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팜므파탈 음탕한 요녀 달기(妲己).
고서에서는 달기의 미모를 "구름처럼 검게 드리운 머리카락, 살구 같은 얼굴에 복숭아 같은 뺨, 봄날의 산처럼 옅고 가는 눈썹, 가을 파도처럼 둥근 눈동자, 풍만한 가슴과 갸냘픈 허리, 풍성한 엉덩이와 날씬한 다리, 햇빛에 취한 해당화 비에 젖은 배꽃 보다도 아름다워라.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배꽃이 봄비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여러가지 꽃잎을 짜서 그 액을 얼굴에 바르는 도화장(桃化粧) 지금의 연지(燕脂)라는 화장을 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화장술이다.
달기는 상(商)나라 유소(有蘇) 부락 출신으로 폭군으로 악명 높은 주왕(紂王)의 귀비가 되었으며,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고사로 잘 알려진 여인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섹시한 여인 중의 한 사람으로 음탕한 여인이나 독부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달기는 상(商)의 주왕(紂王)을 유혹하여 잔혹한 형벌로 생사람을 죽게 만들어 놓고 사람이 고통스러워 하는 소리를 듣기 좋아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자신의 성욕을 자극했다. 그녀의 흉악하고 음탕한 행위는 그야말로 변태 그 자체였다. 달기와 주왕에 대한 이야기는 명대의 소설 봉신연의(封神演義)에 상세하게 전해오고 있다.
기원전 11세기에 있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그보다 수백년 이전에 있었던 하(夏) 걸왕(桀王)과 말희(妺喜)의 이야기와 너무도 흡사하다. 달기와 주왕이 상(商)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한다면 걸왕과 말희는 하(夏)나라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주왕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아홉 마리 소를 뒤로 잡아당길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으며, 매우 총명하고 예민하여 상당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성격이 포악하였다. 특히 달기를 왕비로 맞은 후부터 그러한 성격이 더욱 심하게 드러나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상왕조를 파멸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달기는 주왕의 제후 소호(蘇護)의 딸로 빼어난 용모와 몸매를 갖춘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 소호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주왕은 막강한 병력을 파견하여 진압하자, 소호는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딸 달기를 주왕에게 바치고 목숨을 구걸하였다. 야사에 따르면 주왕이 단지 그녀의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그토록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질 수는 없었을 것이라 봤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외형적인 미모를 훨씬 능가하는 또 다른 어떤 성적 매력이 있었다. 봉신연의의 기록에 따르면 달기는 그야 말로 보기드문 명기(名器) 중의 명기였다고 한다. 봉신연의 작자는 달기가 단지 미모만으로 그렇게 간단히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녀만의 특수한 침실에서의 방중비법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주왕이 여와궁(女媧宮)에서 참배를 하면서 여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음탕한 마음이 일어 신을 모독하는 시를 지었다. 이에 여와는 크게 노하여 구미호를 내려 보내 주왕을 현혹시켜 상(은)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하였다. 원래 달기의 본성은 선량하고 인자하였는데, 소호가 달기를 주왕에게 바치기 위해 상나라 도성인 조가(朝歌)로 가는 도중 구미호가 달기의 영혼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리하여 달기는 구미호가 사람을 유혹하는 비법과 요괴의 잔악한 악행을 저지르는 것으로 묘사 되었다.
주왕은 달기를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하였고 달기는 주왕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달기를 만난 이후부터 주왕은 다른 궁녀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정사도 내 팽개친 채 오직 달기에게만 정신이 빠져 있었다. 본처인 강왕후를 몰아내고 달기는 왕비에 책봉된 후에 주왕이 자기의 미색에 현혹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서서히 그녀의 황음무도한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먼저 주왕에게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을 새로 지어달라고 요구하고, 모든 난간과 기둥은 아름다운 마노와 옥으로 장식하게 하였다. 주왕은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여 경비를 조달하고, 10만여명의 장인들을 불러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를 계속하도록 하였다. 7년이란 세월이 걸려 길이 3리(里) 높이 천 척(尺), 대궁전 100여개, 소궁전 72개에 이르는 호화로운 궁궐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녹대(鹿台)이다. 주왕과 달기는 밤낮으로 이 녹대에서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마음껏 유희를 즐겼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연월일을 잊어 버릴 정도였기에 사관은 그것을 장야음(長夜飮: 밤새 술마시며 논다는 뜻)이라 기록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본 대신 기자(箕子)는 "대왕의 측근들 조차 모두 왕조의 멸망을 모르지만 나만은 그것을 안다. 나의 처지가 실로 위태롭구나!"라고 한탄하였다.
