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백색 테러리스트
9, 백색 테러리스트 1
그때, 역사앞 시계탑의 시간이 막 10시를 가리켰다.
최유진은 청량리역 대합실에서 나와 광장을 가로질러 걷던 참이었다.
몇 사람이 함께 대합실을 빠져나왔지만 광장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즈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광장 건너편의 크고 작은 건물들과 텔레비전 뉴스시간의 자료화면처럼 수많은 차량들이 무리를 오가는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면서 최유진은 천천히 지하철역 입구를 향했다. 이따금씩, 퍽퍽한 어깨를 손으로 토닥이면서.
순간, 무슨 전조나 예감의 낌새도 느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그리고 느닷없이, 양쪽에서 건장한 사내 두 명이 최유진의 양쪽 옆으로
바싹 다가왔다. 한 사람은 바로 옆에서 왼쪽 팔을 잡으며,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두어 발치 뒤에서 어깨를 움켜쥐며.
"당신들, 뭐....., "
최유진은 엉겁결에 소리치며 몸을 사렸다.
반사적으로 왼쪽 사내의 팔을 물리치려고 꿈틀댔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최유진의 입을 막았다.
팔도 잠깐 사이에 다시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조여졌다. 어깨는 통증을 느껴야 할 정도로 압박이 전해져 왔다.
"그냥 앞만 보고 가시지요."
이런 사람들 목소리는 모두 이렇게 각지고 투박한가. 게다가 사무적일 뿐만이 아니라 위협적이고 ....., 최유진은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며 그들이 이끄는 대로 앞으로 걸었다.
"지금 뭣하는 거요? 당신들 대체 누구요?"
주눅이 들었음인가. 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김실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김실장이면......, 김동주?"
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뒷말의 끝을 올렸다. 옆의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순간, 사내의 억센 팔이 손목을 세게 조여왔다. 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질렀다.
"놔! 이거 못 놔?"
최유진은 걸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하지만 잠까니었다.
멈칫하는 순간, 뒤쪽에 있는 사내까지 옆으로 다가오며 최유진을 끌어당겼다.
"안 놓으면 소리친다. 어서 놔!"
최유진은 발작적으로 몸을 틀었다. 옆으로 가까이 지나가던 사람들 몇몇이 힐끔거렸다.
하지만 사내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선생님, 이게 뭔줄 아십니까?"
오른쪽 사내가 문득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꺼내 최유진 앞으로 보였다.
장갑을 낀 손에는 꼭 반 뼘쯤 되는 , 아이들 장난감 같은 주사기 모양의 약병이 놓여 있었다.
"주 성분은 포로말린입니다. 신체부위 아무 곳에나 찌르면 효과는 3초 이내에 나타납니다. 이것을 사용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마취할 때는 별 느낌이 없지만 깨어나면 엄청난 두통을 수반합니다. 그게 이것의 단점입니다."
마치 무슨 강의를 하듯 사내는 빠르게, 그리고 정확히 말했다.
"지, 지금 날 협박하는 거요?"
"부탁드리는 겁니다. 실장님께서 잠깐이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봐요, 당신들......, "
최유진은 다시 한 번 꿈틀대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내의 손길은 더욱 억세게 조여왔다.
빠져나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소리차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까 하는 생각도 얼핏 스쳤지만 그만두었다.
사내들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최유진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걸었다.
사내들은 최유진이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자 이내 안심이 되었는지 팔과 어깨에 주었던 힘을 풀고 대신 빨리 걸었다.
지하철역 입구를 지나 이내 백화점 앞의 버스 정류장을 스쳐 사창가 입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바로 그곳에 새까만 고급 승용차가 세워져 있었다.
"어서오시오."
자동차에 다가갔을 때, 뒷좌석에서 누군가 내리며 말했다. 김동주였다.
그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윗주머니에 꽂고는 이내 최유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당신......, "
입은 떼었지만 김동주를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때까지도 김동주는 손을 내민 채 서 있었다.
"최 형, 이런 식으로 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만날 방법이 있어야죠. 전화도 불통이고, 하숙집에도 없고....., 최 형 찾느라고
이 친구들이 나흘 동안이나 수고를 했습니다."
"당신, 정말 왜 이러시오? 도대체 왜 나를 괴롭히는 겁니까?"
최유진은 신경질적으로 그러나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김동주는 일시에 표정을 굳혔다. 앞으로 내밀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최 형,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요. 우린 거래를 시작했잖소. 약속을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첫째, 둘째 마디는 제법 진지하게. 그리고 셋째 마디는 타이르듯 김동주는 마치 계산에 넣어두고 하는 것처럼 말했다.
"이봐요. 그만둡시다. 난 자신없어요."
"최 형. 이러지 말고 타시오. 가면서 이야기 합시다."
사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있던 사내 하나가 달려가더니 운전석 뒤쪽의 문을 열었다.
최유진은 김동주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그랬지만 그의 얼굴은 여유 있어 보였다. 얼핏 보면 씨익 웃고 있는 듯도 했다.
최유진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나, 약속이 있습니다. 열한시까지 급히 가야 할 데가 있어요."
