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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가는 거야.”
화엄전에 약한 비가 내리고 있었고, 큰스님께서는 마루에서 점심 공양 중이셨다.
장호원에서 여초스님과 연오스님이 오셨는데, 더덕구이, 고추부각 같은 손많이 가는 반찬들을 장만해 오셨다고 했다.
지난 달에 큰스님께 빌려갔던 책을 반납해드렸다. 무심코 여기저기 들고 다녔는데 표지가 너무 닳아서 죄송했다.
대선스님이 연륜이니까 괜찮다고 하셨고, 큰스님께서도 “흔적이 많을수록 더 좋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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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 들어오면 안 됩니다.”
대선스님이 유리문 밖을 보며 말씀하셨는데 큰스님께서 놔두라고 하셨다.
“여기 있으라한들 그 사람들이 있겠어?”
“예, 알겠습니다.”
“아무리 있으라 해도 안 있어. 금방 가. 10분 안에 가. 춘성스님 이야기 니는 몇 번 들었제?”
하고 큰스님께서 얼굴을 보고 물으셔서 도봉산 망월사가 떠올랐다.
“눈비 오는 날, 관광객들이 오면 일루와라 일루와라 해서 법당 처마밑에서 밥 해먹고 불고기 만들고 된장찌개 하도록 배려해주신 스님이 춘성스님이셔. 내가 거기 선방에 있으면서 봤는데 감동을 받았어. 그래서 나는 절대 관광객이 들어와도 안 말려. 마당에 아아들이 뛰어놀아도 금방 갈 사람들이야. 내가 아무리 붙들어도 그 사람들 안 있어.”
“그거 보기 힘들다고 대문 잠궈 놓고 안 그렇습니까.내비두면 되는데”
대선스님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냅두면 저절로 가.”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
얼른 보여드리라고 하셔서 큰스님께 <만선동귀중도송> 견본을 보여드렸다. 큰스님께서 유튜브에서 법문하시고, 화엄경에 부록으로 넣으신 강설을 같이 엮은 책인데,그동안 찍어서 모아둔 사진을 책에 붙이는 재미로 작년에 샘플북으로 만들었었다.
세 권 중에 한 권을 대선스님께 드렸더니 이번 여름 치과치료를 다니면서 버스 안에서 읽으셨다고 했다. 위로를 많이 받으셨다고, 가을에 생신 책으로 내자고 하셨다.
그래서 이번에 큰스님께 허락 받으려고 보여드렸는데
“여기 글씨를 조금 내리고 그 위에 <만 가지 선(善)이 중도(中道)로 돌아간다> 라고 하자.”
라고 큰스님께서 제목까지 지어주셨다.
대선스님이 기뻐하시며 옆에 계시던 지묘스님도 천 부를 인쇄하라고 권유하셔서 지묘스님도 고맙다고 하시면서 흔쾌히 인쇄하겠다고 하셨다.
큰스님께서 돈을 이런 데 쓰는 게 쉽지 않다고 하시면서 우표 이야기를 해주셨다.
“니는 많이 들어봤제? 나는 은해사에서 아주 가난했어. 도반에게서 편지가 와서 답장을 써놨는데 우표가 없어서 못 부쳤어. 그런 세월이 1년 반 동안 그렇게 됐어. 그런데 법공양 하면서부터 복이 넘쳐 나. 내가 만약에 법공양을 안하고 보통상식으로 살았으면 지금도 가난하게 살거야. 범어사에 살아도 아주아주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이 법공양에 대해서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고, 여러 종류가 많아. 그런데 법공양은 백 배 천 배로 뻥튀기하는 이문이 많아. 그러니까 스님은 돈을 쓸 줄 아는 거야. 이 법공양에 끝나는 게 아니라고 이게. 대작몽중불사, 얼마나 근사한 말이야?”
큰스님께서 대선스님에게 비용을 물으시더니 지혜월님에게 봉투를 가져오게 하셨다.
“내가 좋아하는 글이라서. 여기 오면 사람들에게 새로운 책 줄 게 없잖아. 천 권 쌓아놓고 주면 넉넉하잖아.”
그래서 <만 가지 선(善)이 중도(中道)로 돌아간다>라는 만선동귀중도송 책은 큰스님 생신을 맞이해서 3천권을 인쇄하게 되었다.
(큰스님과 대선스님과 지묘스님이 법공양을 해주셨다.)
*
내려오는 길에 대선스님이 큰스님께 받으신 봉투를 통째로 주셔서 집에 돌아와서 보니,‘보내는 이’란에 범어사, ‘받는 이’란에 ‘무비스님(휴가비)’라고 적혀 있었다.
책을 다시 편집하면서 ‘#우표 #휴가비 #생신 선물’ 이렇게 적어놓고 ‘#편지 #휴식 #기쁨’이라고도 써놓고 오래 들여다 봤다.
*
문수선원에 내려왔을 때, 지묘스님이 숙제 걱정을 하셨다.
화엄전에서 큰스님께서 모두 한 권씩 읽고 오라고 수진스님이 번역하신 <청량국사 화엄경소초> 책을 대선스님과 지묘스님에게도 빌려주셨기 때문이다.
“한글만 읽으면 되어요.”
하고 말씀드렸는데 한글로도 다 못 읽고 한달이 금세 돌아왔다.
숙제는 걱정이지만 큰스님을 화엄전에서 뵙는 시간이 빨리 오는 건 좋다.
매월 첫번째 월요일 문수선원에서 화엄법회 있는 날, 12시부터 1시 사이에 범어사 화엄전에는 유리문이 열려 있다. 큰스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五十七
離世間品 第三十八之五
四. 普賢菩薩의 二千答
5. 五十門의 十地答
반갑다. 오늘은 교재 제3권(민족사刊) 412페이지 부동지 할 차례다. 엔간히 왔다.
화엄경 이세간품 중에서 십지보살, 분별심이 끊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원효스님께서는 기신론에서 분별심이 처음 끊어진 것을 오온 중에서 식온이 끊어진 상태, 견도 환희지라고 한다고 분석하셨다.
그중에서 지난 시간까지 우리가 제7 원행지까지 했는데, 원행지는 아집이 빠지는 것이다. 아집스러운 것은 집착이 많은 것이다. 집착(執著)의 착(著)자는 드러날 저(著)라고도 하는데, 저명한 것 비슷하다. 글로 드러내든지 그림으로 드러내든지 화장으로 드러내든지 가방으로 드러내든지, 말로 드러내든지,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집착하는 것은 드러내는 것과도 같다.
