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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적 가상과 상상적 가상
-헤겔의 미적 가상 비판과 아도르노의 예술론을 중심으로 -
권대근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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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현상에 대해서 반응을 하면서 거기서 문제점을 채취해 내고 동시에 그 문제점이 해결될 수 있는 어떤 방향을 제시하는 것 을 말하는데, critic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 아도르노가 이 현대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론작업을 한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 무엇인가를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고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 부정의 계기를 통해서 바로 어떤 다른 가능성이나 또 어떤 긍정성이라고 하는 것을 또한 제시하려고 하는 그런 작업으로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도대체 저 아도르노의 현대예술에 대한 이론작업이 어떤 상황을 전제로 하는 것이냐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려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 그리고 우리가 현대예술 그러는데 그 현대예술이 도대체 전통적인 예술하고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도 살펴보겠다. 그리고 그 차이 때문에 현대예술이 전통예술과 비교할 수 없는 어떤 장점도 지니지만 동시에 그 전통예술로부터 벗어나온다는 이론 아래 오히려 그 예술이라고 하는 고유한 문제를 스스로 방기해버린 결과를 가져온다고 아도르노가 지적하고 있다는 것도 살펴보겠다. 그리고 미학이론에 담겨 있는 일종의 예술론은 한 방향만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아도르노의 그런 생각을 쭉 따라오면서 그 아도르노의 사유체계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많은 그런 분야들을 통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현대예술에 대해 얘기하면서도 다양한 그런 문제들을 동시적 동시다발적으로 다루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참 얘기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어려운데 그러한 것들을 오늘은 대체로 현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는 그리고 현대와 현대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좀 분리가 된다.
우리가 흔히 모던 모더니티하고 그 다음에 모더니즘을 구분을 한다. 그래서 모터니티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현대성이라고 얘기를 한다면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현대적인 예술의 운동을 얘기를 하고 있다. 동시 동일한 베이스는 똑같지만 전통이라고 하는 것과 그 분리되어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러나 그 방향성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먼저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현대를 정의하는 관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 거기서 현대예술이라는 것도 나오게 되는데 이 현대예술이 바로 아도르노가 보고 있는 하나의 특별한 상황이 있다. 그래서 50년대 60년대 70년대에 이르는 상황에서의 아방가르드운동이 언제 일어나고 그리고 그 아방가르드 운동이 자기모순성에 의해서 처음에 시작되었던 아방가르드의 프로젝트 기획을 스스로 방기해버린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아도르노가 반응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도르노가 위기의식을 갖고 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런 현대예술의 어떤 특별한 상황이라는 건 대체 뭘 얘기하려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현대예술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 좀 이야기할 거고 물론 아도르노가 모든 현대예술을 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다. 아도르노식으로 얘기하자면 자기성찰적인 예술에 대해서 스스로 작업을 하는 일군의 예술운동이나 아니면 예술작품들 혹은 예술가들을 사라져가고 있는 현대예술의 가능성을 다시 구성해 내려고 하는 그런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예술작품들이 대체 내적으로 어떤 운동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이냐 그러니까 아도르노가 평가하고 있는 예술작품들의 어떤 내적 운동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좀 따져보도록 하겠다. 예술작품이 도대체 어떻게 움직여 나가고 있는 것이냐에 대한 질문은 일종의 생산미학적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예술을 생산과정이라든지 그 생산된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그 운동을 보고자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술작품이 문제가 되고 있다면 그래서 그걸 보통 예술작품을 대상으로 해서 그런 그 여러 가지 심미적 현상들을 논고하고자 하는 그런 미학을 보통 생산미학이라고 부른다. 생산미학 그러나 예술작품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수용자들이 있을 때 가능한데 그런 점에서 보게 되면 수용미학이라는 말은 사실 아도르노에게 잘 어울리지 않는다. 나중에 야우스가 오히려 아도르노의 미학이론 내용을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사실은 그 수용미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용미학이라고 하는 말을 아주 전문적으로 쓰면 어울리진 않지만 그러나 넓은 범주에서 우리가 받아들이면 수용미학적인 측면이 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심미적 경험이라고 하는 그런 차원에서 현대예술만이 가능하게 하고 있는 특별한 심미적 경험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그 문제를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실 아도르노의 예술관 속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되고 있는 즉 예술과 사회는 어떤 관계를 지니는 것이냐 이런 문제들을 좀 차근차근 짚어나가면 대체로 이제 미학이론 자체 내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몇 가지 문제들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과정이 성립될 거라고 생각한다.
▲ 불연속성의 현대
그래서 먼저 그 현대란 게 도대체 뭔가를 생각해 보겠다. 현대라는 것은 적어도 사실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물질적 혁명이 일어나면서 기존의 세계관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된다. 그래서 계몽주의라고 하는 것과 그 다음에 산업혁명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이전의 세계로부터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는 그런 관념적이거나 감각적이거나 물질적인 그런 조건들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서게 되는 것을 현대 혹은 근대라고 부른다. 그래서 모던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모던이라고 하는 시기와 더불어서 가장 중요한 그런 이제 그 현상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내려 왔던 그런 그 관념적 아니면 물질적 그런 그 전승성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단절되는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하나의 시대는 늘상 그 이전 시대에 대해서 어떤 모방적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면 현대라는 시기 혹은 근대라는 시기가 등장을 하게 되면 모방적 관계가 아니라 완전한 단절의 그런 관계를 지니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이 연속성 불연속성이라고 하는 바로 그런 그 문제가 현대라고 하는 그런 시기와 더불어서 아주 그 첨예하게 얘기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된다.
