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봉은 양강도 개마고원 두운봉(頭雲峯)에서 따온 이름.
두운봉 주위엔 궐덕산 노룡봉 희사봉 등이 애워싸고 있다.
황수원강까지 뻗은 평정능선은 각각 엄방천 장동천 발원지.
두운봉은 백두대간의 머리 지점
운봉은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점.
두운봉은 여러 부족의 연합체 옥저 동예의 영토.
BC 108년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현토군에 속했다가
낙랑동부도위(樂浪東部都尉) 소관 하에 들어 갔다.
고구려 태조 때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고
미천왕 때부터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한때 당의 지배를 받았고
699년 발해의 동경용원부(東京龍原部)에 속해 있었고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 거란 여진의 지배를 받았던 곳.
이 무렵 발해 유민들이 고향을 떠나 고려로 유입.
그들이 정착한 곳에 두운봉을 본따 운봉이라 명명.
지금까지 운봉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게 된 것 같다.
'따라서, 운봉은 발해 두운봉 유민들의 정착지.'
발해 유민들이 정착하기 전부터 고구려 유민 정착지.
당나라의 고구려 유민 분산 정책 결과로도 추정된다.
훗날, 운봉 발해 유민들은 고려 창건의 밑바탕 세력.
'잃어버린 고향 두운봉을 되찾으려 했던 것일까?'
고려 말 위화도 회군으로 이조를 창건한 이성계.
지리산을 '반역의 산'이라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1995년 전북 남원시 운봉읍으로 승격, 읍소재지는 서천리.
사방이 덕두산(1,150m)·바래봉(1,165m)·고리봉(1,305m)·
수정봉(805m) 등으로 둘러 싸인 고원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배추·고추·마늘 고랭지채소 생산지이고 화훼재배도 활발.
용산리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면양목장 국립종축장이 있다.
동남부는 지리산 국립공원에 속하며 운봉목기가 유명하다.
주촌(舟村)·덕산(德山)·공안(孔安)·행정(杏亭)·산덕(山德)
동천(東川)·용산(龍山)·북천(北川)·준향(準香)·장교(長橋)
권포(權布)·임(林)·신기(新基)·매요(梅要)·가산(佳山)·화수(花水)
17개 동리가 있고, 면적 69.49㎢, 인구는 2002년 현재 5,317 명 .
'백두대간의 등마루에 걸터앉은 <매요리>
백두대간 종주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쉼터다.
마을 인심도 좋아 경로당은 종주자들 잠자리.
마을 끝 지점에서 매점을 하시는 신순남 할머니
“여원치에서 출발했어? 그럼 오늘 복성이재까지 가겠구만.”
모래재에서 새맥이재를 지나 복성이재를 향하는 대간 길은 단순하다.
오른쪽으로는 산동네 치고는 꽤나 너른 들판에 안긴 마을이 옹기종기.
남원시 운봉읍 일대. 이 한가로운 마을이 한때는 혁명의 싹을 틔운 곳.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운봉의 황산에서 치른 왜구와의 전투에서 대승.
이조가 창건할 수 있었던 전기를 마련한... 운봉.
'이조의 멸망 계기'인 동학혁명이 일어난....운봉.
이조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는 18 세기
농업 ·산업 ·수공업 ·봉건적 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의 붕괴.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1862년(철종 13) 진주 봉기
삼남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문란한 국정에 대한 항거.
............ 전봉준과 동학 혁명(갑오경쟁)................
전북 고부군 궁동면에서 1855년 태어난 천안 전씨.
몰락한 양반의 후예인 그는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그 탓에 녹두라는 별명을 지닌 그의 쏘는 듯한 눈빛
전봉준은 아이들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 등을 가르치던 훈장이었다.
논 세마지기 농사에 여섯 식구가 의존해, 아침엔 밥을 먹고 저녁엔 죽.