예경을 한다는 것은 몸, 신업을 조복을 받는 것이고, 애어 아끼는 말을 하고 조심하고 빼딱하게 안 하고, 구업을 삼가는 것이다.
그리고 안쪽으로 지혜가 밝아진다고 하는 것은 의업을 맑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즉사표법(卽事表法)이다. 사물 사건 사실에 근거해서 진리, 이치를 표한다.
*
지난 시간에 우리가 제7 원행지를 하면서 발도 하고 손도 했다. 열 개의 발이 있다. 열 개의 손이 있다.
한 달 지나니까 딱 까먹기 좋을 시간이다.
우리가 자꾸 이것을 되짚어 봐야 빼짝 마른 기둥에도 나무 이파리가 열린다. 빼짝 마른 우리 정신세계에서 꽃과 열매가 맺히려면 그 나무젓가락 짝대기 하나 꽂아 놓고도 거기에서 꽃이 피도록 기도하려면 뭔가 자꾸 의미를 부여해야 된다.
한번 생각해 보자.
발은 무엇인가?
손발 두 개만 하고 진행하자.
경전은 제가 볼 때 항상 치밀하게 순서대로 되어 있다. 이게 상류인지 하류인지 급한 물인지 약한 물인지 넓은 데인지, 좁은 데인지 자꾸 표가 난다.
단단한 거냐 무른 거냐?
둥근 데에 모난 것을 갖다 놓으면 잘 맞지 않는다.
또 모난 데에 둥근 것이 잘 들어가지도 않는다.
발은 어떤 것이 있는가?
“법희스님, 발은 어떻습니까?”
길이 있으면 그렇게 진취, 앞으로 나아가는 행, 진취성이 있지 않은가?
여러분들, 지금 두 손이 없다고 생각하면 뭘 만들 때, 글을 쓰든지 손을 잡든지, 돈을 세든지 밥을 먹든지, 손 한번 잘라 놓고 젓가락질 한번 해보시겠는가?
손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기도 하지만, 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재가 있다.
그리고 손발이 절대 이 심장하고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십지(十地)가 다 그렇다.
심지어 우리한테는 ‘안이비설신의폰카컴뱅’ 이래야 요즘 시대에 맞다.
안이비설신의도 나지만, 어디에서 사람을 조사하고 이러면 폰부터 조사하지 않는가.
그 사람 행적이라든가 카(Car) 차량 어디로 움직이는가 조사한다. 컴퓨터를 압수한다.뱅(Bank) 그거는 전부 다 그 사람의 모든 행적이 같이 묻어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도 바로 뒤 선혜지에 가면 그런 말이 나온다.
선혜지에 가면 피갑이 있다. 갑옷이 있다. 그 사람하고 갑옷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다.
그 사람한테 또 무기가 있다.
무기는 몸하고 손발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 무기가 있는가. 수행자의 무기를 무엇이라고 지칭하는가?
화엄경에서는 수행자의 무기는 바라밀행이다.
수행자는 무기가 보현행원이다.
그러니까 악독한 사람들은 무기가 총이나 칼이겠지만 수행자는 무기가 자비다. 자비의 갑옷을 입는다.
법화경에서도 자실인의(慈室忍衣)라고 이야기한다. 화엄경에도 딱 ‘갑옷이다’라고 해놨다. ‘아, 갑옷’ 갑옷은 내 마음의 양심과 심장의 이 자비심을 보호하는 바깥의 테두리다.
전투는 누구하고 하는가? 마구니하고 한다. 항마라는 표현도 있다.
마구니를 이기려면 갑옷을 입고 있어야 되지 않겠나.
마구니를 처부수려면 뭐가 있어야 되는가?
무기가 있어야 되는데, 욕설하고 총쏘고 활 쏘고 미사일 쏘면서 무기를 쓰는 게 아니다.
‘미소 땅기소’ 미소를 가지고 한다
발은 나아간다 진취한다.
손은 자유, 자재하다.
얼핏 보면 새끼손가락하고 엄지손가락이 다른 것 같지만 화엄경을 한참 보다 보면 한 손에 같이 붙어 있다. 주먹이냐 손바닥이냐 손가락이냐, 그러나 그것은 손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일심(一心)밖을 벗어날 수가 없다. 어떤 생각이 선명하게 벌어진다 하더라도 가는 거냐 굵은 거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마음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진여라고 한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 하는데 그 법성이 말로 표현될 수 없으니까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라.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그 법성을 알겠느냐?”
“이해 안 갑니다.”
“그럼 이름 하나 지어줄게.진성이라고 한다.”
그것을 진성심심극미묘,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데 굳이 붙이자면 자성이라 하겠다. 또 진성이라 하겠다. 각성이라 하겠다. 불성이라 하겠다. 법성이라 하겠다. 불성이나 자성이나 본성이나 다 똑같은 말이잖은가.
이와 같이 이름이 없지만 가르치려고, 전하려고 하니까 그렇게 했다.
생멸에는 이름이 필요하다.
불생불멸에는 이름이 필요 없다.
우리는 생멸을 살기 때문에 주민등록 번호도 필요 있고 전화번호도 필요하다. 이게 다 생멸법이고, 생멸은 시종(始終)이 있고 시리얼 넘버가 있다.
생멸을 떠난 상태, 여기 십지품에서 손이다 발이다 이렇게 나오면 그게 인연생멸의 연기를 쫙 설명하는 것 같지만, 종래는 본래무일물 쪽으로 자꾸 이렇게 당긴다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지 오늘은 부동지를 공부한다.
부동지를 색자재지(色自在地)라고 한다. 또 다른 말로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불생불멸의 씨앗이 여기서는 무분별심이라고 이야기한다.
분별심이 끊어지면 사람의 상태는 어떠냐?
화엄경을 빌리자면 분별심이 완전히 끊어져서, 끊어지기 시작해서 치료가 되기 시작해서 완전히 아물어서 핵이 빠져 버린 상태, 다시 재발할 가능성이 없는데 아직 조금 더 치료는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러면 무생법인이지 않은가?
무생법인은 무분별심이라고 하는데 거기 오기 직전, 부동지로 가기 직전까지가 아까 발과 손을 이야기해 놓았다.
