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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묵상글 들 ( 연중 10주 목요일-의로움에 대한 성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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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10주 목요일-의로움에 대한 성찰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언급하시며
제자들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만
제자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별생각 없이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의로움이면 의로움이지 율법 학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이고
제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인지 오늘은 뜯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절대적인 의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의로움이 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옛날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의 사회 구현을 정권 탈취의 명분으로 내세웠고
삼청 교육대를 운영하면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면서
죄 없는 민주화 운동 인사들도 마구 잡아들였었지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정의 구현 사제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들도 정의 구현 사제단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들먹이는 거잖아요?
이로 인해 정의라는 말이 많이 오염되고 타락되었으며
많은 국민이 정의가 무엇인지 많이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 후에도 우리는 정의와 의로움의 주관성을 많이 보았고
정의와 의로움의 주관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지요.
실로 많은 것이 주관적인 정의이고 주장되는 의로움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비판하시는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어떤 것이고 그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는 제자들의 의로움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비판하시고 바오로 사도도 비판하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말할 것도 없이 율법주의적인 의로움이지요.
그런데 어제 주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오늘 주님 말씀은 어제 말씀과 이어지는 말씀이고,
율법을 기준으로 하는 그들의 의로움은 불완전하니
제자들은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무엇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고
무엇이 율법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런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복음에서 계속 말씀하시는데 율법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에 대한 당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인데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고 사랑이 최고의 의로움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 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나도 율법 학자들처럼 사랑 없이 시비지심으로 정의를 논하지 않는지.
다시 말해서 옳고 그름만을 따지다가 싸움만 하고 사랑은 놓치지 않는지.
사랑 없이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싸우다가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고 하거나 형제에게 분노하지는 않는지.
그런데도 화해하지 않고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성당에는 가지는 않는지.
아무튼,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지 반성하며
사랑으로 의로움을 완성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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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산상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산상설교의 핵심주제로, 산상 설교의 중심에서 또 다시 거듭 말씀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그러나 그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의로움을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의 “살인하지 말라”는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하십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도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한편, 사도 바오로는 “그(아브라함)가 하느님을 믿으니 그것이 그의 의로움으로 인정”(갈라 3,6)되었음을 말하면서, 옛 율법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갈라 3,11)
이제,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본질을 꿰찔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합니다. 곧 용서와 형제애, 우애가 이 율법의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를 소중하게 여기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우애와 사랑을 중요시 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느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우리에게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원망을 품은 이의 아픈 마음을 보게 하소서.
제 불찰을 먼저 살피게 하소서. 당신께 바치는 합당한 예물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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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 “능가하지 않으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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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갈림길에 서서
모세는 하느님을 뵈었지만 백성 앞에서는 너울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직접 뵈오면 죽는다는 속설(俗說)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믿으면서도 하느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에서 만난 이방인 신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서 보여주고자 합니다.
너울 대신 거울이 되어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유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율법 지식 속에 꽁꽁
가두어놓고 백성까지도 하느님 없는 어둠 속에 살게 방치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복음대로 사는 신자들에게 ‘바보!’라고 놀리거나 ‘멍청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이런 종교적 위선 속에는 하느님께서 계실 수가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위선을 능가하라고 제자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앞에 나서라는 깨우침이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나서야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비롯해서 열 가지 율법 조문을 담고 있는 십계명 전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너울이 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복음에서 나오는 영광의
빛을 통하면 그 계명은 자신의 참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열 가지 계명을 일단 두 계명으로 줄이셨습니다.
단, 육신의 힘을 다하면서 육신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마음을 다하는 정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살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이렇게 진심으로 사랑하려면 보이는 이웃에게
그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야 정작 그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실상 두 가지가 아니라 한 가지였습니다.
죽어다 깨어나도 구약 시대에는 그리고 사람의 수준으로는 이 진리를 스스로의
힘으로 깨우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요 길이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계시해 주신 이 진리를 기준으로 보면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으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가 가야 할 길도 두 갈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울로 가려진 하느님의 광채를 먼 발치로 보면서 하느님의 계명을 형식적으로만
지키고 실제로는 자신들의 뜻과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부류가 먼저 눈에 뜨입니다.
