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 군사작전 개시 이후 러시아 당국의 언론 통제에 맞서 발트해 연안의 라트비아 리가로 근거지를 옮긴 대표적인 반정부 성향의 TV 채널 '도쥐'(비 라는 뜻)가 현지에서 방송금지 조치를 당했다. 라트비아 미디어 감독기관인 '미디어 위원회'(National Council of Latvia on Electronic Media)는 6일 TV 채널 '도쥐'가 방송 규정을 다수 위반했다는 이유로 방송 면허를 취소했다고 발표했다.
라트비아 미디어위원회 대표, '도쥐' 채널의 방송 허가 취소 발표/젠(dzen.ru) 노보스티 캡처
당국에 의해 외국 에이전트(대리인)으로 지정된 러시아 매체 로스발트.ru는 이날 "라트비아 미디어위원회가 국가 안보 및 공공 질서를 위협하는 '도쥐' 채널의 방송법 위반 사항들을 평가한 뒤, 방송 금지 조치를 취했다"며 "라트비아어 사용 문제와 크림반도(의 러시아령) 표기 지도 사용, 방송 앵커의 부적절한 단어 구사 등을 예로 들었다"고 보도했다. 미디어 위원회는 또 "라트비아 국가안보국의 비공개 자료도 참조했다"면서 "'도쥐' 채널 지도부가 위반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 부득이 면허를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도쥐' 방송 측은 라트비아 미디어 위원회의 결정에 대해 "해명할 기회마저 주지 않았다"고 반발하면서 유튜브 채널로 방송을 계속할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라트비아 당국은 '도쥐'의 유튜브 채널 접속마저 차단할 계획이다.
TV채널 '도쥐'의 방송 장면. 얼굴 보이는 이가 나탈리야 신데예바 CEO. (후원) 서명캠페인을 시작한다는 자막이 떠 있다/트위터 캡처
'도쥐' 채널 운영자(CEO)인 나탈리야 신데예바는 '러시아 군대'를 '우리 군대'로 부르는 등 부적절한 단어를 구사했다는 이유로 최근 해고한 알렉세이 코로스텔레프에게 사과하면서 다시 방송에 복귀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도쥐' 채널의 면허 취소는 언론 자유를 위해 해외로 옮겨간 반정부 성향의 러시아 언론 매체들에게는 '반면 교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 가장 적대적인 국가 중 하나인 라트비아에서 대표적인 반정부 러시아 TV 매체의 활동을 금지한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러시아어판)는 "'도쥐'의 사례는 러시아를 떠나 서방에서 활발하게 정치및 언론 활동을 하는 반정부 아댱인사들에게는 놀라운 신호"라고 지적했다.
지난 2010년 개국한 '도쥐' TV 채널은 푸틴 대통령과 크렘린의 정책을 비판하는데 앞장서 왔다. 그만큼 러시아 당국의 압박도 많이 받았다. 시청자들로부터 후원금으로 운영자금을 마련g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지난해 8월 '외국 에이전트(대리인)'로 지정됐다. 든든한 후원자들은 바로 외국 NGO(서방 정부 지원?)들이었기 때문이다. 특수 군사작전에 대한 비판적 보도로 지난 3월 러시아에서 방송 활동이 금지된 '도쥐' 채널은 지난 여름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로 옮겨갔다.
해외로 근거지를 옮긴 반정부 매체는 '도쥐' 채널 뿐만이 아니다. 서방 외신이 '독립 언론'으로 부르는 반정부 성향의 매체들은 이제 리가를 비롯해 베를린, 그루지야(조지야), 리투아니아 등에서 러시아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크라이나 당국의 발표나 텔레그램 채널, 언론 보도를 마음껏 전달하고 있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러시아 독립 언론 매체들이 해외에서 러시아 정부가 숨기려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진실을 폭로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쟁을 치르는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극비 군사 정보의 유출 방지나 지지 여론 조작(?) 등을 위해 일정 수준의 정보 통제가 필요할 터인데, 이마저도 단호히 거부하는 게 '참 언론'이라는 주장으로 들린다.
서방 외신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 당국도 지난 달 '헤르손시(市)' 입성 직전 외신들에게 '헤르손 현지 보도의 자제'를 요청했으나, 무시당하자 일부 외신을 규제했다. 하지만 이를 크게 문제삼았던 외신은 눈에 띄지 않았다.
반정부 성향의 인터넷 매체 '메디아조나'(미디어조나)/캡처
해외로 떠난 러시아 반정부 매체로는 TV 채널 '도쥐'외에도 소련시절부터 인기를 얻은 '에흐 모스크비'(모스크바의 목소리)와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노바야 가제타’ 등이 대표적이다. 인터넷 매체 '미디어조나'도 러시아에서 '외국 에이전트'(대리인)라는 주홍글씨를 벗기 위해 해외로 근거지를 옮겼다. '외국 에이전트'란 타이틀을 앞세우고 보도하는 '로스발트.ru'와는 다르다.
흥미로운 것은 포탈 사이트 얀덱스(yandex.ru)의 뉴스 부문을 인수한 젠(dzen.ru)의 운영 방향. 젠의 기사 목록에는 여전히 '미디어조나' 등 해외 이전 매체들의 뉴스가 올라오고 있다. 온라인 접속의 차단망을 피할 수 있는 '가상 사설망'(VPN) 이용률이 크게 늘어난 것도 관심을 끈다. 이코노미스트는 “전쟁 전 러시아의 VPN 이용률은 전 세계 국가 중 40위 정도였으나, 지금은 1위이고, 러시아인의 절반 이상이 VPN을 사용한다”며 은근히 'VPN 사용 = 반정부 매체 접속'으로 연결시켰다.
하지만, 한 러시아 교민은 러시아에서 차단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를 계속 이용하기 VPN에 가입했다고 밝혔다. 러시아인들의 VPN 가입 목적도 반정부 매체 접속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 가능하다.
해외로 떠난 매체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역시 재정문제다. 러시아 기업의 광고는 물론, 유튜브를 통한 수익 확보도 서방의 대러 제재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크라우드펀딩이나 유료 구독도 비자와 마스터와 같은 해외 카드가 러시아에서 거래가 중단돼 거의 불가능하다. 남은 것은 외국 자선단체의 도움이다. '외국 에이전트'의 주홍글씨 이미지를 벗지 못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