서장에 보면 대혜 종고스님이 ‘칠지보살이 무생법인을 얻는다는 대목에서 활연대오했다’라고 해놨다.
화두선을 주창했던 대혜 종고스님이 화엄경 십지품 37권 그부분에서 확철대오 했다.
‘호구사에서 열화엄이라다가 칠지보살이 무생법인을 얻는다는 대목에서 아흔아홉 명을 죽인 살인마 앙굴리마라가 발우를 들고 가서 새로 태어나는 생명, 산모에게 간 그 화두를 해결해 버렸다’ 하는 대목이 서장 행장에 나온다.
그러면 제 7지에 가서는 어떻다고 했는가?
글을 읽고 쭉 넘어가면 그냥 넘어가도 괜찮은데, 경전해석은 어떻게든 하겠지만, 제 깜냥으로 해석하는 건 아니다.
서장이나 화엄경에 근거를 대서 옛 분들, 눈 밝은 분들이 본 것에 대해서 한번 되짚어 보는 것, 되새김질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7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화내는 것이 없는 줄 알지만 일부러 중생을 제도하게 화를 내고, 욕심을 다 떠났지만 일부러 욕심을 낸다, 그런 대목들이 쭉 나온다.
본래는 장엄할 것도 없지만 최대한 장엄한다. 그러니까 남에게 줄 때는 정성을 다 바쳐서 그 사람 근기에 맞춰서 주는 것이 7지 보살의 나타난 바 특색이다.
완전히 분별심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걸 기신론 같은 데는 분별사식이라 그런다. 안쪽으로 내재되어 있는 분별사식이 바깥으로 뾰족이 돋아 나온 것을 분별심이라고 한다. 그 자라난 분별심을 생기식이라고 한다.
그것을 원효스님은 식온(識蘊)이라고 하였다.
고락이 처음에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 식온이다. 그 고락을 수고한다, 고생한다 이러면 식온이다.
고수 락수로 그 수고한다는 느낌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수온(受蘊)이다.
이것을 상상적으로 이미지화시키는 것은 상온(想蘊)이라고 한다. 뱀에 물리지도 않았는데 ‘으흐흐’ 깜짝깜짝 놀란다. 있지도 않은데 상상적으로 상온으로 갔다가 동시에 일어나지만, 행온(行蘊)으로 가면 행위동작으로 구체적인 업을 짓는다. 안으로 독한 마음이 생기든지, 착한 마음이 생기든지 한다.
이것이 식수상행 마지막에 색이잖은가.
색이면 겁나서 눈물이 뚝 떨어진다든지, 좋아서 웃음소리가 터져버린다든지,색성향미촉법으로써 반드시 색온의 경계가 현상으로 나타나면 그걸 색온(色蘊)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은 한꺼번에 너무 빨라서 나눌 수는 없는데 슬로비디오처럼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이 대목은 그런 오온이 공한 것이 다 끝나고, 그다음에 안쪽에 아집이 끝나고, 그 안쪽 아집 바깥으로 나와 있던 생기식이 끝나고, 분별사식도 끝나고, 그다음에 부동지라 하는 것이다. ‘아, 이래서 분별심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부동지’라고 하는 것이다.
왜 부동지냐? 부동이 바로 무생이다.
무생(無生) 무생법인이기 때문에 부동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생법인이라 하기도 하고 이때부터 응무소주이생기심처럼 무공용지라. 내가 해도 생색내는 바가 없다. 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 보시한다.
금강경에는 이렇게 나온다.
어떤 사람이 여인심주어법(如人心住於法)하면 그 사람이 심(心) 마음을 주(住) 머무른다. 주착한다. 어법(於法)이라 어떤 일체법에 대해서 마음을 머무르면 여인입암(如人入暗)에 캄캄한 밤중에 들어서, 즉무소견(卽無所見)이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분별심을 가지고는 이 세상의 마음을 아무것도 못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주어법이라. 법에 부주, 무주, 응무소주 머무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느냐? 여인유목(如人有目)에 눈이 있는 사람이 바깥에 일광명조(日光明照)하야 눈이 있는 사람이 태양이 환하게 비췄으니 어떤가? 견종종색(見種種色)이다.
‘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환하게 보고, 미세한 것까지 허공까지도 보고, 안 보이는 것까지도 보는구나’
본다는 것은 안다고 하는 것, 지견이다. 여실지, 여실견. 그것이 어느 정도 여기 온 것이 부동지라고 보면 되겠다.
부동지는 안 보이는 마음이다.
안 보이는 마음이 처음 시작되는 것은 원행지부터다.
앞에 나왔던 원행지부터 안 보이는 마음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 너무 집착하니까 ‘그런 거 아니야. 보지 마.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하는 게 분별식을 끄라는 얘기 아닌가.
원리전도몽상하라고 하는데, 그게 원리, 원행지잖은가.
그 뒤로 전도몽상 완전히 떠나가 버리고 나면, 부처님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해서 구경열반, 불생불멸이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다. 불생불멸의 시작이 부동지다,
부동지에 오니까 뭐가 있는가?
복(腹)이 있다. 배가 있으면 배 속에는 뭐가 있겠는가? 오장육부가 있다. 오장육부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게 심장이다. 경전은 이런 식으로 착착착 되어 있다.
이야기인즉슨 경전은 그렇게 치밀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판알처럼 카운팅이 정확하다.
모르는 놈은, 놈이라고 해서 이상하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영리한 사람은 금방 알아먹는다.
한번 보자.
여기서 배라고 이야기했을 때는 손발이 어느 정도 해결된 사람들은 그 자유자재 진취성이 있다.
성숙이 되고, 어느 정도 성장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배가 있는데 그 배 안에는 뭐가 있겠는가?
안쪽에 마음에 굳이 해체하지 않더라도 내덕을 가지고 있다. 안에서 저 사람의 인격 자체가 풍겨져 나온다.
냄새나는 것을 막 거둬내 버렸잖은가.
속에 쓰레기통 같은 분별식을 싹 거둬내고 싹 세척해 놓았다. 아집이 쑥 빠져 버리고 나니까, 배 안에서 공덕이 쌓여 있다. 이런 뜻으로 배를 써놓은 것이다.
너무 막 저 혼자만 좋아해서 죄송하다.
