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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벧엘로 올라가라
부제 : 큰 위기에서 벗어난 야곱의 더 큰 위기
설교본문 : 창세기 35:1~15(참고, 33~35장)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3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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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 야곱의 하나님 경험
야곱이 지난 20년간 외삼촌 라반에게 거의 노예처럼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외삼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그의 형 에서 때문이었습니다.
외삼촌의 집 밧단아람에서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있는 브엘세바로 가거나,
그가 돌베게를 하고 잠을 자다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가려면
반드시 그의 형 에서가 있는 곳을 지나가야만 합니다.
얼마나 두려웠던지 하나님께서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두 군대의 천사를 보내셨으나 위로받지 못했고,
심지어 하나님과 씨름까지 했음에도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할 만큼
그의 형 에서를 두려워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천사만 봐도 기절하는데,
야곱은 두 군대의 천사들을 보았고 하나님과 씨름까지 했음에도
자기가 경험한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었는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시자
비로소 힘을 내어 형 에서를 향해 나아갑니다.
오늘은 지난 20년간 야곱이 가장 두렵게 여겼던 형 에서와의 만남에 대한 말씀과
그 이후에 찾아온 야곱의 가장 큰 위기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1 부 : 형 에서와 화해하는 야곱
1. 부담이 되는 만남
1) 야곱과 에서의 만남(33:1~3)
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오는지라.
야곱은 자식들을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나누어 맡기고,
2. 두 여종과 그 자식들은 맨 앞에 세우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그다음에 세웠으며,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우고
3. 그리고 야곱은 맨 앞으로 나와서,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하며 자기 형에게 가까이 하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습니다.
야곱은 자식들을 두 아내와 두 여종에게 각각 맡겼습니다.
맨 앞에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자식들을 세우고,
그다음에는 레아와 그 자식들을 세우고,
맨 마지막에 라헬과 요셉을 세웠습니다.
야곱은 혹시 불상사가 생기면 조금이라도 더 여유가 있도록 하기 위해
사랑하는 라헬을 맨 마지막에 두고, 그다음에 레아를 둔 것입니다.
2) 부담이 되는 만남 : 그러나 브엘세바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길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부담되는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담이 되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 서원했던 브엘세바에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일입니다.
● 묵상 :
우리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내 마음에 너무나도 부담되는 일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부담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그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부담이 되어 그곳으로 가는 것이 꺼려지겠지만,
그 현장에 가보면
이미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두신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하나님을 믿고 그 현장으로 가보십시오.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2. 에서의 진노를 풀어주신 하나님
1) 에서를 향하여 극진한 예후로 절하는 야곱(33:3)
(3절 성경구절 위에)
라반이 그랬던 것처럼 에서 역시 야곱을 죽이기 위해 왔습니다.
죽이려 한 것이 아니었다면 에서가 그의 부하를 400명씩이나 데려올 이유가 없습니다.
야곱이 두려워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치 봉신(封神)이 봉건 군주에게 하듯
깍듯이 예를 갖추어 땅에 일곱 번 절하면서 형에게 나아갔습니다.
2) 야곱과 에서의 화해(4절)
4. 그러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두 팔을 벌려 목을 어긋맞추어(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둘이 함께 통곡하며 우니라.
그러나 형은 그의 걱정과는 달리 달려와서
두 팔로 안고 입을 맞추고는 함께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 속에 동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선물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2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동생을 죽일 일념으로 살아온 에서가
그 정도의 선물로 마음을 풀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에서의 마음에 연민의 마음을 넣어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3) 지난 20년간 야곱을 두렵게 했던 마음의 앙금이 풀렸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두려워했습니까?
오죽 답답했으면 남들은 하나님의 천사를 보기만 해도 기절을 하는데,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면서도 두려운 줄 모르고 밤새도록 씨름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와서 만나보니 이미 하나님께서 형의 마음을 녹여주셨습니다.
