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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이며 종교개혁기념주일이다.
우리 교회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인 종교개혁기념주일날 추수감사주일로 지키며, 전교인 성경암송대회를 실시해 왔다.
종교개혁 3대 슬로건 중 하나인 "오직 말씀으로"라는 주제를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올해에는 야고보서 2장 전체 말씀을 암송 범위로 지정했다.
교역자들이 다같이 모여 심사숙고하여 지정했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는 성경암송대회 직전 주일에는 성경암송말씀을 본문으로 설교를 행해 왔었다.
이유는? 참여하는 성도님들이 좀 더 용이하게 성경말씀을 암송하도록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이다.
본문은 오늘 하나님께서 저희 교회에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다음주일에 있을 성경암송대회를 참여하는 성도님들뿐 아니라, 이 시간에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신앙에 양질의 영양분을 공급해주는 그런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먼저, 설교 제목에 나타난 용어들을 정리하면서 설교를 시작한다.
"칭의"? "의롭게 되었다고 칭한다"라는 의미를 가진 기독교 용어이다.
이 용어는 하나님만이 사용하시는 용어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향해 "당신은 이제부터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라고 선언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칭의"는 일종의 하나님의 선언이다.
이 용어는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는 순간부터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특히 개신교 교단중 장로교 교단은 "이신칭의" 용어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신칭의 교리를 강조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칼빈입니다.
칼빈은 장로교의 창시자라 불리는 인물이다.
"성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옛 습관이나 성질에서 벗어나 거룩하게 되어가는 과정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 모두가 성화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구원받은 이후의 삶을 주목한다.
구원 받은 자가 구원 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지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반면에 "칭의"는 구원받는 과정에 주목한다.
무엇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대체로 감리교단에서 "성화"를 매우 중요한 주제로 취급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감리교 창시자인 죤 웨슬리입니다.
이렇게 "칭의"와 "성화"는 기독교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매우 중요한 주제들이다.
조직신학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여 다루고 있다.
특히 성경말씀 중 야고보서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칭의"를 "믿음"으로 그리고 "성화"를 "행함"이라는 단어로 대체 사용한다.
"칭의"가 "믿음"이고, "믿음"이 '칭의"이다.
"성화"가 "행함"이고, "행함"이 '성화"이다.
본문으로 돌아가자.
야고보서의 저자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을 향해 선포하는 말씀이다. "내 형제들아"
"믿음"("칭의")과"행함"("성화")을 구별하고 있다(14, 18)
믿음과 행함을 따로 구별해서 사용한다.
즉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야고보서의 저자가 이렇게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성도들이 이렇게 구별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도한 것이다.
14절을 보라.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중에 이렇게 "칭의"와 "성화"를 구별해서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다.
18절도 보라.
마찬가지다. 어떤 성도에게는 "믿음"만 있고, 어떤 성도에게는 "행함"만 있다고 설명한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1세기 성도들중에 "믿음"(칭의)과 "행함"(성화)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이들이 적잖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의 저자는 무엇이라 답하는가?
행함과 믿음을 구별할수 없다고 선언한다(17,20)
"믿음과 행함을 구별하는 순간 믿음과 행함 모두가 죽어버린다(17)"
"믿음과 행함을 구별하는 순간 믿음과 행함 둘 다 사라져 버린다(20)"
즉, 칭의와 성화 즉 믿음과 행함은 구분할수는 있어도 구별할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 문장이 오늘 설교의 논지이다.
제가 방금 전 구분과 구별이라는 두 가지 용어를 사용했다.
"구분"은 규정에 따라 전체를 분리하는 것이고, "구별"은 차이에 따라 분리하는 것을 말한다.
예) 책중에 수학책과 과학책을 분리하는 것은 "구분"이다.
라면중에 진라면과 신라면을 분리하는 것은 "구분"이다.
이렇게 성질에 차이가 없는 대상을 분리할때에는 "구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반면에 차이에 따라 분리할시에는 "구별"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결혼과 연애는 구분이 아니라 구별된다.
왜? 결혼과 연예는 전혀 다른 성질이다.
진짜와 가짜도 구분이 아니라 구별한다.
전혀 다른 성질이기 때문이다.
칭의과 성화는 구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는 같은 성질이기 때문이다.
칭의와 성화는 같은 모양 같은 성질이다.
즉 믿음과 행함은 구별되지 않는다. 같은 모양 같은 성질이다.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야고보서에서는 "아브라함"과 "라합"을 소환한다.
