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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한상원목사
PW : 믿음 BIW : 굳건하게 지키라 AG : 성도
TS :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기업을 굳건하게 지켜나가는 것이다.
별꼬라지 다 보겠네
요즘처럼 싱그러운 봄 날씨에는 산책하기도 좋고, 들로, 산으로 놀러 가기도 좋은 때입니다.
온 세상이 새로운 생명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어서 아주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어느 날, 거대한 코끼리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미가 날씨가 너무 좋아서 등산을 한다고 배낭을 메고 코끼리 배 위로 올라갔습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코끼리가 개미에게 소리쳤습니다.
“야 임마! 무겁다, 내려가라!”
그러자 개미가 앞발을 번쩍 치켜들면서
“조용해 이 자슥아! 콱 밟아 죽이기 전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침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하루살이가 혼자 말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입니다.
뭐라 했을까요?
“나원 참.... 세상에 오래 살다 보니..... 별 꼬라지 다 보겠네!”
세상에는 이렇게 말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세상에는 수없이 일어납니다.
세상에는 더 이상의 소망이 없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갈 때, 거기에 새로운 길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P4.
욥기1장에 보면 우스 땅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서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삶을 살았다고 소개한다.
욥은 아들 일곱과 딸 셋의 10남매를 두었다고 한다.
욥은 양이 칠천 마리이고, 낙타가 삼천 마리이고, 소가 오백 겨리이고, 암나귀가 오백 마리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종들도 많이 있었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자식들과 재산을 가지고 동방 사람들 중에 가장 훌륭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는데, 사탄의 시기와 모함에 따라서 어느 한순간에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욥에게서 사라지고 없어지고 만다.
그럴 때에 욥은 너무나 허망하여 절망에 빠질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자식들과 재산을 한순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는데, 어떻게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욥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이렇게 고백한다.
욥기1;20-22절에 보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자식들과 많은 재산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거두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리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이런 고백이 가능할까?
성경에 기록한 욥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그러한 처지에 놓였다면 우리들은 어떤 모습일까?
사람이란 존재는 자식들과 재산에 아주 조금이라도 손해(損害), 위해(危害)를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입에 거품을 물면서 최대한으로 발악하며 지키려고 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다.
자신의 자식들과 재산에 유익을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으로 유익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일을 추진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기본 심성이다.
하물며 열 자식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하고, 그 모든 재산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면 온전하고 덤덤한 정신세계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모습이지 않을까?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헛소리하고 온 세상이 떠나가라고 울고불고 야단치면서 발악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 모습이지 않을까?
오늘 본문 민수기 32장은 어떤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을까?
하나님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서 조상들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했던 땅,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면서 히브리민족 대이동이라는 출애굽을 단행시켰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있다.
곧이어 요단강 대협곡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중간에 이상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이상한 문제, 변수는 항상 존재한다.
어떤 일이건 변수는 발생하게 마련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떤 변수가 발생하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일어난 변수를 어떤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고 계시는가?
하나님께서 그 변수를 해결해 나가시는 과정을 통해서 신앙인들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심어주고 싶어 하시는 것일까?
D4.
① 많은 재산을 주신 하나님.
1절에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라고 소개하고 있다.
르우밴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에게는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다고 한다.
다른 지파에 비하여 얼마나 더 많은 가축 떼를 거느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경에서는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거느리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르우벤과 갓 지파 자손들에게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거느릴 수 있도록 하신 것일까?
자손이든, 물질이든, 가축이든, 무엇이 되었든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하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조카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라기 보다는 종처럼, 데릴사위라는 신분이었지만 종처럼 살았을 때, 창세기31;9에 보면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라반의 재물을 빼앗아서 자신의 재산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신명기8;18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이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라고 말씀하신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인구조사에서 보면 1차 조사 때보다 2차 조사에서는 인구가 감소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민수기26장에서 보면 르우벤 지파는 46,500명에서 43,730명으로 2,770명이 감소한다.
갓 지파는 45,650명에서 40,500명으로 5,150명이 감소한다.
분명히 인구는 감소했는데, 가축 떼는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가축에 대하여 르우벤과 갓 지파 외에 다른 지파는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가했는지, 감소했는지 그 여부를 판가름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르우벤과 갓 지파는 가축 떼가 심히 많았다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면 분명히 르우벤과 갓 지파는 인구는 감소했지만, 가축 떼는, 곧 재산은 증가했다는 것이다.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재산이 증식했다는 것은 전폭적으로 생명의 주인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셨다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재산이 많고 적음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다.
욥의 고백처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께서 재물을 많게 주실 수도 있고, 적게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창조주이시고 천지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많은 재물을 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소망일 뿐이고,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서 많이 주실 수도 있고, 적게 주실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서 르우벤과 갓 지파 자손들에게는 많은 가축 떼를 주신 것이다.
② 좋은 땅을 보게 하시는 하나님.
1절에서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목축할 만한 장소인지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은 많은 가축 떼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늘 이렇게 많은 가축 떼를 어디에서 어떻게 목축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좋은 땅이 어디에 있을까? 찾아보았을 것이다.
