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며 전태일 분신자살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30분, 500여명의 노동자들이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 위해 평화시장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태일이 자기 몸에 불을 지르고는 피맺힌 절규를
쏟아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또 외쳐댔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22세 전태일은 자신을 불태우며 그렇게 쓰러졌다. 그리고 그날 밤 10시,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눈을 감았다. “배가 고프다.”
전태일(1948년 8월 26일 ~ 1970년 11월 13일)은 대구의 가난한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내수공업을 하였으나 거듭 실패했고 사기까지 당해서 결국 서울로 올라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초등학교도 중퇴했으며, 노숙도 하고 동냥도 하는 등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1960년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가 1964년 무일푼의 몸으로 상경해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견습공)로 일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서울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 한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
1965년 가을 의류제조 회사인 삼일사의 구인광고를 보고 삼일사에 입사했다. 삼일사에서의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재봉사로 일하면서 어린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보고 분개했고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해고 당하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1966년 해고되었다.
이후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면서도 잠깐 다녔던 고등학교에 다시 가는 꿈은 버리지 않았다. 하루에
2시간씩 자면서 꿈을 키워나가던 중, 1968년 우연히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는 공부하였고 최소한의 근로조건 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실망과 좌절 그리고
나아가 분노했다.
그는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운동 조직인 바보회를 창립하여 현재 근로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막장 현실 속에서 봉제공장주들에게 밉보인 전태일은 직장에서 해고된 후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한동안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지냈다.
1970년 재단사로 다시 취직이 되었고 이전 바보회 활동을 한 친구들을 규합해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였다.
청계천 피복공장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실태를 조사하였고 이를 경향신문에 제출에 실리게 되면서
청계천 고용주와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협상도 해 보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1970년 당시 청계천 일대에는 2천여 개의 피복공장이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옷 공장 1년이면 집을
산다느니, 3년이면 빌딩을 산다느니 하던 호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밑에서 일하는 2만 7천여 노동자
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끔찍한 노동과 가난뿐이었다. 하루 평균 14시간에서 16시간까지, 일요일은
물론 국경일조차 거의 놀지 못한 채 일 년 내내 혹독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의류산업이 호황이라 명절 때 사흘 노는 게 전부일 정도로 일이 많았다. 크리스마스 날, 저녁 6시에 일이
끝나자 다 같이 만세를 부르며 좋아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어떤 집은 한 달에 한 번은 논다느니, 일
잘하는 사람에게 명절 때 쌀 한 포를 준다더라 하는 소문에 솔깃해 옮겨 봐도 가보면 거기서 거기였다.
게다가 공장은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먼지가 많았다.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까면 몇 숟가락 먹기도 전에
시커먼 꽁보리밥 위에 먼지가 눈처럼 하얗게 내려 앉아 흰 쌀밥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스크가 있어도
덥고 숨이 차서 쓸 수 없는 지경이었는데, 어린 시다가 마스크를 썼다고 건방지다며 따귀를 때리는
사장도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자취방 하나 얻을 돈조차 없어 먼지구덩이에서 공장 바닥에서 새
우잠을 자야 했다.
청계천 생활 몇 년 만에 폐병에 걸려 죽어나가는 어린 여성들이 숱했지만 보상이나 산재보험 따위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재봉틀 바늘이 손톱에 박히면 펜치로 빼버린 다음 미싱 기름을 발라주고 바로 일을
시키는 사장도 있었다. 노동자는 기계가 되고 손가락은 부품이 된 셈이었다.
마술처럼 쏟아지는 돈에 미친 사장들에게는 노동자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고 들어선 군사독재의 눈에 그 고통이 들어올 리도 없었다. 끔찍한 노동현실을 개선하는
일은 온전히 노동자 스스로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전태일과 친구들이 그 운명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근로감독관에게 쓴 전태일의 편지(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1970년 11월 13일 낮 1시 평화시장 일대에 긴장감이 돌았다. 경비원들과 출동한 경찰들이 이곳 저곳에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각 사업장에서는 업주들이 근로자들에게 협박하며 단속을 강화하고
있었다. 경비원들과 형사들이 국민은행 앞길을 철저하게 차단했다. 그러나 업주들의 협박과 경찰, 경
비원들의 감시망을 뚫고 삽시간에 약 5백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국민은행 앞길에 모여들었다.
