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진리 주장에 대한 붓다의 검증 가능한 "열 가지 기준": 탈진실의 정체를 밝히는 기준의 비판적인 검토 (2) |
본문 번역:
이 글은 2019년 11월 22일, Religions Journal에 출판된 논문을 저자 범산 최종일 박사와 뉴욕주립대에서 불교를 강의하고 있는 주현 박사의 허락을 얻어 본지 편집위원인 송광섭 박사가 미주현대불교 독자를 위하여 번역한 것이다. 본지에 두번에 걸쳐 소개한다.
이 글을 싣을 수 있도록 협조해주신 저자와 번역을 해준송박사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원제목과 저자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각주와 참고 문헌은 지면 관계로 생략하니 필요한 분은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The Buddha’s Empirically Testable “Ten Criteria” Challenges the Authenticity of Truth Claims: A Critical Review and Its Potential Applicability to Debunking the Various Post-Truths
Jay J. Choi, doctorjaychoi@yahoo.com and
B. Hyun Choo, bhyun.choo@stonybrook.edu
Religions 2019, 10(12), 645; https://www.mdpi.com/2077-1444/10/12/645/html
초록:
종교 이론과 수행을 연구하는 현대의 독자들은 실증되지 않은 다양한 진리 주장과 세계관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한 주장은 종종 서로 모순되고, 독자를 갖가지 오해와 잘못된 기준으로 이끌게 된다. 불교에서는 붓다가 존재의 본질에 관한 진리를 깨달았으며 삶의 고통으로부터 궁극의 자유, 즉 “무상 정등각”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붓다는 어떻게 제자들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확신시킬 수 있었을까? 그러한 붓다의 논거는, 좋은 교육은 받았지만 끊임없는 디지털 정보의 확산으로 과부하가 걸린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붓다는 특히 깔라마 경에서 경험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열 가지 기준”의 지침을 제시하는데, 이 지침서는 이성적인 논리와 도덕성이 결합한 통합적 상호작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붓다가 제시한 방법이 본질적으로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속성을 가지며 또한 현대 과학의 기본 원리를 수용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붓다의 방법론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교육학적인 접근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종의 도덕적인 수련법임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 독자들에게 하나의 판단기준점으로, 감정과 개인적인 신념에 주로 의존하는 편향된 탈진실로부터 올바른 진실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키워드: 붓다의 열 가지 기준, 깔라마 경; 에-히빠시꼬 Ehipassiko; 경험주의; 실용주의; 사의(四依Four Reliances), 네 가지 위안(Four Assurances),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 탈진실(post-truth)

6. 빠알리 불교학자 등의 시각을 통한 초기 불교의 실용주의적 경험주의자 접근
붓다는 깔라마 경에서 실증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을 정교하게 기술했는데, 이 지침은 많은 학자들이 개인적 관찰과 검사를 익숙하게 사용하는, 과학적이고 귀납적인 방법으로 비유하고 있다. 붓다는 단순 논리와 연역적 사고를 넘어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탐구조사”라고 말한다. 붓다가 불충분하다고 여기는 "그럴듯한 추론"이란, 단순한 해석적 논리나 추론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는 합리적 이성과 논리를 수용한 후에 이를 실천으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직접 경험을 통해 알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편 불교는 고전 과학의 엄격한 원리를 수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므로, 따라서 붓다는 현대 용어로 정의되는 연구과학자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깔라마 경에 나타나는 그의 필수적인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경험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이며,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시험할 수 있고 논리 정연한 이론을 거쳐야 하는 현대 과학의 기본 원칙과 연관이 있다.
초기 불교에서 보이는 이러한 경험주의적 접근은 주요 불교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연구되고 정리되어 왔다. 빠알리 불교학자들, 특히 케이 엔 자야틸레키, 데이비드 제이 칼루파하나, 구나팔라 다르마시리 등은 초기 불교는 경험적 관점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했다; 자야틸레키는 초기 불교는 일종의 경험주의 (Jayatilleke 1964, pp. 463-464), 칼루파하나는 논리적 실증주의(Kalupahana 1976, pp. 3 - 24, and 1975, p. 185); 다르마시리는 초기 불교가 갖는 합리적, 과학적, 경험적 지향성을 강조한다 (Dharmasiri 1988, pp. 298-299). 이들 학자들은 “불교”의 경험주의의 개념은, 정신이 여섯 번째 감각으로 포함되는 초지식(超知識P. abhiññ-,아비냐Skt. Abhijñ- 아비즈냐)을 갖는 타당한 연장선에 있다고 주장한다. 아비냐라는 용어는 붓다나 아라한이 일반적으로 지닌 능력으로써 도덕적인 고결한 생활과 집중적인 명상 수행을 통해 습득한 초자연적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번역된다. 이러한 능력들은 마음대로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능력[신족통], 초인적 청력[천이통],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능력[타심통], 자신의 전생 모습을 알 수 있는 능력[숙명통], 천리안[천안통], 모든 오염의 소멸을 성취하는 능력[누진통]을 포함한다.
