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 있는 백산 안희제 생가
백산 안희제 생가(뒤)와 사랑채(앞).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그는 무역상이 되었다 번 돈은 상해로 보내져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다
교육·언론 등 수많은 분야서 항일투쟁을 하던 그는 1942년 체포돼 이듬해 59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 있는 백산 안희제 생가.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는 의령 사람이다. 백범 김구, 백암 박은식과 더불어 삼백(三白)으로 불리던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다. 국사시험에 하도 잘 나왔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백산상회 안희제’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일요일 오전, 백산 안희제 생가를 찾아 나는 의령으로 길을 나섰다. 의령(宜寧)- 한자의 뜻을 풀어보면 의령은 말 그대로 ‘마땅히 편안한 곳’이다. 들녘은 기름져 보였고 마을 앞 동구엔 어김없이 커다란 노거수들이 초록빛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특히나 궁류계곡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물빛은 짙었고 그 물빛이 드리워진 웅덩이마다엔 병풍절벽이 둘려져 있어 절경이었다.
캠핑장 근처, 간밤에 텐트에서 잠을 잔 사람들이 다슬기를 건져내고 있는 풍경 또한 그랬다. 다슬기는, 끓여서 들여다보나마나 초록빛 물빛이 우러날 게 빤했다. 일테면 의령으로의 여행은 초록빛 정구지(부추)를 잘게 썰어 넣은 다슬기국 한 대접을 잘 마신 느낌 바로 그것이었다.
홍의장군 곽재우 생가와 나뭇가지에 북을 매달아 의병을 모았다는 현고수를 보고 서둘러 백산 안희제 생가를 향해 달려갔다. 백산 안희제 생가는 홍의장군 곽재우 생가와 지척이었다. 곽재우 생가에서 좌회전, 창녕 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다리 하나를 만난다. 그 다리 끝에 여러 안내판과 함께 백산 안희제 생가 표지판이 보인다.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는 예사 동네가 아니었다. 잘 보존된 여러 개의 고택과 함께 안희제 선생 생가를 둘러본다면 한나절 여행지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거기서 창녕 우포늪도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도 찾지 않는 백산생가(白山生家) 마루 끝에 앉아 나는 멍하니 앞산을 바라보았다. 곽재우 생가 마루에 앉아 앞산을 바라볼 때랑 백산 생가에 앉아 앞산을 바라볼 때는 그 느낌이 달랐다. 곽재우 생가는 그야말로 인위적인 느낌, 뭐랄까 생가가 아니라 기념관 같은 곳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는데 백산 생가는 내 고향집 마루에 앉아 느끼던 막막한 느낌 그대로였다. 그래서 나는 나른하고 무력해졌다.
좌우지간, 얼핏 올려다본 백산생가 현판 글씨는 은초(隱樵) 정명수의 글씨였다. 아시다시피 은초는 여기저기 너무나 많은 현판 글씨를 남겼다. 나는 그것이 좀 못마땅했다. 왜 그랬을까. 곽재우 생가 앞 현고수 아래 비석에 새겨진 글도 노산 이은상의 것이었다.
백산 안희제는 1885년 8월 4일(음력)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168번지에서 태어났다. 사립흥화학교에서 신문학을 수학하였으며, 1905년 보성전문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음해 양정의숙 경제학과에 재입학하였다.
민중계몽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에 투신하여 1907년 윤상은(尹相殷)과 함께 구명학교(현 부산구포초등학교)를 설립,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같은 해 고향인 의령에 의신학교를 설립하였고 다음해인 1908년에는 창남학교를 설립하였다.
1909년 10월엔 남형우,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을 결성, 2대 단장을 지내기도 했다. 백산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 러시아와 중국으로 망명,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대책을 협의,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독립운동 자금조달의 중책을 맡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14년 부산에서 무역회사인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였다.
백산상회는 표면적으로는 해산물과 농수산물을 구매, 위탁하는 무역상이었으나 실은 독립운동자금 조달과 국내연락망 구축을 위한 독립운동기지였다. 독립운동자금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 국내에 서울 대구 원산 인천 등 18개소, 국외에 중국 안동, 봉천, 길림 등 3개소의 지점 및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냈다.
