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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영혼에 대해서
1. 인간의 구성요소
1. 영혼:[정신] 2. 마음:[감정, 기분] 3. 육체:[몸, 신체]
1-1-1. 영혼의 목표
먼저, 영혼은 맑아야[환하고 빛나고 투명하고] 하고,
순수해야 하고, 깨끗하여야 하고, 건강해야 한다.
영혼은 깨어있어야 한다.
만약 영혼이 흐릿하고, 더럽고, 썩고, 병들면 어찌 되겠는가?
영혼이 병들면 온 몸에 병이 든다.
현실의 영혼은 왜 깨끗하지 못하고, 왜 맑지 못할까?
그것은 몸과 결합되어 몸의 특성인 욕심으로 얼룩지어 있기 때문이다.
욕심을 적절히 통제, 제어, 조절, 절제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영혼이 맑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늘, 날마다 그 때를 닦아내야 한다.
다음, 영혼은 깊고 높고 성숙해야 한다.
만약 영혼이 변덕을 부리고 천박하고
양은 냄비마냥 금방 뜨거웠다 차가웠다 하면 어찌 되겠는가?
영혼은 듬직하고 여유있고 품격이 있어야 하리라.
그런데 왜 현실의 영혼은 성숙하지 못할까?
그것은 마음과 결합되어 마음의 특성인 제 감정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감정을 적절히 통제, 제어, 조절, 절제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할 때가 많으므로 영혼이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따라서 늘, 날마다 감정의 변덕을 닦아내야 한다.
또 영혼은 아래의 기능을 잘 발휘하느냐, 발휘하지 못하느냐에 따라
그 품격이 맑으냐 맑지 못하냐, 깨끗하냐 깨끗하지 못하냐,
높으냐 낮으냐, 성숙하냐 성숙하지 못하냐가 결정된다.
1-1-2 영혼의 기능
-생각한다[인식기능, 지성기능]
-말한다.
-깨닫는다. 알아차린다. 감동을 한다. 무릎을 탁치고 깨닫는다. 무명과 무지를 깨는 것이다.
진리를 알아듣는다.
예: 하느님은 나와 함께 현존하신다. 실존하신다.
예: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예: 삼라만상은 다 하느님의 작품이다.
예: 너는 누구인가? 너와 나는 하나이다. 너는 나의 분신이다. 너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뭐든지 깨달음이 와야 제대로 아는 것이다.
깨달음이 와야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하느님과 교류한다. 기도한다.
먼저 부르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다.
내가 먼저 뭘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와 계신 하느님,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께 그저 응답하는 것이다.
기도: 청원기도, 애원기도, 탄원기도, 단식기도, 금식시도, 100일기도, 기복적 기도, 말씀기도.
참된 기도: 교류이다.
교류는 쌍 방형이다.
-마음[감정, 기분]을 조절한다. 마음[감정, 기분]을 제어, 통제한다.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사랑과 미움이고, 좋고 나쁨이고,
기쁨과 슬픔, 만족과 불만, 평온과 불안, 무서움이다.
감정은 짧게 “희-노-애-락”이라 한다.
이건 주로 마음의 작용이다. 근데, 이걸 영혼이 컨트롤한다.
이걸 잘 해야 영혼이 맑고 순수하고 건강하게 된다.
이걸 잘 못하면 막가파가 된다. 감정의 노예가 된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게 된다. 비참하게 된다.
-판단하고 뜻을 세우고 행동 한다:
잘 생각하고 결단하고 실행에 옮긴다.
목표를 세우고 용맹정진 한다.
뜻을 세운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초발심.
백일기도도 한다.
세분해서 살펴보자.
1-1-2-1 생각하기
정신이란 첫째로 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면 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생각이 곧 인식이다.
생각을 잘 하면 인식력과 분별력이 강화된다.
생각을 잘 해야 한다. 궁리를 잘 해야 한다. 머리를 잘 써야 한다.
생각을 잘 해야 좋은 결실이 생긴다.
이로운 생각, 좋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 남을 배려하는 생각, 이웃을 사랑하는 생각.
뭐든지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듯이, 일체유사조도 가능한 것이다.
이왕이면 생각을 잘 해야 한다.
반대로 생각을 잘 못하면 온갖 불행이 닥쳐온다.
나쁜 생각, 해로운 생각, 이기적인 생각, 남을 이용하려는 생각, 남을 판단하고 헐뜯고
비하하려는 생각을 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
만사는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
1-1-2-2 말하기
정신이란 두 번째로 말한다는 것을 뜻한다.
말이란 의사를 표시하고,
내면의 생각을 입으로 전달하는 능력이다.
인간만이 참다운 의미에서 의사표시가 가능하다.