자야틸레키와 칼루파하나는 소위 “개인적인 앎”에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일상적이고 초능력 감각을 통해 습득되는 것과 그러한 인식에서 파생되는 추론에 의해 습득되는 것이다 (Jayatilleke 1964, p. 416, Kalupahana 1975, p.185). 두 가지 형태의 인식의 차이는 침투력의 정도 차이인 것 같다. 칼루파하나는 초감적 지각은 일상적인 감각에 의해 인식되지 않는 상응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붓다는 일상적인 감각 경험과 초감각적인 인식 모두를 폭넓게 포용하는 하나의 경험주의의 형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Bodhi 2000, p. 1140). 칼루파하나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붓다는 절대자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브라만 또는 아트만 등) 또는 초경험적(transempirical) 실재를 거부하고, 자신을 경험적으로 주어진 상황에 국한했다. 현대 논리적 실증주의자 (Logical Positivists, Empiricists)와 견줄 만한 방법을 따라서, 그는 때때로 언어학적 분석에 의존하고 형이상학의 무용성을 나타내는 경험에 호소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자신의 경험주의 결과로써, 인과관계를 실재로 인식하였으며, 그것을 그의 가르침의 본질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붓다는 언급한다: '인과를 보는 자는 담마를 본다.' (Kalupahana, 1975, p. 185)

그러나 칼루파하나는 붓다가 일상의 감각적 인식에 입각한 그러한 경험적 접근의 한계를 이해한 것 같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주의 범위와 지속시간, 영혼의 본질, 그리고 성자의 운명에 관한 '열 가지 질문'에 관한 붓다의 침묵을 생각해 보자 (Kalupahana, 1975, p. 185). 칼루파하나는 붓다가 이 열 가지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한 것은 전적으로 경험주의의 한계 때문이며, 초월적 현실을 묘사하는 개념의 불가능성 때문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앞서 에드워드 콘즈는 "일부 열성 선전가들은 그러한 합리성과 현대 과학과의 유대감을 지나치게 강조해왔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주님 붓다는 자신이 영국 경험주의 철학 전통의 지지자로 징집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누가 그 검사를 할 수 있을까?" (Conze 1962, p. 26). 이러한 주장에 비추어 프랭크 호프만은, 마음은 백지상태 위에 쓰인 감각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로크의 글에 근거하여, 초기 불교는 경험주의의 형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불교의 가르침이 초감각적 능력을 포용하는 여섯 번째 감각으로서의 마음을 포함하는 “경험주의”의 타당성 있는 확장이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있다 (Hoffman 1982, p. 155). 호프만의 견해는 다른 학자들- 예를 들면 데이비드 몬탈보에 의해 공유되었는데, 그는 "불교 경험주의 논지"가 확실히 거짓이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Montalvo 1999).
이른바 불교 경험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비판론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찬성론자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붓다의 시대와 2천 년이 훨씬 넘는 시기에 나타난 경험주의 철학의 출현 사이의 광대한 기간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기원전 5세기의 붓다의 가르침을 17세기 영국 경험론자들에게 비교하여 어떻게 서로 관련이 있는지를 조사하기 위한 대담한 시도는 언뜻 보기에 증거가 확실한 사례(a prima facie case)로 보일 수도 있으나, "말 앞에 수레를 놓기"와 같아서 비교하려는 노력을 역으로 적용하면 더 합리적일 수 있을 것이다; 즉 경험주의를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심지어 과학적인 지향성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붓다의 사상과 비교하면 유사성과 차별성의 양쪽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비교하는 것은 더욱 면밀한 검토를 보증하기에 충분히 유용한 시도가 된다 (Hayes 1995, p. 75).
그러나 비구 보디의 경고대로, 붓다의 가르침은 과격한 회의론이나 불합리한 개인적 진리의 창조에 대한 지지의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보디는 말한다: "문맥 밖에서 인용된 단 한 구절을 근거로 붓다는, 모든 교리와 믿음을 무시하고 그의 담마는 진리에 대하여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도록 초대하는 자유 사상가의 도구일 뿐인, 실용주의적인 경험주의자로 만들어졌다" (Bodhi 1988).