먹을 것과 서식지를 확보하려고 힘을 쓰는 무리들이 기록해 놓은 인류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우상숭배자들이거나 무신론자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고 진리를 짓밟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하느님의 광채를 마음으로 거울처럼 비추어 자신도 하느님 안에서
살고자 하면서 자기 주변 세상의 이웃들에게 그 빛을 나누어주며 살아가는 부류도
숨어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중요한 줄 알지만 자기 근본을 잊지 않으려고
하느님을 찾는 이 소수의 사람들이 생명의 책에 기록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면서 진리를 실현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갈림길에 서서 망설이다가 이 두 번째 길에 들어선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생애의 마지막 가르침으로 “서로 사랑하라”고 당부하시고 부활하러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마음을 다해 서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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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혹시 동물원에서 기린을 본 적이 있습니까? 이 기린의 키는 클까요? 아니면 작을까요? 아마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모두 “크다”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기린의 키는 자그마치 3.5~4.8m에 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게도 550~1,930kg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까. 기린은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작다고 말해야 할까요?
인간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크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프리카코끼리가 보기에는 너무 작게 보일 것입니다. 이 코끼리는 6.5~7.6m, 무게는 6t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큰 동물도 있습니다. 바다에 사는 흰긴수염고래입니다. 몸길이가 23~27m, 체중은 80~150t입니다. 아파트 8~9층의 높이입니다. 이 고래가 기린을 보면 너무 작은 미니어처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누가 보느냐에 따라 크다 작다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대단한 존재일까요? 별것 아닌 존재일까요?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 바라보시면 크게 웃지 않으실까 싶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부족함과 나약함이 가득하지요. 그래서 항상 겸손한 모습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율법에 나와 있는 계명을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즉, 계명을 확장시키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계명은 화도 내지 말고, 욕도 하지 말고, 원망도 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으로 확장됩니다. 사실 사람들은 율법에서 규정하는 그 정도만 지키고 그 이상은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생각하면서 율법이 정한 선에서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서 조금만 더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 모습을 따라야 할까요? 따르지 않아도 될까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이기에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고서 이만하면 됐다며 선을 그어 놓고 사는 것을 반대하시는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선에서 조금만 더 나아가는 노력을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어떤 말씀을 하실까요? 겸손하게 주님 말씀에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조금 더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감옥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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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고할 시간을 가져라. 그러나 일단 행동할 시간이 되면 생각을 멈추고 돌진하라(나폴레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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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 남성.
한 여성단체에서 ‘모범 남성’을 선정하겠다고 홍보했습니다. 이에 수만 통의 추천서가 접수되었지요. 그런데 자기 자신을 스스로 추천한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야말로 최고 모범 남성이 분명하다면서 심사의원 모두 이견 없이 동의했습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술이나 담배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음식의 정량 외엔 절대 과식을 하지 않습니다. 운동 시간을 정해서 하루도 빠짐없이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성이나 아이들을 절대 구타하지 않습니다. 규칙적인 생활을 몸에 익혀서 질서 정연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화나 비디오로 시간을 축내는 법이 없습니다. 규칙적인 삶을 위해 휴대폰을 사용하지도 않습니다. 일요일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합니다. 이런 생활을 7년째 계속하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했더니, 상대방의 전화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교도소입니다!”
완벽한 생활 리듬을 유지하는 사람은 통제당하는 사람일뿐일까요? 아무튼 어쩔 수 없는 통제를 따르는 사람은 ‘최고의 남성’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통제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잘 통제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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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씨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제대로 공부 못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누구보다 열심히, 대본을 성경처럼 읽고 연습했습니다.” 윤여정씨를 아는 분들은 대부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언젠가 큰일을 할 줄 알았습니다. 자신만의 연기를 보여 주는 배우였습니다.” 연기생활 55년 만에, 75세의 나이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배우로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연기를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려한 외모, 뛰어난 재능, 주위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배우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배우들이 모두 정상에 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멀고도 험하기 때문입니다. 곳곳에 암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만과 교만이라는 암초가 있습니다.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암초가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암초가 있습니다.
일전에 한 형제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형제님은 정년퇴임을 하고나서 매일 성경을 입력했다고 합니다. 성경을 모두 입력했을 때입니다. 주변에서 아직 건강하니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다고 합니다. 새로운 곳에서 면접을 보았는데 면접관이 원하는 것은 타이핑의 속도였다고 합니다. 1년 동안 성경을 입력하면서 타이핑 실력이 늘었고, 다행히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 성경을 입력한 것은 아닌데, 하느님께서 그렇게 기회를 주셨다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매일 묵주기도를 하는데 한 자매님이 묵주의 9일기도를 권했다고 합니다. 가족을 위해서, 건강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묵주의 9일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고, 병원에 가서도 잘 고쳐지지 않았던 병들이 조금씩 좋아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기도하면서 몸이 좋아진 것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지낸다고 합니다.