인간만이 참다운 의미에서 교류가 가능하다.
그것은 말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간은 말을 한다.
말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정신이다.
생각이 입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 말이다.
말한다는 것,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말로 맺어진다.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
말은 입안에서 나오는데,
잘 보면 혀를 통해서 나온다.
따라서 혀를 잘 놀려야 한다.
혀를 잘 놀리면 좋은 결과가 생기고
혀를 잘못 놀리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
우리 옛말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말이 씨가 된다.
이렇게 말과 혀의 중요성을 간파하였다.
그러니 말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가?
혀를 잘 다스려야 한다.
사실, 인간관계는 혀 다스리기에 달려 있다.
좋은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칭찬하는 말, 진실한 말, 정직한 말, 온화한 말, 유익한 말,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말.
이런 말을 자주 할 줄 알아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헐뜯고, 비방하고, 시비 걸고, 모욕하고,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어떤가?
분열을 조장하고, 파당을 만들고, 비꼬고, 거짓의 말을 하면 어떤가?
문제는 말이요, 혀다.
늘 생각을 잘 하고, 말을 잘 해야 한다.
이제 이거 연습하고, 공부하고, 훈련하고, 수련하자.
의식을 가지고 연구하자. 되는대로 말하지 말고, 한 번 생각하고 말하자.
두 번 생각하고 말하자.
화난다고 막가파로 말하지 말자.
너 죽고 나 죽는 말을 하지 말자. 서로 분열을 일으키는 말을 하지 말자.
1-1-2-3 깨닫기
정신이란 세 번째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정신의 기능 중에 생각하고 인식하는 것이 으뜸인데,
생각과 인식 중에서도 최고가 바로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은 보통의 인식이 아니고
깊은 종교적 진리, 철학적 진리에 대한 깨침이다.
그래서 이를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 말의 어원은 깨다, 깨치다 에서 왔다고 한다.
꿈에서 깨다, 미망에서 깨치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깨쳐 아는 것이다.
무명을 깨다, 어리석음을 깨다, 어둠을 깬다는 뜻이다.
이 세상이 다 부질없는 허깨비라는 것을 깨치다,
인생무상이요, 권력무상이요, 제행무상이요, 제법무아라는 것을 깨치는 것이다.
깨달음은 언제 올까?
모를 일이다.
다만 어떤 문제의식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궁구할 때,
가고, 가고, 또 가다 보면, 정진하고, 정진하고, 또 정진하다 보면,
궁구하고, 궁구하고, 또 궁구하다 보면,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불현듯이, 아무도 모르게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깨달음은 진리를 깨쳐 아는 것, 즉 진리를 인식하는 것,
진리를 보는 것, 견성(見性)이라고도 한다.
깨달음이 계속되면 삼매경에 이른다.
일상 중에서도 작은 깨달음이 많다.
이때 우리는 너무 기뻐서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아 하 그렇구나!! 아 하, 인생은 이런 것이구나!!
아 하 사람은 이렇구나!! 아 하, 생명은 이런 것이구나!!
진리를 모르면 무명, 무지요,
그래서 어둠이요, 미망이요, 캄캄함이다.
그런데 진리를 깨쳐 알면 그게 바로 각이요, 견성이요,
그래서 밝음이요, 빛이요, 환함이여, 기쁨이요, 천국이요, 극락이다.
무엇을 깨치는 것일까?
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예: 하늘은 높고 푸르구나!!!
예: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이로구나!!
예: 지성이면 감천이로구나!!
예: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구나!!
예: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로구나!!
예: 하느님은 나와 함께 현존하시는구나.
예: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예: 하느님의 신성이 내 안에 현존하시는구나.
예: 너는 누구인가? 너는 곧 나로구나. 너와 나가 둘이 아니로구나.
너는 하느님의 귀한 선물이구나.
너는 하느님의 작품이로구나!! 너와 나는 하나로구나!!
우리는 이런 깨침을 얻기 위해서 이상한 짓을 할 필요가 없다.
삶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지 않고, 다만 오늘 지금을 살뿐이다.
그러다 보면 저절로 눈이 열릴 날이 올 것이다.
성실히 오늘 이 순간만을 녹녹하게 살아갈 뿐이다.
이런 깨침을 하늘로부터 다시 한 번 태어난다고 말한다.
부모를 통해서 한 번 태어나 자연인식을 하지만,
그거 가지고는 안 된다.
성령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눈이 열려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과 교류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밝고 맑고 향기롭게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사는 것을, 세상을 빛낸다고 한다.
1-1-2-4 하느님과 교류하다
정신은 명상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명상을 한다. 명상은 기도이다.