1890년 동학에 입도, 고부 접주가 되었다.(동학은 1860년 최제우 창시)
그당시 천주교는 한반도 민족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천주교, 즉 서양종교와 구분하기 위한 종교가 동학이다.
그당시 서학이라 불렀던 천주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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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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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
바티칸은 세계에서 제일 작고도 큰 나라.
로마 교황청이 바티칸 안에 있기 때문이다.
현재 10억 신도를 보유하고 있는 천주교.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력한 종교이다.
16세기 중엽 중국과 일본에 전파된 천주교.
1593년 12월 일본을 교화한 에스파냐 신부.
이조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1614년 실학이 이조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발전.
특히, 이익과 그의 제자 안정복은 가톨릭을 깊이 연구.
이 두 학자가 천주교를 최초로 서학이라고 부르기 시작.
이조의 탄압 대상이 되어 1887년까지 100 년간 천주교 박해.
.............천주교 박해 100년 수난사................
1801년 순조 즉위후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가 시작.
득세한 노론파가 남인파에게 정치보복을 가했던 신유박해.
이로 인해 천주교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순교를 한다.
그후 기해박해로 3명의 선교사와 유진길 정하상 등이 순교.
1845년 마카오로 유학했던 김대건이 신부가 되어 귀국
1846년 체포되어 병오박해로 김대건과 교우 9명이 순교.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2만 카돌릭 신도들이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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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 후기 16세기말~ 17세기 초에 전래된 천주교(서학).
일본, 명, 청 사신 및 이조 학자들을 통해 유입된 서학.
서학은 이조에서 새 학문을 추구하던 실학자들의 관심사.
1
8세기 후반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등 일부 남인 학자들
천주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며 천주교 정착에 기여.
천주교의 평등사상과 내세 사상은 서민층에게도 쉽게 호응
'그러나, 유교 제사의식을 거부해 사회문제.'
마침내 1785년(정조 9)에는 사교로 규정하여 금지령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당시 집권세력 노론벽파
자신들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명목으로 천주교 탄압.
그러나, 서양인 신부들이 계속 들어와서 포교활동.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귀국하여 적극적인 포교활동
19세기 천주교 교세가 확장 및 서양 열강의 통상 강요
이조 조정은 백성들이 천주교와 외세의 결탁을 우려
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진하며 천주교를 탄압.
그러나, 천주교는 봉건사회를 해체한 개혁사상으로 작용.
순조 즉위후 60년 간 세도정치로 농촌은 극도로 피폐.
국가기강이 해이해지자 탐관오리들은 권력을 남용한다.
사리사욕을 채우고 횡포를 일삼자 농민들은 더욱 궁핍.
가난에 찌들리고 빚에 몰린 농민들은 마침내 파산
고향을 떠나 걸식하거나 산간벽지로 들어가 화전민
국경을 넘어가 간도나 연해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천주교는 권력에서 소외된 남인과 부녀자 중심으로 확산.
이조에서는 천주교도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귀양보낸다.
심지어 5 가구씩 한 단위로 묶어 천주교도 색출을 공동 책임.
천주교도들은 순교를 택하지 않으면 귀양살이
그 가족들은 관아의 노비, 관비, 방지기로 전락.
천주교 동정녀까지 정절을 유린당하며 살아야 한다.
<천주교 = 서양 학문 =서학>. <동학 = 동양 학문>
천주교 박해로 인해 동학은 종교로까지 급성장한다.
동학은 천주교 교리와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
동학의 근본 사상은 인내천
즉 백성이 하늘이므로 평등.
귀천을 가림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것
동학사상은 이조에서 종교로서 급성장.
"양반, 부자, 선비는 들어오지 말라."
상민, 노비, 백정, 특히 여성들에게 큰 호응.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은 곤궁하고 비참했다.
왕 이하 양반 귀족들은 사리사욕과 권세 다툼
탐관오리와 세리의 악행으로 농토를 버린 농민들.