7. 실용주의적 경험주의 관점에서 본 깔라마 경에 나타난 붓다의 가르침
흔히 붓다의 “고귀한 침묵”(Noble Silence) 또는 '부적절한 질문에 대한 답변 거부'는 불교학자들과 수행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예를 들어 니까야에는 붓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 유행승 금욕주의자 왓차고따와의 대화에 관한 붓다의 침묵을 언급하고 있다. 세상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세계는 유한한 것인가, 무한한 것인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아니면 같은가? 고타마 존자는, 돌아가신 뒤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또는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일까? 이에 대응하여, 비록 붓다가 침묵하였다는 좋은 예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붓다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한 답변이 없다며 열반의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어느 가능한 생각은 다른 어떠한 추측처럼 부정확한 견해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분명히 설명했다:
왓차, 세상은 영원하다는 추측성 견해는 덤불 같이 뒤얽힌 견해, 황무지 같은 견해, 뒤틀린 견해, 동요된 견해, 속박된 견해이다... 그것은 고통, 분노, 절망, 그리고 열병으로 포위되어 있고, 각성으로, 탐욕의 빛바램, 소멸로, 평화로, 직접적인 지식으로, 바른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나는 이러한 재난을 보기 때문에 이런 일체의 추측성 견해 중 어떤 것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Ńānamoli and Bodhi, 1995. pp. 591 ̶ 592)
현대의 지식인들은 과학적, 실증적 세계관의 맥락 안에서 위의 진술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붓다의 가르침과 과학적인 분야는 어느 정도 시행 가능한 전략을 공유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리처드 헤이에스가 질문한 대로, "불교와 실용주의 사이의 결혼이 지속될까?" 헤이에스는 마지막 결론에서 "나는 그 질문에 대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은 아직 너무 이르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Hayes 2009).
여기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긍정적인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 결혼은 데카르트-뉴턴식 이원론을 넘어서는 가장 최신의 과학적 이론에 기초하여 볼 때 지속될 것이다. 현재의 과학적 방법론과 철학, 특히 실용주의적 경험주의가 붓다의 담론과 어떻게 병행할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지식인들은 종종 어떤 알려지고 주장되는 진리에 대하여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입증하기 위해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을 채택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진실 공방의 진정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흔히 “반권위주의”가 강조되는데, 모든 데이터는 경험적으로 시험 될 수 있는 증거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진실은 시험 결과에 따라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판명될 수 있다. 깔라마 경에서 붓다는 타당한 지식을 추구함에 있어서 종교적인 진실이나 지혜를 지지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과학적 원칙과 실용주의적인 경험주의와 일치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과 과학적 방법론의 유사성과 불균형에 대해서는 약간의 해명이 필요하다.
인간의 지식을 연구하는 경험주의는 지식이 주로 감각 경험, 특히 실험적인 감각 경험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Curd and Psillos 2008, pp. 129-138). 마찬가지로, 과학적 방법의 지지자들은 모든 가설과 이론들이 선험적 추론이나 직관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연계의 관찰에 대응하여 시험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과학적인 방법의 중심 개념은 진리의 진술이 분명한 감각적 증거에 근거하여 경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관찰 그리고 실험에 의해서만 시험 될 수 있는 것이다. 피터 마키는 철학적 경험론자들은 감각 기반 경험에서 도출되지 않는 한 아무런 지식도 적절하게 추론되거나 추정할 수 없다고 하지만, 합리주의에서는 지식은 감각과 무관하게 이성으로부터 파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Markie 2017). 경험주의/실용주의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는 이 글의 범위를 훨씬 넘는 관계로,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그 문맥적 배경에 대한 간단한 설명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과학의 경험론적 방법은 현대 과학 방법론의 기본 초석이 되어 왔는데,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이 그의 철학적 저술 「노붐 오르가눔」(The Novum Organum)에서 처음 제시한 바와 같이, 명시적이고 귀납적인 방법으로 공식화되었다. 베이컨에 따르면 정확한 절차는 실험을 수행하고,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하며, 추가 실험을 통해 이들의 재현 가능성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모든 지식은 감각 경험으로부터 파생된다는 이론이 실험과학의 발전에 따라 17세기와 18세기에 널리 개발되었다.
1870년경부터 20세기 초까지, 찰스 샌더스 퍼어스(1839-1914), 윌리엄 제임스(1842-1910)와 존 듀이(1859-1952)에 의해, 경험주의와 관련은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철학적 전통인 "실증주의"가 제시되었다. 제임스는 이를 초기에 발전시킨 퍼어스에게 전반적인 공을 넘기면서 "실용주의"라는 용어를 대중화하였는데, 과학의 규범적 논리에서 적용되는 규제적 원리인 실용주의 금언은 퍼어스가 1878년 성명에서 발표한 바와 같이, 생각을 원만하게 펼치도록 안내하기 위한 권고로서 공식화한 것으로 “우리의 사고를 명확히 하는 방법”에 대한 가장 적절한 방안으로 제안하였다.
