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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인물상 · 129] 북한 공산 정권의 수립과 한국 천주교회
해방 전후의 평양교구 상황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영국·중국 정상들은 “적절한 절차를 거친 후에(in due course)” 조선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킨다고 하여, 최초로 한민족의 독립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일정한 절차로서 신탁통치(信託統治)를 언급하였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는 미국·영국·소련 3국이 카이로 회담에서 확인된 조선의 독립과 신탁통치를 재확인하였다. 같은 해 7월 포츠담회담에서는 미국·영국·중국 3국이 다시 카이로 선언의 준수를 확인하였다. 이처럼 일제와 전쟁을 벌여온 연합국들은 일제 패전 후에 식민지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에 대해 여러 차례 협의를 통해서 국제적인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8월 15일 한국은 해방을 맞았고, 동시에 미·소 양국의 냉전 가운데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해방 직전인 1944년 한국 천주교회에는 만주를 포함하여 약 18만 5천 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남한에는 서울·대구 등 2개의 대목구와 광주·전주·춘천 등 3개의 지목구 등 모두 5개의 교구에 약 11만 명의 신자가 있었고, 북한에는 평양·함흥 등 2개의 대목구와 덕원 면속구를 합하여 모두 3개의 교구에 약 5만 5천 명의 신자가 있었다. 만주에는 연길교구가 있었는데 약 2만 명의 신자가 있었다. 하지만 남북이 갈라지면서 한국 천주교회 역시 분단의 아픔을 감수하여야 했다. 만주의 연길대목구, 북한의 평양대목구·함흥대목구·덕원 면속구, 그리고 서울대목구의 일부였던 황해도 지역이 소련군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고, 38선 이남의 서울과 대구대목구와 춘천·전주·광주지목구 등이 미군의 점령하에 놓였다.
평양지목구는 1939년 7월 11일 대목구로 승격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추방하기 전까지 신부 43명(메리놀회 35명, 한국인 8명), 수녀 39명(메리놀 수녀회 15명, 한국인 24명), 전교 회장 112명, 신자 26,424명, 예비 신자 3,170명, 본당 21개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였다.1) 하지만 태평양전쟁 발발로 평양대목구의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되었고, 평양대목구는 서울대목구장이 관할하게 되었다. 이후 1943년 3월 2일 한국인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1906~1950?) 신부가 평양대목구장에 임명되고 같은 해 6월 29일 평양대목구의 첫 한국인 주교로 서품을 받았다.
평양대목구는 1944년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 주교 1명, 신부 14명, 수녀 31명, 신학생 19명, 평신도 28,400명에 이르렀다. 평양대목구 관할 본당은 평양시 4개(관후리[館後里], 기림리[基林里], 대신리[大新里], 서포[西浦]), 평안남도 9개(강서[江西], 마산[馬山], 성천[成川], 숙천[肅川], 순천[順川], 영유[永柔], 안주[安州], 중화[中和], 진남포[鎭南浦]), 평안북도 8개(강계[江界], 마전동[麻田洞], 비현[枇峴], 신의주[新義州], 운향시[運餉市], 의주[義州], 중강진[中江鎭], 정주[定州])였다.
해방이 되자마자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는 일제에 징발되어 고사포 진지로 사용되고 있던 관후리 주교좌 성당 부지를 되찾는 일에 착수하였다. 홍용호 주교는 부감목 김필현(金必現, 루도비코, 1909~1950?) 신부를 책임자로 임명하고 당시 평양대목구 재단 사무를 보고 있던 주교 비서 강창희(康昌熙, 야고보, 1912~1945)에게 협조하도록 하였다. 1946년 3월 29일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과 재단법인 평양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홍용호 주교 간에 매매 계약서가 조인되었다. 그리고 4월 1일 일제에 몰수당했던 관후리 성당 부지 소유권에 필요한 등기가 완료되었다.2)
평양대목구는 “대성당을 우리의 손으로 세우기로 목표를 세우고” 평양교구 사업 기성회를 조직하고, 총책임자 김필현 신부, 기성회장 최창우(崔昌禹, 요셉), 상임이사 강유선(姜有善, 요셉)을 임명하였다. 이 기성회는 성당 건립 사업 계획을 추진하고 건축비 모금을 시작하였다. 홍용호 주교는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cius Sauer, 辛上院, 1877~1950) 주교에게 건축 설계와 기술 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 북한 사정으로 보아 대성전 건축은 불가능하다고 거절당하였다. 하지만 홍용호 주교는 단념하지 않고 1946년 8월 5일 기초 공사에 착수하여 1947년 9월 1일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북한 공산 정권의 수립과 평양교구
북한 정권이 수립된 이후 1948년 12월에 접어들어 북한 당국은 신축 중인 관후리 성당을 평양인민위원회에 양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서를 받은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는 김일성에게 성당을 위원회에 양도하라는 명령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3) 이후 대성당 양도 문제는 보류되어 건축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관후리 주교좌 대성당은 준공을 보지 못하고 1949년 12월 10일 공산 정권에 강제 몰수당하였다.