최유진은 일부러 시간을 정해 말했다.
"약속?"
"그래요, 웬만하면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 합시다."
그렇게 말하며 최유진은 짐짓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즉시 김동주가 어깨를 잡았다.
"이러지 말고 탑시다. 가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지요, 가면서 이야기하면 되잖소."
"......, "
할말이 없었다.
늘 느끼던 바였지만 김동주는 빈틈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최유진은 사내가 열어둔 문으로 몸을 실었다.
김동주가 타고, 두 사내가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다음, 승용차는 이내 출발했다.
"가는 곳이 어딥니까?"
김동주는 승용차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마자 물었다.
"명동입니다."
최유진은 짧게 대답했다.
시선은 창 밖에 둔 채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제기랄 . 입 속에서는 반복해서 욕설이 맴돌았다.
도대체 일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최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보다 김도우에게 꼬리를 밟힌 것이 잘못이긴 했다.
그러나 일진은 어제부터 사나웠다. 조 선배가 굳이 만나자고 했을 때, 끝까지 버텻어야 했다.
무슨 핑계든 대고 그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만나서 회포나 풀자구. 자네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나중에 우편으로 부쳐주면 되고 일단 이쪽으로
나오게. 청량리 미주 아파트 알지.....,
최유진으로서는 최후의 통첩을 하기 위해 전화를 했었고, 물론 조선배는 애초에 예상했던 대로 설득하려 했다.
그때까지 최유진은, 못 합니다, 혹은 하고 싶지 않아요, 라는 대답으로 일관했었다.
만난다면 설득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더더욱 약속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수화기를 든 지 30분, 포기했다는 듯한 조 선배의 말투 때문에 우선 한풀 기가 꺾였고, 속을 달래듯 복잡한 머리도 술로
달래리라는 생각으로, 내가 근사하게 한잔 살게, 라는 조 선배의 말에 만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스스로 허물어버렸다.
그게 잘못이었다.
밤 9시가 넘어서 조선배가 이사한 아파트 근처까지 최유진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10시 15분. 청량리 청량리 역사 옆쪽의 백화점과 이웃한 지하 술집, 포장마차면 족하다고 최유진은 말했지만 조 선배는
기어코 그를 룸살롱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11시. 그때까지 술을 먹는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룸살롱의 도색적인 조명과 밀실의 분위기가 무엇보다 어색했고, 뿐만 아니라 낯선 여자가 제 살을 바삭 붙이고 앉아 따라주는
술이 제대로 넘어갈 리 없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노동현장을 전전할 때도 퇴폐적이라고 일갈하며 옆에도 가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11시 반이 지나면서, 썸씽인가 하는 양주를 두 병이나 비웠을 즈음, 멋모르고 마신 술에 최유진은 취하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여자가, 조 선배의 주문에 따라 한 손으로 최유진의 손을 가져가 제 가슴과 사타구니에 대고 문지르고 또다른 손으로는
그의 허벅지와 더 깊은 곳까지 더듬었다. 그러나 최유진은 그녀를 뿌리치지 못했다.
10년 이상 자신이 몸담았던 모임의 사람들이 자신을 버렸듯이 자신도 그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것은 결국 그들의 규율을 철저히 깨고 하루 빨리, 이른바 세속적으로,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자본주의적으로 물들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하필 왜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혹 자위는 아니었을까. 여하튼 여자의 집요한 손길을 따돌리지 못했던 것은
물론 술기운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느새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있는 그 생각의 몫이 컸다.
더구나 조 선배가 수표 한 장을 최유진의 옆에 앉은 여자의 젖가슴 속에 밀어넣었을 때, 여자는 이내 술상에 올라가 최유진을 향해
서서 그렇지 않아도 짧은 치마를 아예 걷어올려 보였다. 그 이후의 시간은 또 어떻게 흘러갔을까. 최유진은 몇 번 더 여자의
알몸과 맨젖을 보았고, 또 조 선배가 하듯이 주물렀다. 그러면서 들었다.
-그래, 잘 생각한 거야. 이제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갔다구. 자네도 목격했잖아. 이제 80년대는 다시 오지 않아. 자본주의!
더럽지만 자본주의시대가 온 거야. 그 괴물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튼튼해. 견고하다구. 그리고 봐. 자네가 원하던 사회는
뭐였나? 소비에트? 아니면..... 설마, 엔 케이(N.K)? 이봐 , 웃기지 말라구. 레닌의 깃발 아래 뭉쳤던 소비에트도 이제 조각조각
났어. 엔 케이는 또 어때? 혹부리 영감도 죽었어. 그럼 이젠 뭐야? 뭐가 될 것 같아?..... 내 말 잘들어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했던가.
38부에서 계속
작가 : 한정영
첫댓글 좋은글 켈로 잘보고 갑니다.고맙습니다.
좋은글 잘 보고감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켈로 37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감사 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수고 하셨읍니다
감사 합니다 건강 유념 하세요
멋지고 소중한 작품 감상 잘 보고 갑니다. 대단히 수고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켈로부대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
잘 보구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