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 30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 이다.” (요한 10,31-42)
If I do not perform my Father's works, do not believe me; but if I perform them, even if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works, so that you may realize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말씀의 초대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마고르 미싸빕’이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사방에서 공포’라는 뜻이다. 예언자로서 예레미야가 겪은 고통스러운 삶을 잘 드러내 주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사방에서 다가오는 조롱과 박해에서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께 찬양을 드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당신께서 하느님의 일들을 하셨고,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과 하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며 돌을 던지려고 한다.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관계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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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결심하고 그 구실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증거를 찾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죄목에 맞는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입에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이 나오도록 유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하자 그들은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예수님 말씀을 두고 따집니다. 종교적 전통과 율법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생각한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편에 있지 않으면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도 그러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그릇된 신념이나 편견과 고집으로 꽉 찬 사람들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전쟁까지도 일으킵니다. 폭력과 살상을 해서라도 자신들의 신념과 종교를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내 신념이나 주관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올바로 점검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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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돌을 던져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사실은 섬긴 것이 ‘아닌’ 결과가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출현을 노래했지만, 정작 오시니까 ‘거짓 예언자’라고 합니다. 성경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메시아를 고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다인들이 모르기에 돌을 던진 것이 아닙니다. 알려고 하지 않았기에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의 무지는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초래합니다. 종교 때문에 살인을 기획했다면 광신입니다. 미친 믿음이지요. 자신들은 의로움을 내세우지만, 진실은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이려 들면 상대도 나를 죽이려 듭니다. 내가 남의 종교를 비난하면, 그들도 내 종교를 비난합니다. 신앙이 아니라고 우기면, 결과 역시 마찬가지로 돌아옵니다.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된 현실입니다. 타인의 종교에도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아닌 듯이’ 보이더라도 기본 예의는 갖춰야 합니다. 종교를 떠나 해석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문화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무시하려 드는 것은 참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유럽 종교가 얼마나 우수한 문화를 말살시켰는지 역사는 알고 있습니다. 타 종교라는 이유로 ‘색안경’을 꼈다면 이제는 벗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예수님께 돌을 던지는 유다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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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는 자기를 박해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반드시 복수해 주시리라 확신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벌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로 미루어 보아, 예레미야는 그의 행동에 꼬투리를 잡거나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술수를 꾀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임이 확실합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자들의 음모를 잘 알고 있었기에 하느님께 그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레미야의 청원은 하느님께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빼앗기고 유배 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 공동체적인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백성에게 박해받는 예레미야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레미야처럼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저주하고 배척하며 벌을 내려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시며 그들을 하느님께 봉헌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이 가슴 깊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양승국신부-
<배은망덕 앞에서도>
극도의 배신감에 밤잠을 설쳐본 적이 있으십니까? 의외로 부모 자식 간이나 친구 동료 등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자주 느끼게 되는 감정입니다.
이쪽에서는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헌신했는데, 그토록 오랜 세월 한결 같이 뒤를 보살펴주고 자상하게 챙겨줬는데,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돌봐주었는데, 결국 돌아오는 것은 비난의 화살이요, ‘○○가 되가지고 나한테 해준 게 뭐냐고’고 대듭니다.
그런 순간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을 잊게 됩니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 정신이 멍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동족들로부터 느끼셨던 심정이 그랬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신을 낮추고 또 낮추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셔서 우리 사이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들 하나 하나는 모두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이었습니다. 오랜 병고로 신음하는 환자들에게 치유의 은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생명수 같은, 순금 같은, 보배 같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온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셔서 우리와 동고동락하셨습니다. 앞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결국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감지덕지한 황송스런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하는 짓을 보십시오.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손에 손에 하나씩 돌을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도적이며 적극적인 ‘살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이기로 마음먹고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족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배신감, 비애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진노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징벌을 내리지도 않으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에 또 다시 설득하십니다. 끝까지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으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그게 아니란다.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것이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하고 마음 바꿔먹어라. 내게로 돌아와라.”며 신신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배은망덕함, 돌까지 드는 노골적인 적대감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예수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항상 우리들의 영혼, 우리들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어디에나 계신 주님 때문에
- 구인회-
돌아가신 이모님은 90세 넘어서까지 건강하고 정신이 맑으셨는데 사고로 막내아들을 여읜 뒤 약간의 치매기가 생기셨다. 이모님보다 아홉 살 아래인 우리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난 후였다. 한번은 이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언니와 함께 갔다. 이모님은 우리를 알아보고 반기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글쎄, 내가 예수님을 만나 우리 아우가 그렇게 열심히 예수님을 믿다 세상을 떠났는데 천상에서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물어보았지 뭐냐. 그랬더니 예수님이 아우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더라. 글쎄, 돌봐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고 바빠 누가 세상을 떴는지 일일이 다 알 수가 없다고 하더라.” 이모는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무슨 일이든 다 하실 수 있으리라고 믿으면서도, 한편 바빠서 일일이 모든 이를 돌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인간적 걱정이 앞서 아마도 그런 대화를 한 것으로 착각하신 모양이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라고 배웠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씀과도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내 안에 자리하고 계시다면, 나의 존재는 성스러운 존재여야 한다. 한없이 크신 주님께서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는 내 안에까지 임하고 계심을 생각하면, 우리 자신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을 사랑하듯이 나를 사랑해야 하며, 주님을 그 안에 모시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을 귀하게 대하고 그렇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디에든 계신 주님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검정색’을 흑인들은 좀 다르게 말한다고 합니다.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바로 ‘살색’이라고 말한답니다.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하긴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말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지요. 흑인들은 얼룩말을 가리키며 까만 바탕에 하얀 줄이 있다고 말하는 반면, 백인들은 얼룩말을 가리키며 하얀 바탕에 까만 줄이 있다고 말한답니다. 즉, 자신들이 보는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결과를 낸다고 해서 반대를 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이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오히려 나와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라고 확정 지으면서 그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할 때가 너무나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긴 예수님도 이러한 이유로 십자가상의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놀라운 기적과 힘이 되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자신들에게 해로운 일을 전혀 하지 않으신 예수님이었지만, 자신들이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생각나요.