홍용호 주교는 덕원 수도원과 함흥대목구의 성직자·수도자들이 체포되고 성당이 폐쇄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즉시 북한 당국에 항의문을 전달하였다. 즉 북한 정부는 1948년 12월에 베네딕도회의 덕원 수도원 경리 담당 신부와 수도자를 체포하고, 1949년 5월에는 원산대목구의 사우어 주교 아빠스와 수도원장 신부 등 40명을 체포·투옥하였다. 또한, 신학교 교장 등 독일인 신부 8명, 한국인 신부 4명, 수도자 22명을 투옥하였다. 한국인 수사 26명과 신학생 73명을 내쫓고 수도원과 신학교 등 모든 교회 시설물도 몰수하였다.4) 그래서 소유 토지 대부분을 몰수당하고 단지 5헥타르의 정원과 경작 중인 땅만 남았다.5) 1949년 5월 14일 홍용호 주교는 서포(西浦)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원을 방문하던 중 그를 수행하던 두 소년과 함께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다.
홍 주교가 납치된 후 1949년 12월까지 9명의 신부가 잡혀갔다. 6월 10일 부감목 김필현 신부, 교구 경리부장 겸 주교 비서 최항준(崔恒俊, 마티아, 1920~1950?) 신부, 대성당 기성회 이사 강유선이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고, 7월 8일에는 평북 강계 본당의 석원섭(石元燮, 마르코, 1919~1950?) 신부가 고열로 앓던 중 연행되어 갔는데 최삼준(崔三俊, 일명 자백[慈伯], 프란치스코, 1907~1950?) 회장이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7일에는 평양 선교리 본당의 박용옥(朴瓏玉, 티모테오, 1913~1950?) 신부, 관후리 본당 보좌 서운석(徐雲錫, 보니파시오, 1922~1950?) 신부, 기림리 본당 주임 이재호(李載虎, 알렉시오, 1919~1950?) 신부가 체포되었다. 관후리 본당과 대신리 본당에 파견되었던 수녀들은 상수구리 분원에 연금되었다. 12월 10일 신의주 본당 주임 홍건항(洪建恒, 갈리스토, 1913~1950?) 신부, 11일 영유 본당 홍도근(洪道根, 요한 세례자, 1915~1950?) 신부, 12일 장두봉(張斗鳳, 안드레아, 1917~1950?) 신부가 차례로 체포·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다.6) 그리고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도 평양대목구 신부들은 북한 당국에 연행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이처럼 1947년대 말부터 연길과 38선 이북 지역에서 교회가 공산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는다는 소식이 한국 천주교회에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경향잡지』는 1948년 2월호에 교회 재산 몰수, 신자들에 대한 신앙 압박, 교회 전멸, 성직자의 수난 등과 같은 종교 박해의 진상을 게재하였고, 이어서 연길교구 소식(1948년 5 ·7·8월호)과 북한교회 소식(1949년 4·8월호, 1950년 2월호) 등의 기사를 보도하였다. 1949년 6월호에서는 “북한 공산당 정권은 지난 5월 10일 돌연 덕원 보니파시오 주교와 신부, 수사, 원산의 신부, 수녀들을 납치하여 감금하고, 수도원 신학교 수녀원 건물과 가구 전부를 몰수하였고, 평양 홍 주교는 서포에 가셨다가 귀환 도중 납치되어 행방불명되었다고 한다.…북한에 본격적 종교 박해가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염려를 금할 수 없다.”라고 보도하였다.7) 교황사절 패트릭 번(P. Byrne, 方溢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엄중히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8)
한국 천주교회의 반공주의
한국 천주교회는 19세기 유럽에서 유물론에 기초한 과격한 공산주의 사상이 유행하게 될 때부터 하느님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를 경계해 왔다. 그들이 노동자와 농민을 선동하여 그릇된 사상의 포로로 만드는 것을 보고, 역대 교황들은 가톨릭 정신에 근거해서 여러 번 건전한 사회 교리를 선포하여 대중들이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고, 공산주의의 무신론을 비판·배척해 왔다.9) 교황 비오 12세는 1946년 3월 이탈리아 총선거를 앞두고 행한 연설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면서 가톨릭을 파괴하는 공산주의에 투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10)
한국 천주교회 역시 『경향잡지』에 「파티마의 성모」를 1947년 7월호부터 1948년 8월호까지 총 14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할 것과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승공(勝共)을 강조하였다.11) 『가톨릭청년』도 1947년 11월호에서 비오 11세 교황이 1937년에 선포한 「무신적 공산주의를 배격함」이란 회칙을 인용하여, 공산주의는 인간을 기계 부품처럼 취급하여 인권을 파괴하고 부모의 권리를 배제하고 결혼의 불가해소성을 배척함으로써 가정의 행복을 파괴한다고 비판하였다. 이어서 볼셰비키 공산주의는 나 자신은 물론이고 전 조선 20만 가톨릭 신자의 적이며 삼천만 동포의 적이며 전 세계 그리스도교인의 적이라고 하였다.12)