전국을 떠돌며 방황하다 굶어죽는 백성이 많았다.
깊은 산속에 전답을 일궈 이상향을 추구한 화전민들.
청나라, 일본, 러시아 등등 외세가 밀려들어 올수록
백성들의 생활은 나날이 궁핍해 지자 일어난 동학혁명
이조의 집권 보수세력이 외세와 손잡고 부를 축적한 탓.
그외 금낭화와 까치수영ㆍ노루오줌ㆍ동자꽃ㆍ땅나리ㆍ
술패랭이ㆍ우산나물 등의 야생화도 곳곳에 분포한다.
지리강활과 지리개별꽃ㆍ지리괴불나무 17종 특산식물
개불알꽃ㆍ깽깽이꽃ㆍ도깨비부채 등 15종의 희귀식물,
나도풍란과 돌매화나무등 6종의 멸종위기 식물이 자생
야생화
전국최대 지리산 자생식물환경공원 조성 계획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 지리산 바래봉 자락에 조성.
국가예산 67억여원이 투입 2007년 마무리되는 이 공원
약 14만㎡의 부지 공원에 자생식물 전시관 및 연구시설
이곳은 최근 환경부로부터 자연생태 우수마을로 선정
산덕리 삼산마을은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대상
마을 숲 이른 봄에 산까치와 멧새들이 새끼를 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초가을, 함박눈 펑펑 내리는 겨울날
멧비둘기들이나 매에게 쫓긴 꿩들이 마을숲으로 피난.
기나긴 한겨울밤에 부엉이의 외처로운 쇳소리 울음
봄날 새벽 슬픈 접동새 울음이 퍼지는 마을숲 정경.
마을 옆 300m 쯤 떨어진 곳에 450평의 넓이 푸른 세상.
200년 넘은 서어나무와 느티나무 1백여 그루가 울창하다.
이곳은 칸 영화제 수상작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촬영장소
흥부마을.
전북 남원시 아영면, 장수군 번암면에 위치한 흥부마을
봉화산(919.8m)에 봉화 대신 철쭉이 횃불처럼 타오른다.
하산 길에 흥부전의 설화가 남아있는 아영면 성리마을.
흥부가 정착하여 부자가 된 발복지(發福地)로 밝혀졌다.
놀부 박춘보의 묘, 흥부전 지명이 마을 곳곳에 있다.
흥부의 출생지 인월면 성산마을도 차로 15분 남짓 거리
문의 전화번호 : 남원시청 문화 관광과 (063)620-6150
봉화산 철쭉 군락지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 도보거리.
철쭉 군락, 참나무숲 지나 정상 주변은 억새평원 백두대간
경남 함양과 경계선 백운산(1,237m) 남으로 아영면 고원지대
그 들판 너머 천왕봉을 비롯, 반야봉, 바래봉이 우뚝 솟아있다.
동으로 함양에서 거창에 이르는 산세, 서로 장수군 번암면 일대.
주변에 식당 가게가 없어 아영면사무소 사거리에서 준비 바람직.
성리에는 흥부전에 등장하는 지명이 마을 곳곳에 남아있다.
허기재, 고둔터, 새금모퉁이, 흰묵배미 등 흥부전의 지명들.
허기재는 허기에 지쳐 쓰러진 흥부를 마을사람들이 도운 고개.
고둔터는 고승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흥부에게 잡아 준 명당
흥부는 이곳에서 제비를 고쳐주고 복을 받은 발복지 집터이다.
실제 '고둔’이란 지명은 곳집 터, 즉 부자가 되는 터라는 의미.
'사금모퉁이’는 흥부가 이곳에서 사금을 주워 부자가 되었던 곳.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 다리 하나 건너면 전남 구례
전라도와 경상도가 만나는 화개장터와 비슷한 여건.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역이었던 격전지.
'인월은 농지 부족한 오지마을이자 빨치산 격전지.'