이 시각, 삼동회 회원들은 형사들의 눈을 피해 평화시장 건물 3층의 어둡고 침침한 복도 구석에 모여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회원 중 몇 사람은 이미 시장 경비원들에게 끌려가서 회사
사무실에 감금된 처지였다. 그날 아침 회원들은 플래카드를 몸에 감고 옷 속에 감춘 뒤 시장에 나왔다.
드디어 1시 30분, 삼동회 회원들은 플래카드를 꺼내어 펼쳐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2층 복도까지 왔을 때
형사 두 사람이 뛰어오더니 플래카드를 빼앗으려 했다. 전태일은 구호를 외치며 플래카드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종이로 만든 플래카드에는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햇빛을!’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같은 글귀들이 쓰여 있었고, 결국 플래카드는 바로 찢어져 못쓰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태일은 너무나도 침착하게 “너희들 먼저 내려가서 담배가게 옆에서 기다려라. 난 좀
있다 갈 테니.”라고 말하였다. 회원들은 별 생각 없이 먼저 내려갔다. 전날, 전태일이 아무도 지키지
않는 근로기준법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휘발유를 샀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분신을 하리라는
데 생각이 미친 사람은 없었다.
약 10분 뒤에 전태일이 내려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한 친구의 옷소매를 끌어당겼다가 전태일은 눈짓으로
그 친구를 사람이 뜸한 옆 골목으로 데리고 갔고 자신의 몸에 불을 부칠 것을 당부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화염에 휩싸인 전태일이 소리 지르며 내달린 것은 불과 몇 분 후였다. 바람이 센 날이었다. 불길은 순식간에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때마침 그 자리에 서 있었던 한 회원이 근로기준법 책을 전태일의 불길 속에 집어 던
졌다. 삼동회가 계획했던 근로기준법 화형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시키지 마라!”
구호를 외치던 전태일은 불길을 들이마시고 기절해 엎어졌다. 놀란 삼동회원들이 달려가 점퍼를 벗어 불을
끄려 했으나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경비원이 소화기를 가져와 겨우 불길을 잡았을 때, 그의 몸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전태일은 서울 성모병원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삼동회원들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시위를 벌였다. 그들의
손에는 문방구에서 산 백지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흘러내린 피로 쓴 혈서가 들려 있었다. 이에 분신을
목격한 후 작업장에 들어가지 않고 서성이던 젊은 노동자 수십 명도 합류해 동대문 쪽으로 함께 행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장 대기하고 있던 경찰의 곤봉과 구둣발에 무참히 짓밟혀 연행되고 말았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아들의 소식을 들은 것은 두 시 라디오뉴스를 통해서였다. 평소 어린
여공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며 어려운 노동법을 읽고 이상적인 공장을 꿈꾸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분신까지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사십대 초반의 과부인 그녀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이소선이 병원에서 아들의 주검을 지키고 있을 때, 정부에서는 작은 빌딩을 한 채 살 수 있을만한 현금을 싸
들고 찾아와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그녀는 돈다발을 관리들의 얼굴에 집어 던지며 아들의
뜻이 이뤄질 때까지 온몸으로 싸울 것을 맹세했다.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아들의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눈물을 삼키고 있는 모습.
이소선은 분신현장을 지켰던 삼동회원들과 함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만들어 아들의 뜻을 지켰다. 그리고
2012년 사망할 때까지 40여 년간, 전태일의 어머니로서, 한국 노동자 모두의 어머니로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1983년 인권 변호사인 조영래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전태일의 평전을 썼고, 1995년 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개봉되었다.
분신 장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