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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산에 오르라
출 24: 12-18
유엔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신실한 신앙인으로 널리 알려진 다그 하마
슐드(Dag Hammarskjold)는 1961년 9월 17일 아프리카 정글에서 비행기 추
락사고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그의 일기장에는 그가 죽기 직전에 기록한
이런 기도문이 쓰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겸
손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나를 위해서 몸을 바치신 주님! 저도 주님께 예하고 대답하나이다." 그는 정
말로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신앙생활을 그 무엇보다도 중요
하게 알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정진에 힘썼습니다.
이렇게 그가 위대한 신앙을 소유했던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고
합니다. 그는 Markings(里程標)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여러 차례 말씀하시기를 가장 만족한 인생은 조국과 인류
를 위해서 몸을 바치는 것이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항상 하나님의 정의를 위
하여 인간을 섬기는 생활을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렇게 부모님의 가르침
은 그의 일생을 그 말씀대로 살게 했습니다. 그가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부단히 애쓰고 힘쓰다가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출발하여 시
내산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들이 200만이나 되었기 때문에 그곳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도 끌어안을 수
있는 광활한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그곳은 그가 얼마 전 떨기나무 불꽃 가운
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소명을 받았던 낯익은 장소였습니다. 모세는
친숙한 이곳 시내산에 왔을 때 마음에 상당한 안정을 찾았을 것입니다. 시내
산을 끼고 있는 거대한 요새와 같은 벌판, 이 정도라면 애굽 군대들의 추격
과 갑작스러운 광야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백성들이 쉴만한 임시거처로는
손색이 없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그는 시내산에 올라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수천 년 전 택하신 종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오늘도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산에 오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철저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믿음을 통하
여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제자의 모습에 대하여 묵상하면서 하나
님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했습니다(12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산으로 올라와서 거기 있으라"(12절)고 하시니
까 모세는 즉시 시내산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200만이나 되는 백성들
을 두고서 어떻게 갈 수 있느냐고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즉각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취해야 할
신앙의 자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라는 명령을 받았듯이 우리들도 때때로 하나님
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때나 기도 드릴 때 하나님께
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
한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순종하고 있습니까? 모세는 순종하되 즉각 순종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즉각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크게 쓰
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즉각
순종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라고 히
브리서 기자는 술회합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할지 구체적인 장소도 모
르면서 하나님의 명령이니까 즉각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로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은 하루 이틀 동안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
니다. 오랜 세월동안 사막을 여행해야 하는 지루한 행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믿고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절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어떤 것은 순종하고 어떤 것은 생각해보고 순종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절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
님의 명령에는 "예"만 있지 "아니오"는 없습니다.
이집트의 어느 수도원에 수도사를 자원하는 한 남자가 찾아와서 수도
원장과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원장은 그 지원자에게 "우리 수도원에
서 가장 중요한 규칙은 복종"이라고 말하면서 어떤 명령이라도 복종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지원자가 무슨 명령이라도 다 따르겠다고 다짐하
자 수도원장은 다 말라버린 버드나무 막대기를 땅에 꽂으며 막대기에서 잎
이 날 때까지 물을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자연법칙을 거스르
는 명령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수도원은 물이 귀하기 때문에 3km 나
떨어져 있는 나일강에서 물을 길어다가 막대기에 물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
러나 그 수도사 지망생은 묵묵히 그 먼 곳에서 지게로 물을 길어다 그 막대
기에 물을 주었습니다.
1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는 이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일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수도원장의 말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1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그 일을 쉬지 않고 계속했습니
다. 3년 째 접어들었지만 그는 막대기에 물을 주기 위하여 먼길을 여전히 왕
복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막대기에서 싹
이 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처럼 그의
절대적인 순종과 성실한 생활이 기적을 낳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
적을 체험하게 된 이 수도사는 나중에 그 수도원장의 후계자가 되어 위대한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여호수아라는 제자를 이끌고 산에 오르면서 아론과 훌에게 200
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맡기고 올라갔습니다. 자기가 없는 동안 자기를 대
신해 백성들을 섬기고 통솔할 일꾼을 세우고 간 것입니다. 모세의 이러한 행
동은 지도자로서 얼마나 훌륭한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에 백성을 돌보
아야 한다고 핑계를 대며 머뭇거리지 않으면서도 산에 오를 때는 자신이 해
야 할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모세! 우리도 이러한 모세의 믿음과 지혜
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인간이 해야 할 일
조차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인간으로
서 할 일은 최선을 다하면서 교회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입니다.
