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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는 사랑/고린도전서 13:1-8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오늘은 사랑의 여섯 번째 속성을 다룹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무례하다로 번역된 원어로 (아스케이모네이)는 “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다. 못되게 행동하다. 매력이 없다. 격에 벗어난 행동을 하다. 위치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다. 창피한 행동을 하다 비열한 행동을 하다 보기 흉한 짓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의 없고, 질서를 무시하고, 사랑스러움이 전혀 없는 막무가내의 행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례하다는 것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격(格)을 갖추지 못한 행위를 말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되먹지 못하게 행동하는 것이 무례함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부모에게 대드는 행동은 무례히 행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는 것도 무례한 행동입니다. 또는 학생이 자기 교사에게 욕하는 것, 교인이 목사의 멱살을 붙든 행동 등,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함부로 건방지게 행동하는 것이 무례함입니다.
똑 같은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원어로 신약을 찾아보니 고린도전서 7장 36절에 있었습니다. 개정 개역은 “그러므로 만일 누가 자기의 약혼녀에 대한 행동이 합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번역하였고, 새번역은 “온당하지 않게 대하는 것”, 공동 번역은 “떳떳하지 못하게 대하는 것”, 현대인의 성경은 “처사가 옳지 못하게 행함”이라고 하였는데 영어 해석을 보면 “무례하게, 불합리하게, 업신여기며 학대하는 식으로” 등으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즉, 고린도전서 7장 36절에서 무례하다는 것은 상대의 인격과 자존심을 전혀 개의치 않고 마치 내 물건이나 노예를 대하듯 함부로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에 대해 전혀 존경하는 마음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이 상대를 무시하고 막대하고 멸시하는 것이 무례이며, 심지어 학대 및 업신여기는 말과 태도로 모욕하는 것이 무례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러한 무례한 행동을 하는 자들을 “방자히 행하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즉, 헬라 원어 (아스케이모네이)에 해당하는 구약의 히브리어는 (포-루아으)인데 그 의미는 “주제를 모르다. 자신의 위치를 모르고 덤비다. 부끄러움을 노출하다. 고삐가 풀리다. 망하다”라는 뜻이고, 개역 성경은 이를 “방자하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방자하다”라는 말은 신약에서 “무례하다”는 말과 거의 동등한 의미로서 “건방지게 행동하다.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행동하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노출하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 원어에서 “방자함”은 철이 덜 든 어린 강아지 또는 훈련이 덜 된 개를 풀어놓으면 천방지축 엉망진창인 것과 연결됩니다. 고삐 풀린 방자한 개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멀리 도망을 가고 난리를 칩니다. 이곳 저곳에 오줌을 싸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물어 뜯어서 주인에게 큰 피해를 끼칩니다. 바로 이러한 방자함이 ‘무례’라는 헬라 원어가 지니고 있는 개념인 것입니다.
특히 출애굽기 32장에는 주의 백성이 하나님께 무례하게 행동한 대표적인 예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제 멋대로 하도록 풀어주어)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출 32:25).
이 뜻은 이 백성들이 고삐가 빠진 채 날뛰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영적으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는데 아론이 제 멋대로 하도록 풀어주니 방자하여져서 무례하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 방자하고 무례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주의 백성으로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종 모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대신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하고, 아론과 더불어 금송아지를 만들어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행한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방자한 것이요, 건방진 것이요, 무례한 행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방자한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고 공동체에 큰 모욕을 가져온 사실입니다.
종종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망나니 행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어른들이 혀를 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뉘 집 아들이기에 저 모양인가. 철이 안 들어도 어떻게 저렇게 안 들수 있을까. 전혀 교양이 없군. 가정 교육을 못 받았나 보군. 가문의 망신이요, 동네 망신일세”
과거에 한국의 모 대학교에서 전 세계에 해외 토픽으로 나갈 정도로 부끄러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바로 대학생들이 자신들의 교수님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삭발을 시키고 몽둥이로 구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그 대학은 얼마나 수치를 당하였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방자한 사람, 예절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가정, 또는 학교 나아가 그 사람이 속한 공동체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출애굽기 32장의 내용이 그러한 내용입니다. 영적으로 고삐가 풀려서 방자해진 것입니다. 훈련이 안된 백성이 잠깐 고삐가 풀어지니 망나니 짓을 한 것입니다. 방자한 상태가 되니 모세의 명령을 우습게 알고, 나아가 그들의 창조주요 구원주이신 하나님을 우습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뛰어 놀며 우상 앞에서 절을 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영적인 망나니 짓을 한 것인데, 이 행위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부끄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들은 심판하십니다.
[
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28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자기의 아들과 자기의 형제를 쳤으니 오늘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출 32:27-29)
하나님께서는 주의 공동체 안에서 무례한 자들을 결코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도를 지나친 무례함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둘째로, 성경에서 무례함이란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착각하여 주제 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어떤 선지자가 내가 전하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말을 제 마음대로 내 이름으로 전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신 18:20)
여기 “방자히”라는 말은 “무례히, 건방지게” 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허락하지도 않으셨는데,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지자로 세워 무슨 말씀과 권위를 주신양 건방지게 행동함을 의미합니다. 사실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를 도용한 것입니다.