형은 동생을 울면서 맞아 주었습니다. 야곱의 마음이 녹아내리는 순간입니다.
제 2 부 : 형 에서와 화해한 후 영적 침체에 빠진 야곱
1. 세겜성에 머문 야곱 : 평안할 때 조심하십시오.
1) 에서의 요구를 거절하고 세겜 땅으로 가는 야곱(33:12~17)
12. 에서가 가로되 “자, 이제 함께 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13. 야곱이 에서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연약하고,
또 내게 있는 양 떼와 소 떼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이다.
14. 그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이 가축들과 아이들의 행보대로(가는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5. 에서가 가로되 “그렇다면 내 부하 몇 사람을 남겨서 너와 함께 가게 하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6. 그리하여 그날 에서는 길을 떠나 세일로 돌아가고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그곳에서 자기 식구들이 머물 집을 짓고 가축우릿간도 만들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곳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과 화해한 에서는 이제 동생 야곱과 함께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야곱에게 세일에 가서 함께 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른 에서와 함께 살고 싶지 않습니다.
에서는 완전히 신앙을 떠난 사람입니다.
오직 이 세상의 것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어린 자녀와 가축들을 핑계 대며 천천히 따라가겠다고 하고는
전혀 다른 곳인 숙곳과 세겜 땅으로 갑니다.
2) 야곱은 세겜이 아니라 곧바로 벧엘로 가야 했습니다.
야곱은 20년 전 벧엘에서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창28:20~22) 라고 서원했었습니다.
3) 그런데 엉뚱한 곳인 세겜 성에서 정착하고 살려합니다.(18~19절)
18. 이와 같이 야곱이 밧단아람으로부터 돌아와서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히 돌아왔음에도 그 서원을 망각하고
가나안의 도시 숙곳과 세겜 땅에 머뭅니다.
그가 머문 숙곳은 본래 “오두막집들”이라는 뜻으로
잠시 거쳐만 가야할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땅을 사서 영구 거주할 집과 우릿간을 지어
세겜에 이르기까지 생활 기반을 확대해 가며
그곳에서 약 10년~15년을 머물렀습니다.
본래 유목민들은 장막을 짓는데
야곱은 은 일백 개로 땅을 사서는 그곳에 집을 지었습니다.
➠ 야곱이 세겜 성에 머무르려는 이유
야곱이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 성에 머무르는 이유는
➀ 첫째 그 들판이 넉넉하고 목초가 많아
살기가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입니다(창34:21).
목자에게 좋은 목초지는 욕심나는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➁ 둘째 이유는, 18절에 “평안히”라고 했듯
모든 시련이 다 사라지고 평안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죽을 고생시키던 라반에게서 해방되었고,
자기를 죽이려던 형의 원한도 풀었습니다.
거기에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대한 재산에 거기다 살기 좋은 곳까지 만났으니
야곱에게 무슨 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야곱은 인생의 편안함을 누리려는 욕심을 품게 됩니다.
그러기에는 세겜성 만한 곳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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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가까운 요단 평원으로 갔던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그렇게도 원하고 바랐던 야곱이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세겜의 타락한 문화를 동경한 것입니다.
● 묵상 : 어려울 때보다 평안할 때 더 위험합니다.
성경은 어려움을 겪을 때보다
평안을 누릴 때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다윗 역시 그가 왕이 된 후 소란스러웠던 나라를 평안하게 한 후,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는 일을 범합니다.
야곱 역시 20년간 그를 짓눌렀던 괴로움에서 벗어나자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벧엘보다는
육신의 평안을 주는 세겜 성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중에 있을 때보다 내 기도제목이 이루어졌을 때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2. 참으로 어이없는 세겜에서의 야곱의 예배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33:19~20).
야곱이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다는 것만 보면
역시 하나님의 사람 야곱이구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이것이 왜 어이없는 일인지를 정리하여 봅시다.
