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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4일(주일) 로마서 10:5~13 ‘구원을 받으리라’ 새찬송가 521장 구원으로 인도하는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오늘은 로마서 10:5~13 말씀을 중심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최근 브랜든 힐게만 목사가 웹사이트 프로프리처에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입니다.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는 '이달 초 미국인들이 종교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이유'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 조사는 4,729명의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지난 해 12월 4일부터 18일까지 실시됐습니다.
한달에 한두번 예배에 참석하는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교회에 참석하는 이유에 대해 약 81%의 응답자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69%는 "아이들이 도덕적 기반을 가질 수 있어서"라고 응답했으며 68%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교회에 출석한다고 응답했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이유 다섯 번째 순위(59 %)는 "설교가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라고 응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응답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대답은 그들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따르며 더 하나님과 같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이밖에 "어려움과 슬픔에 대한 위로를 얻기 위해"(66%),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57%), "가족들의 신앙 유산을 지키기 위해"(37%) 등을 교회 출석의 이유로 응답했습니다.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19%) 혹은 배우자가 가족을 기쁘게 하기 위해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한다고 대답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규 예배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한 후속 질문에서 교회에 참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로 한 가지에 대해서는 약 60%가 "하나님에게 가까워 지고 싶어서"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는 8%,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6%), "설교가 가치 있어서"라는 응답은 4%에 불과했습니다.
따라서 설교가 필수적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 학교 다닐 때 자주 부르던 찬양이 있었습니다.
‘구원열차’라는 찬양인데요, 가사를 보면,
1.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 나라 가지요
죄악 역벗어나 달려가다가 다시 내리지 않죠
차표 필요없어요 주님 차장되시니 나는 염려없어요
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하늘 나라 가지요
2. 나는 구원 방주 올라타고서 하늘 나라 가지요
험한 시험물결 달려들어도 전혀 겁내지 않죠
배삯 필요없어요 주님 선장되시니 나는 염려없어요
나는 구원 방주 올라타고서 하늘 나라 가지요
구원을 받으리라(13절).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까요?
첫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사는 사람(5~7절)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롬1:16-17, 갈3장, 히10:38).
합2:4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여 년 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강포하고 분쟁과 패역이 가득하여 제 멋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면, 자신들이 할 바를 다한다고 생각했지요. 이런 죄악 속에 있는 남 유다를 보고 하박국 선지자는 합1:2-3에 내가 (그렇게)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니 "주여,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원망 섞인 어조로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이 시대에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꼴을 보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노아의 방주 때처럼 부패와 타락으로 살고 있었는데, 하박국1:4에 하박국 선지자는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나서셔야 할 것 아닙니까? 왜 잠잠하시나이까?' 라고 호소합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방 바벨론을 세워서라도 유대를 심판하겠노라’고 경고를 하십니다. 그 결과로 왕궁은 불타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며 아주 철저히 땅은 황폐화되지만, 실상 바벨론 포로 70년 동안 그 땅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역대하36:18-21).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하박국 1장 13-17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어찌(하필이면) 포악한 바벨론을 들어 의인인 이스라엘을 징벌할 수 있습니까?”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불의, 우상숭배와 거짓스승 등 너희 죽은 율법과 위선에 가득 찬 제사는 도무지 생기가 없어. 의롭지 못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야! 내가 바벨론을 들어 너희를 응징하고 난 다음에 그 바벨론도 이방인이지만 고레스를 나의 종으로 세워서 너희들을 해방시킬거야...그러니 너는 이 묵시를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고,(2:2)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서)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니, 비록 더딜지라도 (너희는)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고 약속하십니다. 여기 고레스 왕은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갈라디아서 3:22-24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22-24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함이라. 이같이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로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묵시이겠지요. 그러자 비로소 하박국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주께 기도와 찬송을 드리게 됩니다(합3장).
이 말씀은 신약성경 3곳에서 인용되는데 그 중 로마서1:16-17절만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이방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KJV역)
이 말씀을 보고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였으며, 18C 영국의 성공회 출신 존 웨슬리 선교사는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상에서 이 말씀을 보고 깨달아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답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본질상 행함으로 구원받는 다고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행해야지만, 그 의로 살고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온전히 행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로 여기면서 사는 사람은 늘 심판과 저주의 그늘 아래 두려워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1, 32절을 통해 진리와 자유에 대해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이 진리와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 선행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듯,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그분을 따르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릇된 진리가 너무 많습니다. 가짜 스승, 제자, 일꾼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진짜처럼 위장하고 살아가지만, 스스로 가짜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짜인 줄 알았는데, 가짜임이 드러났을 때 실망하게 됩니다.
자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자유가 없습니다. 희망이라고 부르는 불행, 자유를 가장한 억압, 감격으로 위장한 쾌락,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앞세운 도덕적 타락…. 우리는 그것들을 ‘자유’라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통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진리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길 원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신뢰하고 만나야 합니다. 그분께 접근해야 합니다. 그 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고 만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얻는 두 번째 단계는 ‘내 말 안에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 우리가 진리와 자유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안에서 살 때에 가능합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는 그 사람의 말과 인격, 그리고 삶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안에 거할 때 진정한 진리와 자유를 맛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당장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즉시 진리 안에 거하고 자유롭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은 평생이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내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만큼 진리를 경험하고, 내가 진리를 경험하는 것만큼 자유를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보고 구경만 하지 말고 맛있게 먹을 때, 몸 안에서 음식이 소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화된 음식은 몸에 필요한 피가 되고 살이 되며, 찌꺼기는 배설물로 나가게 됩니다. 몸 밖에 있는 음식이 몸 안에 들어왔을 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음식이 피가 되고 살이 될 때 나의 몸 안에 있는 것이고, 나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신앙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는 것입니다.