달기는 음욕을 즐기는 것 외에도 잔혹한 형벌로써 생사람을 학살하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주왕과 함께 여러 가지 새로운 무시무시한 형벌들을 고안해내었다.
상나라를 창건한 탕왕(湯王)은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형법이 너무도 잔혹하여 그것을 폐지하고 비교적 경미한 형벌로써 죄인들을 처벌했다. 그러나 주왕은 선왕들의 법제가 너무 가볍다고 여겼다. 달기는 주왕에게 대형 청동 기둥을 주조하도록 꼬드겼다. 죄수를 벌거벗긴 채로 시뻘겋게 타오르는 숯불을 그 위에 서서 붉게 달아 오른 청동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걸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속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죽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을 고안해 냈다. 이러한 처참한 상황을 보고 주왕과 달기는 박장대소하며 즐거워 하였다. 1~2년 사이에 포락형으로 죽어간 사람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포락형을 즐기는 것도 점차 지겨워지자 달기는 다시 고심 끝에 돈분(躉盆)이란 형을 고안해냈다. 그녀는 먼저 주왕에게 녹대 부근에 넓고 깊은 구덩이를 하나 파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수많은 독사와 전갈을 그 안에 집어넣은 다음 궁녀들을 발가벗겨서 안으로 밀어 넣게 하였다. 달기는 주왕과 함께 녹대 위에서 잔치상을 차려놓고
그 구덩이 안에서 독사와 전갈에 잡아 먹히면서 몸부림치는 모습과 비명소리를 즐기면서 무한한 환락에 빠져들곤 하였다. 얼마후 달기는 다시 돈분 좌우로 연못을 하나 파달라고 한 다음, 연못을 피하여 왼쪽에는 술지게미를 쌓은 작은 언덕을 만들고 거기에 나무를 심게 했다. 그 나무 위에 고기덩어리를 매달아두고 그것을 육림(肉林)이라 하였으며, 오른쪽 연못에는 술을 가득 채워놓고 그것을 주해(酒海)라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궁녀와 환관들을 불러모아서 나체로 씨름을 하게 한 다음, 승자는 "주해육림(酒海肉林)"에 들어가서 마음껏 먹고 마시게 하고, 패자는 주왕의 존엄함을 욕되게 했다고 하여 돈분에 집어 넣으며 자신의 성욕을 자극시켰다.
당시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서백(西伯: 이후의 주나라 문왕)이라는 삼공(三公)이 있었다. 주왕은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소문을 듣고 그녀를 강제로 궁으로 데려와 후궁에 앉힌 다음 그녀와 달기의 옷을 벗겨놓고 차례로 훑어 보면서 비교해 보았다. 그녀의 용모에 흡족한 주왕은 그녀를 비에 책봉했으나 정숙한 구후의 딸은 그 처럼 음란한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주왕의 노여움을 사게 되니, 이 소식을 들은 달기는 기뻐하며 잔인한 방법(차마 글로 옮길 수 없음)으로 구후의 딸을 처참하게 죽였다. 그래도 주왕은 분노가 가시지 않아 다시 구후를 잡아오게 하여 소금에 절이고 포를 떠 죽였다. 악후도 몇 번이나 간언을 하지만 결국 그마저 처형당하게 된다. 서백 희창(姬昌)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을 우러러 세 번 탄식한 다음 기산(歧山)에서 비밀리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폭군 주왕을 토벌할 준비를 하였다.
달기의 악랄한 위세는 날로 심해져 인명을 파리 목숨보다 가벼이 여겼다 주왕은 오로지 달기를 기쁘게 하기위해 사람들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산사람을 화살 과녁으로 삼거나 호랑이 우리에 집어넣었다. 달기는 심지어 임산부의 배에 들어있는 태아의 성별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면서 주왕과 내기를 하고, 임산부를 잡아와서 직접 배를 갈라 확인해 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잔인한 행위는 너무도 많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3대에 걸친 공신 비간(比干)이 죽음을 무릅쓰고 주왕에게 간언을 하자, 달기는 주왕에게 자기가 심장병이 들었는데 성현의 심장을 먹어야 나을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주왕은 당장 충직한 신하 비간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냈다.