“아줌마, 이 뱃속에 뭐가 들었어요.”
그러자 임산부는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지요.
“귀여운 아가가 들어있단다.”
이에 이 꼬마 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다가 귀여운 아가를 먹었대요?”
이 꼬마 아이가 이렇게 말했던 이유는 잘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배가 나온 임산부를 행해 어떻게 하다 귀여운 아기를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도 이러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주님에 대해서 잘 모를 때 아니 알려고도 시도하지 않을 때 우리들은 주님을 세상에 제대로 알릴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향해 박해의 돌을 집어 들게 될 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주님을 잘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미사와 기도생활을 통해서, 각종 피정과 특강을 통해서, 성경 공부와 그 밖의 영적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반대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웃음은 마음의 치료제인 동시에 몸의 미용제다. 당신은 웃을 때 가장 아름답다(칼 조세프 쿠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두렵습니다
-오민환-
유다인들은 점점 더 폭력적으로 변해갑니다.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하나로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돌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의 논쟁에 있어 구약 성경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운명이 구약 성경에 근거하고 있고, 하느님의 의지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성경과 관련해서 특히 중요한 문제는 예수님께서 과연 메시아이고 하느님의 아들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를 신이라 한다면, 하느님이 보내신 분, 그분을 드러내시는 계시자는 그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다인들은 믿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한 일을 본다면 하느님과 당신이 서로 하나임을 알 수 있다고 예수님은 유다인들을 설득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 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증언은 세례자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큽니다. 아버지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증언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요한 5,33 이하 참조).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더 확실히 알아갈수록 그들의 살기는 더 커집니다. 오랫동안 누려왔던 기득권이 상실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진리를 아는 경건한 종교인이었으나 율법의 힘으로 자신들의 기득권만을 키워놓았을 뿐입니다.
독선이 아닌 확신과 시비가 아닌 사랑이
-김찬선신부-
“마르고 미싸빕”
오늘 예레미야서에 나온 말입니다. 생소한 말이지만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사면초가의 상태에 몰린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참 부끄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저는 마르고 미싸빕이 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마르고 미싸빕이 된 적이 거의 없음이 미안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사면초가에 몰린 분들에 대해서입니다. 이런 미안함은 인간된 情理로서 이해가 되지만, 그런데 부끄러움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레미야처럼 불의한 사람에 의해 사면초가에 몰린 적이 없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위해 사면초가에 몰린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제가 불의와 적극적인 타협을 하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저는 불의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 조용함으로써 소극적인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하여 사람들과 척지지 않았고 그래서 궁지에 몰린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 다시 말해서 소극적 타협을 하는 이유는 대개 다음 몇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불의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 사소한 것을 가지고 일일이 시비하여 관계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감수하는 것은 큰 불의에 대해서만이고 사소한 불의는 그냥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둘째는 조심스러움 때문입니다. 대다수가 맞다고 하는데 나만 아니라고 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에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셋째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소극적인 타협을 하는 제일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두려움 때문입니다. 사면초가의 두려움을 감수할 정도로 진리를 사랑하거나 사면초가가 되어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외롭지 않은 사람만이 사면초가를 무릅쓰지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이 두려움에 굴복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면초가에 몰린 주님과 예레미아는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다는 확신이 있으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자신이 하는 말이나 하는 일이 다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도 아버지 안에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내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내 안에 계시기에 나는 진리 안에 있고 진리를 실천하고 있다는, 독선이 아닌 확신이 저에게 있기를. 나의 말은 나와 그의 우리 공동체가 정의롭기를 바라는, 그래서 시비가 아닌 사랑의 말이기를. 이 새벽 기원하여 봅니다.