그런데 제 거라고 이렇게 주장해 버리면 여러분들이 별로이시겠지만, 저는 주장할 수도 없고, 청량국사나 현수스님이 이 대목을 그런 식으로 다 해석을 해놨다. 우리는 그런 분들의 고견을 따라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가 했으면 더 좋겠지만, 저는 소개시켜 드리는 것뿐이다.
(8)不動地
가. 菩薩의 十種腹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腹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離諂曲腹이니 心淸淨故며 離幻僞腹이니 性質直故며 不虛假腹이니 無險詖故며 無欺奪腹이니 於一切物에無所貪故며斷煩惱腹이니 具智慧故며淸淨心腹이니 離諸惡故며觀察飮食腹이니 念如實法故며觀察無作腹이니 覺悟緣起故며覺悟一切出離道腹이니 善成熟深心故며遠離一切邊見垢腹이니 令一切衆生으로 得入佛腹故라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如來無上廣大腹하야 悉能容受一切衆生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배[腹]가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아첨을 여읜 배니, 마음이 청정한 연고며, 거짓을 여읜 배니 성품이 순진하고 정직한 연고며, 헛되지 않은 배니 험하고 치우침이 없는 연고이니라.
속이고 빼앗음이 없는 배니 모든 물건에 탐욕이 없는 연고며, 번뇌가 끊어진 배니 지혜를 갖춘 연고며, 깨끗한 마음을 가진 배니 모든 악을 여읜 연고며, 음식을 잘 살펴보는 배니 실다운 법을 생각하는 연고이니라.
지음이 없음을 관찰하는 배니, 인연으로 일어남을 깨닫는 연고며, 모든 벗어나는 길을 깨달은 배니 깊은 마음을 잘 성숙한 연고며, 모든 치우친 소견의 때를 멀리 여의는 배니 일체중생을 부처님의 배에 들게 하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없는 광대한 배를 얻어 일체 중생을 모두 용납하여 받아들이느니라.”
*
부동지(不動地)
*
보살(菩薩)의 십종복(十種腹)
*
불자(佛子)야 :불자여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복(有十種腹)하니 :열 가지 배가 있으니
하등(何等)이 : 어떠한 것이
위십(爲十)고 : 열 가지냐
소위이첨곡복(所謂離諂曲腹)이니: 소위 말하자면. 8지 중에는 배가 있다. 그다음에 오장육부가 있다.
또 뭔가? 심장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오장육부 중에서 심장이 제일 중요하잖은가.
심장이 제일 중요하다.
눈동자 속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안에서 각막같이 중요한 게 있잖은가. 다 인연이 합쳐야 되지만, 그중에 중요한 게 있다. 사람 몸도 다 중요하지만 숨을 딱 막아보면, 코 막으면 죽어버린다. 숨은 이 몸에 있지도 않은 것이 코 막으면 죽어버린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가?
‘아, 이래서 우리가 지심귀명례 하는구나’ 원효스님이 기신론에서 그렇게 했다.
육근 중에서 육근이 다 달라붙어 있는데, 최고 중요한 게 명근(命根)이다. 목숨 명자 있잖은가? 명근이기 때문에 지심귀명례라 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내덕이 원만해서 안에 복장이 양심이 아주 탄탄한 걸 의미한다.
양심이 탄탄해지고 안에 보배가 가득 들어있다.
‘저놈은 속이 아주 시커멓다’ 하는 것 있잖은가?
그런 소리는 화엄경을 많이 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인가 보다.
우리는 속에 지금 황금덩어리가 찬란하다.
육문상방(六門常放)이다. 아, 그럼 좀 있다가 안이비설신의가 다 나오겠네.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 나올 것이다. 안 그렇겠는가?
머리 나오고 그다음에 눈 나오고 뒤에 안이비설신의가 싹 다 나온다. 그다음에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다 나온다.
안에 꽉 차 있으니까 바깥에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아, 잠념 없는 사람은 눈으로 귀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이 전부 불보살처럼 보고 듣고 할 수가 있겠구나’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아미타불 어디 계시더냐? 염도염궁무념처에 계신다.
‘아, 무념, 무념무상절일체 아, 그게 궁좌실제중도상 아, 그렇게 되는구나’
이첨곡복(離諂曲腹)이라. 아첨하고 얍삽하게 똥파리 손 빌듯이 그렇게 간사하게 왜곡되고 진실이 없는 사람들 그런 배를 떠나 버렸다. 아첨과 굽은 짓을 여의는 배니, 악한 짓은 안 한다는 것이다.
심청정고(心淸淨故)며: 마음이 청정한 연고다. 아첨을 잘하는 사람은 남을 잘 홀린다.
그래서 마음이 직선적이지 못하고 딱 남을 유혹하는 마음은 정직하지 못하다. 애교를 떨면서 ‘아아, 안녕하세요’ 이런 사람들이 전부 다 여기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이환위복(離幻僞腹)이니 : 헛것, 거짓된 것, 환술 같고 거짓된 것을 여의는 배니
성질직고(性質直故)며: 성품이 아주 바탕이 근본적으로 곧은 연고이고
불허가복(不虛假腹)이니: 헛되지 않은 배이니
무험피고(無險詖故)며: 남을 험담하고 쥐어뜯고 이런 험피가 없는 까닭이다. 모든 악한 것을 다 떠났다는 말이다.
무기탈복(無欺奪腹)이니 : 속이고 빼앗고 남을 기만하고 빼앗고 침탈하는 것이 없는 배다.
어일체물(於一切物)에: 일체 모든 물건에
무소탐고(無所貪故)며 : 탐욕이 없는 까닭이고
단번뇌복(斷煩惱腹)이니 : 단번뇌복이라. 무(無)자로 하다가 이(離)자로 하다가 여기는 단(斷)자로 한다. 다 똑같은 뜻인데 단어의 반복을 피하려고 무자로 쓰기도 하고 끊을 단자로 쓰기도 하고 여읠 이자로 쓰기도 한다.
번뇌가 끊어진 배이니
구지혜고(具智慧故)며: 지혜를 갖춘 까닭이며
청정심복(淸淨心腹)이니: 청정한 복이니
이제악고(離諸惡故)며: 모든 악한 것을 떠난 까닭이다.