그렇다면, 개념 이해의 확실성을 획득하는 세 등급의 규칙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는 개념의 대상이 실제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결과를 가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이러한 결과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우리의 대상의 개념 전체다.. (Peirce 1878, p. 293, Buchler 2018, p.31)
실용주의 철학은 인간 경험에서 실제로 그것들을 시험하기 위해, 그것들에 작용하는 여러 사고/사상의 실질적인 적용을 강조하고, 변하지 않는 우주보다는 변화하는 우주에 초점을 맞춘다 (Gutek 2013, pp. 76, 100). 테디 워드는 퍼어스가 합리주의의 주요 사상을 도입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합리적 개념이 의미가 있을 수 있으며, 경험적 관찰을 통해 수집된 자료를 넘어 필연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생각을 채택했다고 말한다. 퍼어스는 귀납적 추론과 연역적 추론을 경쟁적 추론이 아닌 보완적 방식으로 설정하는 데 기여했다 (Ward 2015). 이를 위해 관찰에 대한, 가장 단순하고 가장 “이용할 수 있는” 그리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명을 찾기 위한 논리적 추론의 한 형태인 귀추법(abductive reasoning) 개념을 추가해서 적극적인 검증보다는 가능한 결론에 도달한다 (Sober 2013, p. 28). 퍼어스가 연역, 귀납, 귀추법에 관한 그의 초기 견해를 밝히는 중에 가장 중요한 외연의 확장은 진리를 찾기 위한 체계적 절차에 대한 그의 견해에 세 가지 주장 양식을 통합한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과학적 방법”이라고 불렀고, 그것은 오늘날 경험주의에 근거한 과학적 방법의 중요한 개념적 기반이 되고 있다 (Burch 2014). 이러한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퍼어스는 “상상할 수 있는 실제적인 효과"의 개념에 해당하는 모든 사상개념을 개발하면서, 실용주의의 금언이 단순히 실용적인 범위를 넘어서 어떠한 “가능한 상상의 비행"을 허용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 상상이 "가능한 실제적인 효과" 위에 궁극적으로 내려앉기만 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귀추법의 논리로서의 실용주의, 하버드 실용주의 강의, (Peirce, "Pragmatism as the Logic of Abduction", Lecture VII of the 1903 Harvard lectures on pragmatism, p. 226).

제임스는 그의 실용주의적 진리 이론을 확립하기 위하여 이성주의와 상대적으로, 때로는 '논리적 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로 불리기도 하는 급진적 경험주의(radical empiricism), 혹은 논리적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급진적 경험주의는 먼저 경험에서 도출된 용어로 정의가 가능한 개념만으로 구성되며, 다음으로, 직접적 특정한 경험에 의한 사실의 진술로서 구성되며, 마지막으로 일반화된 결론이 주어진다 (James 1909, p. 138). 그는 "급진적 경험주의가 되려면 직접 경험하지 않은 어떤 요소도 그 구조 안에 포함해서는 안 되며, 직접 경험하는 어떤 요소도 그들로부터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철학에 포함되기 위하여, 그 연결하는 경험 자체는 경험된 관계가 되어야 하며, 경험된 모든 종류의 관계는 그 체계에서 다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것으로” 간주하여야 한다 (James 1904, p. 315). 제임스는 "직접적으로 파악되는 우주에는 간단히 말해서 외부와 관계없는 초자연적 결합 지원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연결되거나 연속적인 구조를 소유하고 있다"고 본다 (James 1909, p. 138).
실용주의는 실제 경험과 행동에 근거한 사상의 개입을 강조하지만, 제임스의 경우는 논리적 실증주의는 과학적 지식의 정당성에 더 관심이 있다 (Fumerton et al. 2016). 제임스는 '실용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제목의 실용주의에 관한 두 번째 강의 (James 1907b)에서 이 용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실용주의적 방법은, 다른 방법으로는 끝없이 계속될지도 모를, 주로 형이상학적 논쟁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세상은 하나인가, 많은가?-운명인가, 자유스러운가?- 물질적 또는 정신적?...; 그리고 그러한 관념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다. 그러한 경우에 실용주의적인 방법은 각각의 실제적인 결과를 추적함으로써 각각의 개념을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만약 저 관념이 아닌 이 관념이 사실이라면 어느 개인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인가? 만약 실질적인 차이가 무엇이든 추적될 수 없다면, 대안은 실질적으로 같은 것을 의미하며, 모든 논쟁은 가동되지 않는다. 분쟁이 심각할 때마다, 우리는 한쪽이 또는 다른 한쪽이 옳아야 하는 어떤 실질적인 차이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James 1907, What Pragmatism Means, p.25)
제임스는 계속해서, 만약 이 실용주의적인 방법이 적용된다면 많은 철학적 논쟁은 간단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이 얼마나 많은 철학적 논쟁들이 구체적인 결과를 추적하는 이 간단한 테스트를 받게 되는 순간 무의미하게 붕괴하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철학의 전체 기능은 여러분과 나에게 우리 삶의 분명한 시점에 있어서, 이 세계 방식이 진실한가 혹은 저 세계 방식이 진실한지에 대하여 어떤 확실한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인지 알아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James 1907, What Pragmatism Means, p. 27). 제임스는 철학적 사상의 현금 가치 혹은 유용성에 초점을 맞췄는데, 그것은 그가 의미했던 관련 없는 철학적 논쟁들이 종종 무의미하게 무너지고 따라서 아무 현금적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많은 부질없는 철학적 논쟁에 대한 중요한 의의를 추구하는 문제에 대한 붓다의 언급, 즉 그 논쟁들은 “열반으로 유도하는가, 아닌가”를 현저하게 상기시킨다. 여기에서 제임스의 용어, “유용한 현금 가치”는 붓다의 열반(Nibbāna)으로 대체할 수 있다. 