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추억
金 時 宗(한국경찰문학회 대구 경북지회장)
나의 유년 시절을 외가에서 보냈다. 영천시 삼창면 한천이다. 한천은 경주 김씨의 집성촌을 이루었고, 마을 뒤 야산은 북풍을 막아 주며 산자락을 따라 60여 호가 옹기종기 흩어져 마을을 이루고 살았었다.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내성천은 삼창 소재지에서 금호강 지류와 합수한다.
우수가 지나고 경칩이 되면 동민 하든 개구리도 잠에서 깨어나고, 매화와 산수유가 피고 질 때면 나는 외삼촌을 따라 마을 뒷산 진 덤벙(지명) 맑은 물에서 물고기를 잡고 물장난을 즐기던 유년 시절이 아련해진다. 지금은 가슴에 추억으로 머무는 듯하다.
나는 문간 사랑채에서 상투를 튼 외할아버지와 거처를 같이했다. 사랑방은 새벽녘이나 저녁때가 되면 소죽을 끊이기 때문에 방은 언제나 훈기가 가득했다. 방 한쪽에는 곰방대의 불씨를 위해 화로에 담배 불씨가 꺼지지 않았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생각난다.
외할아버님은 나를 몹시 귀여워하셨다. 소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천자문을 배워두면 좋다고 말씀하시었다. 고희를 넘긴 연세에 곰방대로 천자문의 글자 한 자씩 짚어가며 음과 뜻을 가리키신 할아버지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지 70여 년이란 긴 세월이 바람처럼 사라진 듯 세상이 무정스럽기도 했었다. 지금은 마을 뒷산 양지바른 논 실 언덕바지에 내외분을 모셨다고 한다.
생전에 해수(咳欶) 때문에 가래침을 많이 토하면서도 공방 대는 손에서 놓지 않았었다. 나에게 극진한 사랑을 주신 옛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절어온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연년생으로 출생한 동생이 있었다. 그런 탓에 외가에서 오랜 생활이 나의 고향처럼 정감이 가는지도 모른다.
밤이 깊은 동지 때가 되면 외삼촌은 전등으로 참새를 잡기 위해 초가지붕 처마 끝에 새집을 찾아 헤맬 때도 있었다. 참새를 잡아 새털을 뽑고 참기름을 발라 화롯불에 구어면 쫄깃쫄깃한 그 맛이 입안에 군침을 돌게 하였다.
석양이 짙어지면 산자락 초가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오르는 연기가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아름답기도 하였다.
물질문명의 발달로 농촌에도 생활양식이 많이 변했다. 덩달아 주택 문화도 변천되었다. 유령 같은 농촌에 새 마을 사업 덕분에 도로가 포장되고, 전기가 들어와 문화생활을 즐길 만큼 변모했다. 자식들은 도시로 이주하였고, 노령의 부모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며 대대로 내려온 전 답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 현실이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조상을 숭배하고, 예절 바른 민족성을 지닌 국민이었다. 그러나 절제되지 않은 서구 문화의 유입으로 전통적인 유교 사상은 붕괴하였고, 집단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주의 심화로 사회가 병들어 가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인간의 삶도 시류에 따라 지각(知覺) 변동이 심했다. 인간 만사도 시대 흐름에 영향을 받은 듯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지는 듯하였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삭막한 엄동설한이 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생태계도 자연환경 변화의 적응에 몸부림친다. 봄의 여신도 기류를 타고 야생화 번식 매개체 역할에 충만한 계절이다.
봄은 만물의 영장(靈長)이라는 인간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는 계절이 아닌가 싶다. 초야를 물들인 봄도 대기권의 기상 변화에 따라 곳곳에 초원을 이루며 빠르게 북상하고 있는 듯했다.
지금 외가에는 등 굽은 외삼촌 내외분이 적막 같은 고향을 지키고 있다. 해마다 봄이면 내성천을 따라 매화꽃과 산수유가 어우러진 한천에 봄 향기가 물씬 풍기기도 한다. 마을 뒤 야산에도 살구꽃이 아름답게 핀 한천이 그리워진다.
봄은 여인의 가슴에도 봄꽃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듯 치마폭 끝에 봄의 여운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약력
《경찰문학》《영남문학》 수필 신인상 / 50회 한민족 통일 문예대전 대구협의회 회장상, 한국경찰문학 발전 유공상, 제6회 송암 문학상, 국제펜 문학회 공로상외 다수, / 시집 《봄의 지열》수필집 《영혼》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