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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자료 스크랩 세종의 진실
김양걸 추천 0 조회 111 08.06.27 13: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가 잘 모르는 세종의 이런 부분도?


* 현재 인기리에 방영 되고 있는 "대왕 세종" 의 드라마를 보면서..

 

이조시대를 막연히 우상화하는데 있어서, 흔히 대표적 인물로 세종을 말 합니다만 실사구시의 측면에서 사실을 근거로, 기존의 인식을 냉정하게 되돌아보자 합니다.


1.  인사관리의 문제점


세종때 천한 노비였지만 손재주가 뛰어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장영실이다. 장영실의 업적은 다 알 것이니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다.

              

                  ▲세종대왕 영정


허나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세종실록을 읽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으니 이 인사관리에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다.

능력 위주의 인사 관리라고는 하지만 문제 많은 인물들이 조정의 중신으로 중용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능력은 좋았지만 성품이 부덕해서 아부와 뇌물 등 싫어할 짓은 골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세종의 인사관리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적어도 능력 말고도 그 사람의 인품 등도 살펴보고 등용해야 되지 않을까?


2. 이조의 건국이념인 사대주의 외교, 세종도 변함없었다.


조선과 명과의 관계를 흔히 사대 관계라고 한다.

조선은 명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지만 힘이 약했던 조선으로써는 사대외교 자체는 나쁘지 않다.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많았으니까 이건 태종도 마찬가지였으니 사대외교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겠다.

이조실록을 읽고 나서 분노할 사실을 발견했으니 명 황제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중국 사신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원하는 걸 무조건 들어줬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것은 이 사신들이 대부분 명 황제의 요구에 의해 바쳐졌던 조선출신 환관들이라는 사실이다.


세종시대 때 명의 황제는 영락제의 손자 선덕제였다.

         

▲명(明 )의 영락제                                              ▲선덕제

 

이 사람도 정화의 해외원정으로 유명한 영락제와 다르지 않았는데 얼마나 가관인가 하면 "나이 어린 이쁜 여자 보내" "반찬할 여자도 그리고 내시도" 선덕제의 어처구니없는 요구 덕에 백성들은 집집마다 자녀를 숨기고 나이를 속이느라 온 나라가 난리법석이라고 했다.


여기서 인수대비가 등장하게 된 계기를 말하겠다.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던 조선 여인 중 한씨가 있는데 그녀는 영락제가 죽자 순장을 요구 받고 새 황제와 이별 인사를 나눈 뒤 자결 했다.

 

다행히 이 소식을 접한 보수주의의 대표격 허조가 중국황제에게 순장금지를 요청해서 그 이후로는 순장은 면했다고는 한다.

잠시 딴 이야기로 샜는데 다시 이야기 하겠다.

 

조선에 사신으로 다녀왔던 환관들이 선덕제에게 죽은 한씨의 막내동생도 절새미인이라하니 선덕제가 입이 찢어지게 좋아하면서 결국 동생 한씨도 뽑히게 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병이 난 상태였다.

 

그녀의 오빠 중에 한확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한확이 약을 지어오자 그녀는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를 이미 지극하신데 이약을 또 무엇에 쓰려고요" 라면 서 한확을 면박하고 시집갈 때 쓰려고 장만하여 두었던 침구를 찢고 패물은 모두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녀 또한 성덕제의 총애를 받자 누이 덕에 출세한 그는 나중에 세조와 사돈을 맺는데 그의 딸이 인수대비다.


이제 다시 이야기 하겠다. 영락제는 전쟁을 좋아했지만 선덕제는 전쟁은 좋아하지 않아서 태종 때 말(馬) 요구는 거의 사라졌지만 대신 사냥을 너무 좋아해서 매중의 매인 조선의 해동청과 큰개와 시라소니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졸지에 전국의 감사, 수령, 절제사들의 가장 큰 업무가 해동청 잡기가 되어버렸는데 더구나 해동청을 잡으면 세종이 상을 내릴 정도였으니 출세에 눈이 먼 지방관리들이 해동청 잡기에 급급하지 백성들의 안위를 살펴볼 일이 있겠는가?

