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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가시고기의 생태계를 잘 보셨습니까?..... 부성애를 상징한 가시고기로 더 잘 알려진 것은 2000년 조창인 작가가 쓴 장편 ‘가시고기’(밝은세상)소설이 당시 300만 부 팔려 베스트셀러가 되었기에 사람들에게 더 알려졌습니다.
이 소설이 인기를 끌었던 건 시대상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직장을 잃은 한 아버지가 백혈병에 걸린 아들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각막을 판 뒤 암으로 죽는 이야기가 IMF 직후 가족애에 목말랐던 한국인의 마음을 절절히 울린 내용입니다.동영상에서 보는 것처럼 알을 낳고 떠나는 암컷 대신 알과 새끼를 지키다 죽음을 맞이한 수컷 아빠 가시고기가 곧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시대가 좀 여유 있게 사는 것처럼 보여도 가정들을 더 깊이 들어다 보면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는 때 5월 가정의 달 둘째 주일 어버이 주일예배를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저와 여러분은 이미 부모가 됐든지 아니면 앞으로 부모가 되실 분이 어버이주일 예배에 참석 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함께 읽은 본문은 ‘탕자의 비유’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성도는 탕자가 둘째 아들 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이야기를 들여 다 보면 둘째 아들이 크로즈업 되기에 탕자처럼 보여도 25절부터 등장한 큰아들도 동생 못지않게 탕자의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속에 나오는 둘째아들이나 첫째 아들 자식을 둔 부모는 엣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걱정하고 염려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철이 들까!..... 걱정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제 나이가 육신이 훨씬 넘었지만 어머님 살아계셨을때 행동했던 모습을 돌아보면 언제나 철이 들래 지금 그런 심정입니다. 어떤 소설이나 드라마든 주인공이 누구일까 알려고 하면 드라마 결론을 보면 압니다. 주인공은 어떠습니까?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엑스트라는 칼만 지나가면 윽하고 쓰러져 죽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몇 번 총에 맞고 칼에 베어도 살아있어요 그리고 드라마 끝 마무리를 멋지게 장식하는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읽은 본문말씀 11-24절은 둘째아들이야기입니다. (큰아들 등장하지 않음)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25-32절은 큰아들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등장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한 사람은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 이야기는 아들이 초점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깊은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요 어머니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누구에게까지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까?.........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다가갑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이지만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참 모습을 긍극적으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여기 등장한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어떤 아들로 보입니까?......... 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재산을 달라고 합니다. 모든 결정권을 가지신 아버지를 보세요 재산 달라고 졸라 되는 둘째아들에게 그냥 말없이 재산을 줍니다.
그런데 철없는 둘째아들을 보세요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물려받은 재산가지고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땀 한 번 흘리지 않고 받은 유산 다 허랑 방탕하고 말았습니다.허랑 방탕(虛浪放蕩)을 인터넷 낱말사전을 보니까 “ 언행이 허황하고 착실하지 못하며 주색에 빠져 행실이 추 저분 하다” 풀이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술과 놀음으로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로 살았으면 성경에서는 패역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신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이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부모가 잘못을 저지른 아들에게 지적하고 훈계를 해도 재차 잘못한 행동을 또 했습니다. 아버지는 너무 마음이 아파 아들을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성읍에 데리고 가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성읍 원로 장로님께 부탁합니다.장로님! 제 아들입니다. 이 놈이 그렇게 잘못을 타이르고 가르쳐도 반복해서 죄를 짓고 말을 듣지 않아 여러 가지 방법을 써도 안돼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 이 아들을 돌로 쳐 죽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둘째 아들의 잘못된 행위를 보면 율법대로 하면 아버지가 고소하지 않아도 동네사람들이 판단하고 돌로 쳐 죽을 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둘째 아들이 율법대로 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들이지요 그런데 둘째 아들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가 피 땀 흘려 모은 재산이니 잘써야 하겠다 하여 사업하여 성공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결국 허랑방탕하여 유산을 탕진하여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거지라도 먹어야하기에 이집 저집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한 집에 들어가 먹을 것 만 주면 일 하겠습니다 간청을 합니다. 다행히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보세요 둘째 아들 돼지를 관리하는 일인데 흉년이 들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부족합니다. 일하면서 배를 채우고 싶은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부족하여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조차 없습니다. 이 정도면 둘째아들은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구제불능입니다. 인생 최고 밑바닥 신세가 된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둘째 아들 놀라운 반전이 시작됩니다.
