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언어예술이다. 당연한 얘기 아니냐고? 문학이 음악이나 미술과 다른 점은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음악의 재료인 소리와 미술의 재료인 이미지가 인류 보편적이기에 음악과 미술은 국경 밖으로 쉽게 전파되지만 문학은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한다. 번역의 도움 없이는.
부커상 재단이 외국 소설을 대상으로 맨부커 국제상을 제정하면서 작가와 번역가에게 공동 시상하고 상금도 절반씩 지급하는 것에서 보듯 번역은 창작 못지않게 중요한 작업이다. 그래서 2016년 맨부커 국제상 수상작은 한강이 쓴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한강이 쓰고 데버러 스미스가 번역한 《The Vegetarian》이다. 한술 더 떠서 데버러 스미스가 《The Vegetarian》의 저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The Vegetarian》을 감명 깊게 읽은 영국 독자는 스미스의 차기 번역작을 찾아 읽을까, 한강의 차기작을 찾아 읽을까? 대부분은 한강의 책을 읽을 것이고, 일부는 한강이 쓰고 스미스가 번역한 책을 읽을 것이다. 스미스를 ‘믿고 읽는 번역가’ 명단에 넣은 몇몇은 스미스가 번역한 책을 읽을지도 모르지만.
번역은 텍스트에서 출발하지만 텍스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한다. 번역이란,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상태,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존재할 뿐인 무정형의 상태에 언어의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작가를 일종의 번역가로 볼 수도 있고 번역가를 일종의 작가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아직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어떤 플롯을 한강은 한국어로 번역했고 스미스는 영어로 번역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플롯의 저자는 물론 한강이다. 이렇게 어느 시점부터 작가와 번역가는 대등한 존재가 된다.
스미스의 번역은 내용을 크게 누락하지 않으면서도 원문에 종속되지 않은 점이 돋보인다. 한국어의 문장 구조를 그대로 영어에 대입하면 흐름이 끊기고 리듬이 어긋나기 마련인데, 영어로만 놓고 보아도 짜임새가 훌륭하다. 문학 번역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원작의 ‘가치’를 얼마나 제대로 번역해내느냐다. 이 점에서 《The Vegetarian》은 《채식주의자》가 한국어로 거둔 문학적 성취를 영어로 엇비슷하게 이루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스미스는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한국 문학을 영국 문학으로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1968년에 《설국》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수상 기자회견에서 상의 절반이 번역자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몫이라며 상금도 그와 반으로 나눴다. 사이덴스티커도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원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의역을 시도했다. 《설국》은 “작품으로서 너무 약하기 때문에 번역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사이덴 스티커는 “번역 불가능한 것도 번역해야 합니다. 번역하는 것은 번역하지 않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죠”라며 과감하게 도전했다. 성혜경의 논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번역》에 따르면 사이덴스티커는 의미를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원서의 문학적 가치를 유지하고자 했다.
번역은 문학을 향유하는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동양 최초의 번역가는 인도의 불경을 한문으로 옮긴 승려들이다. 경·율·논의 삼장에 통달하거나 이를 번역한 승려를 ‘삼장법사’라 하는데 구자국 출신으로 후진 시대에 활약한 쿠마라지바와 당 시대의 현장이 이에 속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동아시아 불교가 독특하고 심오하게 발전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전파는 자국어 성경의 전파와 함께 이루어졌다. 구한말의 선교사 제임스 게일은 성경과 《천로 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춘향전》과 《구운몽》 등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그가 엮은 한영사전인 《한영자전》은 영어 교육 및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의 근대 문학도 번역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식민지 시기 조선의 문인들은 외국 문학을 번역 소개하면서 이렇게 취지를 밝혔다. “무릇 新文學[신문학]의 창설은 外國 文學[외국 문학] 수입으로 그 기록을 비롯한다. 우리가 외국 문학을 연구하는 것은 決(결)코 외국 문학 연구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오 첫재에 우리 문학의 건설, 둘재로 세계 문학의 互相[호상] 범위를 넓히는 데 있다.” 그렇다면 번역된 외국 문학 또한 한국 문학의 역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할 것이다.
좋은 번역은 자국어의 지평을 넓힌다. 사람들은 번역 투가 우리말을 오염시킨다고 생각하지만, 언어는 번역을 통해 다른 언어와 접촉하며 끊임없이 발전한다. 기존의 한국어 어법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을 만났을 때 번역가는 한국어의 틀을 뛰어넘어 새로운 표현 방식을 모색한다.
물론 한국어의 가능성을 탐색하지 않고서 안이하게 외국어의 어법을 흉내 내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어도 한문과 일본어의 영향을 받으며 진화한 결과다. 번역 투를 새로운 문체의 실험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영어로 썼다가 다시 일본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하루키가 일본어의 틀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문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번역 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 작가들이 번역 투를 많이 쓰면 번역 가능성이 커지는 부수 효과가 일어난다. 이것은 작가들이 외국어의 틀로 생각하고 외국어로 표현할 수 있는 테두리 안에서 표현한다는 뜻도 된다. 이렇게 쓴 훌륭한 소설은 번역해도 훌륭한 소설일 가능성이 있다.
