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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漢陽都城 일주(3-1); 崇禮門-敦義門터-仁王山-彰義門
4.23(목) 10:30 숭례문 崇禮門 북쪽에 있는 大韓∙서울商工會議所 앞을 출발하여
昭義門(西小門) 터-敦義門(西大門) 터-仁王山을 거쳐 彰義門(紫霞門)까지 답사하여 內四山을
연하여 있는 약 8.6km의 서울 漢陽都城 일주의 끝을 맺었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한 北漢山 둘레길 71.5km, 작년 12월에 시작한 서울 둘레길 157km와
이번에 서울 漢陽都城 길 걷기를 마무리하여 서울시 지역과 관련된 둘레길을 전부 일주하였다.
사진을 2회로 나누어 올린다.
2015. 05. 11 孤 山 朴 春 慶
崇禮門-敦義門터-仁王山-彰義門 사진(2-1)
(01) 서울 崇禮門 -국보 제1호- (도성 안쪽 모습)
(02) <예빈시 터>표석. 숭례문 앞 국민은행 남대문지점 시청 쪽 인도에 있다.
禮賓寺는 조선시대 국가의 손님을 대접하고 왕의 宗親들과 宰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던
관청으로 조선 太祖 이래 1894년 甲午更張 때까지 ‘예빈시’라는 이름은 계속 남아 있었으며
처음에 광화문 앞에 설치되었다가 후에 이곳으로 옮겼다. (*寺: 내관 시)
(03) 서울 漢陽都城 터. -大韓∙서울商工會議所 앞-
崇禮門 복구와 함께 옛 漢陽都城 자리에 城郭이 있었던 것을 알리기 위하여 2008년 8월
상징적으로 도로 바닥에 성돌[城石]을 깔아 표시하였다.
(04) 서울 漢陽都城
조선 太祖 5년(1396)에 築城된 서울 漢陽都城(사적 제10호)의 일부 구간으로 옛 城郭의
흔적을 재현시키고 連續性을 유지하기 위하여 2005년 10월 復元∙整備하였다.
(05) 서울 한양도성. 원래의 성돌[城石]과 복원한 성돌(위)
(06) 李忠純 자결 터. -중앙일보사 앞-
이충순(1877~1907.8.3)은 충남 洪城 출신으로 1902년 육군보병 參尉(현재 少尉에 해당)로
임관되어 侍衛隊(國王 호위부대)에서 복무하였으며 1905년 軍人俱樂部를 조직하여
救國運動을 전개하다 1907년 8월 내려진 군대해산명령에 불복하여 일본군과 한양에서
교전하던 중 부상을 입고 체포 당하기 직전에 自決한 韓末의 義兵이자 殉國志士로 1977년
建國褒章, 1990년 愛國章이 追敍되었다.
(07) 昭義門 터. 서울시청에서 阿峴洞쪽으로 가는 西小門路 언덕이다.
소의문은 조선시대 四小門의 하나로 西小門이라도 한다. 太祖 5년(1396) 다른 성문과 함께
건립하면서 ‘昭德門’이라 했으며 成宗 3년(1472) 睿宗의 妃 韓氏의 諡號를 昭德王后라
하면서 이를 피해 昭義門이라 했다고도 하고, 英祖 20년(1744) 門樓를 세우면서
소의문으로 고쳤다고 하는 설도 있다.
西小門洞 큰길에 있던 西南間門으로 일반적인 통행로이면서 光熙門과 함께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긴 통로 구실을 하였으며 1914년 일제강점기의 도시계획에 따라 근처 성곽과
함께 철거되어 사진으로만 그 모습이 전해진다.
(08) <소덕문 터> 표석.
중앙일보사와 대한통운 건물 사이 철탑주차장 앞에 있다.
*四小門: 동북의 弘化門 후에 惠化門(속칭 東小門), 남서의 昭德門 후에
昭義門(속칭 西小門), 동남의 光熙門(속칭 水口門, 屍口門), 서북의 彰義門(속칭 紫霞門)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며 世祖 3년(1457) 4소문 외에 현재의 장충단고개에 南小門을
개설하였다가 睿宗 1년(1469) 폐문하였다.