팬데믹 시대를 지내면서 두 가지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는 피아노입니다. 모종을 심고 매일 물을 주면 어느덧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는 것을 봅니다. 자연은 시간이 지나면 생명이 결실을 맺도록 해 줍니다. 1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눈으로 악보를 보고, 다음에 손이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손이 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전문가들이 능숙하고, 자유롭게 건반을 움직이는 것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전거입니다. 처음에는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습니다. 좁은 길에서는 겁이 났습니다. 조금만 달리면 숨이 차고 힘이 들었습니다. 1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를 느끼게 됩니다. 3번 쉬었다 가던 거리를 한 번에 갈 수 있었습니다. 신호등의 흐름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속도를 조절하면서 파란 불이 되는 시간에 교차로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 뺨을 스치는 바람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변을 보니 팬데믹 시대를 지혜롭게 지내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 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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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 무지, 성령, 자유, 온유, 겸손 -
얼마전 어느 신부님의 책을 선물받았습니다. 면담고백성사를 드렸던 분입니다. 성사를 드리면서 ‘아, 지극한 나이에도 참 성실하게 사시는 분이구나!’하는 느낌을 지녔던 분입니다.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를 배운다’, ‘내적인 삶으로 초대’ 라는 책명에서 보다시피 영적 삶과 직결되는 책이었습니다. 책 표지 안에 글귀도 좋았습니다.
“환대와 친절에 감사드리며 신부님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즉시 핸드폰 전화를 확인해 수도원 십자로 예수 성심상 사진과 함께 감사의 답신을 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귀한 책 잘 받았습니다. 틈틈이 읽어보려 합니다. 예수님 감사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곧 신부님의 답신이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신부님, 제가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온유와 겸손의 처방을 잘 실천하여 예수성심을 닮고자 하겠습니다.”
참 지금도 기분 좋은 여운으로, 향기처럼 남아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6월은 예수성심성월입니다. 그러고 보니 내일 6월11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입니다. 계속된 대축일이 내일 예수성심 대축일로 마감되는 느낌입니다. 마침 면담고백성사시 신부님께 써드린 처방전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11,29)
예수성심의 사랑이 바로 온유와 겸손입니다. 예닮의 여정, 즉 예수님을 날로 닮아가는 여정은 바로 점차 온유와 겸손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제가 2014년 안식년때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참 많이 강론에 인용했던 주제가 ‘여정’입니다. 아마 남은 평생도 끊임없이 반복될 주제가 여정입니다.
늘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해 보자, 또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자. 일일일생 하루중 어느 시점에, 일년사계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겠나’하는 물음입니다. 참 절박해지는 물음에 정신 번쩍 들게 합니다. 제 경우는 하루중 오후 4시쯤, 계절로 하면 초겨울에 접어든 느낌입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 예닮의 여정중에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날로 온유와 겸손의 예수 성심을 닮아가고 있는지요.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갈수록 역설적으로 참나의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제가 ‘삶의 여정’과 더불어 참 많이 강조한 것이 ‘무지無知의 병’입니다. 동방영성에서 극히 강조하는 바, 마음의 병이 바로 무지입니다.
무지에서 기인하는 온갖 탐욕, 교만, 어리석음, 완고, 분노, 질투, 허무 등 끝없이 이어지는 무지의 부정적 현실들입니다. 바로 이런 무지에 대한 답이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뿐입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성심을 닮아갈수록 무지의 치유요 자유로운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바로 무지에서 벗어나 온유하고 겸손해지는 것이 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것이겠습니다. 무지에서 기인한 살인이요, 형제에게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살인에 앞서 마음의 분노를,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 무시하는 살인의 근원적 뿌리를 뽑아 버릴 것을 명하십니다. 형제들에 대한 무시와 차별이 정말 큰 죄이며 이 또한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참으로 제대로 된 인성의 사람이라면 ‘존경과 사랑’은 못해도 ‘존중과 배려’는 기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에 전제되는 바, 회개와 화해를 통한 이웃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형제들과의 화해와 더불어 하느님과의 화해, 바로 이것이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이자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구체적 처방임을 봅니다.