경남과 전북의 도 경계선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
경남 함양에서 5분도 안되어 사투리가 바뀌는 인월
흥부전의 배경마을로 알려져 관광지 개발 붐이 한창.
흥부전은 이조 후기 작자 연대 미상의 소설.
흥부전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된 판소리 소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가 만나는 지역의 이야기.
형인 놀부는 심술이 궂고 욕심이 많아서
부모 재산을 독차지하고 아우를 내쫓는다.
그런데도 형을 원망않고 가난하게 사는 흥부.
흥부는 자식이 많고 재산이 없어 형에게 양식을 구걸
흥부는 남의 품을 팔기도 하고, 매를 대신 맞아 돈벌이.
온갖 애를 쓰지만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루는 처마 밑에 떨어져 다리 다친 제비를 살려주고,
그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 하나를 심어서 부자가 된다.
박이 열렸는데 그 속에서 많은 금은보화가 쏟아졌기 때문.
이 소식을 들은 놀부는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고 싸매주지만,
제비가 가져다준 박씨에서 온갖 재앙이 쏟아져나와 패가망신.
흥부전은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는 도덕적 측면
빈부 격차를 문제삼은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이해
서민의 실생활과 직접적 연관을 갖는 소제의 소설.
<흥부와 놀부> 편.
화설, 경상 · 전라 양도 지경에서 사는 사람이 있으니, 놀부는 형이요 흥부는 아우라. 놀부 심사 무거(無據) 하여 부모 생전 분재 전답을 홀로 차지하고, 흥부같은 어진 동생을 구박하여 건넛산 언덕 밑에 내떨고 나가며 조롱하고 들어가며 비양하니 어찌 아니 무지하리.
놀부 심사를 볼작시면 초상난 데 춤추기, 불붙는 데 부채질하기, 해산한 데 개 잡기, 장에가면 억매(抑賣) 흥정하기, 집에서 몹쓸 노릇하기, 우는 아해 볼기 치기, 갓난 아해 똥 먹이기, 무죄한 놈 뺨 치기, 빚값에 계집 빼앗기, 늙은 영감 덜미 잡기, 아해 밴 계집 배 차기, 우물 밑에 똥 누기, 오려 논에 물 터놓기, 잦힌 밥에 돌 퍼붓기, 패는 곡식 이삭 자르기, 논두렁에 구멍 뚫기, 호박에 말뚝 박기, 곱사장이 엎어 놓고 발꿈치로 탕탕치기, 심사가 모과나무의 아들이라. 이놈의 심술은 이러하되, 집은 부자라 호의호식 하는구나.
흥부는 집도없이 집을 지으려고 집 재목을 내려갈 양이면 만첩청산 들어가서 소부등(小不等) 대부등 (大不等)을 와드렁 퉁탕 베어다가 안방 ·대청 · 행랑 · 몸채 · 내외 분합(分閤) 물림퇴에 살미살창 가로닫이 입구자로 지은 것이 아니라, 이놈은 집재목을 내려하고 수수밭 틈으로 들어가서 수수깡 한 단을 베어다가 안방 · 대청 · 행랑 · 몸채 두루 짚어 말집을 꽉 짓고 돌아 보니, 수숫대 반 단이 그저 남았구나.
