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안개처럼 사라지는 인생
3대 독자인 우리 오빠와 나는 12년 차이다. 유년 시절 오빠와 같이 보낸 추억은 기억에도 없다. 그는 서울 가서 공부하고 방학 때만 잠시 내려왔다 돌아가는 친척 오빠 같은 존재였다. 눈빠지게 방학을 기다리는 엄마와는 반대로 방학이 되어 오빠가 집에 오는 게 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다. 책 가져와서 공부하자고 하면 완전 경직되어 망부석이 된다.
오빠가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빈틈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완벽 그 자체였다. 다정다감한 모습은 볼 수 없고 그냥 두려웠다. 그래도 방학 때 집에 올 때 좋은 학용품 사다주는 것 한가지는 좋았다. 오빠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까지 마치고 중매로 스물여섯살에 스물한 살된 신부를 만났다. 처가 집 과수원에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가을날 야외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무뚝뚝했던 성격이라도 올케한테는 다정다감한 최고의 남편이었다. 내가 중학생 당시 영어를 가르쳐 줄 때는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오빠와 그렇게 단란한 가족으로 함께 산 것도 1년 조금 넘는 세월이었다.
오빠는 자식이 태어나자 독립해야 된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백일 조금 넘은 핏덩이 질녀를 데리고 강원도 황지란 곳으로 떠났다. 엄동설한이지만 누구도 그의 독립을 막지는 못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손녀가 조금 크고 봄이라도 되면 분가하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고등학교 교사 교생실습까지 마쳤던 오빠가 하필이면 장사를 하겠다고 강원도 골짜기로 갔을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었다.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차려 풀빵 장수부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혼자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도움을 거절한 강직한 성격이었다. 허리띠 졸라매고 고생 고생하면서 몇 년 뒤 정선에 가게를 마련하고 포목점을 차렸다.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광산 경기도 좋았지만 정찰제를 했기 때문이다. 손님들은 그 집에 가면 바가지 안 쓴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물건 깎아 달라고 하면 다른 가게 가서 사라고 하면서 손님을 보냈다. 그런 것이 오히려 손님들에게 믿음을 주었다.
오빠는 책 읽는 것을 참 좋아해서 늘 책을 끼고 살았다. 서울로 물건 하러갈 때면 서점에 가서 책을 산 뒤 기차에서 보았다. 가게를 볼 때도 시간만 있으면 책을 읽는 오빠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다. 남아수독오거서( 男兒須讀五車書 ) (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에 실은 만큼의 책을 읽으라는 말)를 몸소 실천한 박학다식한 오빠였다. 그러나 그런 게 죽음 앞에서는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때는 수명이 짧았다. 삼사십 대가 중년, 오십대면 노인 축에 들었고 환갑 해 먹으면 장수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노후대책을 위해 근검절약하는 생활을 하던 오빠였다.
평소 말 수 가적은 오빠는 군대 갔다 휴가를 나온 아들과 좀 더 가까이 지내야겠다는 생각에 수안보온천을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이 몇㎞ 안 남았을 때 안심하고 운전대를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아들은 목욕한 후라 피곤했던지 깜빡 조는 바람에 중앙선을 넘어 마주오던 트럭과 충돌하는 대형 사고가 났다. 오빠는 평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규정법규를 철저히 지키면서 완벽하게 살았다. 그런데 잠시 아들에게 운전대를 넘긴 게 인생 최고의 실수였다.
조카는 얼굴에 유리파편으로 피투성이가 되었고, 오빠는 다리가 문에 끼고 안전벨트가 풀리지 않아 탈출하지 못했다. 차가 한시간에 한대도 잘 다니지않는 한적한 길이었다. 다행히도 사고 트럭운전자는 차는 파손되어도 사람은 다치지 않아 몇㎞나 되는 파출소를 걸어가서 신고를 했다.하지만 경찰이 와도 수습이 힘들었다. 지금은 119가 있어 그런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고 5시간 만에 겨우 수습이 되어 아들은 외상이 크니 원주 큰 병원으로 이송했다. 오빠는 외상이 없어 정선 시골 의원으로 갔다. 의사가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가는 도중 숨졌다. 53세의 나이에 열심히 산 죄밖에 없는 오빠가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내장 파열, 남에 일인 줄만 알았던 교통사고가 하나 밖에 없는 오빠에게 찾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정말 인생 별거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이다. 나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물론 미래도 중요하지만 지금이 나를 위한 기본 바탕이다.
아내와 2남1녀 자식들이야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지만 오빠 인생은 뭔지. 내일을 알 수 없고 한 순간 안개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이다. 오빠의 죽음은 나에게 살아가는데 큰 교훈을 남겨주었다. 오늘 하루도 기운내서 행복하게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