겉만 겸손한 사람
-전삼용신부-
제가 사제가 되기로 한 것은 25세 이후인데, 그 전에 대학 다닐 때 신부님이 되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사제가 될 생각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그렇게 청하는 분께, “저는 그럴 자격이 안 됩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럴 자격이 안 된다’는 말이 얼핏 들으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낮추는 말이 아니고 사제가 되기 싫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제가 되어 신자들에게 성당에서 봉사를 하라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대답이 “저는 그럴 능력이 안 돼요.”입니다. 물론 정말 능력이 안 된다고 느껴서 그렇게 대답하기도 하겠지만 많은 경우는 “하기 싫어요.”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거부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그런 대답이 나오면 으레 “그런 것이라면 상관없어요. 어차피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주님께서 어떤 일을 위해 부르신다면 합당한 능력도 주실 거예요.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쩌면 참 좋은 일입니다.”하며 응수합니다.
그러면 실제적인 이유들을 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서요. 아는 것이 없어서요. ...” 저는 이런 말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그것이 큰 이유가 되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정말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서 보면 봉사를 하지 못할 이유를 지닌 사람은 5%도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무엇을 거절하면서도 자신이 겸손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참 겸손은 받아들이는 능력이지 거부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며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지 ‘감히 내가 어떻게?’라고 하며 거부하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만약 성모님께서, “제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돼요, 말도 안 돼요!”했더라면 성자의 강생도 구원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겸손은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그분을 돌로 치려고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예수님은 성경 구절을 들어 당신의 말씀을 정당화합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성경에는 정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모두 신, 즉 ‘하느님’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 즉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으로써 그 분의 신성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고 그렇게 영원한 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니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이고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만약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면,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지요.”라고 신자에게 말하면 “제가 감히 어떻게 예수님처럼... 전 예수님이 될 수 없어요.”라고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 말이 이젠 주님처럼 살기를 원치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교만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 되지만 굳이 판단하려면 그 사람의 겸손으로 판단하라고 배웠습니다. 우리들은 사람들 앞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속은 안 그런데 겉으로만 겸손한 모습을 보이고 본인도 그것이 겸손이라고 믿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 사람이 신이 될 수 없다고 믿었던 겉으로만 겸손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겸손한 척 하려해도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주님의 뜻이라고 하셨던, “매사에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것들은 참으로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겸손하면서 불만이 많을 수 없고 겸손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으며 겸손하면서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았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겸손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항상 불만족이고 기도도 안 하고 우울하기만 하면 겉보다는 먼저 자신의 본질에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사람 흉내만 내는 원숭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말과 행동도 겸손해야 하지만 진정 본질이 겸손한 모습인지 살필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때에 유다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예수께 던지려고 하였다."
-양승국신부-
<짱돌>
어린 시절 저는 장난이 유난히 심했습니다. 당시 동네 마다 텃세란 것이 있었고, 때때로 동네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두가 몰려 나가 다른 동네 아이들과 연탄재 싸움도 많이 했었지요. 싸움이 격해지다보니 연탄재가 아니라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동네 아이들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퇴각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정신없이 도망치던 저는 뒤통수에 뭔가 크게 와 닿는 둔탁한 충격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혼절한 상태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적십자 병원으로 실려 갔지요. 한참 만에 깨어났었는데, 어질어질했습니다. 후유증도 대단했습니다.
그 전에는 제가 산수 문제도 곧잘 풀곤 했었는데, 그 때 충격 탓인지 그 뒤로 공부와는 담을 쌓게 되었습니다. 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치명적인 살상도구인지 그 때 잘 알게 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을 잡고 말꼬리를 물고 늘어집니다. 예수님의 논리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유다인들은 화가 잔뜩 난 나머지 예수님을 향해 돌을 집어 듭니다.
그 누군가를 향하여 돌을 집어 든다는 것,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보편적인 인간관계 안에서, 정상적인 사고방식, 기본적인 상식을 지닌 인간들 사이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돌은 일종의 흉기입니다. 돌을 집어 들었다는 것은 흉기를 집어 들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결국 돌을 집어 들었다는 것은 살의를 품었다는 말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철저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철저하게 왕따를 당하셨던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지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동족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진정 그 어떤 민족에 앞서 가장 먼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몰라주고 자신을 끝까지 왕따시키는 동족 유다인들,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돌까지 집어든 동족들의 모습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노보다는 서글픔이, 미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섰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신성모독죄를 저지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께 신성모독죄를 짓고 있다고 따지던 동족 유다인들입니다.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고 안타까워 할말을 잊으셨습니다.
아무리 눈을 뜨게 하려고, 아무리 깨닫게 하려고 안간힘을 써도 끝까지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동족 유다인들 앞에 예수님은 조용히 상황을 종료시키고 빠져나가십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눈을 뜨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려고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해 오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진지하게 찾아나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마음 안에, 우리 삶 한 가운데 머물고 계심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을 감고 영혼의 눈을 뜨게 되는 순간, 창조 때부터 머물고 계셨던 하느님, 우리 인생 역사 시초부터 함께 자리하고 계셨던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굳게 닫혀있었던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이미 우리 안에 와계신 하느님 그분의 자취를 발견하는 소중한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당에 아주 열심히 성당에 나오시고, 또 성당에서 항상 성경만 읽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읽는 성경 부분을 보니 조금 이상한 것입니다. 할머니가 읽는 부분은 성경의 내용 중에서 가장 재미없는 부분 그러니까 사람의 이름만 잔뜩 나오는 족보 부분만 골라서 읽는 것이었어요. 이 이상한 모습을 본 신부님께서는 할머니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할머니! 왜 사람 이름만 읽으세요?”