➠ 이때 야곱이 얼마나 타락한 마음을 품었는지는 살펴보시려면
아래 제3부의 2, ‘오직 세겜 성에만 머무르기를 바라는 야곱’부분을 참조하십시오.
1) 하나님을 향하여 꾀를 부리는 야곱
➀ 마음에는 없는 입술로만의 고백
엘 엘로헤 이스라엘’, 번역하면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아주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믿음의 자리 벧엘은 없습니다.
오직 세겜성 주변의 아름다운 목초지와, 가나안의 도시 세겜 성이 있을 뿐입니다.
➁ 완벽한 신앙고백이었으나, 그의 마음에는 세겜성만 있을 뿐입니다.
야곱이 그곳에 제단을 만들었으니
성전도 있고, 예배도 있고, 아름다운 신앙고백도 있습니다.
그럴듯한 제단도 쌓았고, 아름다운 고백도 있고,
예배로서 갖추어야 할 것은 다 갖추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겜에서 누리는 평안이 있을 뿐입니다.
➂ 이것은 벧엘로 가지 않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꾀쟁이 야곱이 이번에는 하나님을 향하여 꾀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벧엘로는 가지 않으면서
적당히 예배행위를 통해 무마시키려는 것입니다.
어린시절 공부하기는 싫고, 그러니 적당히 공부하는 척했던 것처럼
야곱은 그럴듯한 예배행위로 거룩한 사람인 척한 것입니다.
2) 마음에 다른 것을 품고 있으면서 드리는 예배는 뇌물이다.
야곱의 마음속에는 세겜에서의 평안한 삶이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드리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뇌물입니다.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거룩한 예배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으면 가짜 예배인 것입니다.
• 이런 것을 성경에서는 ‘뇌물’이라고 합니다.
이런 자가 드리는 헌금도 뇌물이요,
이런 자가 드리는 예배도 뇌물인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 때에 바리새인들이 속에는 물질에 대한 탐욕을 갖고 있으면서
거룩한 예배의식에 참여하여 거룩한 백성인 척했던 것처럼,
야곱은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신앙고백을 하면서
그의 마음속에 담긴 세겜성에 대한 마음을 달래려 하고 있습니다.
3)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예배도 뇌물입니다.
야곱이 숙곳과 세겜에서 집을 지은 것은 “자기를 위하여”(17절)였습니다.
그가 벧엘로 가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도
자기를 위하여 한 것이었습니다.
세겜에서의 야곱의 신앙행위는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위해 예배드리는 것 역시 예배가 아니라 뇌물입니다.
4) 허물과 죄에 빠져 있으면서 드리는 예배도 뇌물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조금 더 확장해 본다면,
허물과 죄에 빠져 있으면서 드리는 예배 역시 뇌물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허물과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편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죄를 짓고 기도하고,
죄를 짓고 예배를 드리는 상황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면
이 또한 뇌물인 것입니다.
➠ 하나님 앞에 순전한 예배를 드리십시오.
너무나도 오랫동안 죄가 습관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고 산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기도하는 순간만이라도
자신의 허물과 죄를 진정으로 아파해야 하고,
예배드리는 순간만이라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과 떠난 삶을 살고 있으면서 아파하지 않습니다.
게으름과 나태함, 세상 즐거움에 빠져 있는 자신의 상태를 아파하지 않으면서
그저 예배 의식에만 참여합니다.
그리고는 거룩한 행위에 참여했으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묵상1 : 마음은 다른 곳에 있고 형식만 그럴듯한 예배는
거짓 예배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기도할 때, 찬양과 경배와 예배 드릴 때
마음까지 주께 드리려 힘쓰고 애쓰십시오.
이것이 거짓 없는 순전한 기도요 순전한 찬양과 경배와 예배입니다.
이 기도와 예배를 주께서 기뻐 받으시기를 원하는 간절함으로
기도하고 찬양과 경배와 예배를 드리시오.