기원전 1057년 서백 희창의 아들 희발(姬發: 후의 주나라 무왕)과 군사(軍師) 강자아(姜子牙: 강태공)가 대군을 거느리고 상나라 수도 조가(朝歌)를 공격하였다.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판단한 주왕은 자신이 만든 녹대에 올라
가서 그 아래에 붙혀둔 불길속으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달기는 강자아의 병사들에게 붙잡혔을 때,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로, "나에게는 공은 있으되 죄는 없다. 만약 내가 주왕을 유혹하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어찌 상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었겠느냐?" 하며 오히려 큰소리를 쳤다.
강자아는 달기를 봉신방(封神榜)으로 끌고가서 참수를 명했다. 그런데 망나니가 칼을 뽑아 형을 집행하려고 할 때 달기는 돌연히 머리를 돌려 요염한 웃음을 날리며 그를 홀렸다. 망나니는 갑자기 넋이 빠져 달기를 멍청히 바라보다 그만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른 망나니들로 바꾸어서 집형을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강자아는 달기의 사람 홀리는 술책이 이미 입신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고, 부하의 화살을 꺼내어 직접 그녀의 심장을 향하여 연속해서 세 발을 쏘았다. 이로써 달기는 영원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파란만장했던 상나라의 역사도 종말을 고하고 새로 일어난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그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달기와 주왕에 관한 위의 이야기는 대부분 봉신연의를 근거로 한 내용이다. 그러나 봉신연의는 많은 야사들을 기록한 일종의 기이한 신화소설로, 여기에 기록된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라 간주할 수 없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발견된 은허(殷墟)에서는 은(殷) 상(商) 시기의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는데, 그 어디에서도 달기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언급된 곳을 찾을 수 없다. 특히 상나라 시대에는 국가의 대소사를 모두 거북 껍질에 기록하여 점을 치는 형식을 통해서 결정하였는데, 주왕이 달기의 말에 따라 모든 국가의 대소사를 결정지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다. 또 달기가 주왕을 좌지우지 할 정도로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면, 지금까지의 중국역사를 살펴볼 때 그녀의 친정 세력이 충분히 권력의 중심에 있을 법도 한데, 어떤 역사서에도 그녀. 일족인 유소씨(有蘇氏)의 권력 대한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달기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등장한 주(周)나라가 자신들의 명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부분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의 전개에서 뒤에 권력을 잡은 정권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직전의 역사를 부정 왜곡한 예를 도처에서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주왕의 포악성과 달기의 음란함을 어느 정도 인정은 하지만 상상을 불허할 정도의 만행을 저지른 부분이 특히 왜곡된 부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것 또한 추측일 뿐이다.
주왕과 달기의 죽음에 대해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주왕이 녹대에서 뛰어내려 분신자살한 후에 달기는 주(周) 무왕(武王)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설신어(世說新語)에서는 공융(孔融)의 말을 인용하여 주나라 군대가 조가(朝歌)에 진입한 후에 주공(周公)이
달기를 취하여 그의 시녀로 삼았다고 하였다. 결국 어떤 측면에서 보면 달기는 뒤에 일어난 왕조에 의해 역사적으로 희생된 인물일 가능성이 크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중국에서는 희대의 독부나 요녀로 기록되어있다.
중국인들이 쓰는 속어에는 달기정(姮己精)이란 말이있다. 이는 '여우같은 년'이란 뜻으로 음탕하고 음흉한 여자를 욕하는 말이다. 달기의 전설이 중국풍속에 구미호의 이미지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데, 나 어릴때 여름밤이면 전설의 고향을 보며 의문이 들었었다. 욕심을 내고 배신을 하는 건 항상 인간이였지 구미호가 아니였는데, 왜? 사람들은 여우를 나쁘고 무섭고 흉악하게 표현하는 것일까?
아득한 기원전 고대부터 경국지색이야기는 여성의 미를 찬양하면서도 미색은 종국엔 나라를 망치고 남자를 망치는 근원처럼 나오는 것을 보면 여화론에 입각한 남성지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아름다운 미색을 탐하면서도 동시에 경계하는 남성의 이중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글쓴이 : 들풀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