명상은 선(禪), 참선(參禪), 묵상(黙想), 정관(靜觀), 관상(觀想), 성찰(省察)이라고도 한다.
명상은 자기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명상은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여 진리를 인식한다.
명상은 삶의 도피인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면 욕망을 벗어버리게 하기 때문이다. 명상은 무엇이 옳은가를 분별시키기 때문이다.
명상은 욕망을 내려놓는 수련이기 때문이다.
명상은 깨달음에로 인도하고 무명을 깨게 한다.
명상을 지속적으로 하다보면 어느덧, 불현듯이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때 지복(至福)을 경험하게 된다.
듣도 보도 못한 지복을 느끼게 된다.
이때 넘쳐흐르는 황홀감으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환희로 인해, 극락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이때 온 몸이 황홀한 빛에 휩싸인다.
명상을 하다보면 진리와 교류하고 하느님과 교류하게 된다.
어떻게 하는 것이 기도인가?
기도는 일방적인 것이다.
기도는 욕심이 묻은 탄원이다.
탄원기도, 청원기도, 애원기도, 단식기도, 금식기도, 침묵기도, 100일기도, 40일기도 등.
그러나 욕심이 있다.
욕심을 정화하는 것이 큰 관건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교류인가?
우선, 교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나의 현실은 하느님의 응답이요, 선물이기 때문이다.
나의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나의 현실, 외면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자.
기쁘게 받아들이자.
마음에 들건 안 들건 상관없이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다.
이왕이면 기쁘게 받아들이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
다음, 교류는 봉헌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 나의 지성, 나의 의지, 나의 마음, 나의 감정, 나의 기분.
나의 행실, 좋은 것, 좋지 못한 것.
나의 전부를, 나의 모두를, 나의 전체를 봉헌한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봉헌하고, 감사하고, 찬미하는 것. 이것이 생생한 교류이다.
이런 상태에서 아침기도를 함께 바칠 때, 황홀경이 온다. 엑스타시를 경험한다.
영혼이 맑고, 정신이 맑아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고
거기에 응답하는 것. 이게 바로 엑스타시이다.
교류는 이렇게 수용, 봉헌, 감사, 찬미로 이루어진다.
찬미, 찬양, 찬송, 칭찬하는 것이 교류다.
일종의 애교를 부린다고나 할까?
예: 주님은 거룩하시나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 사랑이 끝이 없으신 분,
선하시나이다. 최고 선, 모든 선, 홀로 선, 완전 선, 지상 선, 선 자체, 온갖 선.
좋으신 분, 최고로 좋으신 분,
멋진 분, 인자하신 분, 달콤한 분, 가장 바랄만한 분, 온화하신 분, 자애로운 분.
기도는 교류이고, 교류는 먼저 부르시는 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리고 봉헌하고, 봉헌하고 알아차리는 것.
이렇게 쌍 방형으로 교통하는 것이 바로 교류이다.
이걸 도와주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호흡 명상 기도 법”이라는 것이다.
숨을 쉬는 것. 숨 쉬는 것을 집중하고, 의식하는 방법이다.
마음을 배꼽 아래 하단전에 모으는 의식 집중 수련이다.
편안하게 누워서, 온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고, 고요히 단전만 응시하는 것이다.
숨이 단전에 오고 감을 조용히 응시, 내관, 의식, 지켜보는 것이다.
단전은 어디?
배꼽 밑에. 아랫배에 있다. 거기를 의식하는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 아랫배가 불룩해진다. 숨을 내쉬면 아랫배가 홀쭉해진다.
요것만을 조용히 관찰하는 것이다.
숨은 천천히 가늘게 깊이 들이쉬고 내쉰다.
이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떨림이 온다. 시원하고도 뜨거운 기운이 감지된다.
이런 느낌을 느끼면서 30분간 숨쉬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입에 단침에 괸다.
아주 맛있는 침이 생긴다.
생기가 솟는다. 생기발랄.
아침에 20분, 저녁에 20분 한다.
어디서나 한다.
운전, 버스, 지하철, 길을 가거나 앉아있거나, 성당에 있거나, 강의를 듣거나....
늘 한다. 언제나 한다.
아침에 세수를 하고, 저녁에 세수를 하고....
그럼 하루가 달라진다.
체조를 한다.
먼저 몸 운동을 하고 나서 한다.
등산, 달리기, 산보, 다 좋다.
몸도 우리의 인간 구성에 중요한 요소이다.
몸은 물론 마음을 따라 움직인다. 마음은 정신을 따라 움직이고.
몸 조절, [질병]
감정 조절, [변덕]
정신 수양이 필요하다. [품격향상]
사람이 여유가 있고, 평온하고, 너그럽고, 편안한 사람. 좋은 사람. 따뜻한 사람.
