溪巖과 忘窩는 함께 修巖의 아버지인 西厓의 제자이기도 하다.
『遊淸凉山記』의 기록에서 忘窩가 川城으로 들어가 살았다고 했다. 忘窩의 처가(妻家)는 石泉(來)의 집으로 沖齋宗宅이다.『계암일록』에서도 보듯 1620年 9월에는 忘窩와 修巖은 함께 川城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川城은 어디일까? 그리고 忘窩와 修巖은 川城의 어디쯤 살았을까?
달실마을
토일마을
서설당
송암정
자료를 살피니 川城은 내성(乃城)으로 내성천을 끼고 있는 봉화읍의 달실을 포함한 일부를 칭(稱)하는 것 같다. 忘窩와 修巖은 처가가 있는 달실(酉谷)을 자주 갔다. 忘窩는 석천정사(石泉亭舍)를 즐겨 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修巖은 沖齋의 차자(次子)인 石亭(權東美)이 분가하여 살았던 토일(吐日)마을의 서설당(瑞雪堂)이나 장인 松巖(采)이 건립한 송암정(松岩亭), 또는 근처에서 산 것으로 짐작된다. 冲齋 이래 3대에 걸쳐 많은 정자를 짓고 경영한 것으로 보아 松巖은 경제적 여유가 있었고 궁핍한 생활로 일관한 修巖에게는 처가에서의 생활이 보탬이 된 것 같다. 修巖은 1620年 正月에 처가가 있는 川城에 들어가 여덟 달을 살다가 그해 9月 다시 達美로 돌아간다.
우리는 豐山柳氏 愚川派 입향조인 修巖의 세거지를 따라 가 봤다. 역사의 기록과는 다른 ‘達美’와 ‘川城’이라는 새로운 地名의 등장이 놀랍기만 하다. 『계암일록』이 없었다면 영원히 묻힐 기록이었다. 이제는 愚川과 관련된 기록에 達美를 추가해야 한다는 숙제도 함께 안는다. 또한 河回에서 達美로 이거한 기록이 나왔으니 達美에서 愚川으로 이거한 기록도 반드시 찾아야 할 과제로 남았다. 오늘 본인의 글에서는 아무 것도 얻은 것이 없다. 행여 새로 밝혀진 ‘達美’와 ‘川城’를 언급하면서 본인의 어설픈 생각과 섣부른 추측으로 분란의 씨를 낳지는 않았는지 염려스럽기만 하다.
忘窩가 修巖께 보낸 簡札
늦었지만 이런 기록을 우리에게 전해 준 溪巖께 감사드린다. 종동서(從同壻)이자 벗으로 修巖과 우의(友誼)를 함께한 忘窩께도 한없는 존모(尊慕)의 마음을 올린다. 아울러 선현들의 얼을 전하는 후손들의 세의(世誼)도 함께 발전시켜 가면 좋겠다.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숨은 자료들이 속속 나와 세상을 환히 밝혀주길 기대한다. 『계암일록』이 ‘達美’와 ‘川城’이라는 명제를 우리에게 주었듯 이를 풀어줄 또 다른 기록이 나타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가 함께 노력해서 또 다른 새로운 기록들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생활이 궁핍하여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고향 河回를 떠나는 修巖의 서글픈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 분들은 가시덤불을 걷고 후손을 키우며 영남(嶺南)에서도 우뚝한 愚川의 신화를 만들었다. 영남남인(嶺南南人)의 한 축으로써 소임에 충실했고 가학으로 전승된 충효(忠孝)의 보급에도 앞장섰다. 끊임없이 벼슬을 배출했지만 하나같이 선정(善政)을 베풀어 관료로써 후세의 귀감(龜鑑)이 되기도 했다. 선조의 가난과 청빈, 고뇌와 희생, 정열과 눈물이 오늘의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근원이 아닐까.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愚川을 명당으로 일군 修巖을 비롯한 모든 愚川의 선조께 한없는 존경심을 가슴에 품고 감사의 절을 올린다.
(본 원고는 2014 儒學과 現代, 2015 豊柳會誌에 기고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