그러나 제임스는 자연현상에 대한 초자연적인 설명을 추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불교적 인식을 배제하는 것 같다. 여기서 그의 부정은 고차원적 혹은 초자연적인 지식은 과학적으로 의미가 없다고 하는 엄격한 고전 과학의 원칙과 상당히 일치한다. 초자연적 원인을 허용하는 것은 일상적인 인간 지각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초월적 영역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에 걸쳐 퍼어스의 실용주의적인 금언은 오늘날 경험주의적 바탕을 가진 과학적 방법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따라서, 실용주의 운동은 그것의 공리주의적인 개념의 실체적 응용을, 초기 불교의 경험주의적 접근에 한 걸음 더 가깝게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현대 독자들은 어떻게 합리적으로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일반적인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래에 더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요약하면, 빠알리 니까야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보는 것 또는 직접적인 지각 경험에 근거해야 한다는 견해는, 인식과 귀납법적 추론이 앎의 수단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불교를 경험주의의 한 형태로 분류한다. 서양의 종교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붓다는 감각적인, 그리고 초감각적인 지각을 포괄하는 확장되고 포괄적인 “경험주의”를 전개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영국의 경험주의 전통은 데카르트적 세계관과 뉴턴적 구조에 따른 감각적인 부분에만 기초한 경험주의를 활용한다. 이와 관련해서 프릿조프 카프라는 역동적이고 총체적인 체계는, 충분히 과학적이며 물리적 현실의 가장 진보된 과학 이론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더 나아가서 현대 과학에서는 “이성적 정신의 극단적인 특수 전문화의 발현”이 지금 종교의 본질과 접촉하고 있다고 강조하는데, 이러한 종교의 본질은 “직관적 마음의 극단적인 특수 전문화의 발현”이라고 주장한다 (Capra 1982, pp. 47-49). 그는 과학 이론은 결코 실재에 대하여 완전하고 결정적인 묘사를 제공할 수 없으며, 다만 그 본성에 대한 근사치만을 기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카프라와 루이지는 과학자들은 진리를 다루지 않고, 오히려, 체계적 전형안에서 모든 과학적인 개념과 이론은 실재의 본성에 대한 제한적이고 개략적인 묘사를 기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Capra and Luisi 2014, p. 82,).
불교에서 말하는 지식의 본질과 경험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널드 로페즈가 정교하게 기술한 불교 인식론의 표준 범주 중 하나를 도입하는 것이 유용하다. 로페즈는 세 개의 그룹으로 분류한다: 직접적인 감각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전지”(現前地The Manifest)와, 추론으로 얻어지는 “숨겨진 지외”(智外 The Hidden), 그리고 직접적인 감각이나 추론으로 얻어질 수 없는 “깊이 숨겨진 지심외”(智甚外The Very Hidden)이다 (Lopez 2008, pp. 141-142). 나타나는 “현전지”는 직접적인 인식으로 파악될 수 있는 안식과 같이 눈에 보이는 색깔이나 모양을 지각하는 것을 의미하고, 숨겨진 “지외”는 직접적인 인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추론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으로, 예를 들어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불타는 존재를 유추하는 것이 포함된다. 로페즈는 숨겨진 범주에 환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개념, 전지전능의 가능성, 미묘한 인연 화합으로 이루어진 모든 사물에 나타나는 무상한 모습, 환생 등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몇 가지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 중 어느 것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직접 알 수는 없지만, 이성에 의해서 추론할 수는 있다. 세 번째 깊이 숨겨진 “지심외” 는 역시 깨우치지 못한 중생에게는 직접적인 인식은 물론, 추론을 통해서도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고, 오직 붓다나 깨달은 존재에게만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여러 하늘의 특징과 덕행이나 비도덕적인 행위의 결과 등 미묘하게 작용하는 인과 법이 포함된다 (Lopez 2008, p. 141). 불교와 과학의 이론을 수용하는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불교 스승 중 하나인 티베트의 14대 달라이 라마는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깊이 숨겨진 지심외”는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접근이 어려울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예를 들어 그는 세상에 왜 이렇게 많은 종류의 생명체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와 같은 인과 법칙의 가장 미묘한 작용을 지적하고 있다 (His Holiness the Dalai Lama 2005, p. 28).
일반적으로, “깨달은 마음과 깨닫지 못한 마음”이라는 용어에 대해 이성적인 지식인들은 어떻게 일상적인 인식의 범위 안에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불교, 특히 중국, 한국, 일본의 선 전통에서는 깨달은 마음의 본질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며, 따라서 명시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나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 지향적인 지식인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음에 제시하는 견해는 초지식(superknowledge, abhiññā), 신통(神通)/명지(明知)와 같은 평범한 인간의 인식을 초월하는 무제한적이고 방대한 초감각적 인식에 근접하는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인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것은 얼마나 인간 의식에 침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분류해보기로 한다.