2. 모세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체험했습니다(15-18절).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산에 올라 6일 동안 하나님의 지시를 기다
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산에 오르라고 명령하실 때 올라와 "거기 있으라"(12
절)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는 산 위에서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만일
모세가 산에서 7일째를 기다리지 못하고 "내가 어느 때까지 여호와를 기다
리이까?"라고 말했더라면 그는 하나님과 직접 만나 인류의 역사상 최고의
법인 십계명의 돌판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인
성소에 대한 지시도 받지 못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기다릴 수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
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면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울왕 시절 블레셋 군대가 병거 3만, 마병이 6천, 그리고 해변의 모
래알 같이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몰려와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러한 위기에 처하여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길갈에서 군대를 모아놓고
자기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돌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때까지 기
다리라(삼상 10:8)고 했습니다. 사울왕은 블레셋 군대와 대항하기 위해서 이
스라엘 군대를 길갈에 모으고 사무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기한이 다 되
었건만 사무엘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하나 하나 흩어지기 시
작했고 사기는 떨어져만 갔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위기 중의 위기였습
니다. 사무엘은 오는지 안오는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사울왕은 기다리다
못해 자기가 제사를 막 드렸는데 그때 사무엘이 도착하여 "왕이 행한 것이
무엇이뇨?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 . .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삼상
13:13,14)고 책망했습니다. 사울은 기다리지 못하여 결국 저주를 받아 면류관
을 빼앗긴 수치스러운 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조급해 하는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라기 3장의 말씀의 설교를 듣고 십일조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두
달이나 바쳤는데 돈을 더 벌기는커녕 아들이 깡패들에게 맞고 들어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십일조가 아까워 견딜 수 없었는데 그런 사고가 나니까
그만 십일조 헌금을 중단하고 교회생활도 등한히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
르매 거두리라"(갈 6:9)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
다. 아무 소식이 없어도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에
는 반드시 역사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머무르고 구름이 6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그 구름 속으로 모세를 오르도록 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구름 속에서 40일
동안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그 구름 속에 들어가기 전 6일
은 여호수아와 함께 기다리는 시간이었기에 지루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40일 주야는 영광스러운 구름 속에 있었고, 이 40주야는 여호수아와 떨어진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모세가 여호
수아와 함께 있던 6일 동안 하나님을 기다리면서는 만나를 먹고 시냇물을
마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가운데 들
어갔을 때 여호수아는 모세가 돌아오기까지 먹고 마셨지만 모세는 금식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가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 40일 주야는 하나님
의 은혜 속에서 있던 때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 것도 먹지를 못하였지만 결
코 기력이 쇠하거나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주
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일 이 말씀으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있어야만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 수가 있습니다.
3. 모세는 그들 민족 속에 돌아왔습니다.