 

또 조선출신환관들이 중간에 농간을 부려서 아예 수백 명의 해동청 포획 조를 조정에서 보냈다고 하니 해동청 잡기를 구실로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돌아다니는 그들을 먹이고 재워야 했던 백성들의 고통은 얼마나 심했을까?

 

또 조선으로 들어오는 사신들은 주로 명황제의 요구에 의해 보내줬던 조선출신의 내시들이였는데 처음에는 조선의 임금을 대하는데 어려워했지만 이내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되면서 도가 넘는 행동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조선인이 조선조정을 우습게 보는 사례다.


이들이 얼마나 도가 넘는 행동을 했냐 하면 정승 판서쯤은 우습게보고 임금 앞에서도 고개를 쳐들고 다니니 정말 가관이었다.




 3. 중국 사신 접대 관습 


중국사신을 대접하는 모습을 보자,

일단 사신이 북경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임금은 영접사를 보내어서 의주에서 사신을 맞이해 연회를 베풀고 사신이 평양에 도착하면 또 잔치, 황주에 도착해도 잔치, 개성에 도착해도 잔치였다.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길목 영접사를 보내서 잔치를 베풀고는 임금이 백관과 함께 사신을 맞이한다.

  ▲경회루 : 나라의 경사나 외국 사신들의 접대 및 향연을 베풀던 곳이다.

 


경북궁에서 칙서를 받는 예(禮)에서는 사신 앞에 왕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삼배하는 예를 행한 다음 중국 사신은 중국사신전용의 고급숙소인 태평관에서 하마연을 베풀고 다음 날은 익일연이라고 해서 또 잔치를 베풀고 이후로도 하루걸러 잔치를 베푸는데 물론, 조선의 일류관기가 총동원 된다.


이 밖에도 이조왕(임금)이 주최하는 잔치와 이조왕 종친이 베푸는 잔치, 정부기관인 의정부가 마련한 잔치 등등 여러 잔치를 계속해서 베풀어주고, 떠날 때쯤이면 태평관에서 또, 송별연을 베풀고 돌아가는 길목에서도 개성-황주-안주-의주 이렇게 계속 잔치를 베푼 후에야 끝이 난다.

 

이러한 사신접대는 세계역사에서 찾을 수 없다.

 

- 여기서 잠깐 사신의 종류를 보면 

 

 

  

세상에, 생명의 은인이라 하더라도 어쩌다 한번이지, 이조시대의 이러한 관행적인 사신접대는 이조시대 500년 동안 계속되어온 왕실의 중요한 의례행사였다는 점이다.

▲명나라 지도


이 이씨조선 왕실의 생리를 안 어버이나라인 중국사신이 된 조선환관들은 조선에 들어 올 때, 황제의 하사품 외에 개인적인 선물이랍시고 몇가지를 가져와 바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뇌물을 챙기기 위한 수법으로써, 이조 조정에서는 그 몇 배의 값진 답례품을 상납했고 이외에 이들은 또 장사까지 했었는데, 중국에서 갖고 온 물건들을 진귀한 물건으로 속여 왕족 귀족 등에게 팔아 막대한 금, 은화로 바꾸어 가져가는 등 엉청난 이윤도 챙겼다.

 

이들은 이조를 완전히 봉으로 알았기 때문에 황제의 이름을 팔아 챙기는 수법도 다양해졌는데 금도금한 불상, 접는 부채, 모피코트등 황제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개인적인 욕심으로 요구하는 것도 무조건 다 들어주다 보니 사신만 한번 왔다 가면 이조의 재정이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더구나, 갈수록 도가 더해가면서 급기야 물품 서너 궤짝 갖고 들어와서 200여개의 금 은화 궤짝을 챙겨 돌아갔다고 하니 이러한 일을 어떻게 설명하랴...


