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늦깎이의 변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또 잠을 자는 꿈이었습니다.
그 잠 속의 잠결에 손님이 찾아와 큰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비몽사몽이어서 그분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뒤늦게 부스스 일어났고,
그 손님과 마주 대했을 때, 그분은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 이렇게 늦게라고 나를 만났으니 다행일세,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게지!”
그 후의 내용은 기억되지 않았지만 너무나 신비한 꿈이었죠.
해몽이란걸 신뢰하지 않기에 꿈을 무시하지만, 잊히지 않는 꿈도 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내 생애에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다른 사람들을 뒤쫓아가느라고 애를 쓰는 늦깎이임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그래서인지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용어가 마음에 쏘옥 들어옵니다.
내가 결코 큰 그릇도 아니고, 큰 그릇이 될 수도 없을 테지만, 남보다 뒤진 사람으로서
자신을 달래고 위안받을 말로 이만큼 좋은 용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항상, 막차를 타듯, 뛰다가 넘어지고 또다시 일어나서 달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겨우 따라잡을 것 같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는 서울 흑석동에서 남영동으로 버스나 전차로 통학했습니다.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절, 가끔은 막차를 타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알아준다는 선린상고에 입학하고, 몇 개월 만에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원하시는 부친의 의사(意思)에 따라 야간학급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매일 밤 아홉 시가 되어 학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재잘거릴 여유란 없었습니다.
막차를 타기 싫어서 서둘러 남영동 버스정류장으로 달렸기 때문입니다.
앞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밀려드는 버스들은 승객이 이리 뛰고 저리 달리게 하는 일이 예사였지요.
목적지가 다른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면서 흑석동행 버스를 찾다가 보면,
어느새 남영극장에서 마지막 회 관람을 마치고 밀려 나오는 관객들과 뒤범벅됩니다.
어물어물하다가는 영락없이 막차를 타겠지만, 회고해 보니 막차를 떨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시내버스 차장은 안내양이 아니라 건장한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문을 여닫으며 “스토옵, 오라이”를 힘차게 외치는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습니다.
빽빽이 들어찬 승객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는 게 쉽지 않지만,
억센 차장의 손놀림과 운전사의 절묘한 운전 솜씨가 합작이 되어 승객은 빨려들 듯이 안으로 밀려들어 갑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동작동 국립묘지 못미처 비게라 불리던 곳이 흑석동 버스 종점이었습니다.
아주 가까운 곳에 집이 있어서, 혹시 버스 안에서 졸더라도 결코 집을 지나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고교졸업을 앞두고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으니까 일찍 뜻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지요.
졸업하던 해에 바로 신학교 입학원서와 추천서를 제출(‘60년도)했으나,
신학교에 입학한 것은, 10년이 훌쩍 지난 ’70년도였고,
목회자가 되기까지 또 10여 년이 흐른 ‘82년이었고,
목사의 칭호를 받은 것 또한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92년이었습니다.
늦깎이가 분명하죠?
누구인들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겠습니까마는,
어머니께서는 7남매의 맏이인 나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서원을 하셨답니다.
초태생(初胎生)은 모두 하나님 것이니 거룩히 구별하여 바치라는 말씀이 근거였고, (출13:2)
‘하나님 것’은 곧 목사라고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의(自意) 반, 타의(他意) 반’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비록 막차일망정, 차를 떨구지 않고 타고 다니던 훈련(?) 덕에,
늦게나마 서원(誓願)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아니, 삶에 허덕이며 갈지(之)자로 비틀거리는 큰아들의 헌신을 포기하지 않으신
‘어머니의 기도’가 성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지각한 사람은 또 지각할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변화하는 현실에서 여전히 늦깎이로 살면서,
여전히 남을 뒤따라갈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그래도 도전(挑戰)을 멈추지 않는 건, 늦깎이 버릇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겠죠? -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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