“아이구 신부님!! 이제 곧 하느님 앞에 갈 텐데 성경은 다 읽어서 무엇 합니까? 여기 나와 있는 이 사람들이 다 천당에 있을 테니까, 이 분들 이름을 외워서 가면 이름을 불러주면서 아는 척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이 할머니는 자신이 구원되어 하느님 나라에 간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반성을 해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이 넘치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이 세상에 보내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 사랑을 간직하지 못합니다. 바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 결과 의심과 불안함이 점점 커져서 하느님과 멀어질 뿐입니다.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어떤 사람이 강가에서 참외만한 연보랏빛이 나는 돌을 주웠습니다. 그러나 이 돌은 아름다운 빛깔을 내고는 있을 뿐, 생긴 것은 워낙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마을에서 수석전시회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볼품없는 이 돌을 15달러라는 낮은 가격을 붙여 놓고서 팔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볼품없는 돌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이제 전시회를 끝내려는 순간 어떤 신사가 다가와 돌을 유심히 살펴보고 두들겨 보더니 얼마냐고 묻습니다. 돌의 주인은 가격표대로 15달러라고 하면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까봐 10달러에 가져가라고 했지요. 하지만 이 신사는 마음씨 좋게 10달러가 아닌 15달러를 꺼내어 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로부터 얼마 후, 세상은 하나의 돌덩이로 인하여 시끌벅적 난리가 났습니다. 브로커 웻스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노신사가 어디선가 15달러에 구입한 돌이 세계에서 제일 큰 사파이어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격이 우리 돈으로 약 20억원에 해당되었거든요.
우리가 믿고 따른다는 주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지요. 그 모습만 보면 마치 15달러 가치의 돌처럼 그냥 보면 아주 볼품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치가 과연 15달러밖에 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가치는 얼마가 되는지 감히 가늠을 할 수가 없지요.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어서 예수님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예수님의 가치를 얼마나 내 마음 깊이 느끼고 있을까요? 진정으로 믿는 자만이 구원의 선물도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보다 높은 이상이 없다면 쉬지 않고 일하는 개미와 다를 바 없다.(헤겔)
참된 예수님 상
-정명숙 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당신이 누구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 나는 위에서 왔다. …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 “내가 나”(요한 8,24)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의심과 회의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은 열릴 줄을 모릅니다. 그들 안에 고정된 하느님 상 때문에 예수님께서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람을 살리는 행동 모두를 그들은 걸림돌로 생각합니다. 이들의 깊은 ‘거부의 병’은 예수님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갑니다. 잠시 우리 신앙 공동체를 바라봅니다. 너도나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입맛에 맞는 예수님 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 또한 적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를 많이 해도 과거의 내 습관에서 벗어나 ‘새 사람’으로 내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우리가 자신의 말과 행동과 내면의 객관적인 모습을 들여다볼 시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병든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누구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셨기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길을 걸으시며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할 수 있으셨습니다.
교만한 겸손
-전삼용신부-
성당에서 봉사를 하라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대답이 “능력이 안 돼서요.”입니다. 물론 정말 능력이 안 된다고 느껴서 그렇게 대답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는 “하기 싫어요.”라는 말을 그렇게 돌려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거부하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보입니다. 저는 그런 대답이 나오면 으레 “그런 것이라면 상관없어요. 어차피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요. 주님께서 어떤 일을 위해 부르신다면 합당한 능력도 주실 거예요.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쩌면 참 좋은 일입니다.”하며 응수합니다.
그러면 실제적인 이유들을 댑니다. “시간이 없어서요.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아서요. 아는 것이 없어서요. ...” 저는 이런 말들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그것이 큰 이유가 되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정말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어가서 보면 봉사를 하지 못할 이유를 지닌 확률은 5%도 안 됩니다.
“능력이 안 돼서요. 아는 게 없어서요. 저보다 더 잘 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전 못해요...”
저도 주님께서 사제성소로 부르실 때 주님께 했던 말들입니다. 가만히 보면 다 자신을 낮추는 말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교만함에서 나오는 말들입니다.