(09) <수렛골> 표지
중구 巡和洞 일대의 옛 이름으로 전 배재고등학교 자리와 이화여자고등학교 부지
일부 지역으로 車洞이라고도 했는데 이곳에 숙박시설이 많아 관청의 수레들이 많이
모여든 것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肅宗 妃 仁顯王后 閔氏가 탄생한 곳으로 1667년 현 중앙일보사옥 맞은편 순화빌딩
주차장 터에서 태어나 15세 때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20세까지 왕자를 낳지 못하여 숙종에게
張禧嬪을 後宮으로 천거하였으나 희빈의 모함으로 6년 동안 안국동 感古堂에 칩거하다가
35세로 창경궁 景春殿에서 昇遐했다.
(10) 배재공원. 1984년 배재중∙고교가 강동구 高德洞으로 이전한 뒤 조성되었다.
* 배재공원에는 배재학당 터와 남궁억 집터 표석이 있다
=培材學堂: 1885년 미국 北監理敎 선교사인 H.G.아펜젤러가 세웠으며, 1개월 먼저 와 있던
W.B.스크랜턴의 집을 구입, 방 두 칸의 벽을 헐어 만든 교실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그 始初로, 高宗이 1886년 <培材學堂>이라 이름 지어 간판을 써 주었고,
그 해 10월 학생수는 20명으로 늘었다. 현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培材學堂 東館(서울시기념물 제16호)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학교건물이다
=南宮檍(1863~1939)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으로서 서울에서 태어나 高宗의
御前通譯, 宮內府 土木局長 등을 지내고 1896년 <獨立新聞>에 참여하고, 獨立協會의
수석총무로 활동하다 일본경찰에 逮捕∙投獄되었으며 <皇城新聞> 초대 사장으로
언론활동에 종사하면서 러시아와 일본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11) 러시아연맹 대사관
1990년 한∙러修交 이후 옛 배재고등학교 부지에 설립된 대사관이다.
*貞洞공원에 있는 서울 舊 러시아公使館(사적 제253호)은 1896년 2월 高宗이 일본의
武力으로 세워진 親日政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俄館播遷’의 현장이
있으며 375일이 지나 慶運宮(德壽宮)으로 환궁하였다.
(12) 서울 貞洞敎會 -사적 제256호-
高宗 光武 2년(1898)에 준공된 우리나라 최초의 改新敎 교회건물이며 고딕풍의 붉은 벽돌
건물로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북미계통의 단순화된 교회건물로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된다.
교회 앞마당에는 Henry Gerhard Appenzeller의 胸像이 있다.
*정동교회(정동제일교회)는 1885년 10월, 미국 北監理敎 선교부 목사 아펜젤러가 정동에
마련한 한옥집에 예배실을 설치하고 감리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聖禮式을
가짐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여자 한 사람을 포함한 4명의 신자가 예배를 드리고 洗禮를
받았다.
(13) 貞洞劇場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圓覺社(현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음)의 복원 이념 아래
1995년에 건립한 예술극장이다.
(14) 貞洞 梨花女高 돌담
(15) 貞洞梨花女高 심슨紀念館 -등록문화재 제3호-
이화여자고등학교 캠퍼스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15년 미국인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이 위탁한 기금으로 세운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6∙25전쟁 때 붕괴되어 1960년대 초 복구하였으며, 외벽은 붉은 벽돌로 지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근대 건물로 학교건축의 초창기 서양 건축양식을 도입하였으며 현재는
梨花博物館으로 사용되고 있다.
(16) 昌德女子中學校
*창덕여중 校庭에는 1896년 프랑시(V. Colinde Plancy) 公使가 지은 옛 프랑스공사관 터가
있으며 1910년 庚戌國恥 때 領事館으로 格下되며 지금의 프랑스대사관이 있는 서대문구
蛤洞으로 옮겨졌다. (*蛤: 조개 합)
(17) 관립법어학교 터
漢城法語學校는 1895년 10월 譯官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된 官立 프랑스어학교로
1906년 ‘外國語學校令’에 의해 한성외국어학교에 통합되었다가 1911년 일제의
‘朝鮮敎育令’에 의해 폐교되었다.
(18) 中華基督敎 漢城敎會
1912년 미국 선교사 부인 C. S. 데밍(Deming)과 중국에서 온 華僑청년 처다오신(車道心)이
京城 YMCA에서 중국인을 위한 집회를 열면서 설립되었다.