바로 온유와 겸손의 예수성심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오늘 제1독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예닮의 여정의 묘사처럼 생각됩니다. 여기서 너울은 무지의 너울이라 해도 좋겠습니다. 무지에 눈이 가려 제대로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무지의 너울에 눈이 가려 주님은 물론 자기도 모르고 이웃도 모릅니다. 헛것같은 유령의 삶을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닮아갈수록 무지의 너울도 치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우리 궁극의 희망이자 목표요 예닮의 여정에 관한 묘사입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감히 무지의 병, 무지의 악, 무지의 죄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매일 미사 은총뿐이라 고백하고 싶습니다. 미사은총이 우리를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닮아가면서 무지의 너울을 치워주기 때문입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영이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 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무지의 너울을 점차 엷게 해주시어 더욱더 영광스럽게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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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을 만난 이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이야기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 준수로 자동 획득된다고 여겨온 의로움을 넘어서라고 이르십니다. 이는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대충 살라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 이상을 살라는 뜻이지요. 율법을 무시하고 마구 살아제끼는 삶이 아니라, 문자로 새겨진 율법 없이도 충실히, 하느님 뜻을 새긴 영혼과 심장으로 살라는 촉구이십니다.
"형제 존중, 화해, 양보"
예수님께서 율법 준수 이상의 삶이 어떤 것인지 세 가지 경우를 들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그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준수한 것으로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음을, 그리고 다른 계명들도 마찬가지임을 깨우쳐 주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는 그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이 믿음은 율법을 포용하는 동시에 율법을 초월하는 투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자취를 닮아가다 결국은 사랑으로 변모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율법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마음에는 너울이 덮여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2코린 3,15-16)
구약의 백성 중에 하느님을 마주하고 그분 마음과 접촉하도록 허락된 이들은 성조들, 모세, 다윗, 그밖의 참 예언자들 등 일부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들이 살아갈 지침으로 율법이 주어졌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통해 하느님을 감지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마치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드리워진 너울과 같아, 간절히 하느님 마음에 파고들기를 열망하는 이가 아니고서는 대부분 율법 너머로 시선을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율법 준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이들은 굳이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까지 이르려 애쓰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은 뜨겁게 사랑하지 않아도 율법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니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2코린 4,5)
하지만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하도록 빛을 받은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믿고 고백합니다. 그 빛 덕분에 우리 앞에서 너울이 치워지고, 우리는 주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하느님 앞에 선 우리 앞에서 이제 율법의 너울이 벗겨지고,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관상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사랑을 관상하는 이에게 일어나는 가장 큰 변화가 바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는 이에게 율법은 최소한의 지침일 뿐입니다. 율법의 정신인 사랑이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이를 선동하고 불붙이고 끌어당겨 사랑에 합류시키고 결국 사랑이 되어가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율법 너머로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라고 초대된 이들입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이 곧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우리에게 맡겨주신 형제와 이웃들을 더 섬세히, 따뜻하게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서툴고 미숙한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도 주님은 큰 영광을 받으신답니다. 사랑을 통해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우리 모두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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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살인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탈출 20,13과 신명 5,17의 ‘살인하지 못한다.’라는 계명을 들어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기는 것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야고 3,8)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 준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 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신다. “너의 사랑이 계속되도록, 나에게 예물을 바치는 일을 잠시 멈추어라. 네가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나에게 예물을 바치는 것이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너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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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먼저 용서를 청하여라.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ㄴ).”
이 말씀의 뜻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입니다.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마태 23,13).”
‘위선자들의 위선’은, 즉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하지 않는 거짓 신앙생활은,
자기 스스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안 들어가려고 해서 못 들어갑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이 말씀은, ‘율법의 완성’에 관한,
또는 ‘율법을 완전하게 실천하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마태 5,17).
위선자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속의 법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은 사람의 마음속도 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더라도,
분노, 증오, 모욕은 살인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죽이지 마라.” 라는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려면,
이웃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하고,
즉 마음속의 미움을 없애야 하고,
이웃에게 화를 내는 일과 이웃을 모욕하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와 ‘모욕’에 관해서 유다서의 다음 구절들이 연상됩니다.
“미카엘 대천사도 모세의 주검을 놓고 악마와 다투며 논쟁할 때,
감히 모독적인 판결을 내놓지 않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바란다.’ 하고 말하였을 뿐입니다(유다 9).”
<미카엘 대천사는 싸움의 상대방이 악마인데도 불구하고
모독적인 말(욕설)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모욕과 욕설 자체가 죄입니다.>
“보라, 주님께서 수만 명이나 되는 당신의 거룩한 이들과 함께 오시어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고, 저마다 불경스럽게 저지른 모든 행실에 따라,
불경한 죄인들이 당신을 거슬러 지껄인 모든 무엄한 말에 따라
각자에게 벌을 내리신다(유다 14-15).”
<심판 때에는 ‘행실’뿐만 아니라 ‘말’도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생각으로 지은 죄’도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형제에게 용서를 청할 일이 있으면
너무 늦기 전에 그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를 용서하여라.”가 아니라, “그에게 용서를 청하여라.”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마태 18,21-22).