방안이 넓든지 말든지 양주(兩主) 드리누워 기지개켜면 발은 마당으로 가고, 대고리는 뒤곁으로 맹자 아래 대문하고 엉덩이는 울타리 밖으로 나가니, 동리 사람이 출입하다가 이 엉덩이 불러들이소 하는 소리, 흥부 듣고 깜짝 놀라 대성통곡 우는 소리,
"애고답답 설운지고. 어떤 사람 팔자 좋아 대광보국숭록대부삼태육경(大匡輔國崇祿大夫三台六卿) 되어 나서 고대광실 좋은 집에 부귀공명 누리면서 호의호식 지내는고. 내 팔자무슨 일로 말만한 오막집에 성소광어공정(星疎光於空庭)하니 지붕 아래 별이 뵈고, 청천한운세우시(靑天寒雲細雨時)에 우대랑이 방중이라. 문 밖에 가랑비 오면 방 안에 큰 비 오고 폐석초갈 찬방 안에 헌 자리 벼룩 빈대 등이 피를 빨아먹고, 앞문에는 살만 남고 뒷벽에는 외(외 흙벽을 만들때 댓가지나 싸리로 얽어 세워 흙을 받는 벽체)만 남아 동지섣달 한풍이 살 쏘듯 들어오고 어린 자식 젖 달라하고 자란 자식 밥 달라니 차마 설워 못살겠네."
가난한 중 웬 자식은 풀마다 낳아서 한 서른남은 되니, 입힐 길이 전혀 없어 한방에 몰아넣고 멍석으로 쓰이고 대강이만 내어놓으니, 한 녀석이 똥이 마려우면 뭇녀석이 시배(侍陪)로 따라간다. 그 중에 값진 것을 다 찾는구나. 한 녀석이 나오면서
"애고 어머니, 우리 열구자탕(悅口子湯)에 국수 말아먹으면."
또 한 녀석이 나앉으며, "애고 어머니, 우리 벙거지를 먹으면."
또 한 녀석이 내달으며, "애고 어머니, 우리 개장국에 흰밥 조금 먹으면."
또 한 녀석이 나오며, "애고 어머니, 대추 찰떡 먹으면."
"애고 이녀석들아, 호박국도 못 얻어 먹는데 보채지나 말려무나."
또 한 녀석이 나오며, "애고 어머니, 우에 올부터 불두덩이 가려우니 날 장가 들여 주오."
이렇듯 보챈들 무엇 먹여 살려낼꼬. 집안에 먹을 것이 있든지 없든지 소반이 네 발로 하늘께 축수하고, 솥이 목을 매어 달렸고 조리가 턱걸이를 하고, 밥을 지어 먹으려면 책력을 보아 갑자일이면 한 때씩 먹고, 새앙쥐가 쌀알을 얻으려고 밤낮 보름을 다니다가 다리에 가래톳이 서서 파종(破腫)하고 앓는 소리, 동리 사람이 잠을 못 자니 어찌 아니 서러울손가.
"아가아가 우지 마라. 아무것도 젖 달란들 무엇 먹고 젖이나며, 아무리 밥 달란들 어디서 밥이 나랴." 달래 올 제 흥부 마음 인후하여 청산유수와 곤륜옥결(崑崙玉潔)이라. 성덕을 본받고 악인을 저어하며 물욕에 탐이 없고 주색에 무심하니, 마음이 이러하매 부귀를 바랄소냐.
흥부 아내 하는 말이,
"애고 여봅소, 부질없는 청렴 맙소. 안자(顔子) 단표(簞瓢) 주린 염치 삼십 조사(早死)하였고, 백이숙제 (白夷淑濟) 주린 염치 청루 소녀 웃었으니, 부질없는 청렴 말고 저 자식들 굶겨 죽이겠으니, 아주버니네
집에 가서 쌀이 되나 벼가 되나 얻어 옵소."
흥부가 하는 말이,
"낯을 쇠우에 슬훈고. 형님이 음식 끝을 보면 사촌을 몰라보고 똥싸도록 치옵나니, 그 매를 뉘 아들놈이 맞는단 말이요." "애고 동량은 못 준들 쪽박조차 깨칠손가. 맞으나 아니 쏘아나 본다고 건너가 봅소."