● 묵상 2 : 기도하는 순간만, 예배드리는 순간만이라도 순전한 마음을 가지십시오.
나의 허물과 죄를 아파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다가 또 죄를 짓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한 마음을 갖고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아파하며 기도하면
그 순전한 마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나를 바꾸십니다.
또 예배드리는 순간만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예배드리십시오.
자신의 걱정거리나 예배 후에 만날 사람에 대한 생각이나
그밖에 어떤 것이라도 다른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 기쁘시게 해드릴 생각만 하며 예배를 드리십시오.
● 묵상 3 : 모든 근심이 사라지고 평안한 때 조심하십시오.
야곱처럼 내가 오랫동안 기도했던 일이 이루어지고 근심거리가 사라져서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찾아왔을 때 조심하십시오.
야곱도, 다윗도 바로 이런 때에 미혹되었습니다.
마귀는 내가 마음을 느슨하게 하고 있는 틈을 타서
잠자고 있던 나의 본능을 건드립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마귀의 덫에 걸리고 맙니다.
3. 형식만 그럴듯한 야곱의 거짓된 예배
1) 예전적으로는 가장 훌륭한 예배를 드렸던 야곱(33:20)
20. 야곱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야곱은 세겜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향하여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전에 벧엘에서는
베개를 베었던 돌에 기름을 붓는 것이었으니 제단이랄 것도 없었는데,
여기에서는 번듯한 제단을 쌓았고, 그가 한 고백도
장차 자신을 통하여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담긴 고백으로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했으니
아주 탁월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적용하여 본다면 아주 훌륭한 성전을 짓고,
예배신학에 정통한 아주 탁월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2) 그러나 세겜에 머무른 야곱 : 야곱 인생에 가장 타락한 때
그러나 예배만 그럴듯했을 뿐
야곱은 이때가 그의 일생에서 가장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무엇이 야곱으로 하여금 이토록 영적 침체에 빠지게 한 것일까요?
3) 세겜의 타락한 문화에 빠진 디나(34:1)
1. 레아와 야곱 사이에서 태어난 딸 디나가 그 땅의 여자들을 보러 나갔더니
이때 야곱이 영적으로 아주 침체된 상태였다는 것은 그의 딸 디나가 히위 족속인
세겜 성 여자들의 타락한 문화에 참여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신앙이 좋아도 딸이 잘못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딸이 가나안 족속 중에서도 성적으로 가장 타락한 족속인
히위 족속의 여자들의 타락한 문화에 참여하는데도
아무런 말도 없고 전혀 가슴 아파하지도 않는다면,
홉니와 비느하스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도
가만히 내버려 두었던 엘리 제사장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4) 가장 타락한 상태에서 행한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까지의 야곱 평생에
세겜에서 그가 쌓은 제단이 가장 훌륭한 제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겜에서 야곱이 한 고백 ‘엘 엘로헤 이스라엘’은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이스라엘이 될 것이라는 믿음까지 담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므로
야곱 평생에 한 모든 신앙고백보다 가장 우수하고 탁월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가장 좋은 제단에 가장 좋은 예배를 드렸는데
오히려 가장 타락하고, 영적으로 가장 침체된 상태에 빠진 것입니까?
그 좋은 제단과 예배가 왜 야곱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 것입니까?
제 3 부 : 또다시 찾아온 하나님의 압박
1. 과잉보복 : 세겜성 사람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야곱이 아들들(요약)
(이 부분은 해당 구절의 큐티를 참조하십시오.)
1) 주저하지 않고 할례를 받기로 동의하는 세겜 성 사람들(34:18~24)
18. 야곱의 아들들의 말을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19. 이 청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또한 세겜은 그의 아버지의 집안에서 가장 존귀한 자였기 때문이라.