아브라함 이야기(21-24)와 라합 이야기(25)가 나온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므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해 보였다(22)
기생 라합도 하나님의 정탐꾼들을 접대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증명해 보였다(24)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한다"(22)
믿음이 "실"이라면 행함이 "바늘"이고, 믿음이 "바늘"이라면 행함이 "실"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본문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몸과 영혼을 구별할 수 없듯이 믿음과 행함도 구별할수 없다"(26)
믿음과 행함은 구별되지 않는다.
행함은 믿음의 결과이다.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만 그 믿음의 실체가 드러난다.
믿음과 행함은 구분될수는 있어도 구별되지는 않는다.
믿음과 행함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행함"이 없는 "믿음" "믿음"이 없는 "행함"은 있을 수가 없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도의 믿음은 행함으로만 증명이 된다.
믿음은 언어가 아니다. 믿음은 행동이다.
앞으로는 여러분의 믿음을 행함으로 입증해야 한다(15-16)
이 논지를 우리 개인에게 적용한다. 3단논법으로 설명한다.
1. 성도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칭의" 교리를 믿는 것이다.
"칭의"는 이미 이루어진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말한다. 과거형을 사용한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건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이다. "칭의"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다.
2. 성도는 그 믿음으로 우리 개인이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믿어야 한다.
"성화"이다.
"성화"는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구원이다. 미래형이다. 미래형 구원이다.
'성화"는 아직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칭의를 받은 모든 성도는 성화의 과정 중에 있다.
3. 성도는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우리 자신의 인격을 하나님의 인격으로 성화시키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우리의 성격과 기질은 변하지 않는가?
왜 우리의 성격이 거룩하게 되지 않는 것인가? 그 이유?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암암리에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고 있다.
1세기 교인들처럼, 야고보서에 등장하는 성도들처럼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는 행동파" "나는 믿음파"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믿음은 있는데 내 성격은 안 변해"라는 말을 스스럼 없이 한다.
이렇게 말하는 성도들이 바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는 성도들이다.
우리가 바로 이런 성도이다.
믿음과 행위를 구별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여야 한다.
우리의 기질과 인격이 예수님의 기질과 인격으로 변해가야만 한다.
거룩하게 되어져야만 한다.
이렇게 되도록 수 없이 시도해야한다. 노력해야 한다.
앞으로는 이런 말을 하지마라.
"예수 잘 믿어도 성격이 안 변하더라" "이 나이에 내 기질이 바뀔까?"
이런 말을 하는 성도들이 누구인가?
자신이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은 믿음과 행함을 구별하는 성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인격을 하나님의 인격으로 만들기란 쉽지 않다.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성격이 거룩하게 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어렵기 때문에..
어렵다는 사실을 야고보서의 저자도 알고 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는없다(3:2)
"실수가 많으니"
"우리는 실수하는 일이 많으니"(공동번역본)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완전한 삶을 살수는 없지만 성화의 삶을 견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프로야구가 포스트시즌에 돌입했다. 프로야구선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항목중 하나가 타율이 있다.
대체로 3할 정도가 고타율의 기준이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타율 3할을 유지할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올해 정규시즌 타율 1위는 엔씨의 손아섭선수이다.
339리이다. 10번의 타석중 세번정도 안타를 친다는 의미이다.
이런 선수가 전체1위이다.
우리나라 프로야구사상 정규리그 전체 타율1위는 백인천선수이다.
1982년. 412리이다. 10번의 타석중 네번정도 안타를 친다는 의미이다.
한미일 통틀어 역사상 타율이 10활이었던 프로야구 선수는 없었다.
10번 타석에 들어서서 10번 모두 안타를 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프로야구 선수가 노력하지 않는가? 3할 타율이라도 유지하기 위해서 피와 땀을 쎁아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가지기는 힘들다. 불가능하다. 이 사실을 야고보서의 저자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도 3할정도는 유지해야 되지 않겠는가?
10번 정도 타석에 들어서면 3번 정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 우리 모두는 거룩의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자신의 기질을 거룩한 기질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성화의 단계를 거치고 있는 것이다.
축복한다.
여러분이 이미 가진 믿음으로 우리들의 성격과 기질을 바꿀수 있다.
태생적으로 아니면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피폐해진 우리의 기질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믿음으로 불안감과 열등감과 외로움을 쫓아내야 한다.
믿음으로 함부로 말하는 습관 그리고 예의 없는 행동, 약한자들을 소외시키고 무시하는 나쁜 습관들을 몰아내야 한다.
기질과 성격을 믿음으로 바꿀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목적이다.
믿음은 우리의 기질을 바꿀수 있는 유일한 도구이다.
믿음은 우리를 거룩한 상태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우리의 믿음을 행함으로 드러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