그런데 우리는 흔히 용서할 일만 생각하고
용서 청할 일은 생각 못할 때가 많습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만 생각하고, 내가 형제에게 잘못한 일은
생각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가 나에게 화를 내고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은 그의 속이 좁아서 그런 것이다.” 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또는 “그가 괜히 오해를 해서 그런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속이 좁아서 그러든지, 그가 오해를 해서 그러든지 간에, 그를 탓하지 말고,
어떻든 먼저 그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 실천도, 용서도, 화해도, ‘나의 판단’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형제와 화해한 다음에 예물을 바쳐라.” 라는
말씀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웃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로(이웃과 화해하지 않은 채로)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은 ‘위선’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그 예물을 거절하시면서
“먼저 형제에게 가라.”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있는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을,
“생각이 안 나면 어쩔 수 없고...”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하느님 앞에 나서기 전에 먼저,
형제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는지 없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라.”입니다.
이 말씀은,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에 연결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께서는 ‘계명’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함을 느끼셨는지
‘명령’으로 표현을 바꿔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이 말씀에서 ‘서로’ 라는 말은 ‘동시에’가 아니라, ‘내가 먼저’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할 때, ‘서로’ 사랑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나를 원망하고 있는 형제에게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하는 일도,
또 나에게 잘못한 형제를 내가 먼저 용서하는 것도, 모두 다 사랑 실천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를 ‘지금 당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회개하는 일과 하느님과 이웃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적당한 때에 하겠다고 미루는 것은 사실상 안 하겠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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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비교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것들은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착실하게 지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좌절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의로움은 계명 그 자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이 커지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단순하게 살인하면 안 된다는 계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성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욕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물 봉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물을 봉헌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이웃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의로움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지키면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형제와 이웃들을 향해서 욕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성당에서 예물과 우리의 마음을 봉헌하면서도 원한 품은 사람들과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한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늘 나라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일까요?
지금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우리의 시선을 계명 그 자체가 아닌 우리 주변의 형제들에게 두어야 한다는 사실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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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화해하여라!"(마태5,24)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위가 율법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간과한 '율법의 본질인 사랑'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만, 율법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살아야만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부터 선포되어지는 '산상설교'는 '율법의 본질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 얼른 화해하고 타협하여,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율법의 본질인 사랑이며,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내야 할 율법의 본질인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땀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 아주 구체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노!'
분노는 죄의 일곱 가지 뿌리인 칠죄종의 하나로써, 이것으로부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죄', '바보라고 하는 죄', '멍청이 라고 하는 죄'가 나오고, '살인 죄'가 나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2코린3,16)
너의 잘못만 바라보지 말고,
나 자신을 바라봅시다!
나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로 돌려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분노의 너울을 먼저 치워냅시다!
그래서 너와의 관계를 다시금 회복하고,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나라가 되게 합시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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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화해는
절박함에서
시작된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화해의 참된
길이다.
화해와 회개는
길을 바로잡아
주는 공통점이
있다.
성찰과 반성은
그래서 화해의
참된 본질이 된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통이다.
화해가 치유로
영글기 위해서는
상처와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진정한 예물이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빈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이
참된 봉헌이다.
우리모두
부족한
사람들임을
인정한다.
먼저 이해와
화해, 기도와
용서가 필요한
우리자신이다.
화해의
첫발걸음은
우리자신을
보는 것이다.
우리자신을
만날 수 없다면
형제도 제대로
만날 수 없고
하느님께로
나갈 수도 없다.
화해는
우리 마음에
눈을 뜨는 것이다.
마음을 만나야
살아난다.
마음을
살리시는
주님께서
먼저 화해를 위해
우리마음을
어루만져 주신다.
화해는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의 길이며
마음으로
다시 만나는
관계회복의
은총이다.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해라는
새로운 변화이다.
화해의 기쁨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참기쁨이다.
화해가
살아있는
평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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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쁜 감정은 숨기고 좋은 감정은 표출하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진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살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도에서 2페니(약 20원)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일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출근해서 바로 차를 한 잔 마시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값이 2페니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머니에 있던 2페니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내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내는 자신을 도둑으로 모느냐며 크게 화를 냈습니다. 이에 남편도 화를 냈고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과거의 일들을 끄집어내고 심지어 상대의 집안을 들먹이며 싸움은 더 크게 번졌습니다.