아울러 1919년 11월, 백산은 부산에서 백산상회 주주들과 영남지역 지주들이 중심이 되어 ‘장차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양성’을 위하여 우수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국내 및 해외유학을 시키기 위해 장학재단인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였다. 그 기미육영회를 통하여 양성된 인재로는 초대문교부장관 안호상, 국문학자 이극로, 신성모, 전진환 등이다.
1911년 러시아로 망명했을 당시 최병찬과 함께 ‘독립순보’를 간행하였으며, 1920년 ‘동아일보’ 창립발기에도 참여하였고, 1926년에는 최남선으로부터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중외일보(中外日報)’로 개칭, 날카로운 항일필봉을 휘둘러 일제로부터 여러 차례의 정간과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42년 11월 19일, 대종교 탄압으로 중국 목단강성 경무대 형사대에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에 의해 건강이 악화되어 1943년 8월 3일 병보석으로 출감, 목단강성 영제의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출감 3시간 만에 순국하였다. 선생의 나이 59세였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바쳐 일제에 항거하였으나 안희제 선생처럼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경우는 흔치 않았다. 1911년 봄, 일본에 견학을 간다는 소문을 퍼뜨려 일경의 관심을 따돌려놓고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안창호, 이갑, 신채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조국 광복을 논의한 뒤 모스크바로 가 체류하면서 국제정세를 살폈는데, 그 장면을 상상해 보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대대적인 독립운동의 봉기를 촉구하기 위해 상하이 신한청년당이 국내에 파견한 밀사 김순애가 찾은 곳도, 그리고 도쿄 2·8학생독립운동을 국내에 전파하기 위해 김마리아가 찾은 곳도 백산상회였다. 이것 또한 영화 같은 일이었다. 백산상회는 해외 독립운동세력의 국내 연락 거점임과 동시에 독립운동 전파소로서의 역할을 톡톡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안희제 생가는 좀 쓸쓸하다. 빛이 바랜 듯 보이기도 한다. 의령의 관심과 행정이 너무 곽재우 쪽으로 쏠린 것 같았다. 어쨌거나.
백산기념관(1995년 개관)은 고향 의령이 아니라 부산시 동광동 그러니까 옛 백산상회가 있던 자리에 위치해 있다. 용두산공원 아래 사십계단 근처다.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 두 개의 전시실을 갖추고 있으며, 일목요연하게 활약상을 짚어 보여주고 있다. 용두산 공원에 올라가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백산 안희제 흉상을 만나볼 수도 있다. 1962년 독립을 위해 헌신한 공로를 높이 사 대한민국 정부는 백산 선생 앞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오월이 끝나 간다. 유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나 같은 막무가내도 유월이 오면 그래도 한 번쯤은 국가와 민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 세대는 흔히 호국 보훈 하면 우파 보수주의자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해 온 게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아랫세대에 가면 이도저도 아무 생각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글쎄, 아직도 나에겐 현충일이 다가오면 조례시간 아이들을 운동장에 세워놓고 긴 시간 일장 연설을 하던 교장 선생님이 떠오르고, 땡볕이 떠오르고, 웅변대회와 반공 포스터와 그리고 백일장 대회가 떠오른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호국 보훈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나라와 민족과 문화, 전통의 소중함에 관해 어떤 방식으로 그 의미를 심어 줄 수 있을지…. 그건 나도 모른다. 그러나 바뀌어야 한다는 건 안다.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는 호국역사와 전통문화 그리고 농촌다움을 잘 보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탐진 안씨 집성촌으로, 항일독립운동과 정신문화를 주도한 곳이다. 백산 안희제 생가와 항일독립 정신의 배양소였던 사립창남학교, 지역의 인재들을 배출한 고산재가 있고 경상남도 문화재가 5곳이나 지정되어 있다.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입산문화역사관에서는 전통체험(문화유산탐방, 민속놀이, 연날리기) 서당체험(한학공부, 예절교육, 다도교육), 농촌·생태체험(농사체험, 생태숲체험, 유곡천 물놀이), 공예체험(짚풀공예, 한지공예)을 할 수 있다.
유월에 꼭 한 번 가족들과 함께 가볼 만한 곳이다.
글·사진=유홍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