비록 이 새로운 관점은, 더 고차원적이거나 초정상적인 지식이 과학적으로 반드시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것이 가시적인 감각 영역의 초월을 지지한다고 해서 “비과학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전자기 스펙트럼(electromagnetic spectrum)의 가시적인 부분인 가시광선의 성질을 살펴보자. 전자기 방사선이 한쪽 끝에는 우주선 (감마선, X선)을 포함하고 다른 쪽 끝에는 전파를 포함하고 있다. '보이는 빛'은 방사선이 눈의 망막 내 광수용체를 자극해서 시각적 감각을 만들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방사선의 범위는 가시 스펙트럼(visible spectrum)이며,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서 보라색(380nm)에서, 다른 쪽 끝에서 빨간색(760nm)으로 보이는 범위를 표시한다. 스펙트럼의 단위로서 나노미터(nm)는 10억분의 1미터의 길이에 해당한다. 가시 스펙트럼의 범위는 0.00038 ~ 0.00076mm에 불과하며 이는 광대한 전자기 스펙트럼의 극히 일부분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색 빛은 가시 스펙트럼의 모든 파장으로 구성되는 반면, 이 스펙트럼 내의 개별 파장은 스스로 다른 색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백색”이라고 부르는 빛은 사실 백색이 아닌 편의상의 이름일 뿐이다. 가시 스펙트럼의 푸른 끝 너머에는 자외선 복사(200~380nm)가 있고, 열과 종종 관련되는 적외선 복사 (760~1,000,000nm)는 적색 끝에 바로 벗어나 존재한다. 이 두 가지 형태의 방사선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소리의 본질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의 청각 시스템은 자연에서 발생하는 소리 중 제한된 범위만 들을 수 있으며, 확실히 모든 범위는 아니다. 음향 주파수는 헤르츠(Hz) 또는 초당 사이클로 측정된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최소 수준의 소리는 주파수에 크게 의존한다. 보통 인간은 20 Hz (초저음 <20Hz)와 20,000Hz(초음파 >20K Hz) 정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가장 듣기 좋은 것은 약 3-4 kHz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전자기 스펙트럼으로 볼 때, 인간의 눈은 극히 제한적이고 거의 눈이 먼 시각장애이며, 귀는 과장 없이 거의 들리지 않는 청각장애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계에 존재하는 광대한 전자기 스펙트럼을 고려할 때 인간의 지각 인식은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제한된 범위의 인간 인식의 한계는 붓다가 지지하는 집중력과 통찰력 훈련의 정도에 따라 의식에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신통과 같은 초지각적 지각을 성급하게 "비과학적"이라고 꼬리표를 붙이는 것 자체는 “과학적”으로 무효가 될 수 있는데, 이러한 앎은 잠재적으로 제 육감으로서 우리의 "일상적" 이해의 타당한 연장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현대 독자들이 통찰력의 범위를 넓히고, 합리적으로 과학적인 관점의 맥락 안에서 도덕성의 문제를 부담 없이 포용하도록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8. 중아함경에 나타난 붓다의 ”열 가지 기준”의 분기와 대승불교의 사의(四依)
빠알리어로 기록된 깔라마 경이 설일체유부의 한역본인 아함경 중 중아함 16 (T138b13-439c22, 중아함경 제 3권, 16, pp. 62-68)에 기록된 가람경과의 흥미로운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 붓다는 빠알리어 경전에서처럼 악의 세 근원으로 탐욕, 진심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며, 사무량심의 수행으로써 자신을 이것들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으며, 결국 네 가지 위안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카알라아마인들의 의심에 대한 붓다의 답변에서 그는 카알라아마인들에게 의혹이나 회의론을 품지 말라고 충고하고, 곧바로 "여러분들은 사후세계에 대해 알 수 있는 순수한 지혜가 없다"고 말한다. 여러분 자신은 어떤 행위가 짓는 바 죄이고 어떤 행위가 짓는 바 죄가 아닌지를 아는 순수한 지혜가 없다" (Bodhi 2012, pp. 73 - 74, 중아함경 제 3권, 16, p. 63). 그런 다음 그는 도덕적인 위반으로 이어지는 업장의 세 가지 악한 뿌리를 설명하고, 직접 체험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단정적으로 이야기한다. 비구 보디는 이러한 차이점에 대하여 중아함 16은, 붓다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권위자로 널리 인식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빠알리 판에 해당하는 인도 경전 원문을 표준화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Bodhi 2012, pp. 1652 - 1653).