관찰음식복(觀察飮食腹)이니:그래서 천친보살이 이렇게 해놨다. 불신(不信) 믿음이 별로 없는 사람은 어떠냐? 지저분한 것, 잡예(雜穢)로써 그 성질을 삼는다. 성질머리가 어떠냐? 잡예다. 지저분하다는 것이다. 옷에 똥이 묻어 있다.
그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냐? 공덕을 귀하게 여긴다. 이렇게 해놨다.
공덕을 귀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관찰음식복이라. 음식을 잘 살펴보는 고이니, 음식이 정말 귀하고도 귀하잖은가.
염여실법고(念如實法故)며: 진실한 법을 생각하는 까닭이라
음식이 정말 사람을 살리잖는가. 만 중생을 살린다. 그걸 잘 관찰한다. 실다운 법을 생각하는 연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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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무작복(觀察無作腹)이니:관찰무작복이라. 음식도 그렇고 이렇게 지음이 없음을 관찰하는 바이니.
무작이라는 말은 많이 쓰는 말이다.
무작이라고도 하고 무주라고도 하고 그렇게 많이 쓴다.
지음이 없음을 관찰하는 배이니
각오연기고(覺悟緣起故)며: 인연으로 일어남을 깨닫는 바다.
각오일체출리도복(覺悟一切出離道腹)이니: 일체 벗어나는 길을 깨달은 배이니
선성숙심심고(善成熟深心故)며: 깊은 마음을 잘 성숙한 까닭이다. 그러니까 깊은 마음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마명스님의 기신론에 이렇게 해놨다.
직심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곧은 마음은 많이 들어봤는데 무엇인가? 진여법을 생각하는 것을 직심이라고 한다.
그러면 직심이 온 뒤에 깊은 마음, 심심(深心)이 되는데, 깊은 마음은 무엇인가? 선을 잘 닦는 것을 깊은 마음이라고 한다. 쉽게 이야기하자.
기신론 본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깊은 마음이 되고 나면 광대심 넓은 마음, 대자대비한 마음이 된다고 하는데 넓은 마음이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
넓은 마음은 악을 다 끊는 것이다.
아, 중선봉행 제악막작이 신심이다.
신심이 성취되고 나면 진여를 생각하면서 중선봉행(衆善奉行) 제악막작(諸惡莫作)이 된다.
기신론 신성취발심(信成就發心)에 나오는 대목이잖은가.
지금 요런 데, 마음이 깊어진다든지, 아까 곧아진다든지 하는 것 있잖은가.
그렇게 해서 감산 덕청스님이 기신론이야말로 화엄경을 여는 관문이다, 열쇠다, 라고 해놓았다.
그 대도인들이 그냥 써 놨겠는가?
저는 그 얘기를 듣고 난 뒤에는 하나하나 기신론과 화엄경이 연관된다. 화엄경을 읽다보면 기신론이 생각나고 기신론 읽다 보면 화엄경이 생각난다.
그런데 화엄경 읽어도 기신론 생각 안 나고, 기신론 읽어도 화엄경 생각 안 나는 사람들이 있다.
화엄경을 쭉 다 아는 사람이 약찬게를 한번 쭉 읽으면 80권 화엄경이 포도송이처럼 뭉텅이 뭉텅이 생각난다.
그런데 화엄경을 전혀 모르고 약찬게만 외우는 사람은 철사줄 같아서 아무것도 없다.
전기를 켜려면 볼트가 맞아야 한다. 여긴 220V 아닌가?
건전지 몇 개 갖다 대놓고 불 켜려고 하면 난감한 것이다.
반대로 건전지를 가지고 켜야 될 조그만 후레쉬 같은 것에 220V를 꽂으면 어떤가. 전기다마가 터져버린다.
우리가 지금 그런 꼴이 난 것 같다.
원리일체변견구복(遠離一切邊見垢腹)이니: 치우친 변의 때를 멀리 여의는 것이니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중생으로 하여금
득입불복고(得入佛腹故)라: 부처님의 배에, 부처님 불복에, 아이고 참 좋다. 득입불복고라. 부처님의 배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라.
그 새까만 중생, 불도 안 들어오는 중생들한테, 다 환하게 눈을 밝혀준다는 말이다.
*
시위십(是爲十)이니: 위십이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약에 이러한 보살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이 법에 머물면
즉득여래무상광대복(則得如來無上廣大腹)하야:여래의 위없는 광대한 배를 얻어서
실능용수일체중생(悉能容受一切衆生)이니라 : 일체중생을 용납한다.
‘아, 배라고 하는 것이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는 것을 배라고 하는구나’ 이 음식 저 음식 다 포용하고 수용하는 것을 배라고 한다. 배포가 큰 것, 마지막 결론을 부처님이라고 했다.
‘아, 이 배가 바로 흔히 우리가 얘기하는 모든 강물을 수용하는 저 바다와 같구나’
나. 菩薩의 十種藏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藏하니 何等이 爲十고所謂不斷佛種이是菩薩藏이니 開示佛法無量威德故며增長法種이是菩薩藏이니 出生智慧廣大光明故며住持僧種이是菩薩藏이니 令其得入不退法輪故며 覺悟正定衆生이 是菩薩藏이니 善隨其時하야 不踰一念故며究竟成熟不定衆生이是菩薩藏이니 令因相續하야 無有間斷故며 爲邪定衆生하야 發起大悲가是菩薩藏이니令未來因으로 悉得成就故며 滿佛十力不可壞因이 是菩薩藏이니 具降伏魔軍無對善根故며 最勝無畏大獅子吼가 是菩薩藏이니 令一切衆生으로 皆歡喜故며 得佛十八不共法이 是菩薩藏이니 智慧普入一切處故며 普了知一切衆生一切刹一切法一切佛이 是菩薩藏이니 於一念中에 悉明見故라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如來無上善根不可壞大智慧藏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창고가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부처님의 종자를 끊지 않음이 보살의 창고이니 불법의 한량없는 위엄과 공덕을 열어 보이는 연고며, 법의 종자를 증장함이 보살의 창고이니 지혜의 광대한 광명을 내는 연고며, 승가의 종자를 머물러 유지함이 보살의 창고이니 그들로 하여금 물러나지 않는 법륜에 들게 하는 연고이니라.
