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漢代) 경학사상의 전개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군현제를 실시하여 정치통일을 강화하였고, 도량형과 화폐를 단일화함으로써 경제통일을 꾀하였으며,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통일을 시도하였다. 특히 책을 지닐 수 없다는 협서율(挾書律)을 만들고, 대부분의 고전을 불태웠다. 그러나 진나라가 15년 만에 망한 뒤 고서들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또한 한나라 초기에는 법가의 강력한 통치가 사회적 위기를 가져왔다는 반성에서 무위(無爲)를 내세우는 도가사상을 채택하였다. 당시 도가는 유가가 요순을 내세우는 데 맞서 신화적 인물 황제(黃帝)를 빌려왔기 때문에 황노지학(黃老之學)이라 불렸다. 한고조가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으로 법삼장(法三章)만 발표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그러나 한나라도 얼마 뒤 왕조 지배의 이념적 근거가 필요해지면서 동중서(董仲舒)의 건의에 따라 유학을 관학으로 공포하였다. 특히 무제는 유가 경전마다 전문가를 뽑아 박사(博士) 칭호를 주고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게 함으로써, 2천년을 이어가는 유학과 정치의 연결 고리를 마련하였다. 이 같은 유가의 독존 현상은 공자 신격화와 함께 한나라 말 참위설(讖緯說)로 이어진 위서(緯書)의 유행으로 나타났다.
분서갱유 이후 경전 복원작업은 학자들이 머리 속에 외워둔 내용을 당시 문자인 예서(隸書)로 기록한 금문(今文)경학과 새로 발견된 옛 문자인 전서(篆書)로 쓰인 고문(古文)경학의 대립으로 발전하였다. 이 논쟁은 석거각(石渠閣) 회의 이후 4차에 걸쳐 200여 년간 춘추(春秋)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3차 논쟁 결과인 백호통(白虎通)은 존비(尊卑)․상하(上下)․귀천(貴賤)의 수직 윤리를 옹호함으로써 통치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금고문 논쟁은 경학을 통치이념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으로, 통치권을 강화하거나 견제할 목적이 담겨 있었다. 특히 고문경학의 등장은 참위설로 얼룩진 금문경학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였으며, 역사학과 문자학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경학사(經學史)의 성립시켰다.
한대 벌어진 또 다른 논의는 천인관계론이다. 이 논의는 자연과 인간이 관련 있다는 천인상관론과 관련 없다는 천인무관론으로 나뉜다. 천인상관론은 은나라와 주나라가 자신들의 조상신인 제(帝)와 천(天)을 최고신으로 여긴 데서 시작하였다. 이것은 하늘이 집권세력에게 왕권을 주었다고 함으로써 현실 정치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였다. 하지만 춘추시기 초기부터 자연 현상과 사람의 행위가 무관하다는 논리가 나온다. 이 두 논리는 도덕적 관점에서 사회 현실과 자연 변화를 연관 지으려 한제학파(齊學派)와 이에 반대하는 노학파(魯學派)로 이어진다. 전자는 맹자의 이론이 구심점이었고, 후자는 순자나 노자․장자의 이론이 구심점이었다. 한대에 들어오면 ‘군권신수설(君權神受說)’과 함께 자연의 이변은 군주의 통치 행위에 대해 하늘이 상벌을 행하는 것이라는 ‘재이설(災異說)’을 바탕으로 하늘과 사람이 서로 느끼고 반응한다는 ‘천인상감설(天人相感說)’을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기(氣)이론과 음양오행 개념을 가지고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였으며, 하늘과 인간 사이에 추상적 덕목, 감정, 심지어 외모와 구조의 공통점까지 있다고 보고 천인합일을 주장하였다. 춘추번로에 담긴 동중서의 사상은 왕권 강화 논리이면서 동시에 왕권에 대한 견제 역할을 했다. 특히 천인상감론은 동양사상의 특징인 유기체적 자연관을 잘 보여준 것으로 전통의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동중서의 철학을 정면으로 반대한 사람이 왕충(王充)이다. 왕충은 실증적,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천인감응설의 종교 신비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는 논형(論衡)을 통해 동중서처럼 천지만물이 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서도 하늘이 만물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두 기가 어울려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자연은 비인격적이며 목적의식 없는 무위(無爲)의 존재이지만, 인간은 유위(有爲)와 욕망을 갖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중서의 목적론적 세계관과 달리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자연을 이해하였다. 따라서 하늘이 인간에게 벌을 준다는 것도 인간 만든 주관적인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위진시대 현학사상의 전개
한나라가 무너진 뒤 위나라가 서진(西晉)에 무너지고 다시 북방민족에게 망할 때까지의 100여 년이 위진시대이다. 이 시기에 노자, 장자, 주역의 삼현을 중심으로 청담(淸談)을 하는 명사(名士)들이 나온다. 청담은 일정한 자태를 갖추고 “완곡한 풍자”로 말하는 것이었으며, 완적․혜강․산도․상수․유영․왕융․완함을 ‘죽림칠현’이라 부른다. 위진현학의 관심은 우주 ‘자연’과 사회 ‘명교’(명분교화)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있었고, 유와 무를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적 담론으로 이어졌다.
