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사도행전 11,21ㄴ-26; 13,1-3 마태 10,7-13
+찬미예수님
종종 시간이 될 때 일부러 서점을 찾아가는 습관이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워낙 발달해 얼마든지 온라인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지만
서점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들을 보면 마음도 편안해지고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를
직접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베스트셀러 가판대를 보면 사람들이 어떠한 욕구를 충족하고 싶어 하는지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린 시절에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와 같은
사람을 대하는 기술을 다루는 도서가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7막 7장> 혹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와 같은
성공에 관련된 책들이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IMF 이후, 커다란 변화가 있었는데, 어떻게 몇 억을 모을 수 있는지,
부동산 투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와 같은 재테크 책들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서점에 갔는데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책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책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이대로 좋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아>,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어>,
<참 애썼다 그것으로 되었다>, <당신의 마음을 안아줄게요>
이 제목들을 보면 요즘의 시대가 위로를 필요로 하는 시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은 천천히 살아도 된다는 것, 존재만으로도 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책들이 인기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로”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위로의 사전적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듯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상대방의 괴로움과 슬픔을 달래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묻고 싶습니다.
상기 책들의 제목처럼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
정말 우리의 마음 속에 깊은 위로와 울림을 선사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입니다.
물론 적당한 위로의 말들이 지쳐있는 일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마치 인스턴트와 같아서 순간적인 즐거움만 줄 뿐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그 답을 찾아야 할텐데
우리는 이 모범을 오늘 기념일을 맞이한 바르나바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래의 이름이 요셉이었던 바르나바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합류한 뒤
자신 소유의 밭을 팔아 교회에 헌납했고 신앙생활에 전념했습니다.
그에겐 고유한 업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오로가 초대교회 공동체에 합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사도 바오로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오로는 바리사이파
출신으로써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박해하는 데 선봉에 섰던 인물입니다.
그는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당시 유대인 측의 증인으로 섰으며 그의 열정적인 박해 탓에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각처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오로는 흩어진 모든 사람들을 추격해 전부 잡아들여야 한다고 고집했습니다.
당시의 박해란 당연히 죽음을 전제하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인 셈입니다.
그러한 바오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기적 이후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신앙이 검증이 되지 않은, 교인들을 직접적으로 박해하고 죽음으로 이끌었던 그를
사람들은 당연히 의심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은 실제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의심하고 두려워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바르나바가 바오로의 후견인이 되어줍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에게 그의 회심과 관련된 기적을 적극적으로 알립니다.
만약 이러한 바르나바의 역할이 없었다면 바오로는 결코 사도단에 들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가 읽고 있는 바오로의 서간들과 이방인 선교는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후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의 독서 말씀입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안티오키아로 파견되어 그곳의 교회를 예루살렘 교회를
능가하는 공동체로 발전시킵니다.
그리하여 안티오키아 교인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얻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이후 바르나바는
키프로스 섬에 가서 선교를 하다가 61년 경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바르나바”라는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생을 묵상하고 있노라면 왜 그의 이름이 요셉에서 바르나바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그가 진정으로 위로를 베푼 것은 바오로 사도 뿐만 아니라
당시 박해를 받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다시 “위로”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이 위로가 행동이 없는 단순한 동감에 그친다면 그것은 인스턴트와 같은 일시적인
기쁨만 선사 할 뿐입니다.
결국 진정한 위로란 보잘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존재에게 진정으로 손을 내밀어 주는 것,
그리고 그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확신과 증언을 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위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우리의 사랑의 실천, 타인에게 베풀어야 하는 위로는 바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거저 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고는 우리가 베푼 것이 결국 모두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에 가득 찬
확신과 함께 그 힘을 발휘합니다.
누군가에게 가진 것을 거저 베푸는 것. 그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사랑을 행하는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지혜로운 하느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그분께서 더욱 더 큰 위로와 축복을 안겨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오늘의 영성체송은
따뜻한 예수님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리라.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부른다.” 아멘.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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