아무리 화교 전주이씨를 고려의 왕으로 봉하여 자손대대로 잘먹고 잘살게 해 주어 자손이 잘 번식했다 하더라도 같은 고려인으로써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이러다 보니 태종과 세종 시절 사신으로 가장 많이 왔던 환관 윤봉의 말년에는 세종이 직접 간절히 청하여 조선의 반출품 내역에서 금, 은 은 뺐다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는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않았다.

 

이 사신은 도승지를 불러 조선에 살고있는 동생을 불러 대면시키고 고위직 벼슬을 주라는 명령 을 하니 사대관계 때문에 들어줄 수밖에 없었는바, 이 자는 또, 이렇게 받은 고위직위를 이용해 매관매직과 가렴주구를 일삼아 상당한 재산을 모았는데 수년만에 그 지역 큰 재벌이 되었다고 한다.


이조시대 중국의 사신은 변방국 왕보다 높았기때문에 이러한 개인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명 황제께 참소 할께 뻔하니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고는 하지만, 저들의 만행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는 근본적인 문제는 화교정권 즉, 화교의 매국노땅소송 원리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1420년에 명(明)제국이 북경(北京)에 건설한 거대한 자금성

 

 

이후에 많이 개선된것처럼 후술하고 있지만, 대동소이하여 위와같이 50보 100보에 지나지 않는다.


4. 세종시대라고 해서 탐관오리가 줄었던 것은 아니다.


세종시대 대표적인 탐관오리가 누구냐 하면 세종 때 음악가였던 박연이 대표격이다.


박연이 음악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고는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존경을 받기는커녕 비판 받은 사람이다.

 

지참금이나 패물이 다는 이유로 신부를 내쫓은 아들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고 누이가 죽자 귀향했다가 장례를 대충 후딱 해치우곤 재산을 분배받아 싣고 왔다고 해서 탄핵을 받기도 했고 악공들을 이용해 영업 행위를 한 일도 비난 받았다.

 

그러나 음악의 천재는 박연 밖에 없었기에 세종은 그의 죄를 덮어주었다고는 하지만, 이치적으로 보자면 세종 또한 그를 이용해 이득을 취하고 있었슴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인물이 황희 정승이다. 

                         

 ▲황희는 1363(공민왕 12)∼1452(문종 2)년 까지 당시로서는 대단한 고령인 89세 까지 살았다. 출생해서 신기(神氣)가 보통 아이와 달랐다고 한다. 아버지가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 判江陵大都護府使)를 지낸 전형적인 관료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덕택에 시험없이도 녹사(錄事)라는 작은 직책을 맡긴 하였지만,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는등 그의 실력을 입증 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의 멸망과 함께 두문동에서 은거하였으나, 조선태조의 요청으로 1394년 성균관 학관과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직을 겸하게 되었다.


 

흔히 청렴결백, 두루뭉실, 온화 한 점이 황희정승하면 생각나는 이미지이지만 실록에 기록된 황희는 완전히 개판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황희정승은 단편적인 야사의 이미지일 뿐이었던 것이다.


황희는 양녕대군을 궁궐 밖으로 쫓아내는 걸 반대해서 유배를 간 바 있지만 유배에서 돌아와서 정승에 오른 황희는 불과 몇 달 뒤 곤혹스런 사건에 휘말린다.

 

좌의정 황희의 사위이자 형조판서 서선의 아들인 서달이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 길을 가다가 사고를 쳤다.

어떤 것이냐 하면 길을 가다가 아전을 만났는데 자기에게 인사를 안했다고 해서 종들을 시켜 매타작을 했는데 이를 보고 동료 아전인 표운평이 서달에게 항의하자 서달이 화가 나서 표운평도 매타작을 했지만 문제는 다음날 죽고 말았다.

 

억울한 아내가 감사에게 고발했고 조사해 보니 실체는 드러났지만 감사는 상부에 보고하기 전에 황희에게 먼저 알렸다.