가축 떼에는 좋은 목초지가 필수적이다.
많은 가축 떼를 거느리고 살려면 넓은 초원이 보장되는 곳이면 안성마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여러 지역을 유심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이들 눈에 요단강 동쪽 편에 있는 땅이 확 하고 들어온다.
이들은 요단 동편의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바라보는데, 와... 이 땅은 정말 목축하기에 아주 좋은 땅이구나. 하는 확신이 생긴다.
이 땅은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도 똑같이 바라본다.
그러나 다른 10지파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고 그런 땅으로 보였지만, 이 두 지파 사람들에게는 이 땅은 정말 목축하기에 아주 좋은 땅이구나 하는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그 확신하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지파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주시지 않고,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에게만 넘치는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뚜렷하게, 확연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에만, 우리의 생각에만, 우리들의 영혼에만 아주 특별한 무언가로 다가오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서 감동을 주실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평범하게 보이는 것인데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특별한 무언가로 다가오는 것이다.
분명하게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왠지 모르게 나의 마음에는 무언가 확신이 드는 마음을 주시기도 하신다.
저에게는 나무수국을 정원수로 키우면 앞으로 전망이 좋겠다는 감동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확신한다.
나무수국을 정원수로 잘 키우면 그 나무수국이 나와 우리 가족들에게 무언가 유익을 줄 수 있겠다는 이상한 확신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무수국의 여러 품종들을 키우면서 어떤 품종이 정원수로 키우면 좋을까를 궁리하면서 나무수국 키우기에 전념하고 있다.
③ 요청하게 하시는 하나님.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은 2절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3-5절에서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또 이르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면서 요단강 동편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다.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지역이 목축하기에 아주 좋은 땅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모세를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찾아가서 그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지파 공동체가 살아가기에 아주 좋은 땅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요청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서서 요청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요청해야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음으로만, 생각으로만 가지고 있고, 입을 열어 요청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믿음으로 입을 크게 열어 요청해야만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편81:10에서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강력하게 요청하라고 감동을 주시지는 않는가?
사람들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가장 필요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마음과 생각에 찾아오셔서 강력하게 무언가를 요청하도록 감동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 깊은 곳에 찾아오셔서 요청하라고 감동을 주신다면 이제 용기를 내어 믿음으로 요청해야 한다.
우리들의 입을 크게 열어 요청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개입하셔서 가장 좋은 일들로 만들어가실 수 있다.
④ 지난 과거를 돌아보게 하시는 하나님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이 요청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불신과 다툼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모세가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은 즉시 과거 바란 광야 사건이 크로즈업 되어 다가온다.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에 진을 치고 12명의 정탐꾼들을 보내서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10명의 정탐꾼들이 잘못된 보고대회를 열면서 일어난 사건이 지금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의 요청으로 다시 수면 위로 떠 오르는 것이다.
모세는 르우벤과 갓 자손들에게 40년 전 과거 바란 광야 사건을 꺼내면서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이 너무 지나친 요청을 하고 있다고 책망한다.
6-15절에서 모세는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 너희 조상들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냈을 때에 그리 하였었나니,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하셨으므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다 끊어졌느니라.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라고 하면서 책망한다.
지난 과거는 현재의 삶을 조명하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어 나타난다.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서 현재의 모습을 올바르게 체크하는 것이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다.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는 것이고,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있는 것이다.
과거를 가마득히 잃어버리면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바로미터가 사라지는 것이고,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바로미터가 세워지지 않으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모세는 바란 광야 사건을 가지고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고 있는 것이다.
⑤ 화합할 수 있도록 결단하게 하시는 하나님
모세가 바란 광야 사건으로 책망하자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은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좀 더 상세하게 이야기한다.
16-19절에서 “우리가 이 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우리는 요단 이쪽 곧 동쪽에서 기업을 받았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
요단 동편의 땅에서 가족들과 가축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모든 것들을 준비해 준 이후에 다른 지파 사람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가서 다른 지파 백성들보다도 더 앞장서서 가나안 땅 정복 전쟁에 참전할 것이고, 요단강 서쪽에서는 기업을 받지 않을 것이고, 각 지파에게 기업을 나누어준 이후에 다시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와서 가족들과 함께 거주할 것이라고 자신들의 결심을 이야기한다.
25-27절에서도 “주의 종들인 우리는 우리 주의 명령대로 행할 것이라. 우리의 어린 아이들과 아내와 양 떼와 모든 가축은 이곳 길르앗 성읍들에 두고, 종들은 우리 주의 말씀대로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라고 재확인시켜준다.
지도자들이 염려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자신들의 결심을 피력한다.
르우벤과 갓 지파가 먼저 요단강 동편의 지역으로 자신들의 기업으로 분배해 달라는 요청은 얼마든지 다른 지파 사람들의 심기에 불편함을 줄 수 있는 요소이다.
얼마든지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이들은 민족간의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가나안 정복 전쟁에 참전할 것이고, 요단강 서편의 지역에서는 기업을 분배받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들의 결심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얼마든지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서로 화합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분쟁은 자신의 것들을 포기하지 않음에서 일어나는 불행이다.