그러나 참 겸손은 받아들이는 능력이지 거부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한 사람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하며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이지 ‘감히 내가 어떻게?’라고 하며 거부하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전 당신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못돼요.”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에게 커다란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겸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랑을 받아들이기 싫다는 말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나는 신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교만한 걸까요, 겸손한 걸까요? 아주 교만하여 자신을 정말 하느님처럼 생각하든지, 아니면 진리를 깨우쳤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스스로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합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예수님은 성경 구절을 들어 당신의 말씀을 정당화합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성경에는 정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을 모두 신, 즉 ‘하느님’이라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하느님의 말씀, 즉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으로써 그 분의 신성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고 그렇게 영원한 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입니까? 예수님만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니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들입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이고 기름은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성령님을 받은 모두는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지요.”라고 신자에게 말하면 “제가 감히 어떻게 예수님처럼... 전 예수님이 될 수 없어요.”라고 겸손하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이 말이 이젠 주님처럼 살기를 원치 않는 마음이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원치 않는 교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당당하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는 은총과 더불어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을 당해야 하는 고통까지 받아들인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읍시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상대자인 신들
-김찬선신부-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은 신이라고 하였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저의 외할머니는 산속에서 홀로 몇 십 년을 도인처럼 사셨습니다. 개를 키울 때면 개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옆에서 보면 그저 개가 아니고 영락없이 사람입니다. 당신 대화의 상대자입니다. 인격화하시는 것입니다. 개를 인간 대화의 상대로 높이시는 것입니다. 개뿐이 아닙니다. 밭에 풀을 매실 때도 풀들에게도 말씀을 하십니다. 그저 풀이 아니고 말이 건네지고 말을 들어주는 대화의 상대자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당신 말씀의 상대자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신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건네시는 순간 당신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건네시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어 우리는 신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대화의 상대자로 삼으시고 말씀을 건네시는 한 우리가 그 말씀을 개똥처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지 않는 한 우리는 신이 되고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게 됩니다.
아버지의 일
- 진병섭 신부-
대한민국에 민주화 물결이 일기까지 수많은 민주열사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 의로운 사제들의 몫도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시절에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표징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처럼, 그들도 사제를 통해 세상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요즘도 나라에 어려움이 닥쳐오면 의로운 사제들은 예언자적 소명을 가지고 시대의 징표를 읽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 교우들과 세상 사람들과 함께하고자 노력합니다. 손가락질하고 욕하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 사제들은 세상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고뇌하며 그 누구도 질 수 없는 십자가이기에 우리를 대신해 져주시는 분들입니다. 저는 그분들이 오늘 말씀처럼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박수로 응원을 보냅니다. 사제로 살다 보면 교만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잘해서 된 것처럼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신부님 덕에 일이 잘 됐습니다”, “신부님 기도로 된 것 같습니다”, “신부님 강론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기분 좋으라고 한 소리건만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착각하고, 때로는 그 우쭐거림으로 일을 그르칠 때도 생깁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을 위한 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일이고 그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도구일 뿐입니다. 어느새 사순 시기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 그분 자신을 내세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길을 바라보며 그분의 자기 낮춤, 자기 비움, 자기 포기를 배웠으면 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제 동창 신부 중 한 명이 이번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실도 새롭게 꾸미고 또한 직원도 여럿 채용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사실 조금 미안했습니다. 동창이라고 하면서 새롭게 시작하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줘야 하는데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해서 말이지요. 하긴 ‘내 코가 석자’라고 요즘처럼 정신없을 때, 남에게 신경 쓴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제게 이러한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직원을 새롭게 채용해서 컴퓨터를 구입해야 하는데, 네가 잘 아니까 웬만큼 쓸 수 있는 것으로 4대만 구입 좀 해줘.”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특히 이번 주는 판공성사 기간이었고, 다른 성당에 가서 특강도 해야 하고, 또한 교리 준비와 종교미술학부 강의로 정신없는 한 주거든요. 여기에 성체조배실을 비롯해서 성당의 각종 공사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인터넷으로 대기업 완제품을 구입하면 편하게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기업 제품이 가지고 있는 상당히 비싸다는 단점 때문에 값 싸고 확장성이 좋은 조립 제품으로 해야만 할 것 같았지요. 구매야 인터넷을 통해서 간단하게 해결되겠지만, 다시 컴퓨터를 세팅하고 프로그램까지 설치하자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텐데 특히 바쁜 이 번 주에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기에 이것이라도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제 열심히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드디어 컴퓨터 4대가 택배로 배달되었습니다. 아직 강의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일거리가 제게 도착하니 앞이 캄캄하더군요.
도움을 조금이라도 주겠다고 응했으면서도 내가 바쁘다고 또한 부정적인 생각이 내 머리 속을 차지합니다. 그러면서 다 불평불만입니다. 제 자신이 스스로 여유가 없다보니, 바쁜 내게 일거리를 준 동창을 비롯해서 만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왜 그럴까요?
묵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생각 하나가 얼마나 많은 죄로 내 자신을 이끌고 간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하긴 2000년 전의 예수님을 반대하던 유다인들을 떠올려 보면, ‘자기들을 반대한다.’는 그들의 부정적인 생각 하나가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제거하게 만드는 엄청난 죄로까지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하나가 큰 죄로도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들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접고 대신 긍정적이고 사랑 가득한 말과 행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나를 진정으로 살리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맙시다.
믿음, 사랑의 응답
-허찬란 신부-
사순절이 깊어질수록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 앞에 나의 믿음이 너무도 약하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짐을 더 무겁게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 옛날 돌을 들던 유다인들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는 결정적 죄목은 하느님 모독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자처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분에게 돌을 던지고 잡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지 못하더라도 하는 일을 보아서라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분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입니다. 요한 복음에서의 믿음은 명사로 끝나지 않고 행위를 수반하는 동사로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따르는 것으로 귀결이 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이 하시는 표징들도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 고발하게 되고 죽이려는 음모를 가시화합니다. 무조건적인 거부의 끝은 하느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사순절 동안 생각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실천으로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며 살고 싶습니다.