(19) 敦義門 터
돈의문은 서울 漢陽都城의 서쪽 문으로, 통상 ‘西大門’이라고 불렀으며 원래 한양도성의
서쪽 문은 太祖 5년 社稷壇 부근에 세워진 西箭門이었으나 世宗 4년에 都城을 고치면서
남쪽으로 옮겨 돈의문을 세웠다. 敦義門은 새로 세운 문이라 하여 ‘새문’ 또는 ‘新門’이라고도
했으며, 肅宗 37년(1711)에 다시 지었으나 1915년 도로 확장공사와 電車의 複線化로 인해
강제 철거되었다.
(20) 서울 京橋莊 -사적 제465호-
大韓民國 임시정부 主席이었던 白凡 金九가 1945년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1949년 6월 26일
암살당할 때까지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건물이다.
1938년 金鑛業者 崔昌學이 지하1층, 지상2층으로 건립한 竹添莊으로 우리나라 근대
건축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金世演(1897~1975)이 설계하여 1930년대 건축술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白凡의 居處로 사용되면서 근처의 개울이름을 따 ‘京橋莊’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白凡 死後
최창학에게 반환되고, 이후 자유중국대사관 관저, 국군의료진 주둔지, 월남대사관 관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8년 高麗病院(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京橋莊은 雩南 李承晩의 梨花莊,尤史 金奎植의 三淸莊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에
建國活動의 중심을 이룬 三大 搖籃이다. (*雩: 기우제 우 *尤: 더욱 우)
(21) 민들레 열매, ‘훅!’하고 불면 다 날아가겠다.
(22) 좀씀바귀. 산과 들의 풀밭에서 자라는 菊花科의 여러해살이풀.
(23) 氣象廳 松月洞別館과 서울氣象觀測所 -등록문화재 제585호-
서울 기상관측소는 ‘露場’이라 부르는 雨量計測室과 계절의 변화를 관측하기 위해 심은
단풍나무, 벚나무 등 기상관측을 위한 부속시설도 잘 남아 있다.
京畿道立 京城測雨所 청사로 건립된 후 현재까지 기상관측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등
우리나라 기상관측의 역사를 증명하는 장소로 가치가 있다.
*氣象現象 觀測基準: 기상청이 발표하는 눈, 적설, 서리, 얼음 등의 기상현상은 각 지역
기상관측소를 기준으로 측정된다.
-서울의 첫 눈: 송월동 서울기상관측소에서 눈발이 肉眼으로 관측될 때
*예를 들어 江南에 함박눈이 내리고 쌓여도 기상관측소에 내리지 않으면 서울에 눈이
내린 것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서울의 첫 얼음: 서울기상관측소 관측 지점 금속제 용기에 담긴 물이 얼 때
-설악산의 첫 얼음: 설악산 대청봉 아래 중청대피소에서 육안으로 얼음이 관측될 때
-설악산의 단풍 시작: 대청봉 정상에서 20% 가량 아래로 단풍이 들었을 때
(24) 복원된 서울 漢陽都城, 인왕산자락
(25) <어니스트 베델 집터>. 월암공원에 있는 베델이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터.
*Ernest Thomas Bethell(1872~1909, 한국명 裵說)은 영국 출신으로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데일리메일>의 특파원으로 來韓하여, 그 해 7월 雩岡 梁起鐸과 함께
<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고 이후 乙巳條約의 무효를 주장하는 등 抗日活動을 벌였으며
1909년 서울에서 病死하여 揚花津 외인 묘지에 安葬되었다.
한국의 독립과 언론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建國勳章 大統領章이
追敍 되었다.
(26) 洪蘭坡의 <고향의 봄>노래碑. 월암공원에 있다.
李元壽 作詞, 洪蘭坡 작곡의 <고향의 봄> 이외에도 <봉숭아>노래碑도 있으며 근처에는
홍난파가 末年을 보낸 집도 있다.
(27) 民家 건물에 갇혀있는 서울 漢陽都城 城壁
(28) 서울 紅把洞 洪蘭坡 家屋 -등록문화재 제90호- -2008.11.02 사진-
1930년대 독일 선교사가 지은 벽돌조 서양식건물을 작곡가 홍난파가 인수하여 6년간
살던 곳으로 선생의 대표곡들이 작곡된 곳이며 1930년대 서양식 주택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어 가치가 있다.