바로 결정된 중생을 깨닫게 함이 보살의 창고이니 그 때를 잘 따라 한 생각도 넘기지 않는 연고며, 결정되지 못한 중생을 끝까지 성숙케 함이 보살의 창고이니, 원인이 서로 계속하여 끊이지 않게 하는 연고며, 잘못 결정된 중생을 위하여 크게 가엾이 여김을 일으킴이 보살의 창고이니 미래의 원인을 다 성숙케 하는 연고이니라.
부처님의 열 가지 힘인 깨뜨릴 수 없는 원인을 만족함이 보살의 창고이니 마(魔)의 군대를 항복받는 상대가 없는 선근을 갖춘 연고며, 가장 훌륭하여 두려움 없이 크게 사자후함이 보살의 창고이니 일체 중생을 모두 환희케 하는 연고이니라.
부처님의 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법을 얻음이 보살의 창고이니 지혜로 모든 곳에 널리 들어가는 연고며, 일체 중생과 일체 세계와 일체 법과 일체 부처님을 널리 아는 것이 보살의 창고이니, 잠깐 동안에 분명하게 다 보는 연고이니라. 이것이 열이니, 만일 모든 보살들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여래의 위없는 착한 뿌리의 깨뜨릴 수 없는 큰 지혜의 창고를 얻느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장(十種藏)
*
불자(佛子)야: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보살마하살이
유십종장(有十種藏)하니 :열 가지의 장이 있다. 우리가 흔히 따로따로 따지면 오장육부라고 한다. 오장 감출 장이다.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냐?
아까 나온 배는 총괄적인 이야기였다.
오장은 따로따로 세분화해서 설명을 한다.
혈관이라고 총체적으로 이야기하고, 동맥 정맥 모세혈관 이렇게 말할 수 있잖은가? 신경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렇게 된다. 경전은 거의 이렇게 프렉탈 구조로 되어 있다.
우리 손가락이 세 마디잖은가?
팔도 세 마디다. 몸도 목 허리 무릎 이렇게 세 마디, 이렇게 큰 거에서 하나 줄여서 세 개, 또 줄여서도 세 개 요렇게 요렇게 나가는 것을 프렉탈 구조라고 한다.
‘경전은 열 개 열 개 계속 이렇게 잡아 째서 설명을 하겠구나’ 짐작이 가잖는가.
열 개를 하다가 갑자기 두 개 하지는 않는다.
80권 화엄경을 보면 열 개 열 개 딱딱딱 해서 완전히 장엄해 놓았다. 그런데 60권 화엄경은 하다가 열한 개 됐다가 여섯 개 됐다가 일곱 개 됐다가 그렇게 60권 화엄경은 터덕거릴 때가 많다.
60권 화엄경은 산에서 송이를 채취해서 특별히 1등급 2등급 이렇게 분류를 안 하고 뭉쳐 놓은 것 같다.
80권 화엄경은 등급별로 딱딱 무게별로 체급별로 나눠 놓은 것 같다.
40권 화엄경은 특히 입법계품 같은 경우 보면 더 치밀해서 40권 화엄경에는 수를 놓은 것 같다.
60권 화엄경은 하얗고 깨끗한 천 고운 천과 같고, 80권 화엄경은 명주 같고 비단 같다. 그러면 40권 화엄경은 비단에다가 수를 놓은 것 같다.
더 정확하게 예를 들어서 가비라성에서 법문을 한다, 어느 선지식을 만날 때면 ‘가비라성 동쪽 몇 리에서 서쪽 강 언덕에서’ 이렇게 정확하게 실제 상황이 아닌데 확실히 사람들도 믿을 수 있게끔 ‘몇 리 앞에서’ 라고까지 한다.
특히 마야부인이 나올 때는 ‘가비라성에서 20리 떨어진 그곳에서’ 이렇게 장소까지 치밀하게 정리한다.
‘갠지스 강의 동쪽 강변에서, 서쪽 강변에서’ 이런 식으로 나온다.
40권 화엄경에 가면 더 치밀하게 ‘아, 정말 잘해놨다’ 싶을 때가 많다.
소위부단불종(所謂不斷佛種)이:부처의 종자를 끊지 않으니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 보살의 장이다. 부단불종이 보살의 장이니
개시불법무량위덕고(開示佛法無量威德故)며 : 이것은 불법의 무량한 위덕을 보이는 연고다.
불법에 한량없는 공덕을 그 보살장에 우리 금강장(金剛藏) 허공장(虛空藏) 무진장, 지장, 일장(日藏) 월장(月藏) 소리야장(蘇利耶藏) 구소마덕장(俱蘇摩德藏)이라 해서 전부 십지품안에 쫙 배워왔잖은가.
그럼 이 장자가 들어가는 것도 해장(海藏) 용장 전부 이런 것들이 부처님의 창고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보살장 이건 엄청난 것이다.
제일 냄새 나는 데는 신발장이다. 옷장 신발장 그것도 다 창고 장(藏)이잖은가.
증장법종(增長法種)이:법의 종자가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보살장이다.
불종, 법종, 그다음 뭐가 나오겠는가? 승종이 나올 것이다.
출생지혜광대광명고(出生智慧廣大光明故)며: 지혜의 광대한 광명을 내는 연고로
주지승종(住持僧種)이: 주지승종이, 이래서 경전은 약간만 눈을 뜨면 쉽다. 구구단만 다 외우면 곱하기는 어렵지 않다. 곱하기하는 사람에게 더하기 빼기는 식은 죽 먹기다.
평생 산수만 공부하다가는 거기에 머무르는 수가 있다. 조금씩 업그레이드해야 된다.
승종의 종자에 머물러 주지 유지하는 것이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보살장이다.
영기득입불퇴법륜고(令其得入不退法輪故)며: 그들로 하여금 물러나지 않는 법륜에 들게 하는 연고다.
*
각오정정중생(覺悟正定衆生)이: 정정중생 바로 결정된 중생을 정정취(正定聚)중생이라고 한다.
여기서 기신론을 약간 인용하겠다.
기신론에서는 중생을 세 가지로 크게 분류한다. 하나는 정정취(正定聚)라고 한다. 또 하나는 사정취(邪定聚) 이것은 아무리 가르쳐도 지옥 아귀 축생을 삼악도에 떨어질 중생들을 말한다.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중생들 악독한 사람들이다.
정정취 중생, 사정취 중생. 그럼 기신론 누구를 위해서 설해놨느냐? 부정취(不定聚) 중생을 위해 설했다.