20.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성문에 이르러 그 고을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21.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그들과 함께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으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22. 그러나 우리 중에 모든 남자가 그들이 할례를 받은 것처럼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23. 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 우리 모두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
24.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물과 그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2) 세겜 성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육한 시므온과 레위((25~26절)
25. 사흘 뒤에 그들이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아픔을 겪고 있을 때에,
야곱의 아들들 중 디나의 친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가서
몰래 엄습하여 그 성읍을 기습하여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26.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27.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약탈)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혔기 때문이라.
2. 오직 세겜성에 머물기만을 바라는 야곱
1) 시므온과 레위에게 크게 진노하며 화를 내는 야곱(30절)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불러 나무라며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를 상종도 할 수 없는 추한 사람으로 여기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31. 그들이 가로되 “그러면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증오심의 본능대로 움직이다 보니
세겜 성이 끔찍한 시체 더미로 가득한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야곱은 이 일을 일으킨 시므온과 레위를 불러 크게 화를 내며 나무랍니다.
2) 야곱의 속마음 : 세겜 성에 더 머무르고 싶었는데
그런데 나무라는 야곱의 말을 주목해 보면
야곱이 언짢아하는 것은 그들이 살육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야곱이 세겜성에 더 머물 수 없게 된 것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머물기를 원하는 세겜성은 히위족과 가나안족과 브리스족이 있는 곳입니다.
이들 족속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완전히 멸하라고 명령하신
가나안의 일곱 족속 중에 포함된 족속들입니다.
야곱은 가나안 족속들 중에서도 우상숭배와 성적 타락이 가장 심한
이들 족속의 땅에 더 살지 못해 아쉬워하며 자식들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의 복을 잃게 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세겜 성에 머무르려는 야곱의 타락한 욕망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라반에게 2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한 것도
그가 가나안 여자와 결혼하지 않으려는 것 때문이었고,
에서의 아내 중 한 명이 히위 족속이었다는 것 때문에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다는 것도 잘 아는 야곱이,
그 땅에 더 머물지 못해 아쉬워합니다.
그 땅에 더 머물 수만 있다면
그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것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제 4 부 : 하나님의 명령 ➠ 벧엘로 올라가라
1. 벧엘로 올라가라
1)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35:1)
1.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어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거기서 살며),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칠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의 남자들을 모두 죽인 일로 야곱이 두려워하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전에 그의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할 때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그곳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고 명하십니다.
2) 야곱은 그의 형 에서와 화해를 한 후 곧바로 벧엘로 갔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다 해결되고 난 후에
세겜 성의 세속적인 즐거움에 빠져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를 잊고 살았습니다.
그의 딸 디나가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 것은
그가 하나님과 서원하였던 벧엘로 곧바로 가지 않은 결과입니다.
2. 우상을 버리고 의복을 바꾸라
1) 모든 우상을 버리고 의복을 바꾸어 입어라(2~5절)
2. 이에 야곱이 자기 가족과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되
“너희가 지니고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을 다 없애 버리고,
몸을 깨끗이 씻어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어라.
3. 이제 이곳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환난을 당할 때에 내게 응답하시고,
내가 가는 길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귀에 걸고 있는 귀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고
5. 그런 다음에 그들이 길을 떠났으나
하나님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성읍 사람들로 두려워 떨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은 벧엘로 가기 전에 먼저
야곱의 가족과 야곱이 거느리고 있는 모든 자들이 몸에 지니고 있거나
가지고 있는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모두가 우상과 귀걸이를
야곱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당시 귀걸이는 오늘날처럼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우상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그 귀걸이를 차고 다니면 자신을 보호한다는 일종의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귀걸이처럼 아무리 작은 모양을 하고 있더라도
하여튼 우상이란 우상은 모두 다 제거하라고 한 것입니다.
또 의복은 문화입니다.
그러므로 세겜의 문화를 나타내는 의복을 벗고,
정결한 옷으로 바꾸어 입으라고 한 것입니다.
2) 바로 이것이 야곱과 롯의 차이입니다.