곧, 선생이 아닌데 선생 행세를 하는 것이요, 선지자가 아닌데 선지자 행세를 하는 것이며, 영사도 아닌데 영사 행세를 하는 것이요, 목사도 아닌데 목사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거짓 선지자 및 거짓 사도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제 마음대로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신 18:22).
신기하게도 무례한 사람은 자신이 뭐나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경건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는 그들 마음 속 깊은 곳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기 때문에 어느새 교만하여지고 어리석게 된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 14:16).
이제 성경은 방자한 것이 도를 지나쳐 더 무례하게 행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히브리어로 <쥬으드> 라고 하는데 이는 < 포-루아으>를 훨씬 넘어서는 방자함입니다. 과거에 개역 한글은 “천자히 행하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직접 성경을 찾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신 1:43, 개역개정)
“내가 너희에게 고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고 천자히 산지로 올라가매”(신 1:43, 개역 한글)
한글 사전을 찾아보니, 천자하다는 것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제 멋대로 행하다. 지독하게 거만하게 굴며 오만방자한 교만한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등으로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개역 개정은 “거리낌 없다” “무법하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참조로 모든 권위 있는 영어 성경은 이 히브리어에 대해 “presumptuously : deadly arrogant.”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지극히 교만하여 제 멋대로 행하다”라는 뜻입니다.
신명기 17장 12-13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만일 천자히 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서 섬기는 제사장이나 재판장을 듣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라 그리하면 온 백성이 듣고 두려워하여 다시는 천자히 행치 아니하리라”(신 17:12-13, 개역 한글)
성경을 정리해 보면 무례함에 관하여 세 가지 관점에서 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본 예의가 없는 것이 무례함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다른 지체들과 함께 화목하게 지낼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공동체 내에서 예의를 지킬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형제, 자매 분들에게 예의를 잃고 무례하게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께서 과거에 있었던 교회의 사건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몇 년 전에 어떤 과격한 성도가 주일 예배 시간에 의자를 집어 던져서 예배가 중지되고 결국 경찰이 출동하여 그 교인을 체포하여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몇 년 후에 폐인 중에 폐인이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자녀들은 다 망하고 교회를 다 떠났으며 그 사람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데 아무도 돌아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를 해 주신 장로님이 하시는 말이 “하나님! 정말 무서우신 분이시다”라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일반 세상 사람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기본도 안 되는 사람입니다.
또한 기본 예의가 없는 예로서 성경은, 마가복음 7장 10-13절을 들 수 있습니다.
[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7: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7: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7: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막 7:10-13)
교회는 다닌다고 하는데 부모를 보양치도 않고 부모를 막 대하는 자들. 나아가 박대하는 자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들의 신앙은 가짜요 신앙인이기 전에 기본 예의도 없는 자들임을 동의하신 것입니다. 곧, 무례한 자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 어떤 집사님 가정을 심방하였습니다. 이분은 파티 스토어를 하시던 분이셨는데, (그곳에서는 디스카운트 스토어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가게 앞으로 할머니 한 분이 타주에서 버스를 타고 그분 가게 앞에 도착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류소로 할머니는 내리셨는데 자녀들이 그곳에 나오지 않더랍니다. 그 할머니는 조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들고 하루 종일 그 정류소에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에 제가 아는 그 집사님이 보다 못해 그 할머니가 안쓰러워서 가게로 불러 들여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잘 듣고 보니 일부러 자녀가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이곳까지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왔습니까?”
장남이 고함을 치며 전화를 끊더니 전화도 받지 않고 끊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늙으신 할머니는 길바닥에 앉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멍하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연락이 되지 않고 밤이 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안아서 집사님이 차비를 주어 버스에 태워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를 끝까지 거절한 그 아들을 나중에 알고 보니 글쎄, 그곳의 대형 교회 장로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 집사님이 제 앞에서 얼마나 분노하던지 모릅니다.
“목사님! 세상에 이럴 수 있습니까? 그 놈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교회 장로라고 앉아 있습니까? 그 놈은 짐승만도 못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기본 예의가 되지 못하는 사람을 무례한 사람, 방자한 사람, 천자한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들은 먼저 기본적으로 기본 예의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숙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선포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1).