잘 노력하면 정정취로 갈 수 있는 개연성이 있는데, 노력을 안하면 자칫 사정취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정해지지 않은 중생, 부정취 중생을 위해서, 이와 같이 부처님의 최고 논을 설하노라 이렇게 해놨다.
정정 중생, 바로 결정된 중생을 깨닫게 함이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 보살의 장이니
선수기시(善隨其時)하야: 그 때를 잘 알아서, 수기시하야
불유일념고(不踰一念故)며: 한 생각도 남기지 않는 연고다.
구경성숙부정중생(究竟成熟不定衆生)이: 부정취 중생을 끝까지 구경 성숙하는 것이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 보살장이다. 완벽하게 잘 성숙시킨다는 것이다.
매실청을 담글 때 설탕을 좀 적게 넣으면 부글부글 끓어서 망쳐버린다. 설탕을 많이 넣어야 된다.
젓갈 담글 때 새우젓갈이나 멸치젓갈 담글 때 소금 아낀다고 조금 넣었다가는 다 곯고 썩는다.
과일주를 담글 때 맥주로 담가 놓는다든지, 조금 시원찮고 도수 낮은 술로 과일주를 담그면 어떤가? 과일 자체가 익지를 못한다.
여기 구경성숙부정중생, 부정취 중생은 어떻게 해야되는가?
매어서 두들겨 패면서 공부시켜야 된다. 아주 독하게 시켜야 된다.
정정취 중생은 법을 가지고 다스려도 유연하게 잘 따라온다.
자동적으로 썩지 않는다.
잘 익은 홍시가 함부로 썩어서 문드러지지 않는다.
덜 익은 감은 떨어지면 금방 썩어버린다.
미성숙한 것은 그렇다. 이치가 다 그렇게 되어 있다.
밥도 여름밥을 할 때는 쿠쿠보살한테 43분 하는 게 좋다.
우리 공양주 보살이 쿠쿠보살이다.
43분 야무지게 해 놓으면 밥이 잘 쉬지 않는다.
그런데 29분짜리 밥을 하면 겨울에는 그렇게 해도 괜찮은데 여름에는 물내가 나서 찬밥은 쉬어버린다.
그러니까 밥을 할 때도 ‘아, 요거는 야무지게 해야 되겠다’
‘슬쩍 데쳐야 되겠다’ 콩나물을 삶는데 팍 삶아야지 시금치 청경채 숙주하듯이 그렇게 하면 콩나물은 비린내가 나고 안 삶긴다.
그러니까 부정취 중생, 콩나물 같은 중생은 팍 볶아서 공부시켜야 된다.
슬쩍 데쳐도 되는 중생들이 있는데 정정취 중생이다. 상추 같은 거는 안 데쳐도 괜찮다. 날 걸로 다 완제품이다. 그건 정정취다.
하도 안되니까 별 얘기를 다 한다.
살림, 조리라 한다.
우리가 어릴 때 참선할 때 스님에게 그렇게 배웠다.
‘말 적게 해라. 말을 조리 있게 해라’ 조리 있게 하라는 말은 말을 줄이라는 말이다.
‘예, 아니오’ 말고는 더 말하지 말라.
나머지는 다 시비다.
‘예, 아니요’ 정도만 해야지 ‘아 제 생각에는’ 그건 시비다.
말 조절하고 숨 조절하고 잠 조절하고 음식 조절하고 몸 조절해야 된다.
요게 조절이 안 된 사람은 참선할 수도 없고, 경전을 볼 수도 없다. 조리가 잘된 사람들은 이치를 잘 헤아리니까 요리도 잘한다. 요리조리 뺀질거리는 놈들 말고.
정정취 부정취.
경전을 읽다 보면 환희심이 난다.
특히 금강경도 신나지만 화엄경을 읽으면 왠지 행복한 느낌이 든다.
‘와, 레시피가 이렇게 잘 되어 있네’
마치 된장찌개 끓일 때 그 순서를 몇 초 몇 초 몇 초 탁탁탁탁탁탁 나눠 놓은 것처럼, 김장 담글 때 숨을 죽여가지고 건져가지고, 몇 시간 건지고 몇 시간 건지고 그런 것 있잖은가?
장 담글 때 그런 것처럼. 메주도 뻑뻑하고 물하고 섞이지도 않는 것을 칭칭 감아가지고 독 속에 넣어놓으면 나중에 된장이 우리처럼 보드리해진다. 보들스님이다.
푹 익은 사람들은 부드럽다.
글도 부드러워진다.
글을 읽는 게 내가 읽다가 뻑뻑하다 싶으면 공부 안 한 사람이다. 글이 재밌어진다.
‘이해가 안 간다’고 ‘이해가 안 간다’고, 뭐 어쩌라고?
악독해서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재밌다.
영인상속(令因相續)하야: 원인이 서로
무유간단고(無有間斷故)며:계속해서 끊이지 않는 연고며
위사정중생(爲邪定衆生)하야: 그다음 사정취 중생 아이고 읽기도 싫다.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린다. 사정취 중생.
원효스님이 그랬다.
도를 닦을 게 없지만 주산실자(住山室者)는 산에 사는 사람들은 중생이 제일이라. 모든 부처님이 그 사람한테 생환희심하고 설무도행(說無道行)이나, 주산실자는 중성(衆聖)이 시인에 생환희심(生歡喜心)하시고, 수유재지(雖有才智)나 비록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도읍가자(居邑家者)는 세속스럽게 사는 사람은 제불이 시인(是人)에 생비우심(生悲憂心)이라.
사정취 중생이 근심 걱정 많은 놈들이다.
잘못 결정된 중생을 위하여, 사정취, 사정(邪定) 잘못된 것이 결정됐다. 정정(正定) 올바른 게 결정됐다. 정정취,사정취.
대부분은 부정취 중생이다.
발기대비(發起大悲)가: 크게 가엾이 여기는 대비심을 일으키니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보살의 장이다.
