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1테살 2,13)
오늘 우리가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창조의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인간인 우리가 지녀야 할 삶의 자세, 그 가운데에서도 특별히 관계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관계의 중요성.
오늘 복음은 남녀 간의 혼인이라는 관계를 이야기하고 오늘 독서의 말씀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하나하나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오늘 복음의 말씀은 혼인과 이혼 그리고 독신에 관한 말씀으로 인간 사이의 관계 그 중에서도 남녀 간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 시작은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던지는 다음의 질문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마태 19,3)
바리사이들의 이 질문은 언제나 그렇듯 음흉한 덫이 놓인 의도적 질문입니다. 평소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전해들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분명 이 질문에 부정적 대답을 할 것이 확실하다 생각하고 예수님이 하실 그 대답에 올무를 쳐 모세의 율법 규정을 들어 예수님을 곤란한 상황으로 몰아넣을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의도대로 그리고 율법이 가르치는 그대로 원칙을 짚어 설명하십니다. 여기서 율법이란 다름 아닌 모세오경의 첫 권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바리사이들 역시 모세가 말한 이 율법의 내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은 대답을 해야만 하고 또 그렇게 했을 바리사이들이 본래 자신들의 계획대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 모세의 이혼 규정을 들며 그럼 모세가 말한 것이 틀린 것이냐며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만일 모세의 말이 틀리다하면 구약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자 이스라엘 백성의 영도자 모세를 부정하는 것이니 그렇다할 수 없고 그렇다고 모세의 말이 맞다고 하면 율법인 창세기의 말씀에 거스르게 되어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도 스스로 풀지 못하는 문제를 예수님께 묻고 그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골탕 먹이려는 그들의 의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지혜를 발휘하여 모세가 그런 규정을 만들 수밖에 없던 상황 논리를 설명하며 그들이 놓은 덫을 빠져 나가자 바리사이들은 한 술 더 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마태 19,10)
사실 바리사이들의 이 같은 응답은 시쳇말로 막가자는 겁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대답에 당황하여 바로 응답할 말을 찾지 못한 그들이 정말 되는대로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막 지껄이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바리사이들의 이 말은 그들이 아내를 비롯한 여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곧 아내는 언제든 남편이 이유만 닿으면, 다시 말해 아내를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면 아무 것이나 핑계 삼아 아내를 버리는 그들의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사이들은 그들 마음 내키는 대로 이혼할 수 없다면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낳을 것이라는 막말에 가까운 말을 내뱉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혼자 살 생각도 없는 이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든지 자신들이 이제껏 해오던 방식대로, 다시 말해 여인들을 물건 취급하든 자신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다음의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ㄴ)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리사이들의 이 같은 태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실제 자신의 삶은 하느님의 말씀이 뜻하고 바라는 바와는 전혀 달리, 자신의 인간적 뜻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하느님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바리사이들의 행태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하느님을 팔아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파렴치한의 모습, 하늘나라를 좀먹는 기생충처럼 살아가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다가가 하늘나라의 진리를 선포하며 그들의 잘못된 악습을 고쳐주려 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완고하여 굳을대로 굳은 그들의 마음. 마치 고인 물이 썩어 참을 수 없는 악취를 풍기는 모습이 바로 그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음을 드러내줍니다. 이에 예수님조차 어쩔 수 없어 단 한 마디의 말만을 남기실 뿐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 19,12ㄴ)
한편, 오늘 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버려져 아무에게도 사랑은커녕 존재가치마저 인정받지 못한 채 피투성이 거렁뱅이처럼 살아온 그들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 입히고 먹이며 들의 풀과 꽃처럼, 세상의 귀한 온갖 보물로 그들을 장식해 그 아름다움이 온 세상을 뒤덮고 그 아름다움이 더해져 왕비 자리에까지 오르게 될 정도에 이르렀음을 비유적으로 설명해줍니다. 그런 그들이 하느님을 배신하고 죄악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한탄하면서도 하느님은 그들에게 대한 사랑을 잊지 않고 그들과 맺어진 사랑의 관계, 곧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계약을 다음의 말로 확인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에제 16,60.63)
이처럼 오늘 말씀은 복음과 독서 모두 ‘관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남자와 여자의 혼인관계를, 독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그 관계의 근본이자 모범은 바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 곧 남자와 여자를 처음 창조하신 하느님이 맺어주신 그 둘의 관계가 그것이며, 하느님이 처음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세우신 계약이 그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그 태초의 질서가 바로 우리 관계의 근본이자 모범이며 모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잊고 다른 것에 한 눈을 팔게 되어 그 관계가 흐트러지고 어그러지게 된다는 사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독서가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그 흐트러진 관계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면에서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꼭 새기십시오.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매순간 우리를 사랑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도 한시도 잊지 않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당신 말씀으로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듣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러면 매 순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숨 쉬고 살아가며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전하는 이 진리에 따라 하느님 말씀 안에서 언제나 참 희망 넘치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1테살 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