야곱과 롯의 공통점은 그들 모두 이방 문화에 젖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의 향락에,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향락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야곱과 롯의 차이점은
야곱은 세겜에서의 소란스러운 일에 두려움을 느끼고
곧바로 그가 있어야 할 벧엘로 돌아가는데,
롯은 그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엄청난 일을 겪고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고 영영 세상으로 빠지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3) 우리도 야곱이나 롯처럼 때로 유혹을 받기도 하고,
때로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실 때
야곱처럼 그 경고를 두려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경고나 징계를 받지 않고 에녹처럼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다
하나님 앞에 가는 자가 제일 복된 사람이겠습니다만,
경고를 받고서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 역시 복된 사람입니다.
● 묵상 :
그러나 롯처럼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잃어버린 양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3. 벧엘에서 제단을 쌓은 야곱
1) 드디어 벧엘에 도착한 야곱(6~7절)
6. 야곱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야곱은 그곳 이름을 엘벧엘(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는,
곧바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과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전에 불렀던 대로 그곳 이름을 다시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2) 세겜에서의 예배와 벧엘에서의 예배의 차이(7, 9~10절)
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니,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10.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이제 더 이상 네 이름을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세겜에서도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만,
그때의 제단은 야곱이 세겜의 향락에 마음을 빼앗긴 것을 감추려는
가면과 같은 거짓된 제단과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이곳 벧엘에서의 제단은 하나님께 드리는 순전한 예배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를 받으시고
그의 이름을 다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제단이 얼마 좋은 재질로 만들어졌느냐,
예배가 얼마나 아름답게 드려졌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에 무엇이 담겨 있느냐,
어떤 마음과 어떤 자세와 어떤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을 보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드리는 예배가 순전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순전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십니다.
결 론 : 기도와 찬양과 예배가 능력이 되게 하려면
1) 모순 : 가장 타락한 때에 가장 탁월한 예배를 드렸다는 것
그러나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야곱의 평생에 가장 영적으로 어둡고 타락했던 세겜 땅에서
야곱 평생에 가장 좋은 제단을 쌓았고,
가장 탁월한 신앙고백과 예배를 드렸다고 하는 점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가장 좋은 성전을 지었고,
잘 지어진 그 성전에서 거룩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탁월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2) 타락한 자가 드리는 탁월한 예배 : 어느 것이 진짜인가?
그런데 이런 좋은 제단과 좋은 예배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에서 가장 영적으로 어두운 자, 가장 타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야곱이 하나님 앞에 구별된 존재가 되기를 바라기보다
히위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의
세속적이고 향락적인 즐거움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마음에 하나님과의 만남의 자리보다
그 즐거움에 머물기를 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아무리 훌륭한 예배라 하더라도 그 마음에 다른 것이 있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성전이라도,
아무리 예배 신학적으로 아무런 흠이 없는 탁월한 예배라고 하더라도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에 다른 것이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성전을 짓고 난 후에 1,000명의 여자를 얻은 솔로몬보다,
비록 보잘것없는 성막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다윗의 예배를 더 기뻐하셨습니다.
● 묵상 :
➀ 하나님의 뜻 찾기를 게을리하면 하나님의 압박을 만납니다.
야곱이 신앙의 자리인 벧엘로 가기를 주저할 때
하나님의 압박을 두 차례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고
아들들이 끔찍한 살육을 범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 뜻 찾기를 게을리하면 하나님의 압박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의 알면서도 순종하기를 거부하면 더욱 거센 하나님의 압박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압박은 견딜만한 것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➁ 그러므로 성공한 인생보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사람 되기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십시오.
화려한 성전을 짓기보다
내 안에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채우기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성공한 인생이 되려 하기보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사람 되기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시다.
주님
주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마음에 부담이 될지라도 순종하게 하옵소서.
모든 시련과 아픔이 끝나고 평안해졌을 때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무엇을 이루려 하시는지
분별하고 깨닫고 순종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