결국,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20원 때문에 살인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댐도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집니다. 남편이 화를 참았거나 아내가 화를 참았다면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나는데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차피 얼굴에 화가 난 것이 다 드러나는데 뭐하러 참느냐 할 것입니다. 혹은 내가 지금 화를 내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우습게 볼 것이라고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위선이 아니냐고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화를 내야 화가 풀리는 게 아니냐고 합니다. 화를 참고만 있다가는 화병이 걸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성을 내는” 사람이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밖으로 표출되면 재판을 받는 것입니다.
화를 표출하거나 어디다 분출해버린다면 정말 화가 가라앉을까요? 그렇다고 말한 학자가 프로이트입니다.
프로이트는 화라고 하는 감정을 마치 터지기 직전의 댐으로 보았습니다. 어느 정도씩 자꾸 흘려보내 주어야 댐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분노를 베개를 때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밟아서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분출하면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제임스라고 하는 미국의 심리학자는 프로이트의 접근방식을 매우 위험하게 보았습니다. 화를 내면 더 화가 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방식은 오히려 더 화를 부추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의견이 더 맞는 것 같습니까?
1970년대 초 사회학자 머레이 스트라우스는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부부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한 그룹의 부부에게는 자신들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라고 했고 다른 부부들에게는 그런 감정을 삭이라고 했습니다. 부부의 폭력성은 감정을 드러낸 부부들이 더 심했습니다. 말이 점차 격해지며 몸싸움까지 갔던 것입니다.
즉, ‘프로이트 : 제임스 = 0 : 1’이 되었습니다.
에브 에베덴 연구팀은 한 회사가 조만간 대량 해고를 할 것을 알고, 3년 계약을 하고 들어갔는데 1년 만에 해고를 당해야 하는 이들을 면담했습니다.
한 그룹에게는 불만을 마음껏 표출하게 하는 질문을 하였고 다른 그룹에는 그저 회사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정도만 물어보았습니다. 그리고 회사에 대한 적대감을 조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 분노를 표출한 집단이 회사에 대한 더 큰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프로이트 : 제임스 = 0 : 2’입니다.
마지막으로 스포츠 분야에서도 이런 실험이 있었습니다.
제프리 골드스타인은 축구와 농구, 풋볼과 같은 경쟁하는 스포츠를 보며 마음껏 소리를 지른 사람들과 체조경기와 같은 소리지를 필요가 없는 경기를 본 두 그룹의 공격성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선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장면을 본 이들의 공격성이 더 높게 나왔습니다.
저도 로마에 있을 때 축구경기가 끝나고 관객들이 서로 싸워 심지어 사망사고가 잇따르는 것을 본지라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분노를 표출해도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증가합니다. 결과는 ‘프로이트 : 제임스 = 0 : 3’입니다.
[출처: 『지금 바로 써먹는 심리학』, 리처드 와이즈먼, 웅진 지식하우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은 자신이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사람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냐는 믿음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내가 아무리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운동을 꾸준히 하면 그 사람은 다시 자존감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믿는 대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잘나가더라도 몸이 망가지면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믿어버려 잘나가던 사업도 실패합니다.
미국의 한 해병대 장군은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거든 이불부터 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높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행동은 곧 나의 믿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화를 내면 나는 화를 잘 내는 폭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어버린 이상 폭력도 쓰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꾹 참더라도 화가 나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자신이 화를 안 내는 사람으로 믿게 됩니다. 그러면 다음번에는 조금 덜 화가 납니다.