대승 전통에서는 여러 가지 주장된 진리의 진위 여부에 대한 신뢰의 문제에 붓다의 메시지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 메시지는 원래 깔라마 경에 선포되었다가 나중에 "사의"(四依, Four Reliances, pratisāraṇa)로 진화되었다. 특히 다양한 대승 경전에 나오는 사의에 대한 그의 가르침에서 붓다는 그의 체계에 대한 오해의 여지 없이 틀림없는 이해를 위한 뚜렷한 지침을 제시한다. 사의경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네 가지 의지처; 즉, 말하는 사람(스승)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진리(법)에 대한 의지할 것 (依法 不依人); 표현한 말이나 문장에 따르지 말고, 가르침의 뜻에 따라야 하며(依義 不依語); 의미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완전하지 못한 가르침(neyāstha, interpretable)에 의지하지 말고, 의미가 이미 알려진 완전한 가르침(nītārtha, definite meaning)에 따를 것이며 (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분별에 의존하는 지식(vijñāna, ordinary consciousness)에 의지하지 말고, 참지혜(jñāna, wisdom)를 따를 것이다(依智 不依識). (Thompson 2008, p. 32) (이기영, 원효사상연구, 大智度論, p. 717)
이러한 문구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스승의 명성에 기대지 말고 가르침 자체의 본질을 살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진리이지, 결코 스승의 개인적 특성이 아닌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2) 교육에 관하여: 단지 미사여구, 즉 가르침의 시적 표현에 의해 영향을 받지 말고, 실제 뜻이 의미가 있어야 만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3) 가르침의 의미에 관하여: 우리는 전통적 진리의 해석할 수 있는 잠정적 의미에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궁극적 진리에 대한 결정적인 의미에 의존해야 한다.
(4) 결정적 의미에 관하여: 불순한 이원론적, 산만한 지식에 의존하지 말고, 직접 경험을 통한 고원한 지혜에 의존해야 한다.
사의는 붓다의 열 가지 기준만큼 철저하게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초기 설법의 단순화된 버전으로 여겨지며, 유마경, 대반열반경, 대지도론, 사의경과 같은 다수의 대승 경전에 등장한다. 통상적인 순서인 "가르침의 의지처(teaching-reliance)," "뜻의 의지처(meaning-reliance),"결정적 의미의 의지처 (definitive meaning-reliance),” “지혜의 의지처(wisdom-reliance)"의 순서는 다양한 수행 실천의 단계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에티엔 라모트에 의하면, 사의경은 여러 불교학파가 확립될 때까지 그 내용이 명확한 형태로 되어있지 않았다. 그 경의 개념은 초기의 불교 경전으로부터 이미 생성되고 있었고, 이 경의 목적은 법에 대한 인간 권위의 하위 종속, 문자의 종속, 정확한 의미의 경에 대한 잠정적 의미의 경, 그리고 직접적인 앎(direct knowledge)에 대한 산만한 의식의 종속을 확인하는 것이다 (Lamotte 1988, p. 12). 이 전형적인 사의 인식체계는 수행자가 각 단계를 밟아 가르침의 진리를 평가하는 데 사용함으로써, 수용할 것과 버릴 것을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하여 올바른 수행의 길로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도움을 주는 명확한 기준의 선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9. 현대 사회에서 팽배하는 다양한 탈진실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는 "열 가지 기준"의 적용 가능성
21세기에 우리는 종종 합리적 이성과 증거보다는 열정과 감정에 기반한 수 많은 견해와 탈진실을 포함하는 도전적인 문제들과 계속 씨름하고 있다. 인류의 진화는 불행하게도 반드시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붓다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적용하여, 어느 정도는 회복할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되는 합리적인 인간의식을 고취할 목적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대중 매체수단(Social Media Network)를 통하여 급속하게 퍼지는 잘못된 정보와 편견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인종적으로, 또한 나라 간, 지역 간, 모든 계층의 간극을 넓혀, 증오와 단절을 일으키고, 또한 많은 사람들을 불행과 고통에 빠뜨리는 것을 바로 오늘도 직시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 몇 년 동안, 딕셔너리 닷컴(dictionary.com)은 다양한 유형의 잘못된 정보에 대한 진화하는 이해와 관련된 단어들을 정의하고, 다음과 같은 관련된 용어들을 갱신해 왔다: (1) 오보-오도하려는 의도의 유무와 관계없이 퍼지는 허위 정보, (2) 역정보-고의로 호도하거나 편향된 정보, 조작된 서술 또는 사실, (3) 탈진실-사실과 무관하고, 여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감정적 호소를 이용하는 환경에서 나타난다, (4) 가짜 뉴스-흔히 선정적인 성격의 가짜 뉴스로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또는 공적인 인물, 정치적 운동 등을 홍보하거나 신빙성을 잃게 하기 위하여 널리 공유되거나 배포되도록 만들어지는 뉴스, (5) 확증 편향-기존의 사상과 신념을 뒷받침하는 방식으로 사전에 정보를 처리하고 따져보는 경향에서 비롯되는 편견, (6) 암묵적 편향-무의식적 연관성에 근거하여 정보를 처리하는 경향에서 비롯되는 편견, (7) 동종선호-나이, 성별, 민족, 개인적 신념 등과 같은 확실한 특징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강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려는 경향에서 오는 편견 등을 말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잘못되고 왜곡된 정보의 확산에 지혜롭게 대처할 수 하는가? 놀란만한 일은 고대 깔라마인들의 의문에 대한 붓다의 구체적인 조언은 이러한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는, 이성적으로 교육받은 현대 독자들에게 아직도 설득력이 있고 유효하며 합리적으로 적용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며 이것은 일견 다행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10. 맺음말: "에-히빳시꼬 Ehipassiko”-"모두에게 와서 볼 것을 초대하다"
최근 미디어 오보의 폭발적 발생과 검증 불가능한 주장의 확산은 관심 있는 지식인 사회에 잠재적인 도전을 제시해왔다. 따라서 진정한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현대 독자들은 논증 추론의 필수적인 통합을 보여주는 친숙한 과학적 방법에 따라 이른바 제기된 주장들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어느 종교 단체나 지도자가 이러한 문제에 부딪히면서 다양한 사회, 종교, 환경 문제에서 의미 있는 중요한 일종의 기준점 역할을 할 수 있는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한 적이 있었는지 질문을 해본다.