위진현학의 첫째 유파는 왕필과 하안이다. 그들은 무(無)가 근본이고 유(有)가 말단이라고 주장하여 귀무파(貴無派)라고 불렸으며, 왕필은 노자주(老子注)․주역주(周易注)를 저술하였다. 특히 노자주는 가장 뛰어난 노자 주석서이고, 주역주는 송대 정이(程頤)의 역전(易傳)으로 넘어가는 가교였다. 왕필은 노자사상을 “근본을 숭상하고 말단을 지양한(崇本息末)” 것으로 평가하였다. 왕필이 무를 본체로 삼은 까닭은 구체적인 사물은 자신의 범위와 성질에 제한되어 다른 사물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만물을 통일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왕필 사상의 또 다른 특징은 말(言)과 뜻(意)에 대한 견해이다. 왕필은 장자가 “뜻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려라(得意忘言)”고 한 것을 “상을 얻으면 말을 잊어라(得象忘言)”와 “뜻을 얻으면 상을 잊어버려라(得意忘象)”로 발전시켰다. 상이란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이고 언어란 상을 나타내는 도구일 뿐 인식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같은 이론에서 시가(詩歌)가 언외(言外)의 뜻을 구하고, 음악이 현외(弦外)의 음을 구하며, 회화가 형상(形象) 밖에서 다하지 못한 의취(意趣)를 구한다는 예술이론이 나온다.
청담 학풍은 완적과 혜강에서 전성기를 맞는다. 혜강은 “소리는 애락과 관계가 없다”는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을 주장하였다. 이는 음을 가지고 교화한다는 전통 관점은 넘어 음악 자체의 아름다움을 논한 것이다. 혜강은 또 마음과 육체를 속박하는 거짓 예법을 버리고 진실하고 소박한 예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그리고 장자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받아들여 원기론을 바탕으로 양생설(養生說)을 주장하면서 신선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혜강은 인간이 본래 편한 것을 좋아하고 힘든 것을 싫어하므로 ‘본성을 잘 닦아 정신을 보존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몸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양생의 요체라고 한다. 혜강의 신선론은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로 이어졌고, 완적은 「달장론(達莊論)」을 지어 곽상의 장자학에 영향을 끼쳤다. 그런 점에서 혜강과 완적의 사상은 하안과 왕필을 곽상으로 연결하는 고리였다.
곽상이 지은 장자주는 가장 뛰어난 장자 주석서로 평가된다. 곽상은 모든 사물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스스로 생겨나서 독자적으로 변한다는 ‘자생독화설(自生獨化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곽상은 노장의 ‘무’가 사물 생성의 근거가 되는 다른 사물은 ‘없다’는 뜻의 ‘무’라고 한다. 사물의 존재 근거는 바로 ‘자신의 본성(自性)’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가 자기 위치에 안주하는 자득(自得)을 말하였고, 모든 사물은 자기 본분에 만족하기 때문에 소요자재(逍遙自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물의 보편적 관계를 부정하고 고립시킴으로써 현실성과 추상성을 상실한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위진남북조 시대는 중국미학이 형성된 시기이다. 전통적으로 사물의 고유 속성을 인간 덕성과 연계시켜 예술로 풀어내는 비덕설(比德說)이 있었지만 위진시기는 도덕성을 뺀 채 인물의 풍모에 중점을 둔 인물품조(人物稟藻)가 유행하였고, 이는 시, 산문, 글씨, 그림, 원예 등에 파급되었다. 특히 왕필의 ‘득의망상(得意忘象)’, ‘내면의 정신을 그림으로 그려 비춘다(傳神寫照)’와 ‘형체를 통해 작가의 내면 정신을 그려낸다(以形寫神)’는 고개지(顧豈之)의 형신론(形神論), ‘형상을 통해 도를 꾸민다(以形媚道)’는 종병(宗炳)의 산수화론, 사혁(謝赫)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이 제기된 시기이며,「난정서(蘭亭序)」를 쓴 왕희지와「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쓴 도연명도 이 때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