그러니 화는 내는 것보다 삭이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이기에 화내는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을 덧붙이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항상 행복해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행복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어버리게 되고 그러면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화를 내면 찌푸려지게 되어 있는 부부에 보톡스를 했더니 화가 덜 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습니다. 화를 내니까 더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표현하는 것이 곧 내가 됩니다. 그러니 좋은 것은 표현하고 나쁜 것은 감춥시다. 화가 났다고 말하면 되지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좋은 감정은 드러나게 하고 나쁜 감정은 삭입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믿읍시다. 그러면 화가 나야 할 때도 화가 안 나고 감사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쁜 감정은 숨기고 좋은 감정은 표출하십시오. 결국, 내가 자주 하는 행동이 나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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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초보 사제 시절의 부끄러운 일이 생각납니다. 양육하고 있던 아이의 보호자와 통화하던 중에, 그쪽의 너무나 무책임한 태도에 욱하는 성격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려니 하고 제쪽에서 포기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졌고, 막말을 주고 받다다, 결국 건너지 말아야 할 강까지 건너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끊고나서는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억울함에 도통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 미사를 봉헌하러가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릅니다. 하필 복음을 봉독하는데, 글쎄 내용이 기가 막혔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오 복음 5장 23~24절)
미사 내내 예수님의 권고 말씀이 정말이지 뼈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드리는 미사는 솔직히 미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리 자주, 강력하게 용서나 화해를 강조하셨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미사후 저는 큰 용기를 내서 어제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분이 제게 퍼부었던 말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 부끄럽고 미성숙한 언행에 대해서만 정말 죄송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순간 기적같은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분께 용서를 비는 순간, 아무 죄도 없이 십자가 형에 처해진 예수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억울한 마음도, 격렬했던 감정도 눈녹듯히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와 일상생활 속의 형제애는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적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드리는 예물은 하느님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거금의 봉헌금을 하느님 대전에 바친다 할지라도 이웃과 불목하고 다투고 있다면 그 예물 봉헌 역시 합당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께 대한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하면서 드리는 제사나 예물 역시 하느님께서 즐겨 받지 않으실 것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예배를 핑계로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틈만 나면 다투고, 수시로 불목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헐뜯는데 혈안이 된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한 공동체가 절대 아닙니다. 그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는 울리는 징처럼 공허하고 무의미한 예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바치는 예배와 봉헌이 보다 가치 있고 합당한 것이 되기를 원한다면 필요한 노력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화해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 순간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또 다시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백번이고 천 번이고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밥 먹듯이 이웃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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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10.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0주간목요일 제1독서 (2코린3,15-4,1.3-6)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17-18)
'호 데 퀴리오스 토 프뉴마 에스틴, 후 데 토 프뉴마 퀴리우, 엘류테리아'(ho de kyrios to pneuma estin, hu de to pneuma kyriu, eleutheria)
'주님은 영이십니다'(ho de kyrios to pneuma estin)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 하느님과 본체론적으로 동일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삼위일체 교리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바오로는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2코린3,6) 라는 주장을 여기서도 일관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옛 계약'과 '새 계약'을 대조하고, 문자와 성령을 대조하며, 새 계약인 복음의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코린토 전서 15장 45절에서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라고 사도 바오로가 말하면서 창세기 2장 7절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의 기록을 확대 인용한 데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즉 코린토 후서 3장 17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이는 문자가 아니라 살려주는 영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후서 3장 17절에서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살려주는 영의 현존과 임재는 즉시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는 탈출기 34장 30절의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그 얼굴의 살갗이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에게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코린토 후서 3장 17절에 언급된 "자유"라는 주제를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대조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곧 '살려주는 영'의 현존과 임재 가운데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일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유롭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 바오로 자신도 역시 회심하기 전에는 당시의 유다인들의 교만과 패역무도함을 그대로 답습했던 자였지만, 다마스코스 도상에서 '살려주는 예수의 영'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결국 이러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로마서 8장 15절에서 바오로는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갈라티아서 5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라고 바오로는 언급한다.
이것을 종합해 볼 때, 코린토 후서 3장 16절에서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치워지는 너울의 자유'란 결국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곧 가장 축복된 영적 자유'를 말한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18)
여기서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통해 복음을 깨닫게 되고, 거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을 분명히 보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영광을 보는 것은 너울(수건)을 쓴 유다인들이 그 영광을 보지 못하는 것에 비교하면 크나큰 축복이요 놀라운 기쁨이지만,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전히 드러나는 영광(로마8,18)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너울(수건)이 벗겨져 주님의 영광을 비교적 밝게 보게 되지만, 영광 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완전히 보는 때는 그분의 재림 이후며(1요한3,2), 그때는 우리가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완전히 변화하게 된다(로마8,29.30).
한편 주님의 영광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이시며(콜리1,15), '하느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히브1,3)이시다.
따라서 요한이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라고 진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아버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요한14,9).
'더욱 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이 구절은 성도의 성화(sanctification)와 영화(glorification)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뀌어 갑니다'로 번역된 '메타모르푸메타'(metamorphumeta)는 마태오 복음 17장 2절과 마르코 복음 9장 2절에서 '변하였는데'로 번역된 동사로, 원형 '메타모르포오'(metamorphoo)의 현재 수동태이다.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이 사용된 것은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모습(형상)으로 변형되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메타모르포오' 동사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르페'(morphe)에서 변형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은 외양과는 대조되는 존재의 변화, 즉 본질적 인간의 변화를 말한다(로마2,2).
