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기다리며/靑石 전성훈
강물이 꽁꽁 얼어버릴 정도로 며칠째 기온이 내려가니 정말로 매섭게 춥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위를 심하게 더 타기에 몸으로 받아들이는 체감온도는 더욱더 낮게 느껴진다. 기상청 일기예보에 의하면 삼한사온이 사라져버린 올해가 최근 10년 사이 가장 추운 겨울이라고 한다. 설날 연휴의 극심한 추위로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집안에서 지내며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보낸다. 늘 다니는 도봉문화정보도서관이 나흘간 휴무하는 바람에 책을 빌릴 수 없다. 집안 책장을 둘러보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 한 권을 꺼내 들어보니 이효석선생의 단편집이다. 우리나라 단편의 백미라고 일컫는 ‘메밀꽃 필 무렵’을 위시하여 스무 편 가까운 단편이 보인다. 그 가운데 ‘들’이란 작품은 봄이 무르익은 세상을 이렇게 노래한다. “꽃다지, 질경이, 냉이, 딸장이, 민들레, 솔구장이, 쇠민장이, 길오장이, 달래, 무릇, 시금치, 씀바귀, 돌나물, 비름, 능쟁이. 들은 온통 초록 전에 덮여 벌써 한 조각의 흙빛도 찾아볼 수 없다. 초록의 바다, 초록은 흙빛보다 찬란하고 눈빛보다 복잡하다. 눈이 보얗게 깔렸을 때에는 흰빛과 능금나무의 자줏빛과 그림자의 옥색 빛밖에는 없어, 단순하기 옷 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던 것이-----봄은 옷 입고 치장한 여인이다……. 시절은 만물을 허랑하게 만드는 듯하다. 짐승은 드러내 놓고 모든 것을 들의 품속에 맡긴다.”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봄을 맞이하면 슬슬 자연스럽게 허리춤을 펴고 기지개를 피게 된다. 세월의 흐름을 알려주는 친근한 벗인 거실 벽에 걸린 달력 한 장을 찢어내니 2월이 얼굴을 내민다. 오랜만에 모처럼 톡톡히 그 이름값을 떨친 대한大寒의 참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준 겨울, 대한이 떠나고 봄이 온다는 입춘立春이 지나자 하루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것 같다. 땅속에서 숨을 고르며 기다리던 새 생명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몸이 알아챈다. 가을이 떠난 후 겨울 동안 몸 여기저기 아프고 결리고 어지럽고 쑤시며 잔병치레하여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가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듯하다. 이제는 집안에서만 머물지 말고 바깥나들이를 하면 좋을 것 같다. 못내 떠나기 싫은 차가운 겨울바람과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맞으며 기운을 차리는 계절이 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 쓰디쓴 한약을 마시고 텁텁했던 입안의 냄새가 조금씩 엷어지면 입맛이 되살아나는 봄나물 생각이 간절해지는 때이다. 봄나물을 생각하면 더는 뵐 수 없는 외할머니와 엄마의 따사로운 정이 생각난다. 된장을 풀고 들에서 갓 뜯어온 냉이를 넣어 끓이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는 향긋한 냄새의 냉이 된장찌개나, 햇볕을 듬뿍 먹어 봄 향기가 물씬 묻어나고 나쁜 기운을 없애준다는 쑥을 심심한 된장국에 밀가루를 조금 넣어 함께 끓이는 쑥국은 더할 나위 없는 봄철의 별미이자 잃어버린 고향의 맛이다. 냉이 된장찌개에 비벼 게눈감추듯이 밥 한 그릇을 후다닥 비우거나, 쑥국에 밥을 말아 국물까지 다 마시고 빈 그릇을 보이며 혀를 내밀고 입맛을 다시던, 그 옛날의 봄날이 오늘따라 불현듯 그립고 그리워진다. 어린 시절에 느꼈던 추억의 입맛을 중년에는 잃어버렸다가 늘그막에 그때 그 입맛이 그리워지는 건 무슨 연유일까. 그건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이야기이다. 아니 세월이 지나간 게 아니라 나 자신이 그만큼 낡고 헤지고 늙었다는 증거이리라.
이효석 선생의 단편 ‘들’에 보이는 “짐승은 드러내 놓고 모든 것을 들의 품속에 맡긴다.”라는 의미는 뭘까? 남의 시선이나 체면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이나 입고 싶은 옷 또는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하고,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세상살이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늙으면 젊은 시절처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펑퍼짐한 편한 옷도 입을 수 있고, 옛날보다 느긋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어 좋다고 하신 박완서 선생 말씀이 생각난다. 봄이 오면 두껍게 껴입었던 겨울옷을 벗어버리고 봄의 숨소리가 스며드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는 게 세상 풍경이다. 이름 모르는 들꽃과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나비와 벌이 찾아오는 봄의 길목을 기다리며, 얼어 죽지 않고 무사히 잘 견뎌온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손을 들어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몸이 아파 덩달아 마음도 가라앉은 채 기나긴 겨울을 숨죽이며 지내왔던 내 몸과 영혼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지나간 세월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불안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맞이하는 봄이 오는 길목에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걸어가고 싶다. (2023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