참으로 야만적인
-정복례 수녀-
지난해 12월 30일 이라크의 전직 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이 처형되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끔찍한 생각이 들어 눈을 감아버렸던 기억이 난다. 이제까지 사형 장면을 본 적은 없지만 영화에서 보면 사형수의 눈을 가리고 교수형을 집행한다. 그런데 후세인의 경우, 그의 눈을 가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일을 집행하는 형리들만 복면을 쓰고 일을 진행했다. 물론 사형수 자신이 그것을 원했다고 할지라도 이런 잔인한 행위가 이라크 텔레비전을 통해 전세계에 공개되었다는 사실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하면서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는 모습에 몹시 가슴 아팠다. 이 뉴스가 나가자마자 유럽 연합에서 ‘너무 야만적’이라는 비난을 했다. 후세인은 동족을 죽인 독재자로 처형되었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처한다고 해서 돌팔매를 당할 위기에 처한다. 유다인들이 생각할 때 인간인 주제에 감히 하느님의 아들이라니 이 얼마나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인가.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의 아들을 제일 먼저 알아본 것은 마귀들이다. 사도들? 그들은 눈뜬 봉사나 다름없어서 늘 더듬거렸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에도 그분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도들을 재촉하지 않으셨고 당신의 때를 인내롭게 기다리셨다. 그날이 오면 미숙한 사도들도 어느덧 훌쩍 큰 성숙한 복음전파자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앙
-김훈일 신부-
같은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그 신앙의 여정은 제각각입니다. 신앙생활의 내용을 살펴보면 네 가지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성당을 다니고 있지만 불신앙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려움에 닥치면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 무당들을 찾아 점을 보거나 부적을 씁니다. 두 번째로 명목상의 신앙인들입니다. 기본적인 의무만 다할 뿐 세상에서의 삶과 성당에서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변화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기적을 찾는 신앙인들입니다. 늘 큰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는 곳이나 좋은 피정만을 찾아서 자극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을 체험한 신앙인들입니다. 하느님을 만난 그리스도인은 많은 신앙 경험을 통해 더 이상 보지 않고도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들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은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 어깨에 큰 돌을 메고 건넌다고 합니다. 그 무거운 돌이 무게중심이 되어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고 무사히 건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삶이 때로는 우리에게 부담이 되고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내 삶의 무게중심으로 살아간다면 험한 세상살이에 휩싸이지 않고 바르게 인생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
-양승국신부-
<주님, 항복입니다>
판공시즌을 맞아 고백소에 들어앉아 있노라면 간접적으로나마 세상살이의 고초를 체험합니다. 너무도 거센 인생의 풍랑을 만나 하루하루 힘겹게 견뎌나가는 분들 앞에서 때로 위로의 말조차 찾기 힘듭니다.
너무도 높은 벽 앞에 할 말을 잃고 주저앉아 그저 울고만 계시는 분들, 꼬이고 꼬인 인생의 실타래를 도저히 풀길 없어 난감해하시는 분들, 도무지 용서가 않되 괴로워 미칠 것만 같은 분들, 탈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분들...
해결방법을 찾아 백방으로 뛰어다니지만, 그럴수록 상처만 쌓여갑니다.
결국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인 무력함,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때로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자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로부터의 도움이 절실히 요청된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토록 꼬이고 꼬인 삶의 실타래를 속 시원하게 풀어주실 분은 주님뿐입니다.
결국 주님, 항복입니다. 더 이상 제 힘으로는 되는 것이 하나도 없군요. 이제 모든 것 당신 판단에, 당신의 자비에 맡겨드립니다, 라는 겸손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분께 맡긴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세월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무조건 인내하는 것입니다.
요즘 꽤 넓은 텃밭을 구해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웃기는 일은 아직 이랑도 제대로 만들지 않았는데, 다들 벌써부터 신선한 야채샐러드 먹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직 씨도 뿌리지 않았는데, 그리고 다들 초보농사꾼들이면서 벌써부터 다들 씨알이 굵은 감자나 고구마의 수확을 꿈꾸고 있습니다. 농사를 전문적으로 지으시는 분들 보시기에 한심스럽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만사에는 다 단계가 필요합니다. 만사에 시간에 필요하지요. 상처의 치유도 마음먹는다고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치유를 위한 시간뿐만 아니라 단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용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고백성사를 본다고 해서 용서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용서에도 기나긴, 그리고 꽤 복잡한 과정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때가 이르러야 가능합니다.
그 모든 과정과 시간 안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주님의 힘입니다. 주님의 도움입니다. 제가 이토록 부족하고 그릇이 작으니 당신께서 도와주셔야겠다고 청하는 겸손한 자세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는 세상이 바뀐다할지라도 ‘그 인간’ 용서하지 못하겠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용서가 가능합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 아리고 깊은 상처 죽었다 깨어나도 치유하기 힘들겠지만, 주님의 도움에 힘입어 치유가 가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적대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예수님 당신께 대한 신뢰심을 가지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을 믿어라.”