지상, 지하 각층 121㎡ 규모의 건물은 改∙補修 공사를 끝내고 2007년 小公演場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29) 權慄 都元帥 집터 -2011.09.10 사진-
(30) 권율 도원수 집터에 있는 은행나무 -2011.09.10 사진-
보호수 서1-10호(1976.6.5), 樹齡 420년, 나무높이 23m, 나무둘레 6.8m
(31) 딜쿠샤 -2011.09.10 사진-
서대문구 杏村洞 권율 장군 집터에 있는 서양식 건물은 광산업 및 무역업자미며, UPI통신사
특파원으로 활약한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 1875~1948)가 1923년에
건립하여 1942년까지 부부가 거주했던 집이다.
3.1운동 때는 일본 경찰의 수색을 피해 독립선언문을 국제 통신사에 전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일조했으며, 1919년 4월 華城 堤岩里虐殺事件도 전 세계에
알려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1942년 추방되어 1948년 미국에서 타계하였으나
한국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揚花津 외인 묘지에 安葬되었다.
건물의 머릿돌에는 ‘DILKUSHA 1923’ ‘PSALM CXXVII-I(시편 127편 1절)’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DILKUSHA(딜쿠샤)’는 인도 북부 러크나우 지역 곰티江 인근에 있는 ‘딜쿠샤 궁전’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힌두어로 ‘理想鄕’ ‘행복한 마음’ ‘기쁨’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희망의 궁전’에는 현재 저소득층 9가구가 칸을
나눠 살고 있으며 이들의 移住費用을 놓고 정부와 서울시가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딜쿠샤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32) 서울 漢陽都城 女墻, 仁王山자락
(33) 서울 한양도성 暗門, 인왕산자락
(34) 서울 漢陽都城 體城壁, 암문 외부
(35) 優秀眺望名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이름값을 못하고 잘 보이지 않는다.
(36) 팥배나무 꽃
(37) 서울 한양도성 길, 한양도성과 저 앞에 인왕산이 보인다.
(38) 남쪽능선에서 본 仁王山
(39) 한양도성 너머로 보이는 北漢山 普賢峰, 오른쪽은 白岳山(北岳山)이다.
(40) 毋岳洞 입구, 오른쪽 인왕산길을 따라가면 창의문으로 간다.
(41) 서울 한양도성 길, 무악동 입구에서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길.
(42) 한양도성 밖으로 보이는 仁王寺와 國師堂(뒤)
(43) 仁王山 國師堂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 (*2007.05.20 사진)
인왕산 기슭에 위치한 국사당은 巫俗信仰에서 섬기는 여러 神을 모신 당집으로 요란한
굿판을 벌이기 쉽도록 人家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에 세운 ‘굿당’에 속하며 다른 당집에 비해
건물이 견고하고, 28점의 巫神圖(중요민속문화재 제17호)가 신앙의 대상물로 내부에 걸려
있다.
太祖 5년(1396) 漢陽을 지키는 守護 神祠로 木覓山을 木覓大王이라 하고 현재 八角亭이 있는
곳에 木覓神祠를 두고 매년 나라에서 山神祭를 지내면서 사당을 國師堂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日本人들이 남산에 朝鮮神宮을 지으면서 移轉을 강요하여 인왕산 기슭에 옮겨
원형대로 복원했는데 인왕산을 택한 이유는 風水地理說에서 明堂에 속하고 현재 巫俗神으로
모시는 太祖와 無學大師가 기도하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44) 선바위[禪岩] -서울민속자료 제4호-
2개의 커다란 바위가 마치 스님이 長衫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禪’자를 따서 ‘禪바위’라
불렀다고 하며 岩石崇拜의 일종으로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여겨
일찍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太祖가 都城을 축성할 때 文臣 鄭道傳과 僧侶 無學大師가 이 바위를 성 안으로 할 것인지
성 밖으로 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 대립을 보였으나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逸話가 있다.
(45) 얼굴바위(부처바위), 한양도성 인왕산 南稜 曲墻 끝에 있다.
(46) 서울 한양도성. 인왕산 남쪽 능선
(47) 모자바위
(48) 병꽃
(49) 범바위로 올라가는 한양도성 길 철제계단
-서울 漢陽都城 일주(3-2); 崇禮門-敦義門터-仁王山-彰義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