그러나 본질적 인간의 변화라고 해서 인간이 신격화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궁극적인 변화가 본질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존재론적 변화라고 하더라도, 신과 인간 사이에 놓여 있는 무한한 존재론적 차이를 허무는 변화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본질적 변화는 죄로 인해 타락하여 희미해진 하느님의 모상(형상)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즉 종말론적인 완성의 때가 도래하게 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태조에 창조하신 그 본래의 모상(형상)과 가치들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의화(義化)의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화의 과정은 하느님의 주도권에 힘입은 '이끄심'을 통해 영화(榮化)의 단계까지 실패없이 수행될 것이며, 그것은 '살려주신 영'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관된다.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5,20ㄴ-26)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2)
한글 새 성경에는 단순히 '형제'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원문에는 인칭대명사와 정관사가 붙어 '토 아델포 아우토'(to adelpho autou; to his brother)에 해당하는 '(바로)그의 형제에게'가 된다.
말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형제되는 바로 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형제'는 혈육이나 같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들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이나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않았던 사람까지 포함할 수 있다(루카10,29~37).
그러니까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사랑으로 감싸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고 '누구나'에 해당하는 '파스'(pas; whosoever)라는 단어는 '전체'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사람은 그 누구나 빠짐없이 모두'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을 자구적으로 해석하면,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예외없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의로운 분노(의노)는 여기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이것은 과거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이나 사도 바오로도 악한 자들에게 대해 거룩한 분노를 발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보여진다(마태3,17; 마르3,5; 사도10,16).
마태오 복음 5장 22절의 '성을 내는 자'에 해당하는 '오르기조메노스'(orgizomenos; who is angry with-without a course)가 일시적인 흥분을 나타내는 '튀모스'(thymos)와 달리, 주로 악한 뜻을 가지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지속적인 분노를 가리킨다.
더욱이 표준 원문에 삽입된 '까닭없이'에 해당하는 '에이케'(eike)는 정당한 사유없이 자신의 감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분노를 가리켜준다.
예수님께서 이와같이 악한 뜻(악의)을 가지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을 살인하는 죄로 규정하시는 이유는 많은 경우의 살인이 바로 성을 내고 미워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죽이는 실제적 행위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인 동인(動因)인 그 마음에까지 살인하는 죄를 확대 적용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바보'에 해당하는 '라카'(Raca)는 히브리어 '레크'(req)에서 유래한 단어인데, '레크'(req)는 또한 '황폐하다', '비다'는 뜻을 지닌 '루크'(ruq)에서 유래하여 '빈말', '허사', '헛것'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머리가 텅 빈) 모자란 자'나 도덕적인 정도가 낮은 '사악한 자'를 가리킨다.
성경에서는 '잡류', '건달'(판관11,3), '무뢰한'(2역대13,7)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고 인격을 모욕하는 심한 욕설이다.
그리고 '멍청이'로 번역된 '모레'(More; You fool)는 '모로스'(moros)의 호격이다.
'모로스'(moros)는 '입을 다물다'는 뜻이 있는 '뮈오'(myo)에서 유래하여 '말하지 않는 자', '우매한 자'라는 뜻을 지닌다.
그런데 집회서 22장 11절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자'라는 의미로도 쓰여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단죄를 넘어선 종교적인 단죄이며, 멸망받은 자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라카'(Raca)보다 더 심한 욕설이 된다.
이러한 의미의 욕설을 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의 고유 영역인 심판권을 남용한 죄를 범한 것이며, 영혼의 살인 행위까지도 서슴지 않는 죄를 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의 육체적 목숨을 해치는 것 뿐만 아니라 인격을 모독하여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것까지 살인으로 규정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새로운 기준이요 동인인 내적인 분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에, 그러한 자가 받게 될 형벌이 재판 받음, 최고 의회에 넘겨짐, 불붙는 지옥에 넘겨짐으로 묘사하신다.
이것은 그 형벌의 정도가 점차 심해지는 삼중 점층법적 묘사가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지옥'으로 번역된 '게엔난'(geennan; hell)의 원형 '게엔나'(geenna)는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까이'(gai)와 예루살렘의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힌놈'(hinnom)이 결합되어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갖는 '까이힌놈'(gaihinnom)의 음역(소리나는 데로의 번역)이다.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는 예루살렘 남쪽과 남서쪽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인데, 역사적으로 이곳에서 가나안의 우상인 몰록에게 바치는 인신제사가 행하여졌으므로(2열왕23,10) '살육의 골짜기'로도 불리워졌다(예레19,6).
이처럼 이곳은 사람을 불태워 우상에게 제사지냈던 끔찍한 범죄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쓰레기들이 태워져서 늘 연기가 나며 불이 타오르는 더럽고 공포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범죄한 자가 죽은 후 들어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 장소인 '지옥'을 '힌놈 골짜기'에 비유하였다.
'힌놈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 '게엔나'(geenna)가 '지옥'으로 번역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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