시편의 시작인 시편 1편에는 ‘복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데요. 그 중에서도 2절은 복있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은 세상에 취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취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취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여 그 말씀에 의지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사람을 말하며, 이렇게 살 때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6절에 나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율법을 행함에 그 구원의 뿌리를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구원의 뿌리는 어디에 두느냐 바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셔서 이 땅에 내려오셨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죄 없으신 그 분께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 분께 믿음의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내 열심이 아니라 나의 구원자되신 예수님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적용) 나는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고 이끄는 자기 열심의 의를 쌓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은혜와 주권 아래 내 삶을 맡기는 믿음의 의를 누리고 있습니까?
둘째, 예수 믿는 사람이 받을 축복은 무엇입니까?(11절)
예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11절).
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받을 축복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리라고 말씀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주 어릴 때는 벌거벗겨 놓아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잘 놉니다. 그러나 아이가 돐을 맞고 일년 이년쯤 지나면 언제부터인가 옷을 벗겨놓으면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아이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그만큼 그 아이가 성장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은 생존과 번식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는 본성에 의해, 기본적으로 '자신의 열등함을 다른 개체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은 욕구' 및 '경쟁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여 자신의 번식 행위가 손상 받지 않도록 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의 뿌리에 이 욕구들이 존재합니다. 부끄러움은 크게 분류해 보면 수치심 및 수줍음에 기인하여 느끼는 감정입니다.
부끄러움의 종류를 살펴보면?
1) 수치심에 기인하는 부끄러움입니다.
큰 망신을 당했을 때
열등감을 느꼈을 때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해야할 일을 제대로 못해 양심에 가책을 느낄 때입니다.
2) 수줍음에 기인하는 부끄러움입니다.
숫기가 부족한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 앞에서 말이나 행동을 제대로 못할 때입니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을 규정하는 독특한 감정이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파렴치한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의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을 반성하지만,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넘깁니다. 따라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시사저널-
우리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하면서 죄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남을 속이고 사는 사람 정말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을 하여 잘 사는 사람도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밤낮 노름에 빠져 사는 사람도 부끄럽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부끄러움을 당한 사람들의 예화가 등장합니다. 이 예화가 바로 슬기로운 다섯처녀와 어리석은 다섯처녀의 비유입니다.
열 명의 처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팔레스틴 결혼 풍속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을 방문하는 의식이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자기집으로 데려갑니다. 이 잔치는 주로 밤중에 이루어지는데 신부가 그 친구들과 함께 신랑을 맞습니다. 여기 열 명의 처녀들이 그 들러리들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랑이 예상한 시각을 넘겨 오지 않습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의 도착은 예수님의 재림을 상징합니다. 물론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열 처녀는 다름 아닌 교회입니다. 문제는 신랑이 더디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재림의 지연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종말은 더디올지 모르지만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날은 곧 다가올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미리 그 때를 준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준비한 처녀가 슬기로운 처녀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반드시 필요한 이 기름을 준비하여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갑자기 신랑은 도착하고 불은 붙여야겠는데 기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빌려달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우리 기름도 잘못하면 모자랄 것 같다고 하며 동네에서 기름을 사오라고 충고합니다. 그 미련한 다섯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은 이미 도착하고 혼인 잔치에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 들어가고 문은 닫히고 맙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결국 그 잔치 석상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5: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라.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다.’ 결국 인생의 최종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여러 다른 부끄러움은 상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은 만회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이 땅에서 천국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끄러움 중에 가장 큰 부끄러움은 두가지입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면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저 지나가는 말씀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겉을 볼 때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 같고 목사 노릇 잘하고, 집사 노릇 권사 노릇 장로 노릇 잘 한 것 같고, 주의 일을 잘 한 것 같아도 막상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을 듣고 망신 당할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2. 죄사함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습니다. 그때 두 가지 책이 각 사람들 앞에 놓여질 것입니다. 하나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있는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는 각 사람들의 모든 행실 즉 무슨 말을 했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든 순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된 행위책입니다. 사람들은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입니까? 9절, 10절에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요한계시록 22:15을 보면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1,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아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될 것입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본문 9-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예수님의 양편에 두 강도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 둘은 똑같이 예수님을 욕했습니다((마 27:44). 그러나 나중에 우편강도는 돌이켰습니다. 십자가형을 언도 받을 정도로 큰 죄인인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켜서 주님을 부르자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므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되었습니다.
결 론
교회학자 래리 크랩은 그의 저서 ‘교회를 교회 되게’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교회에 가면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주된 메시지다. 그러나 그 메시지 때문에 교인 수는 늘지만 그리스도인은 줄고 있다.”
우리가 매일 묵상하는 큐티인의 주요 메시지를 보면 ‘인생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입니다.
교회는 행복보다 더 큰 목적인 믿음에 두어야 합니다. 거룩함과 희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갑니ᄃᆞ. 그러므로 믿음이란 성경에 나타난 사실을 단순히 믿는 것 이상으로 도덕적인 일과 영적인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믿고 의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반대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능이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타고난 자질이나 타이트한 훈련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부름심의 역사로 됨을 성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반드시 붙잡고 믿음생활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