좋은 번역이란 어떤 번역일까? 저자의 의도를 고스란히 전달하면 좋은 번역일까? 술술 읽히는 것이 좋은 번역일까? 본국에서 인기 없던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면 좋은 번역일까? 함량 미달의 소설을 근사한 미문으로 포장하는 것이 좋은 번역일까? 물론 정답은 없다. 어떤 독자를 염두에 두느냐에 따라, 어떤 경험을 독자에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번역의 방향이 전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처럼 본국인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훨씬 인기를 끄는 작품이 있는데, 이것은 번역의 힘일 수도 있고 그의 소설이 한국 독자와 궁합이 잘 맞아서일 수도 있다.
반대로 외국에서 걸작으로 인정받던 소설이 한국에서 혹평을 받는다면, 또는 독자가 그런 소설을 읽고 실망했다면 이 또한 번역 때문일 수도 있고 소설 자체가 한국어로는 표현하기에 알맞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김종철이 <한겨레신문>과 나눈 인터뷰에 따르면 일본 문학에서 손꼽히는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를 영어판으로만 읽은 미국인 일반 독자들은 그가 왜 ‘문호’로 평가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걸작인 원작이 번역서로서도 걸작일 수 있으려면 국경을 초월하는 호소력을 지녔든지 걸출한 번역가를 만나야 할 것이다.
세계 문학은 번역을 통해서만 성립될 수 있다. 모든 언어의 작품을 원어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디스 그로스먼의 《번역 예찬》에 따르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윌리엄 포크너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그때 이미 그 소설가의 솜씨를 배우는 데 필요한 모든 책을 번역본으로 빌려서 읽었다. … 윌리엄 포크너는 나를 가르치는 가장 충실한 수호천사였다.”
그 밖에도 카를로스 푸엔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비롯한 많은 중남미 소설가들이 포크너의 영향을 받았으며 토니 모리슨, 살만 루슈디, 돈 드릴로, 마이클 샤본에게서는 마르케스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번역이 아니었다면 이 소설가들이 국경을 넘어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을까? 소설가에게는 국적이 있을지 모르지만 소설은 국적이 없다. 한국 소설이나 외국 소설이나 똑같이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시 《The Vegetarian》을 생각한다. 한국어를 배운 지 7년밖에 안된 외국인이 한국어라는 까다로운 언어를 어떻게 독해하고 풀어냈을까? 게다가 쓸 만한 한영사전과 한국어 관용어 사전이 없는 처지에서-이를테면 ‘안방’을 ‘Main Room’으로 풀이한 사전도 있고 ‘Living Room’으로 풀이한 사전도 있는데, 전자는 문학어로 쓰기에 부적절하고 후자는 의미가 다르다-원문의 뉘앙스를 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소설이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도록 하기위해 해야 할 일은 훌륭한 한영사전과 관용어 사전을 만드는 것 그리고 한국 소설을 사랑하고 역량을 갖춘 번역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한국은 번역 대국이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에 따르면 2015년에 출간된 신간 서적 중에서 번역서가 21.5%를 차지할 정도다. 하지만 ‘번역되는’ 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경험이다. 외국 저자를 이해하고 싶을 때의 번역관은 외국 독자를 이해시키고 싶을 때의 번역관과 다를 수밖에 없다. 독자가 있기에 책이 존재한다는 것, 책은 소통하기 위해 쓰인다는 것이야말로 이번에 우리가 새롭게 배운 교훈일 것이다. – 노승영(번역가)
한강의 작품들
한강은 1993년 시인으로 등단했고, 이듬해 《붉은 닻》이 서울신문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소설가가 됐다. 한강의 최근작인 소설 《흰》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소설가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다는 의미심장한 사실에 자꾸 마음이 간다. 《흰》은 흰 것 65개의 목록을 뽑고 이미 죽은 한 여자의 상상 속의 삶을 그려낸다. 이 작품 속 그의 문장은 단단하고, 오래 매만져 생긴 윤기가 난다. 그러면서도 촉촉하다. 그가 천착해온 주제인 고통과 그에 대한 연민 그리고 애도에서 우러난 습기다. 그는 단편과 중·단편, 장편소설 외에도 동화와 산문집, 시집을 냈다. 그중 꼭 읽어야 할 것을 꼽는다면 우선 《몽고반점》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2005년 심사위원 7인의 만장일치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이 소설은 한강의 작품 세계를 가늠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채식주의자》 《나무 불꽃》과 함께 연작소설로 완성되어 이번에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에 대해 “우리가 폭력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세계를 견뎌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소년이 온다》 또한 폭력이 주제다.그것도 아주 강력한 폭력,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다. 이 소설 또한 같은 번역가에 의해 해외에 소개돼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다룬 소설”이라는 평을 받았다. 거대한 국가적 폭력 아래 놓인 개인의 고통에 천착한 이 소설에는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광주라는 도시에 대한 작가의 애착이 깔려 있다. 그의 작품은 “상처를 응시하는 담담한 시선과 탄탄한 서사, 삶의 비극성에 대한 집요한 탐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채식주의자》의 모태가 된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 《여수의 사랑》 《희랍어 시간》 《검은 사슴》 《바람이 분다, 가라》등의 소설 외에, 시집으로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가 있다. 노래에 담긴 기억을 돌아보는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에는 CD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그가 직접 만들고 부른 노래가 담겨 있다. – 박사 (북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