만사형통할 때야 얼마든지 그분을 향한 온전한 신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고통이 없을 때, 실패의 쓴맛을 전혀 맛보지 못했을 때, 얼마든지 그분께 감사드리고, 충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다가올 때는 어떻습니까? 특히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 우리 삶을 엄습할 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런 하소연을 던집니다.
“도대체 하느님이 계시기나 하는 건가?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찌 나를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떨어트리시는 건가?”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느님의 때는 반드시 있습니다. 때로 바로 응답하시지 않아서 답답하겠지만, 때로 하느님이 너무 더디 오시기에 기다리느라 지루하겠지만, 반드시 그분께서는 오십니다. 참고 기다리다보면 언젠가 반드시 그분께서 힘차게 활동하실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이 부담스런 ‘나 자신’이란 크나큰 속박에서 해방되어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제대로 된 찬양과 영광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들’의 자신감... -정호신부-
예비자들을 가르치다 보면 하느님을 믿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이 풀리지 않는다면 사실 신앙인이라고 불리는 우리들에게도 이 신앙의 이유가 불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 속에서 열심히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우리 신앙의 모델인 예수님의 증언을 통해서 말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이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계신다는 급박한 상황으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돌을 집어 들고 예수님을 치려고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보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라 말하며 당신의 모든 일을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라 이야기하고 있음을 문제 삼습니다. 그야말로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긴 했지만, 그리고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하느님은 ‘무서운 분’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했고 그분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너무 자신 있는 행동들은 분명 하느님께 불경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으시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당신의 입장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드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고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고 말할 정도로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삶의 모습이라는 것과 하느님의 말씀을 받들고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따르는 삶. 그것이 예수님의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씀 속에 들어있는 자신감의 참된 이유였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이 우리가 구원되는 그래서 하느님과 눈을 마주하고도 죽지 않는 영원한 삶을 얻는 길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살아있는 말과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자신 있게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을 많이 닮아 있어야만 합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당당히 맞서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 손에 돌을 쥔 채로 가르침을 받다. † -박상대 신부 -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손에 돌을 집어들고 예수를 치려고 했던 유다인들이 또 다시 돌을 집어들었다. 요한복음을 통틀어 유다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한 것은 모두 두 번이었다.(8,59; 10,31) 물론 같은 자리에서 집어든 돌을 놓았다가 다시 집어든 것은 아니다.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 사이에는 요한복음의 여섯 번째 표징사화에 해당하는 '태생 소경의 치유'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생트집 사건'(9,1-41), 그리고 이 사건과 직접 연결된 '목자와 양의 비유'(10,21) 가르침이 자리하고 있다.
유다인들이 돌로 예수를 치려했던 첫 번째 이유는 초막절 축제 마감에 즈음하여 성전에서 행한 가르침과 논쟁 때문이었다.(8장) 이는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神性)을 밝히신 이유 때문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자신을 유다인들이 믿고 있던 하느님께서 파견한 메시아인 동시에 아들로 선포하신 것, 아버지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관하신다는 것, 그리고 유다인들이 조상들 중에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던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먼저 있었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오늘 복음의 바로 전 구절로서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에 잇따른 논쟁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10,30)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예수를 돌로 쳐죽이려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유는 둘 다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출애 20,7)는 십계명의 제2계명에 근거한다. 따라서 야훼의 이름을 모욕한 자는 "반드시 사형시켜야 한다.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쳐죽여야 한다. 내 이름을 모욕한 자는 외국인이든지 본국인이든 사형에 처해야 한다"(레위 24,16)는 시행세칙에 저촉되는 것이다.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선동하는 자들 또한 "돌로 쳐죽여라. 그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건져내 주신 너희 하느님 야훼와 버성기게(벌어져 틈이 생기게 만드는) 하려고 꾀는 자이니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신명 13,11)는 세칙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세칙들이 예수님께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스스로 당신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죄가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스스로가 자신에 대하여 지나칠 만큼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 주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못마땅해서 돌을 들어 치려는 것이냐?"(31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와 같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신다. 오히려 죽을 뻔한 빌미를 제공하면서까지 당신의 신적(神的) 본성(本性)을 계시해 주신다.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자라는 생각을 굳혔고, 그래서 손에 돌을 집어든 것이다. 이렇게 오늘은 유다인들이 손에 돌을 집어든 채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을 만나게 된다. 유다인들이 예수께 "당신은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하고 있지 않소?"(33절) 하고 대들자,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신(神)이라 불렀다"(34절)는 율법서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여기서 율법서는 모세오경과 예언서만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한다.