흥부 이 말을 듣고 형의 집에 건너갈 제, 치장을 볼작시면 편자 없는 헌 망건에 박쪼가리 관자 달고, 물렛줄로 당끈 달아 대고리 터지게 동이고, 깃만 남은 중치막 동강 이은 헌술띠를 흉복통에 눌로 띠고, 떨어진 헌 고의(袴依)에 청올치로 대님 매고, 헌 짚신 감발하고 세 살부채 손에 쥐고, 서홉들이 오망자루 꽁무늬에 비슥 차고, 바람 맞은 병인같이 잘 쓰는 쇄소(灑掃)같이 어슥비슥 건너달고 형의 집에 들어가서 전후좌우 바라보니, 앞노적, 뒷노적, 멍에노적 담불담불 쌓았으니, 흥부 마음 즐거우나 놀부심사 무거(無據)하여 형제끼리 내외하여 구박이 태심하니, 흥부 하릴 없이 뜰 아래서 문안하니, 놀부가 묻는 말이,
"네가 뉜고."
"내가 흥부요."
"흥부가 뉘 아들인가."
"애고 형님 이것이 웬 말이요. 비나이다, 형님전에 비나이다. 세 끼 굶어 누운 자식 살려낼 길 전혀 없으니 쌀이 되나 벼가 되나 양단간에 주시면 품을 판들 못 갚으며, 일을 한들 공할손가. 부디 옛일을 생각하여 사람을 살려 주오."
애걸하니 놀부놈의 거동 보소. 성낸 눈을 부릅뜨고 볼을 올려 호령하되.
"너도 염치없다. 내말 들어 보아라.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요, 지불생무명지초 (地不生無名之草)라. 네 복을 누를 주고 나를 이리 보채느뇨. 쌀이 많이 있다 한들 너 주자고 노적 헐며, 벼가 많이 있다고 너 주자고 섬을 헐며, 돈이 많이 있다 한들 괴목궤에 가득든 것을 문을 열며, 가룻되나 주자 한들 북고왕 염소독에 가득 넣은 것을 독을 열며, 의복이나 주자 한들 집안이 고루 벗었거든 너를 어찌주며, 찬밥이나 주자 한들 새끼 낳은 거먹암캐 부엌에 누웠거든 너 주자고 개를 굶기며, 지거미나 주자 한들 구중방(九重房) 우리 안에 새끼 낳은 돝(돼지)이 누웠으니 너 주자고 돝을 굶기며, 겻섬이나 주자 한들 큰 농우(소)가 네 필이니 너 주자고 소를 굶기랴. 염치없다."
"애고 형님 이것이 웬 일이요. 방약무인 도척(盜척)이도 이에서 성현이요, 무지불측 관숙(無知不測 菅叔) 이도 이에서 군자로다. 우리 형제 어찌하여 이다지 극악한고."
탄식하고 돌아오니, 흥부 아내 거동 보소. 흥부 오기를 기다리며 우는 아기 달래올 제 물레질하며,"아가아가 우지마라. 어제 저녁 김동지 집 용정방아 찧어 주고 쌀 한 되 얻어다가 너희들만 끓여 주고 우리 양주 어제 저녁 이때까지 그저 있다. 잉잉잉 너 아버지 저 건너 아주버니 집에 가서 돈이 되나 쌀이 양단간에 얻어 오면,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너도 먹고 나도 먹자. 우지마라."
잉잉잉 아무리 달래어도 악치듯 보채는구나. 흥부 아내 하릴없어 흥부 오기 기다릴 제 의복 치장 볼작시면 깃만 남은 저고리, 다 떨어진 누비바지, 몽땅치마 떨쳐입고 목만 남은 헌 버선에 뒤축 없는 짚신 신고 문 밖에 썩 나서며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다릴 제, 칠년 대한 가문 날에 비 오기 기다리듯, 독수 공방에 낭군 기다리듯, 춘향이 죽게 되어 이도령 기다리듯, 과년한 노처녀 시집 가기 기다리듯, 삼십 넘은 노도령 장가 가기 기다리듯, 장중(場中)에 들어가서 과거하기 기다리듯 세 끼를 굶어 누운 자식 흥부 오기 기다린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