못난 사람, 데바닫다 같은 사람한테도 자비심을 일으키는 것이 보살의 길이다. 그래서
영미래인(令未來因)으로: 장래의 원인을
실득성취고(悉得成就故)며: 다 성숙하게 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일천제(一闡提) 같은 사람들도 다 성불을 한다. 데바닫다도 성불시켜야 일승이다
*
만불십력불가괴인(滿佛十力不可壞因)이: 일곱 번째 부처님의 열 가지 힘, 불십력을 원만하게 해서 불가괴인이라. 깨뜨릴 수 없는 원인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보살의 장이니
구항복마군무대선근고(具降伏魔軍無對善根故)며:항복마군이라 마의 무리를 항복 받는 무대선근이라.
상대가 없는 선근을 갖춘 까닭이다.
진리는 상대가 없다. 무대(無對)라, 진리무대 진리는 무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진리는 상대가 있으면 안 된다.
진리는 무대(無對)다. 대도는 무문(無門)이다.
대매 법상선사가 많이 쓰던 말이다. 대도무문, 큰길에는 문이 없고 진리에는 상대가 없다. ‘대도무문, 진리무대’ 흔히 많이 쓰는 말씀이다.
최승무외대사자후(最勝無畏大獅子吼)가: 최승무외대사자후가, 가장 수승한 두려움이 없는 사자후,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대사자후, 두려움 없이 크게 사자후함이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 보살의 장이다.
왜 대사자후라 해놨을까? 확신이 있는 사람은 목소리가 크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아아, 그게요.” 대답을 잘 못 한다.
우리 어릴 때, 틀렸거나 말았거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가? “선생님 저요, 저요.” 고함 지르잖는가?
‘아, 저건 아는구나’ 그러면 선생님이 ‘쟤는 아니까’ 안 시킨다. 그래도 시켜달라고 “저요, 저요.” 막 손을 들었다.
“그럼 눈 새카만 니 해보라.” 이름을 모르니까, 눈 새카만 네가 해봐라 한다.
확신에 찬 사람은 저 안시켜줄까 싶어서 야단이잖은가.
우리가 학교 때, 시험 치면 어떤가? 시험 날이 다가오면 조마조마해서 간 떨어질 것 같은 사람도 있고, 빨리 시험 날짜가 와야 ‘내가 이걸 보여주고 백점 맞아가지고, 집에서 돈도 100원쯤 타야 되는데’ 하는 사람도 있다. 용돈 탈 일이 그날시험날이잖은가.
아직까지 스님들이 연세 많으신데 공부하시는 분들은 그때 아마 시험 날짜에 조마조마 하시지 않았을까?
저는 솔직하게 시험 날짜를 기다렸다.
‘빨리 시험을 쳐야지,시험을 쳐가지고’ 입만 떼면 거짓말한다.
그래도 스님들이 제 과거를 알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니까.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일체중생들로 하여금
개환희고(皆歡喜故)며: 환희하게 하는 까닭이다. 자기가 기쁜데 남도 기쁘게 하는 까닭이다.
부처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법문, 그 음성을 사자후라 하지 않는가. 부처님 가슴을 사자억(獅子臆)이라고 한다.
떡 벌어진 사자 가슴, 새가슴이 아니고 사자 가슴은 딱 벌어지고 단단한 가슴이다.
*
득불십팔불공법(得佛十八不共法)이: 부처님의 18가지 함께 하지 않는, 중생하고는 조금 색깔이 다른, 부처님에게는 도저히 중생으로서는 낼 수 없는 색깔이 있다. 아무리 재주를 피워도 낼 수 없는 부처님의 색깔, 광명이 있다. 중생의 재료 가지고는 안되는 것이다.
완전히 대자대비심의 솜씨에서 우러나오는 것, 아주 1등 미쉐린 별 세 개쯤 되는 셰프가 만든 음식, 솜씨 있잖은가?
그건 레시피에 들어 있는 게 아니다.
똑같은 레시피 책을 본다 하더라도 그 차이는 솜씨에 있는 것이라서 다르다.
참선에서 깨닫고 경전 보고 알고 이런 거는 똑같이 봤는데 왜 아는 사람은 알고, 응무소주이생기심에 6조는 왜 깨쳤느냐? 6조는 이미 마음 쓰는 쪼가리가 우리하고 다르다.
제가 한 번씩 그렇게 자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만 기신론을 만 번 보고 또 안 되니까 만 번을 더 봐서 2만 번 봤다고 했잖은가. 지금도 모른다. 깜깜하다.
원효는 한 번도 안 보고도 알아버린다.
변재를 얻고 부처님 같은 입장에서는 한 번도 안 보고 생전 처음 보는 것도 ‘이것이 무엇인가’ 설명할 수 있어야 그게 변재다.
완전히 솜씨가 익어졌을 때 거기서 묘기가 나온다.
묘기, 묘술이 나온다.
배우는 데도 안 되는 것이다.
배워도 칼질하다가 칼질 아니고 셰프가 내 손가락 잘라버리고 그렇게 하잖는가. 아유 답답해라. 흔히 자기 눈 자기가 찔렀다 그러잖는가.
부처님이 18가지 함께하지 않는 법을 얻으니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 : 보살의 장이다.
지혜보입일체처고(智慧普入一切處故)며: 지혜로 모든 곳에 널리 들어가는 연고다.
보요지일체중생일체찰일체법일체불(普了知一切衆生一切刹一切法一切佛)이: 일체중생, 일체찰, 일체법, 일체불, ‘아, 이쯤 되니까 싹 다 나오는 것 보니 마칠 때쯤 되었는가’ 싶다.
이것이 열 번째잖은가.
일체중생, 일체세계, 일체법, 일체부처님을 두루 아는 것이
시보살장(是菩薩藏)이니: 보살의 지혜이다.
이것을 흔히 구경원성살바야(究竟圓成薩婆若)라고 한다. 일체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일체중생을 알고 일체세계를 알고 일체법을 알고 일체부처님을 아는 건 뭔가?
제일 험한 거부터 제일 귀한 것까지 싹 다 아는 게 허공이다.
다 포용할 수 있는 것, 일체지, 그것이 보살의 장이니 경전에는 이렇게 치밀하게 잘 써놨다.
어일념중(於一念中)에: 잠깐동안에
실명견고(悉明見故)라: 분명하게 다 보는 연고이니라.
시위십(是爲十)이니: 이것이 열 가지니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일 보살들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즉득여래무상선근불가괴대지혜장(則得如來無上善根不可壞大智慧藏)이니라 : 여래의 위없는 선근을 깨뜨릴 수 없는 큰 지혜장, 대지혜장, 보리생 큰 지혜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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