역사상 많은 종교 지도자 중, 붓다는 유일하게 독특한 방식으로 어떻게 진실 주장을 증명할 것인가라는 도전적인 주제를 다룬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존재의 본질을 깨우치고 염처수행을 통하여,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마침내 해탈을 얻었다고 한다. 니까야에 기술된 바와 같이, 붓다는 직접적인 통찰력을 이용해 해답을 찾고, 괴로움의 바탕, 발생과 소멸의 원인, 그리고 망상의 불꽃이 소멸할 수 있는 해결방법 등을 발견했다. 그는 모든 중생이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스스로 최상의 진리를 알 수 있도록 그가 추구했던 원리를 제시하고 가르쳤다. 리처드 곰브리치는 붓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이며 가장 위대한 인격자였으며, 그의 사상이 세상을 더 온화하고 더 지혜로운 개화된 곳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Gombrich 2009, p.1).
그러나, 깨달음의 경험은 틀림없이 어느 종교의 수행자에게도 궁극적인 최상의 개인적 경험으로 추정되지만, 그 경험, 소위 “한 소식”에 대한 주장이 과연 "올바른 깨달음"에 상응하는지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심각한 숙고가 필요할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는 합리적인 독자들이 디지털 정보 홍수나 다양한 탈진실로부터 올바른 진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붓다는 특히 깔라마 경에서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지침인 “열 가지 기준”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실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깊은 논리적 추론과 도덕적 의제의 통합에 근거하고, 그의 제안 방법이 하나의 도덕율로서 검증할 수 있고 설득력이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경전에서 붓다는 명확한 기준점을 유지하는 자유로운 탐구를 통한 수행을 강력하게 옹호하는데, "나와 내가 하는 말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던 당대의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그 대신, 붓다는 그의 제자들에게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가르침의 기본적인 사실들에 관한 모든 증거을 면밀히 조사한 다음, 그것들이 정말로 진리를 나타내는지 분별할 수 있는 실험을 해 보기를 촉구했다. 그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업보를 일으키는 불건전한 뿌리나 독을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만약 어떤 가르침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침해하고, 해를 끼치거나, 고통을 유발할 경우, 그것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반대로 어떤 가르침이 공익을 위하고 일반적인 복지와 행복으로 이어진다면 그것을 채택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경은 궁극적인 진리와 지혜를 추구하는 명제에서 깊은 논리적 추론과 변증법적 원리를 모두 사용하는 것을 옹호하고 있다. 따라서 “열 가지 기준”은 자율적 추리력을 충분히 확대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점 역할을 함으로써 명확한 길을 비추어 준다. 주목할 점은 "열 가지 기준"이 보편적 적용 가능성, 방법론적 타당성 및 검증 가능성 등 과학의 기본 원리를 포함하는 합리적 이성의 ‘완전한 일체성’을 들어내어 입증하는 방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붓다의 가르침의 독특한 자질 중 하나인 “에-히빳시꼬”Ehipassiko - "모든 사람이 와서 보라고 초대하는 것"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 수행의 성취를 목격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을 금지하는 것은, 실재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해 담마의 경험적 검증을 설득력 있게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붓다의 “열 가지 기준”이 이천 오백여 년 전에 선포되었지만 그런데도 그것은 현재에도 놀랄 만큼 본래의 활력을 유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진리를 탐구함에 있어서 귀납적 추론과 합리성을 기치로 삼는 현대 과학의 원칙을 적절히 아우르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붓다의 “열 가지 기준”은 다양하게 제기되는 이른바 “진리에 대한 주장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데 기준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 글은 초기 불교에서 붓다의 전략을 살피고, 이러한 전략이 현대에 범람하는 오보의 물결에 맞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으려고 시도해 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