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 박칼린
연예 프로인 <남자의 자격>을 언제 본 적은 있다. 그런데 며칠전 선생님들과 합창 얘기를 하다가 <남자의 자격> 합창 얘기가 나왔다. 또 그제는 길상상를 갔는데 우연히 집어든 불교신문에 박칼린씨와 관련된 기사가 보였다. 며칠전 나누던 이야기가 생각나 주말에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을 몰아서 봤다.
한마디로 ‘하모니’라는 말의 진정한 뜻을, 내가 부른 건 아니지만 몸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알고보면 문학이라는 것도 노래에서 나왔다. 그리고 노래는 몸의 소리다. 지극히 감정적이다. 박칼린씨가 단원들에게 가성의 기교가 아닌 마음으로 전달하라고 주문하는 말을 들으며 또 그것이 전달되는 방식을 보며 마음을 담는다는 게 실감되었다. 말이 대뇌피질의 영역이라면 노래는 가슴의 영역이다. 물론 음악이 리듬과 멜로디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몸과 감정을 통해 더 잘 전달될 것이다. 하지만 말도 또한 마음을 담으면 그러할 것이다. 이쯤에서 기교냐 진실이냐 묻을 필요도 있을 것이다.
개별과 고립의 시대에 개인들이 만나 서로의 소리를 듣고 하모니를 연출하며 하나가 되는 체험은 내가 볼 때 종교체험과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라는 말의 진정한 어원에 접근하는 체험이었을 것이다. 감동이라는 말, 공감이라는 말이야말로 이 시대 우리가 회복하고 싶은 이상이다. 그렇다. 그래서 문학이나 영화, 음악 같은 예술 장르가 여전히 중요한 것이다.
또한 박칼린씨 자체도 상징적이다. 지금은 그나마 다문화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다. 한 때 다문화는 혼혈도 아닌 튀기라 불리웠다. 그래서 다문화라는 기이한 문화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다문화라는 말엔 경제적 빈국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노동하는 것을 연상시키고 저임금과 차별을 생각하게 한다. 이순이씨가 겪었던 시대처럼 다문화는 일각에서 여전히 튀기로 놀림받기도 할 것이다. 아니 어떤 다문화는 그저 거리를 두고 싶은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여전히 혼혈이 이 땅에서 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의도성도 있긴 하지만 최근 텔레비전에 비록 1세계와의 혼혈이지만 혼혈의 사람들이 다문화의 강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뮤지컬이라는 어찌보면 혼혈적인 장르가 한국에 자리잡고 박칼린이 기여한 바를 떠올리면 그녀는 분명 문화와 인종과 세대의 경첩지점에 있는 셈이다. 지금은 확실히 세계화 교잡종의 시대고, 교잡종은 더이상 순종에 대한 열등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과제는 1세계와의 교잡종이 아니라 3,4세계와의 다문화적 교잡종을 긍정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쯤 되니 나도 늦었지만 기타 배우기를 새롭게 시작해볼까 하는 맘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