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설명한 1호 집터에서는 아주 훌륭하면서도 예쁘고 완전한 민무늬토기 2점(높이 27cm, 30cm)과 조동리유적을 대표하는 굽잔토기가 출토되어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 굽잔토기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터이다).
이러한 연구성과에 고무된 충주시(시장 이시종)는 우리에게 추가 발굴비를 바로 책정해 주어 2차 발굴(97년 4월 11일~6월 8일, 59일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발굴비의 책정에는 충주대학의 김현길교수와 최일성교수의 조언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1차 조사를 마치고 1년 만에 이루어진 2차 조사는 기획 발굴로 이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발굴팀에게 큰 행운이었고 또 이러한 조사를 하게 해 준 충주시 당국에 깊이 감사한 마음으로 발굴을 진행하였다.
2차 조사에서는 집터 3기와 불땐자리 15기, 움 2기를 찾아내었다. 특히 7호 집터는 가장 완전한 긴 네모꼴(긴 변 505cm, 짧은 변 385cm, 움 깊이 21cm, 약 6평 정도)의 집터가 발굴되었는데 여기에서는 많은 생활유물들이 그대로 발굴되어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 연구에 관한 절대적인 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집터에는 두 개의 다른 모양의 불땐자리가 확인되어서 이들 불땐자리를 각기 다른 용도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또한 당시 사람들이 추운 기후에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출토된 돌보습으로 미루어 보습단계의 농경도 행하였음을 밝혀내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는 곱돌로 만든 치레걸이가 출토되어 당시 사람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구조를 이해하는 데도 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집터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조동리 선사박물관에 그대로 이전되었으며, 또한 충북대학 김경표교수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
이렇듯 이 집터가 이렇게 완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나무 묘목 덕분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조사유적 바로 위편에 있는 밭에는 나무 묘목이 심어 있었는데 이 묘목덕분에 홍수에도 밭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듯하다. 밭주인인 교감선생을 설득하여 결국 몇 그루의 묘목을 옮겨 심고 나무 사이사이로 긴 구덩을 넣어서 발굴하여 이 집터들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유적을 더 확대하고 깊은 구덩을 몇 개 넣어서 지층의 변화를 알고자 하였는데 여기에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이동영ㆍ김주용박사 등이 협력하여 주었다. 또한 여기서 밝혀야 할 사실은 바로 1차 때부터 우리들 발굴에 이 지역 출신(충주시 소태면)인 허문회교수님(서울대 명예교수)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허교수께서는 청주사범 1회 졸업생으로 첫 부임지가 동양초등학교이기도 하여서 더욱 우리 유적을 자주 방문하여 주셨다. 그리고 유적에서 탄화된 곡물을 찾도록 여러 차례 독려하여, 우리는 쉽지 않았지만 발굴된 모든 흙을 체질하였다.
이러한 체질과정은 고고학 발굴에서는 기본적으로 수행되어야 하지만 발굴 경비와 시간문제때문에 대개는 무시한 채 그대로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허교수의 부탁에 앞서 소개한 고양시 일산 가와지나 단양 수양개 Ⅱ지구에서 많은 성과를 얻었기에 곡물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조동리 집터는 거의 네모꼴이어서 이 집터들을 대개 4등분 내지 6등분하고 각기 등분된 지역에서 발굴된 흙을 다른 자루에 담아 이것을 물체질한 결과 집의 위치에 따라 곡물이 다르게 출토됨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우리가 지금까지 선사유적의 발굴에서 움터 유적의 흔적만 보고되었던 것에 비해서 이 조동리유적의 조사를 통해 우리는 거의 모든 움터에서 곡물을 검출해 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선사시대유적의 발굴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하는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주었고 또 이 움터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연구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좀 더 나아가서 불땐자리에서 나온 흙까지도 체질하여 보니 여기서는 놀랍게도 곡식 낱알과 함께 물고기뼈가 같이 나와서 이 불땐자리에서 당시 사람들이 물고기를 구워먹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1, 2차 발굴을 통해 채집된 엄청난 양의 그물추를 보아서도 알 수 있었고 또한 이 그물추들의 무게가 아주 작은 것은 10g에서부터 큰 것은 800g까지 나가는 무거운 그물추도 있어서 당시 사람들의 물고기 잡이에 쓰인 그물의 종류도 여러 종류였을 것으로 짐작하게 하였다. / 충북대학교 박물관장ㆍ한국 선사문화 연구원장 이융조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