황희가 고민한 끝에 오랜 벗이자 동료 정승인 맹사성에게 피의자 가족과 합의를 볼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맹사성은 피의자 가족을 설득했는데 뇌물이 빠지지 않았고 고을현감에게 상부에 보고해서 시끄럽게 만드는 것 보다는 조용히 처리하자면서 부탁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사건기록이 작성되고 세종에게 그 사건이 보고되었지만 세종은 미심적인 것이 있다고 의금부에 재조사를 요청했는데 이 사건을 '황정승 사위 구하기' 사건이라고 해서 결국 서달을 비롯해 수사를 맡은 감사와 5명의 현감들과 수사관원들, 형조좌랑 등이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받고 황희와 맹사성은 파면되었다고 한다.

 

1주일 후에 두 정승은 다시 복직되기는 했지만 황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재주 감목관으로 있으면서 말 천여 두가 죽은데 책임이 큰 태석균을 편들어주다 구설수에 올랐는데 항간에서는 태석균이 황희에게 뇌물을 바쳤다고 한다.

 

또 개간 작업을 추진한 공을 내세워 개간한 땅 상당 부분을 차지했으니 이건 재주는 백성들이 넘었는데 돈은 황희가 챙긴 셈이다.

그리고 교하 수령에게 땅을 받은 대가로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비난을 사기도 했는데 이는 매관매직이 아닌가?

 

또 황희의 아들들도 평판이 안좋았다.

 

서자인 황중생은 세자궁에 일하면서 금띠, 금잔을 몰래 훔쳤다가 발각?고 그를 조사하던 과정에서 적자인 황보신은 궁궐의 패물을 더 많이 훔쳐다가 애첩에게 주곤 했다는 것이 드러났는데 이때 황희가 화가나서 서자 황중생을 조중생으로 바꿔버렸는데 이 또한 백성들에게 비난 받았으며 이 사건으로 황보신이 과전을 반납하게 되자 형 황치신은 자신의 돌밭을 반납해야 할 황보신의 기름진 땅과 바꿔치기 하다가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 밖에도 황희의 이미지를 깨는 구절을 조선왕조실록에서 발견했는데 내용인 즉슨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받았을 뿐인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하고 형옥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

또 황희는 박포의 아내와 관통을 하였다.' 라는 구절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록 중에 황희가 영의정에 제수되자 중신들이 "매관매직하고 수뢰 혐의가 있는 자를 영상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 라면서 탄핵을 받은 적도 있으니 깨는 이미지지만 지난 대신들이 못난 탓에 세종이 황희를 감싼 것이지 절대로 황희가 잘해서 감싼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긴 하륜만 하더라도 욕심이 많았고 박은은 아첨을 잘했으며 이원은 이(利)만 알고 의(義)는 모르는 신하였다고 하니 세종이 황희를 감싼 이유는 타당하지만 세종을 완벽한 임금으로 보는 생각은 버렸으면 좋겠다.

 

황희는 삼국지에 있어서 곽가가 아니였을까?

세종시대라고 해서 탐관오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황희와 박연은 정말 깨는 인물이다.


5. 백성들에게 태평성대?  웃기는 말씀이다...


흔히 세종시대 때는 백성들에게는 태평성대라고 할지 모르지만 실록의 기록을 보면 그렇지 않다. 

 

기록을 보면 곳곳에 유랑민이 넘쳐났고 황해도 일대에선 도적떼가 끊이지 않았으며 위에서 밝힌 무리한 사대정책으로 백성들이 고통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 백성들에게 세종시대는 태평성대가 아니었고 오히려 사대부들에게는 태평성대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제 하나하나 알아보자 사대정책은 위에서 밝혔으니 다른 정책이 얼마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었는지 알아보자



6. 4군 6진 개척의 뒷 모습(사민정책의 문제)

 

4군을 개척한 사람은 최윤덕 장군이고 6진을 개척한 이는 김종서다.