모세는 시내산 위의 하나님의 영광 속에서 십계명 돌판과 하나님의
성막에 대한 지시를 받고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더딤을 보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라고 하면서 그 앞에 제사
를 드리고 춤을 추면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자리에 있다가 이런 죄악된 백성들이 있는 민족공동체 속으로 내려
오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내산 위와 아래는 그야말로 천지차이였습니
다. 위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있었고 아래는 인간의 타락으로 광란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산 위에 있지 않고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 능력을 받고는 죄가 있는 곳에 내려와 그들을 구원하
는 사업에 나서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변
화산에서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체험한 것과 비슷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제
자들은 그곳에서 살고 싶어 주님께 간곡히 부탁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산 아래에서는 다른 제자들이 간질 병든 아이 하나를 놓고서 많은 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서기관들과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아이를 위해 아무리 기도를 해도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간질병 든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산 위에만 머무르지 않고 산 아래의 문제를 해결하시러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매주일 하나님의 성산인 교회에 올라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받아 세상에 내려가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 안에서
의 믿음의 생활이 좋다고 할지라도 세상을 등지고서 살아가는 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저 거룩한 보좌를 떠나 아수라장과 같
은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신 것처럼, 교회가,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장소는 바로 이 혼탁한 세상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바로 이
러한 불의한 세상을 구원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교 사찰
과 같이 저 산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오늘의 IMF 관리체제 하에서 신음하는 우리 민족을 구하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이것은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언론인이나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산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으로 은혜와 능력을
받지 못한 사람은 남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필요한 사람은 실력있
는 정치인이나 경제인이나 학자들이 아니라 산 위에 올라 하나님을 만나고
는 신령한 능력을 받아 산 아래로 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
이라도 내 이성이나 상식을 가지고 판단하지 말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 지식
과 지혜를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
도하시리라"(잠 3:5-6).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고는 세
상에 나가 병든 우리 가정과 사회를 사랑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 능력을 사
모하며 이 시간 주님의 성산에 올라와 겸손히 무릎 꿇은 우리 모두에게 주
님께서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해같이 빛나며
24: 12-18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13. 모세가 그 종자 여호수아와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며
14.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기서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라 아론과 훌이 너희와 함께하리니 무릇 일이 있는 자는 그들에게로 나아갈찌니라 하고
15. 모세가 산에 오르매 구름이 산을 가리며
16.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 위에 머무르고 구름이 육일 동안 산을 가리더니 제 칠일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17.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18.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사십일 사십야를 산에 있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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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7:1-9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 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9.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가라사대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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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16-21,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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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이해하려고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1. 성경이 기록될 당시 상황과 함께 성경의 첫 번째 수신자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복음서 본문이 있는 예수님의 산상 변모사건은 당시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것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3사람의 핵심 제자들에게 이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있기 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로소 자신이 고난당하여 죽게 될 것이며 제 3일에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매우 충격적인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일반적인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사상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 한창 들떠 있는 제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름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기까지 했겠습니까? 이 말은 베드로가 감히 예수님의 말씀을 비난하고 질책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가 한 말은 이랬습니다. “하나님 맙소사, 절대로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제자들은 주님이 왕이 되실 것이요, 그리하면 다들 주님 좌우에서 한 자리씩 하게 될 것이라고, 아니 좀 더 넓게 생각하면 이제야 이스라엘이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것이 베드로의 저돌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황당한 경험을 하신 일은 없습니까? 내게 벌어지는 사건 앞에서 감당하지를 못하고 “주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항변해 본 일은 없습니까? 사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든지, 현실에만 고정될 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인도자라는 것은 확실히 믿는다.” 이 말에 의하면 마르틴 루터도 황당하고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수없이 겪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현실에서도 그가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도자시라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항변까지 한 베드로도 베드로이지만 이런 베드로를 향한 우리 주님의 책망도 극치였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사랑하는 제자를 향하여 “사탄아!”라고 하실 만큼 베드로의 행태는 주님을 격노케 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까지 격노하셨습니까? 그 다음 내용이 말씀해줍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런 생각, 그런 말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랬을 때 그는 사탄의 하수인이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게쎄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드리신 기도의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제 우리는 주님이 어째서 그 고통 속에서 드린 기도가 이런 기도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뜻이 아닌 것은 다 사탄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철저히 흑백논리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신앙은 “예” 아니면 “아니요”이지 회색지대는 없기 때문입니다.
2. 이런 배경을 놓고 예수님의 변모사건에 접근해야 합니다.