이를 교류, 교통이라고 한다.
기도는 왠지 "비는 것"이란 통념이 있는,
어떤 불순한 것이 붙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교류하는 것,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알아듣는 것.
여기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최고다.
교류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우리의 삶은 의미 충만하고, 가치 있고, 은혜롭고, 뿌듯하고, 보람 있고,
향기 나고, 상쾌하게 된다.
이런 단계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오로지 느낄 뿐이다. 이 단계는 언어도단의 세계,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저 미소 짓고 자연스럽게 일상을 살뿐이다.
가식이나 꾸밈은 어울리지 않는다.
단순, 기쁨, 진실, 선행, 믿음, 친절, 평화, 사랑, 평화를 살 뿐이다.
깨달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명상을 하며 살기에 가능한 것이다.
누구든지 이렇게 살찌어다! 누구든지!
1-1-2-5 결단하고 행동하기
우리의 정신은 결단하고 행동한다. 이걸 특히 의지라고 한다.
의지란 무엇인가?
의지란 뜻을 세우고, 뜻을 실천하는 행동의 밑바탕이다.
다시 말해서 의지가 있어야 뜻이 서고,
뜻이 있어야 무슨 행동이 나온다는 것.
의지가 강해야 행동이 제대로 나오기 마련이다.
의지가 강하지 못하면 행동도 흐지부지 된다.
이런 것을 작심삼일이라고 하나?
마음을 먹었지만 삼일도 못가서 행동을 그만두는 일.
또는 용두사미라고도 하나?
시작은 거창하고 요란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난관이 오면 금방 꼬리를 내리고 행동을 취소하고 마는 일.
우리는 무수히 많은 행동을 한다.
그 행동들은 모두 뜻을 세웠기 때문에,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의지는 어찌 보면 종합적인 판단이요, 총체적인 판단이다. 의지는 어떤 결단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결정이요, 행동개시를 위한 철저한 다짐이요, 마음먹음이다.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는가? 어떤 일을 하는가?
그런 것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그릇과 크기, 인품과 품격 등을 알 수 있다.
행위를 보고 우리는 사람을 판단한다.
행동을 보고 우리는 사람을 잰다.
일을 보고 우리는 사람을 비판, 혹은 칭찬한다.
근데, 이 모든 행동 밑바닥에는 바로 우리의 의지가 숨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뜻이 깔려 있는 것이다.
행동 중에는 좋은 행동, 이로운 행동, 고마운 행동, 칭찬받아 마땅한 행동 등이 있고,
또 나쁜 행동, 빌어먹을 행동, 사악한 행동, 비난받을 행동, 불행을 초래하는 행동,
불미스런 행동, 고약한 행동, 피해를 주는 행동, 죄악을 일으키는 행동, 죽이는 행동 등이 있다.
뜻을 세운다는 것, 의지를 바로 세운다는 것,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마음을 강하게 먹는다는 것,
어떤 난관이나 어려움이나 마가 낀다 하더라도
이것을 뚫고 나갈 마음을 독하게 먹고, 꾸준히 일을 실천하는 것, 이것도 중요하다.
자고로 좋은 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잔치 집에 파리가 많이 모여든다고 했던가?
이런 마에 무릎을 꿇지 말고 의연히 일어서야 하겠다.
우리는 꾸준히 선한 일을 하고, 어떤 일이 닥쳐와도 굽히지 말고, 기죽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담대히, 용감히, 성령을 힘입어,
선한 일, 착한 일, 아름다운 일, 진리의 일을 행해야 한다.
의지를 세우는 일, 대단히 중요하다.
강하게 마음을 먹는 일, 대단히 중요하다.
행동이 있기 전에 이미 우리 마음속에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가!!
공자님 말씀하시길: 행하되 행함이 없이 행하라.
노자님 말씀하시길: 무위자연 하라. 즉 가식 없이 행하라.
예수님 말씀하시길: 말로만 주님, 주님 하지 말고, 주님의 뜻을 행하라 하셨다.
우리는 말로만 나불대지 말고, 실제로 주님의 뜻을 행해야 하겠다.
뜻을 세우고, 실제로 행동하는 일. 거기까지 가야 일이 완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정신은
-생각하는 기능[인식],
-느끼는 기능[감정],
-뜻을 세우는 기능[행동]으로 특징 지워진다.
아, 위대한 인간이여!
하느님이 박아주신 인간의 이 특성을 제대로 살려서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과 교류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현실적으로는 이러지 못하다.
실제의 인간의 모습은 오히려 악을 조장하고, 악을 사랑하고, 악한 일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