역사를 아는 사람은 김종서에는 장군을 붙이지 않는데, 이유는 김종서는 원래 학자로써 장군의 역할은 없었다.

이조시대 때 왜곡 기록된 서희나 김부식과는 다른 인물이다.


최윤덕장군이 4군을 설치하기는 했지만, 여진족들은 이씨조선의 갑작스런 공세에 일시적으로 놀라기는 했지만 제압당하거나 승복하지 않았다.

 

려진족(여진족의 원래 이름으로 고려의 려와 발해의 원래이름 진을 본따 만든 이름인데 중국측에서 계집녀자등으로 조작기록함)은 원래 전투력이 뛰어난 기마 종족이다.


곧, 반격을 하여 이조군대가 패퇴하자 세종은 이천을 시켜 2차정벌을 감행하였지만 3차례 모두 완패함으로써 결국 이 4군은 세조 이래 포기되어 폐 4군이라 불리게 된다.

 

위와 같은 무리한 대중국 조공 및 사신접대와 왕실의 계속되는 환락에다가 흉년 그리고 추운 기후등가 종합적으로 문제였긴 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군대의 체계상의 허약함과 전술부재 및 군인의 사기저하가 근본이라 하겠다.


이러한 졸속정책인 4군으로 이주한 백성들은 절반이 죽고 남은 반은 려진의 재산이 되었다.


- 김종서가 설치한 6진의 사민정책 -

     

      ▲김종서와 최윤덕, 이천이 개척해낸 북방의 4군과 6진


백성들이 스스로 옮긴 게 아니라 거의 강제적으로 옮겼다고 하니 백성들이 세종을 욕한 건 뻔할 뻔 짜다.

 

물론 이건 김종서의 생각이기도 했지만 세종은 그의 의견을 수용했고  함길도 남쪽에 살던 사람들을 6진으로 이주시키고 충청, 경상, 전라 사람들 중에 뽑아서 함길도 남쪽을 거의 강제적으로 채웠으면 대상자에서 빠지기 위해 힘이나 돈 있는 사람들은 로비를 했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은 자해를 하기도 했지만 세종은 회피하기 위해 고의로 자해한 자도 이주시켰다고 하니 욕은 또 세종이 먹게 되었다.

 

물론 세금 감면등 혜택도 없지는 않았지만 사민초기에는 가뭄과 혹한으로 가축들이 죽고 겨울이면 영하 수십도로 떨어지는 기후에 야인들의 침범에 의한 불안감에 역병까지 돌아 수천명이 죽었다고 하니 정말 심각했다.

 

다행히 여진족들을 조선인으로 귀화해서 6진은 폐 4군 같은 꼴은 면했다고 하니 겨우 피해를 막은 셈이었다.


7.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화폐정책


세종은 창의적인 사고를 가진 임금이기도 했지만 삽질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화폐정책이다.

조선은 자급자족 중심의 농업국가라서 상업과 공업을 천시하고 규제하는 현실인데 세종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화폐유통을 했다.

 

일단 태종 때 제정된 종이 화폐인 저화를 유통해서 물건을 사고 팔 땐 반드시 저화를 사용하라는 어명을 내렸으나 백성들은 호응하지 않았다.

이유인 즉 "쌀이나 포가 안전하지 화폐로 물물교환을 하다가 값어치가 떨어지면 어떻할꺼냐" 라는 게 그 이유였다.

 

백성들이 사용을 꺼리니 화폐가치는 떨어졌고 결국 폐는 백성들에게는 불편한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세종은 백성들이 화폐유통을 거부하는 이유가 화폐를 믿지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여기서 부터였다.

 

서울에 사는 김씨가 콩 한말을 들고 가서 생필품을 사려다가 아전에게 끌려갔다.