(1) 주님의 폭탄선언 같은 이런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정말 혼란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런 일이 있고난 다음에 보여주신 것이 저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런 변모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들렸던 하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의 메시야는 그들이 상상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라고 하는 뜻입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주님의 고난 예고말씀에 매우 충격을 받았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 변화산의 변모사건입니다. 말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 제자들에게 그들이 지금 따르는 분이 누구이신가, 그들이 이분을 따르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 후에 제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이 승리하게 된 것은 적어도 주님이 이런 계시로서 그들에게 확신을 심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2)마태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이 그 일차적인 수신자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하여 이미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상황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이방나라인 로마가 어떻게 주의 백성과 하나님의 거룩한 성에 대하여 이토록 처절하게 멸망을 초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처음부터 예수께서 임마누엘이신 것을 증거해 줍니다. 변화산에서 그분의 진짜 모습을 살짝이라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해 예언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이런저런 절박한 상황에서 많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을 그때 이 복음서의 말씀을 듣고서 얼마나 확신과 용기를 얻게 되었겠습니까? 이 승리하신 주님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보장을 받은 제자들이 무엇을 두려워했겠습니까? 이런 확신을 가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땅 끝으로 땅 끝으로 전파되어나갔습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보면 이러한 제자들의 복음행진 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3.그러면 우리 주님의 이 변화산 변모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예수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해 줍니다.
이 놀라운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베드로사도는 나중에 신앙 때문에 고난 받는 초기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것이 베드로전후서입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말씀은 “교묘히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영광을 친히 목격한 자요, 영광 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노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서를 받은 성도들은 당시 많은 고난 중에 있었고, 또 숱한 거짓 유혹에 시달렸습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는데 대한 확신입니다. 일찍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위대한 신앙을 고백한바 있는 베드로는 이제 고난과 유혹에 시달리는 성도들에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했습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흔들릴 이유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소위 기독교 이후시대 또는 탈기독교시대라고 합니다. 더 이상 기독교의 진리가 먹혀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안티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적극적으로 기독교 반대 내지는 박멸운동까지 전개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시며 앞으로 다시 오실 분이십니다. 우리가 이 확실한 신앙으로 무장할 때 우리 개인은 물론 우리 교회가 예수님 말씀대로 반석 위에 세워지는 교회가 돌 줄 믿습니다.
(2) 예수님의 산상 변모사건은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진리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킵니다.
베드로는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고 말했다가 주님께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는 호된 책망을 들었습니다. 베드로 후서가 전해질 당시 초대 교회에는 예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말로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변모사건은 예수님 말씀대로 “천지가 없어질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시켜줍니다.
오늘 이 시대는 성경을 우습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허구성을 파 해치려고 안간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시대정신이 성경에 관해 별로 흥미나 관심을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요,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어 집니다.
프랑스의 무신론자 볼테르 같은 사람은 “기독교는 20년 내에 사라질 것이다. 예수의 12제자가 세운 교회를 나의 이 한 손으로 무너뜨릴 것이다.”고 호언장담했으나 그가 죽은 후 수년이 지나지 않아서 그가 살던 집이 성경을 판매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비록 세상은 인스턴트시대가 되고, 육감적인 것만을 절대시하지만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요 모든 것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저 변화산에서 들린 하늘의 음성처럼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3)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을 통하여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가 되어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중에 바다 한 가운데서 유라굴로 태풍을 만나 죽을 지경에 이른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배를 타고 가던 사람이 이백 칠십육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바울이 썩나서서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어제 밤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내 곁에 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대로 될 줄 믿습니다.” 그 고난 한 가운데서 죄수인 바울이 그들의 지도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냈습니다.
여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 최 측근이었는가 하면 가장 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사도들입니다.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오래 살고 천수를 누렸으나 에베소에서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는 보좌 주변에 24보좌가 있습니다. 거기 사도들의 영광된 자리가 있습니다. 영광은 고난 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얻게 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의 영광을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없이 누리는 영광은 이후에 주님에게서 추방당해 영원한 수치와 고통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고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한 고난이 있습니까? 야고보 사도는 “오히려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을 통해서 “온전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산 사건은 3가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이신 것, 성경말씀이 절대 진리인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혼란한 시대에서도 저 영광스러운 우리 주님에게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