이 말씀은 정확히 시편 82장 6절을 가리킨다. 그러나 문맥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아삽의 노래에 해당하는 시편 82장 전부를 봐야 한다: "하느님께서 신(神)들을 모으시고 그 가운데 서시어 재판하신다. 언제까지 너희는 불공평한 재판을 하려는가? 언제까지 악인에게 편들려는가? 약한 자와 고아를 보살펴 주고, 없는 이와 구차한 이들에게 권리 찾아주며,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풀어주어라.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그들은 분별력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여 어둠 속을 헤매고만 있으니 세상이 송두리째 흔들린다. 나의 선고를 들어라. 너희가 비록 신(神)들이요, 모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들이나 그러나 너희는 보통 인간처럼 죽겠고 여느 군주처럼 넘어지리라. 하느님이여, 일어나시어 온 세상을 재판하소서. 만백성이 당신의 것이옵니다."(82장)
위의 시편 내용에서 시편저자가 하느님의 재판에 부친 신(神)들이 누구인가? 여기서 신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지도자(재판관, 관리)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하느님의 능력, 즉 정의를 실현하는 기능을 대리하기 때문이다. 시편저자는 백성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살펴야 할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불의(不義)를 정당화하고 권리를 남용함으로써 대리적 기능을 저버렸음을 지적하고, 이로써 그들이 신(神)으로서의 품위를 상실했음을 선포한다. 그러나 적어도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神)이라 불리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율법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이 하느님의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신(神)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헤아리지도 행하지도 못함으로써 '신(神)이 됨'과 '아들들이 됨'의 자격을 박탈당한 유다인들은 손에 돌을 거머쥐고 예수를 해치려 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벗어나 요한이 한 때 세례를 베풀던 요르단 강 건너편으로 가서 머무르셨다고 한다. 요르단 강 건너편이라면 거기가 어디인가? 바로 예수님 스스로가 세례를 받으시고, 성삼(聖三) 하느님의 현현(顯現: epiphany)과 더불어 아들로서의 계시를 받은 곳이며, 공생활의 준비를 위한 대피정(40일간)을 하셨던 곳이다.(마태 3,13-4,2; 마르 1,9-13; 루가 3,21-22; 4,1-2 참조) 예수께서 이곳에서 자신의 세례를 상기(想起)하시고 하늘에서 들려왔던 아버지의 음성을 되새겼을 것이다. 사순절은 이렇게 우리가 이미 받은 세례성사를 기억하는 시기이며,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는 시기이기도하다........◆◆◆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유광수 신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이사55,8-9)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의 생각과 유다인들의 생각은 일치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 다르고 나의 생각과 하느님의 생각이 다르다.
죄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뜻과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좋고 선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과 맞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이고 죄이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과 예수님과 서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예수님은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보여 주셨는데 유다인들은 예수님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라고 말을 하면서 돌을 던지려고 한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죄이고 악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천은 아버지이시다.
아버지 하느님은 진, 선, 미이시고 사랑이시다. 아버지 하느님은 모든 것의 빛이시고 생명이시다. 따라서 아버지 하느님은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기원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마음대로 하지 않으시고 늘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일을 하시며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만을 하신다. 진,선,미이시고 사랑이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항상 좋은 일이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좋은 일이란 어떤 일일까? 물론 사랑이신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요약해서 말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일까? 그 일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창조사업이요, 다른 하나는 구원사업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창조사업과 구원 사업에 대한 계획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이 갖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을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창조와 인간 창조를 그리고 나와 다른 이들의 구원을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덤빈다.
마치 하느님보다 더 높이 오르려고 바벨탑을 쌓듯이 하느님만의 고유 영역인 창조사업과 구원 사업에까지 인간이 침범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 그것이 죄요 악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느님의 영역에서 하느님을 몰아내고 자기 힘으로 하려는 것, 그것이 죄이고 악이다.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계획하고 이루실 일이다. 창조와 구원사업의 주체는 항상 하느님이시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그리고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할 대상이다.
피조물이란 만드신 분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드신 분의 뜻에 따라 존재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인간은 구원자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복음에서 유다인들이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셨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면서 돌을 던지려고 하는 것이다. 유다인들 편에서는 자기들의 생각이 맞고 자기들은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 생각으로는 예수님이 "왜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느냐? 그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을 말하고 행동하는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가? 예수님의 계획에 따라서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한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요,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먼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좋은 일들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실 뿐만 아니라 좋은 일들이 어떤 일들인지를 보여주신다. 어디에서 보여주시는가? 복음을 통해 보여주신다.
그래서 성바오로가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로마 1,16-17)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놓아주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좋은 일들을 보려면 먼저 복음을 읽어야하고 그 말씀이 무엇을 보여주시는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기 위해서 묵상하고 묵상하면서 보게된 좋은 일들과 나의 생각들을 비교하면서 무엇을 내가 잘못 생각하고 행동하였는 가를 점검하기 위해 자신을 성찰해야하고 잘못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발견되면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로 돌아오도록 노력하는 것이 곧 회개이다.
그리고 내가 예수님이 보여주신 좋은 일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는 가를 생각하면서 나 나름대로 거기에 동참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작업을 해야한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하나 하나 실천하는 것이 곧 구원의 길을 걷는 것이요, 회개의 삶을 사는 것이요, 예수님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항상 유다인들처럼 예수님과 다른 의견을 주장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성숙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좋은 일을 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그냥 자기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서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굳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가 구원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할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구원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제시해준 방법에 따라 살아가기 위함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도 나에게 좋은 일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자. 그리고 그것을 생활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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