17절 시작을 보면 “이제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 라고 했어요 17-18절을 다 함께 다시 읽습니다. 17-18절.......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누가 둘째아들 초라한 모습을 보고 여봐요! 부모가 계신 집으로 빨리 돌아가세요 말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돌이켜”..... 자원하는 마음으로 고백했습니다...... “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나님 앞에 제가 죄를 졌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도 죄를 졌습니다.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즉시 과거를 청산합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감히 세상에서 즐겼던 것들을 청산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둘째 아들이 이렇게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는 모습을 오래도록 기다리신 분이 누구입니까? 아버지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집에 계셨지만 둘째 아들의 모든 행동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전과 똑 같이 오늘도 집 앞에서 언제나 돌아올까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아버지가 저 멀리 바라보는데 패가망신하여 돼지만도 못한 패역한 아들이 고개 숙이고 돌아오는 것을 본 것입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면서 알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을 보면 기침소리만 들어도 자기 아들 인 것을 근방 알아봅니다. 가끔 자식들 졸업사진이나 단체사진을 보면 다 똑같은 자식들 모습이라도 네 자식은 근방 찾지 않습니까?
이제 아버지 어떻게 합니까? 20절...... 측은이 여겨 달려갔다고 했습니다.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이 장면은 그냥 지나칠 말씀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행동속에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20절하반절에 “달려가”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달려가” 이 단어 헬라어 원어에는 “전력질주”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가만히 있어도 아들이 아버지 앞에 와 무릎을 꿇고 빌게 할수 있을 것인데 아버지는 먼저 아들을 향해 전력질주하며 달려 간 것입니다. 왜 달려 갔을까요? 집 주변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혹시나 돌로 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에 읽었던 신명기 21장 기억하시죠 패역한 아들을 동네사람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돌로 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동네사람들이 먼저 알기 전 아들을 보호하기위해 먼저 전력 질주한 것입니다.
대개 반가우면 우리는 가슴을 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버지 보세요 장성한 아들을 늙은 아버지가 안은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서 쓰인 “목을 안았다” 목이란 헬라어 단어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단칼에 죽을 수 있는 것이 목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그의 목을 안았다는 것은 아들의 생명을 보호하기위해 아버지의 보호 본능적 행동입니다.
여전히 아버지는 아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살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아버지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찾은 둘째아들에게 어떻게 합니까? 돌아온 아들을 천사처럼 대접합니다. 22-23.....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아버지는 그져 둘째 아들 보고 행복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먼저 심판 하실 것 같죠 아닙니다. 너는 타향에서 뭐! 했냐 내가 준 돈 어디다 섰느냐 왜 이런 꼬라지로 왔느냐 묻지 않습니다.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였습니다. 이것은 둘째 아들 신분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써의 신분을 회복시키는 것이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스스로 돌리켜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그냥 무조건 받아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를 알면서도 끝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오늘도 우리를 눈동자처럼 바라보시며 인내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시대가 악하기에 우리 눈으로 볼 때 탕자 같으니 저 사람 빨리 심판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하시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무신론 교수가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 앞에서 하나님을 마구 욕을 해됐습니다. 한참 욕을 하고나서는 봐라! 기독교의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내가 이렇게 욕을 했는데도 심판하지 않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하나님이 없는 거야! 강단에서 외치니까 교수를 바라본 한 학생이 말하기를....... “교수님 그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교수님을 위해 오래 참고 기다리시기 때문이예요” 말했다고 합니다.
이사야 30:18......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은혜와 긍휼의 보따리를 항상 준비하시고 기다리십니다. 마치 문 밖에서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며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안에서 침묵하며 문이 열리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왜 하나님은 바보처럼 이렇게 하실까요?..... 택함 받은 보배로운 자녀 이기에 언젠가는 마음의 문이 열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돌아올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할 우리자녀들이 지금도 세상에서 방황하며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내 자녀이기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도록 하고 싶지만 이것도 감정이 앞선 우리 부모 생각 일 수 있습니다...... 조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모의 언어도 조급할수록 거칠어질 수 있어요 표정을 살피고 세심하게 듣기를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그런 말을 하지요 부모가 자식 눈치 보며 행동한다고 하는데 자식 앞에서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사랑의 속성 가운데 첫 번째가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했습니다. 기다려 주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셨다면 이미 우리는 범한 죄 때문에 지옥에 열두 번도 더 들어 갔을 것입니다.
다행히 주님이 끝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셨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님 앞에 돌아 온 것입니다. 주님이 인내하시고 기다려주셨기에 오늘 내가 여기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으니 대단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너 설레는 맘 가다듬고 희망중 기다리면서 그 은혜로신 주의 뜻과 사랑에 만족하여라 우리를 불러 주신 주 마음의 소원 아신다 ♬♪ 찬송가 312장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처럼 믿음으로 우리의 자녀를 기다리며 오늘도 내일도 기도하며 긍휼의 마음을 채워 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