 

이유는 세종이 무리하게 강경책을 편 것인데 내용이 어떤 것이냐 하면 시장에서 화폐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매매를 하다 적발될 시엔 가산몰수에다가 벌금형 그리고 곤장형 이라고 하니 가산을 몰수하고 벌금을 내라하니 무슨 돈으로 내라는 말인지... 사채를 빌리지 못해 자결하는 사람도 많았고 그렇다고 있는 부자들은 화폐를 쓰지 않고 물물교환을 해서 잡히더라도 로비를 통해 풀려나올 수 있었지만 백성들은 가진 것이 없으니 당할 수밖에....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정책이라 하겠다.

차라리 화폐를 유통할 꺼면 상업과 공업을 장려해서 발전시킨 후에 장려할 것이지 농업 중신의 자급자족 국가에 화폐경제가 뿌리 내리는 게 고사목에서 싹이 돋는 격이 아닐까? 화폐 정책은 세종이 제일 욕먹은 정책이라고 하겠다.


8. 기타, 이조의 악법들


세종 때 사회의 급격한 보수화가 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들에 의해 주장된 것이 세종 때 현실화 된 것을 알고 있을까? 대표적인 악법들 중 소개하자면


여자가 대궐 문에 말 타고 출입하지 못하게 한 것과 서자가 무과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 또 부인들이 외출 시 얼굴을 가리게 한 것과 가죽신을 서민들이 신지 못하게 한 것 등 이런 악법을 세종이 그대로 시행했다고 한다.

 

명백한 실록의 기록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이 밖에도 많은 악법이 시행되었다. 내용이 많이 길어서 대표적인 것만 적었지만 제일 심한 악법은 현대판 주민소환제를 철폐했다는 것이다.

 

세종 전만해도 지방관리들이 잘못하면 백성들은 수령을 고소할 수 있었으나 어떤 한 사람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보수주의자의 대표격인 허조라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청백리로 알려진 사람인데 황희는 청백리라는 이름에서 빼야할 것 같다^^ 어쨌든 허조의 성격은 강직하고 원칙적이며 할 말은 하는 사람인데 오나라로 따지면 장소라고 할까?

 

또 청백리답게 뇌물, 축재, 여색을 멀리한 도덕주의자지만 흠이라면 지나친 원칙주의로 인한 보수라기보다는 수구꼴통에 가까웠다.

 

이 사람이 태종이 태상왕 이였을 때 아뢰기를 “종이 상전을 고발하면 무조건 교형에 처하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면, 종사에 관계된 일이나 살인한 일이 아닐 경우 곤장 100대, 유형 3000리에 처하도록 하라” 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까지 주청을 했는데 사람은 정에 약한지 태종과 세종이 동의를 해서 시행되었는데 이는 뒷날 탐관오리의 횡포를 키워준 결정적인 법이였다.


허조에 의해 시행된 법에 의해 수령들은 날개를 달았고 백성들은 마지막 보호막마저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수령이 잘못하더라도 반항 할 수 없고 또 하인은 주인이 막 부려먹어도 항의할 수 없게 되었는데 그게 이때부터라고 하니 정말 할말 없다. 허조에 의해 주청된 이 법은 탐관오리의 백성 학대와 뇌물등을 제어하기가 힘들고 또 백성들의 억울한 통로까지 막힌 셈이다.

 

그런데 수구꼴통 대표격인 허조는 백성들이 앞 다투어 고소하게 되고, 그리 되면 자연히 상하, 존비의 구분이 모호해진다며 반대했는데 허조가 욕먹어야 할 것은 세종이 욕먹었다고 하니 평등주의를 원했던 교산 허균이 왜 홍길동전의 첫머리를 세종시대라고 했는지 알만하다.

 

세종의 실책으로 매관매직하는 탐관오리들이 날뛰고 양반이 최고라는 사회를 확립한 법이니까 말이다.


결국 세종시대를 포함한 이조시대는 고려 백성들에게는 최악의 시대였다.


다만, 화교왕족과 그에 충성하는 사대부들에게는 최고의 태평성대였다.


오늘날, 대한민국과 비슷함을 느끼면서 한국은 아직도 이조시대라는 한사 운영진의 말씀이 생각난다..                     참고: 이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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