둘째는, 권위 질서에 대한 도전이 무례함으로 나타납니다. 무례한 자들은 교만하기 때문에 부모에게, 남편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주의 종들에게, 나아가 사회 질서 속에서, 또한 국가 지도자들을 향해 그 권위 질서에 도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 땅을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권위 질서를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이 권위 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의 권위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기본 자세요, 그렇게 하여야 무례함을 드러내지 아니합니다. 사실 성경은 사회 질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으로 연결 시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기들 눈에 보기에 연약하고 무식하고 가난해 보여도 그 분들에게 주어진 권위를 보지 못하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게 맘 먹으면 하나님과 맘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례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내는 남편의 권위를 볼 줄 알아야 하고, 따라서 그들의 요구가 그들의 상위 권위인 하나님의 요구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면 남편에게 순종할 것을 명합니다. 목사와 성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목사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물론 지금 시대는 너무나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의 부패와 자질 문제로 인하여 교회의 권위 질서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직분이 권력인 줄 착각하는 수많은 목사들과 장로들로 인하여 교회는 세상의 정치와 다를 바가 없어졌습니다. 더욱이 수많은 이단들 및 세뇌 작업으로 인해 교인들이 정상적이고 성경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네, 이러한 부정과 부패와 더러움은 철저하게 교회 공동체에게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부패를 척결하는 것과 교회에 주어진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교회의 부패를 제거하는 것은 성경을 지지하는 것이지만 질서를 위해 주어진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주의 말씀을 허무는 것이 됩니다. 이때 교회 권위를 무너뜨리는 행위는 곧바로 무례한 말과 행위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에까지 이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방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참된 종들과 바른 교회를 찾아 그곳에서 권위 질서에 따르며 하나님의 권위 앞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과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연장자와 젊은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은 연로하신 분들을 공경할 줄 알아야 하고 언제나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무례하지 않게 행하여야 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독교인은 예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가정에서도 형과 동생 사이에서 동생이 형에게 순종해야 무례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러한 권위 질서에 대한 바른 의식이 바로 무례하게 행하지 않는 사랑의 기본이며 그러한 기본은 공동체 내에서 반드시 필요한 질서와 예절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감사할 줄 모르는 생활이 무례한 것임을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말세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의 타락의 모습을 그려놓았습니다.
[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
이 내용에 의하면 부모를 거역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운 것은 무례함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마땅히 거저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야 하는데, 그것을 망각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 역시 무례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표현을 정성껏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창조하여 주시고 심지어 아들까지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무례함의 극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례한 자들이 왜 무례하게 행동합니까? 잠언에 의하면 그 원인은 교만과 거만함과 오만함입니다.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잠 21:24).
그리고 영적으로 볼 때 이러한 무례한 자는 망령된 자입니다. 망령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 미친 사람, 부끄러운 사람을 말합니다. 곧, 무례함이란 영적으로 정신이 나간 상태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혈기를 부리는 자가 얼마나 무례합니까? 이처럼 무례함은 망령됨과 연결됩니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욱하면서 혈기를 부리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어떤 종류의 무례 및 망령된 행위들은 결국 모든 쌓은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느니라”(잠 13:11).
또한 법정에 가면 무례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판사나 검사를 향해 욕설을 합니다.
“망령된 증인은 정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잠 19:28)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얼마나 무례합니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성경은 우리에게 부탁합니다.
“(무례하고)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후 4:7)
“(무례하고)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으로 점점 나아가는도다”(딤후 2:16)
그러면 무례함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잠언을 보니 무례함을 제거하는 것은 묵시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묵시란 주께서 주신 소망 또는 비전, 그리고 특히 주의 계시인 성경을 의미합니다. 묵시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을 배우고 율법을 지키게 될 때 방자하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무례함과 망령됨은 오직 성령의 열매인 절제로 인해 제어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특히 영적으로 성숙하여지면 절제함을 이루게 되면서 무례함을 철저하게 제어하게 됩니다.
“오직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8-9)
이처럼 아가페 사랑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는 반드시 무례함과 방종을 제어하는 절제가 있습니다.
[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벧후 1:5-7)
사랑하는 여러분!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관계가 깨어지는 가장 주된 원인은 “무례함” 때문입니다. 아무리 오랜 친구이고 이웃이라 할지라도 무례함이 계속 나타나면 그 관계는 유지되기가 힘듭니다. 그러므로 부부 사이에서도 무례함이 계속되면 그 가정은 존립하기가 어렵습니다. 교회에서도 무례한 자들은 모든 관계를 다 파괴합니다. 사랑은 무례하게 행하지 아니하는 것이며 무례한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사랑은 공동체에서 예절을 지키는 것이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되게 하신 교회의 공동체에서 더욱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 주고 예의를 바르게 지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무례하게 행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다음은 제가 바울의 글을 쉽게 풀어서 쓴 것입니다.
[
무례하게 행하지 말고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십시오. 부모는 자녀들에게 무례하게 행하지 마시고 그들에게 혈기를 부려 노엽게 하지 마십시오. 아내들은 자기 남편이 어떠한 연약한 상태에 있어도 예의를 잃지 마시고 예절을 지키십시오. 남편들은 귀한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십시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직분들이 있습니다. 장로나 권사님들은 더욱 겸손히 섬기는 자가 되기를 힘쓰고, 성도들은 장로님 또는 안수 집사님, 권사님들을 존경하여 적절한 예우를 하십시오. 또한 목사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에게 예절을 갖출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한편 목사님들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에게 거만하게 행동하거나 예의를 벗어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본적인 질서와 예절과 법도를 지켜 나갈 때 사랑이 더욱 두터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가까운 아내, 남편, 친구, 친척, 자녀, 부모님, 성도들에게 예절을 지키는가? 아니면 무례한가?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분의 생명을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분은 언제나 우리를 귀하게 여기셨으며 우리를 향하여 무례히 행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 시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부끄럽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결코방자하거나 천자하거나 무례히 행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무례한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사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