화합은 먼저 솔선수범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행복이다.
서로 약간씩 뒤로 물러서서 양보하고 포기하면 얼마든지 서로 화합할 수 있고 다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들은 지금 무엇 때문에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분쟁하고 있는가?
가족 간에도, 형제지간에도, 동료들 간에도, 가까운 이웃들 간에도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다투고 있다면 왜 그러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포기하지 못해서 화합하지 못하고 있는가?
조금만 뒤로 물러서서 양보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면 얼마든지 화합할 수 있는데, 서로 믿지 못하여 불신하고, 원망하면서 상대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들의 불신앙과 거친 인격으로 인하여 상대에게 깊은 상처와 피해를 주면서 분쟁하고 있지는 않을까?
뭐든지 자신이 먼저 챙기려고 하다가 분쟁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젠 약간 뒤로 물러서서 손해도 보고, 양보도 하고, 포기도 하면서 화합의 길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신앙인들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양보도 할 수 있고, 포기할 수도 있고, 배려할 수도 있고, 약간씩 손해 볼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것이 세상의 것들을 얻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얻는 길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는 것과 같은 것이다.
⑥ 요청하는 땅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의 결심, 결단을 들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29-30절에서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각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면 길르앗 땅을 그들의 소유로 줄 것이니라. 그러나 만일 그들이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면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너희와 함께 땅을 소유할 것이니라.”라고 한다.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도 32-32절에서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행할 것이라. 우리가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나안 땅에 건너가서 요단 이쪽을 우리가 소유할 기업이 되게 하리이다.”라고 재차 자신들의 결심을 확인시켜 준다.
모세는 33절에서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나라와 바산 왕 옥의 나라를 주되 곧 그 땅과 그 경내의 성읍들과 그 성읍들의 사방 땅을 그들에게 주매,”라고 말씀하면서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에게 요단강 동편의 지역을 기업으로 분배할 것을 약속한다.
그러면서 므낫세 반 지파에게도 요단강 동편의 기업을 같이 나눌 수 있도록 한다.
므낫세 반 지파에게는 어떤 이유로 요단강 동편 지역에 르우벤과 갓 지파와 더불어 기업을 분배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는지는 성경에 설명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도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처럼 하지 않았을까?
신명기3:14에 보면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그술 족속과 마아갓 족속의 경계까지의 아르곱 온 지방을 점령하고 자기의 이름으로 이 바산을 오늘날까지 하봇야일이라 불러오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34-36절에서 “갓 자손은 디본과 아다롯과 아로엘과 아다롯소반과 야셀과 욕브하와 벧니므라와 벧하란들의 견고한 성읍을 건축하였고 또 양을 위하여 우리를 지었으며”라고 기록함으로써 이 지역을 갓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37-38절에서는 “르우벤 자손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기랴다임과 느보와 바알므온들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바꾸었고, 또 십마를 건축하고 건축한 성읍들에 새 이름을 주었고”라고 기록함으로써 이 지역을 르우벤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9-42절에서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자손은 가서 길르앗을 쳐서 빼앗고 거기 있는 아모리인을 쫓아내매, 모세가 길르앗을 므낫세의 아들 마길에게 주매 그가 거기 거주하였고, 므낫세의 아들 야일은 가서 그 촌락들을 빼앗고 하봇야일이라 불렀으며, 노바는 가서 그낫과 그 마을들을 빼앗고 자기 이름을 따라서 노바라 불렀더라.”라고 기록함으로써 이 지역을 므낫세 반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많은 가축 떼를 어떻게 목축해야 할까?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가축 떼를 목축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할 때, 요단강 동편의 좋은 땅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다.
그 땅을 기업으로 받았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생기면서 모세를 비롯한 지도자들에게 요청했을 때 많은 난관과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분배받을 수 있게 된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쉽게 해결되면 좋겠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고 많은 어려움과 난관에 부딪치게 되면서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감동으로 주신 일이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
B4 & L4.
만약에 이들 지파가 요단강 동편을 기업으로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가나안 족속들의 땅이 된다.
가나안 족속들이 차지하면 요단강을 중심으로 계속 분쟁, 다툼이 발생하게 된다.
이 지역은 오늘날 요단강을 중심으로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분쟁하고,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분쟁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생업터전을 잘 지키고 성장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다.
하나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놓은 삶의 터전을 굳게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꽤 차고앉아서 주인노릇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예비해 놓으신 축복의 기업은 빼앗기지 말고 잘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무엇을 기업으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기업이란 삶의 터전이요 후손 대대로 상속하면서 지켜나가야 할 유산이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삼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유산을 기업으로 받고, 그 신앙의 유산을 후손 대대로 물려주고 상속해 주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유산을 굳건하게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감동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굳건하게 지키면서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올려드리고, 후손들에게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라가 없으면 교회도 없다.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있는 것이다.
역대상4:10에서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가장 합당한 기업을 분배해 주시리라 믿는다.
잠언서 30:7-9절에서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에게 너무 많게도 마시고, 너무 적게도 마시고, 가장 합당한 기업을 주셔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축복 가운데 온전하게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