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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하 15:1-9 > 1 하나님의 영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2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3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은 지가 오래 되었으나 4 그들이 그 환난 때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찾으매 그가 그들과 만나게 되셨나니 5 그 때에 온 땅의 모든 주민이 크게 요란하여 사람의 출입이 평안하지 못하며 6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서로 치고 이 성읍이 저 성읍과 또한 그러하여 피차 상한 바 되었나니 이는 하나님이 여러 가지 고난으로 요란하게 하셨음이라. 7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너희의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라 하니라. 8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애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도 없애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고 9 또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를 모으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시므온 가운데에서 나와서 저희 중에 머물러 사는 자들을 모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고 아사에게로 돌아오는 자가 많았음이더라
고대 라틴어로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메멘토 – 기억하라.’ ‘모리 – 죽음을’,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이지요. 고대 로마시대에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 많은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시가행진을 할 때에 노예들로 하여금 그 행진을 뒤따라가면서 ‘메멘토 모리’를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이 영광을 누리지만 언젠가는 너도 패배자가 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요. 즉 삶의 본질은 승리와 성공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바르게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아메리카 인디언 중에 나바호족이라는 곳에도 메멘토 모리와 비슷한 말이 있다고 하더군요. ‘네가 세상에 태어날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지 않느냐? 그러니 이제 네가 죽을 때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그런 삶을 살아라.’ 한마디로 죽음을 능가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겁니다. 즉 네가 지금 제대로 살아가고 있느냐의 여부는 얼만큼 돈을 벌고 어떤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얻었느냐 하는 겉모습에 있는 게 아니라 죽음과 비교했을 때 그 죽음을 넘어설만큼 삶의 의미와 무게를 지니며 살아가고 있느냐에 있다는 것이지요. 과연 우리는 지금 죽음의 무게를 능가하는 생명의 무게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래서 언제 죽음이 내게 다가오든 두려움 없이 죽음과 맞닥뜨리고 죽음을 통해 오히려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야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면서 죽음의 무게를 능가하는 생명의 무게를 제대로 지니려면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이 세상에서 계실 때 이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원천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완전한 생명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 그런데 십자가에서 그야말로 원색적으로 처절하게 죽으셨던 예수님, 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이러한 막강하고 엄청난 죽음의 권세와 무게를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없이 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과연 죽음의 무게를 이겨내는 생명의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종교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의 생명력을 단지 하늘에서만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간과 똑같이 살아가시는 과정을 통해 그 생명력을 드러내셨고 나타내셨지요. 그래서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도 죽음과 어둠과 죄악의 모든 권세를 이기고 능가하는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력의 무게를 지닐 수 있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요.
오늘의 본문은 구스라는 족속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남유다의 아사 왕에게 아사랴라는 선지자가 마치 로마의 개선장군에게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를 외쳤던 노예들처럼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라는 것이 삶의 본질임을 외치는 장면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그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이렇게 여호와를 찾는다는 것은 참된 믿음의 근본이면서 동시에 삶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신앙생활도 불가능하지만, 인생다운 인생, 참된 생명의 삶을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먼저 하나님을 찾고 또 찾으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깨달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 아사랴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아사 왕에게 승리를 축하하거나 얼마나 수고가 많았냐고 칭찬하지 않지요. 아무리 이기고 돌아왔어도 우리의 삶의 근본은 그런 승리나 번영이나 성공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찾는데 있다는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교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네가 아무리 대재벌 같은 부자가 되었다 해도, 첨단과학기술자가 되어서 상상도 못할 높은 수준의 문명을 구사한다 해도, 최고의 권력의 자리를 차지했다 해도, 세상 모든 지식과 정보를 통달하는 박사가 되었다 해도 여전히 항상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는 삶의 근본을 놓치지 말라는 거죠.
다행히도 아사 왕은 선지자의 권면을 알아 들었습니다. 8절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아사가 이 말 곧 선지자 오뎃의 예언을 듣고 마음을 강하게 하여 가증한 물건들을 유다와 베냐민 온 땅에서 없애고 또 에브라임 산지에서 빼앗은 성읍들에서도 없애고 또 여호와의 낭실 앞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고’ 먼저 가증한 물건을 없앴다고 합니다. 가증한 물건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들이지요. 이런 것들을 없애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했다고 하지요.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했다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께 바른 예배, 바른 기도, 말씀에 대한 바른 태도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본래의 것으로 돌아감으로 인해서 오늘 본문으로 읽지 않았지만 뒷부분 19절에 보면 ‘이 때부터 아사왕 제삼십오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으니라.’ 태평성대의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지요.
세상에서도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만 세상에서의 개혁은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바뀌고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개혁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처음으로,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즉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성경말씀을 주신 하나님께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겁니다. 성경 말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시고 몸으로 행하신 생명과 구원의 진리에서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참된 뜻과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와 다른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다시 성경말씀으로 돌아가고, 다시 하나님의 뜻과 섭리로 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오늘의 본문은 아사 왕의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우리나라 무종교인 즉 어떤 종교든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의 비율이 약 60%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무종교인의 비율이 10~15%인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나라 무종교인들은 거의 네배에서 여섯배나 높은 수준인 거죠.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교회를 세우기만 하면 부흥했고, 그래서 그야말로 선교의 옥토와 같았었는데 이렇게 불과 몇십년만에 선교의 불모지가 되어가는 현실이 온 겁니다.
이렇게 무종교인이 많아진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요. 종교가 가졌던 지적인 영역을 대학과 교육과 과학과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대체해 버렸고, 종교가 지켜왔던 윤리적인 영역을 세상의 법과 규범들이 대체해 버려서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종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거기에다가 어느 종교이든 성직자들의 부정과 타락이 드러나고, 종교기관들에게서 행해진 재정비리와 폭력과 일반상식에서 벗어난 주장과 행태들에 실망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무종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에 실망했다고 해서 무종교인으로 살면, 과연 인간은 행복해지고 자아 실편이 가능할까요? 하나님 없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 과연 인간의 힘과 판단과 도덕적 의지만으로 바르고 아름다운 인생, 무엇보다 죽음의 무게를 이길 수 있는 생명의 삶이 가능할까요?
무엇보다 우리 인간 존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이 있지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세상 그 어느 것도 줄 수 없습니다. 첨단과학이 내가 왜 이 세상에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에 대해 과학적으로 증명해 줄 수 있나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지 누가 확증해 줄 수 있습니까? 철학이나 문학 같은 인문학에서도, 경제학 경영학을 비롯한 실용적인 처세술에서도 결코 답해 줄 수 없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만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속에 살아가다가, 때가 되면 이 세상을 떠나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우리 인생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아무리 무종교인들이 늘어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판을 친다 해도 우리의 근본과 시작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의 삶의 마지막이 하나님께 있다는 이 사실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고, 본문의 표현처럼 여호와를 찾아야만 인생다운 인생, 가장 의미있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가치있는 인생이 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성경에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예수님께서도 오로지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 마지막으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참된 생명의 길이었기 때문이지요. 이 사실은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어느 누구에게나 변함없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