1947년 9월 한국의 초대 교황사절 패트릭 번 주교 역시 공산주의와의 사상 대결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1947년 10월 천주교 청년 연합회가 서울 명동의 계성여자중학교에서 주최한 연설에서, “현재의 가톨릭 운동은 공산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역량”이라고 강조한 것을 비롯하여,13) 1948년 5월 연희대학 초청 연설14) 등에서 수시로 반공을 강조하였다.15) 해방 직후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 역시 반공을 강조하였다. 1948년 5월 총선거를 앞두고 노 주교는 공문을 보내 “공산주의적 세력 밑에 강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하루바삐 천주께서 주신 인권과 자유를 찾기 위하여, 또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이 회개하기 위하여” 성모께 특별히 전구하도록 하였다.16) 1948년 2월 서울·광주·춘천·대구·전주 등 남한의 교구장들은 「남조선 모든 감목의 연합 교서」를 통해 국토 분단과 공산주의 준동으로 혼란한 현실을 걱정하면서 “나라의 독립과 사상의 안정과 종교의 평화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 운동을 전개해 줄 것을 신자들에게 당부하였다.17)
교황청과 한국 천주교회 내의 반공 사상은 해방 직후의 정치적 혼란과 좌우익 대결 상황 속에서 점차 남북한 단독 정권 간의 대항 구조에서 남한을 대변하는 정치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반공 이념은 남북한의 분단을 고착화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대다수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 지도층의 반공 사상과 해방 직후 한국사회에서 전개된 치열한 좌우 대립과 무력 충돌의 현장을 목도하는 상황 속에서 전개된 반공을 내세운 남한 정권 수립에 압도적인 찬성과 지지를 보냈다.
한국 천주교회의 반공주의 형성 배경과 특성
한국 천주교회의 반공주의는 1920년대 이래 가장 중요한 사목 방침으로 채택되었다.18)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천주교회의 교계 제도와 함께 해방부터 한국전쟁기 한국교회가 공산 정권으로부터 받은 박해 체험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한국교회에서 반공이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숙명’이자 ‘의무’였다.19) 그러나 이 반공 이데올로기는 단순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수준을 넘어 친미·반공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한국 천주교회의 친미적 태도는 미군정과의 친화 관계가 형성되면서부터 강화된 것이기도 하다.
교회의 친미적 태도가 단순한 친화적 태도의 수준을 넘어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로 연결된 것은 세계 질서의 개편과정에서 나타난 교황청의 입장과 역시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 체제가 미·소 간의 냉전 체제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교황청이 선택한 것은 미국에 대한 지지였다. 교황청의 입장은 한국 천주교회의 정치적 입장에 영향을 미쳐 친미적 태도의 형성과 미군정의 정책 동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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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133쪽.
2) 관후리 주교좌 성당 환수 작업은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위의 책, 180~185쪽 참조.
3) 최후통첩은 1. 시 위원장의 요구는 ‘북한 인민 공화국’의 요구인가? 시 위원장 개인의 계획인가? 2. 대성당을 내놓으라는 것은 헌법에 규정된 종교 자유를 침범하는 것이다. 3. 이 성당은 3만 신자들의 소유이다. 주교나 어떤 개인이든 간에 양도할 하등의 권한을 가지지 못하였으니 이 이상 괴롭히기를 중지하라. 4. 강제로 몰수하려면 우리는 소련 정부를 통해서 로마 교황청으로 보고할 것이며 국제적 판결을 요구할 것이다(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위의 책, 1981, 202쪽).
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함경도 천주교회사』, 1995, 382~383쪽.
5) 장정란, 「한국 성 베네딕도 수도회 출신 순교자 연구 : 시복·시성 대상 인물 분석」, 『교회사연구』 33, 2009, 369쪽.
6)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221~236쪽.
7) 여진천, 「천주교회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인식과 기여」, 『교회사연구』 32, 2009, 161~166쪽.
8) 최선혜, 「1940년대 천주교회의 한국 선교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메리놀 외방전교회의 활동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7, 2015, 150쪽.
9) 교황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1891)와 비오 11세의 「사십 주년(Qurdragesimo Anno)」(1931), 비오 11세의 「하느님이신 구세주(Divini Redemptoris)」(1937).
10) 『가톨릭청년』 1947년 4월호, 17·19쪽.
11) 『경향잡지』 1947년 7월호~1948년 8월호.
12) 『가톨릭청년』 1947년 11월호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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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톨릭청년』 1947년 11월호, 2~3쪽.
14) 『경향잡지』 1948년 5월호, 75쪽.
15) 번 주교의 반공은 여진천, 2009 ; 최선혜, 「한국 전쟁기 천주교회와 공산 정권―초대 주한 교황사절 번 주교(Bishop Byrne)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44, 2014 ; 이민석, 「‘하느님의 종’ 패트릭 번 주교의 선교활동과 순교」, 『아시아가톨릭연구』 2, 2023 참조.
16) 『경향잡지』 1948년 5월호 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