▲ 전통과의 불연속성의 현대에서 탄생한 현대예술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보면 아도르노는 보들레르 이후의 예술들을 현대예술이라고 대체로 얘기하고 있다. 보들레르의 악의꽃도 유명하다. 이전에 제기되기도 했지만 보들레르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문제시되었던 옛것과 새것 사이의 논쟁이 있다. 그 옛것과 새것 사이의 논쟁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보들레르는 새것이라고 하는 그 문제를 그 예술운동의 전면적인 그 테마로서 구체화하는 작업을 했고, 그 이후에 예술들이 끊임없이 옛것과 새것의 관계성을 재구성하려고 하는 그런 운동이 일어나게 도니다. 그래서 현대라고 하는 그 현대예술이라고 하는 것의 현대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일차적으로 현대라는 시기가 등장을 하면서 몇 개 여러 가지 특성들이 이전 그 전통성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여러 가지 편차 특수성들이 있다.
▲ 현대예술의 탈전통성
우선은 탈전통성이라고 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근대라고 하는 것은 제가 자꾸 근대와 현대를 바꿔서 죄송한데 지금부터는 근대라고 부르겠다. 보통 모던하면 얼마 전까지는 현대라고 그러다가 요새는 또 근대라고 자꾸 이야기하니까, 바로 이 근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탈전통성을 지닌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꾸 말씀 드리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관념적 물질적 조건들과 더 이상 공유할 수 있는 정의가 없다. 예컨대 산업혁명 같은 걸 한 번 생각을 해 보면 뭐 산업혁명 이전에 우리의 그 물질적 그런 환경과 산업혁명 이후에 물질적 환경이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같이 이어서 생각할 수 있는 여건들이 형성이 되지 않는다.
예컨대 전기라고 하는 걸 한 번 생각해 보면 전기는 근대 산업혁명과 더불어서 생겨난 건데 그 이전에 램프를 킨다든지 아니면 촛불을 킨다든지 하는 그 광학적 여건으로 봐도 도저히 촛불을 밝히면서 빛과의 관계를 가졌던 감각과 전기를 밝히면서 그 빛들과 교류하게 되는 빛의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이어볼 수가 있는 상황이 안 된다. 완전히 다른 거다. 속도감각도 마찬가지고 마차타고 달리는 사람이 자동차 타고 다니고 그 다음에 기차 타고 다니고 하는 것의 그 연계성을 생각할 수도 없다. 또 정신적으로 봐도 근대이전에는 엄중한 의미에서 신적인 시스템 안에서 개인이 한 단자들로서만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이 세계를 운영해 나가고 있는 그 중심점에 이 신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 근대와 더불어서 신성의 자리에 이성이라고 하는 것이 자리를 잡게 되죠. 그러면서 소위 그 개인 혹은 주체라고 하는 그 개념들이 이 세계를 구성해 나가고 있는 주인들이 되고 있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신성과 합리성 사이에 바로 우리가 어떤 전승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바로 이런 식으로 이 대의 특성은 탈전통성에 있다는 것이다.
▲ 현대예술의 해체 분화성
또 하나는 하버마스가 얘기하는 것처럼 분화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중세적이라고 하는 세계는 하나의 커다란 전체로서의 하나의 그 시스템이다. 전부 신에 의해서 전부 통괄되고 있는 커다란 하나의 그런 그 세계라고 한다면 근대가 들어서선 이후에는 인간의 영역들은 전부 분화되기 시작한다, 세밀하게 분화되고 정화되는데, 오늘날에도 점점 전문화되고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막을 수 없는 이 전문화 과정이 바로 그 일종의 그 중세적 관점에서 보면 해체과정이다. 그래서 전체 속에 다 포함되어 있던 것들이 저마다 독자화되어 버리는 과정을 볼 수가 있다.
▲ 진보성
그 다음에 그 굉장히 중요한 것은 현대의 기본적인 에센스라고 하는 것은 새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새것을 창출해 내고 있는 창출해 내는 운동이 현대의 운동이다. 바로 이것들이 움직여 나가고 있는 기본적인 운동을 바로 진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진보다, 끊임없이 발전해 나간다. 탈전통성과 이 분화과정 그리고 새것지향성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진보가 잘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에 의해서 그게 물질적 능력이든 테크닉컬한 것이든 어떤 물질을 생산하는 생산력이든 아니면 정신적 생산력이든 이런 뉴라고 하는 정신적 생산력이든 이런 것들이 인간이 더 이상 신에 의지하거나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테크닉과 합리성 능력을 가지고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풍요한 유토피아를 향해 간다.
▲ 그러나 진보에 대한 회의를 제기한 현대예술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인간이 스스로 구축해 낼 수 있는 텔레오 텔레올로기라고 얘기한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서 끊임없이 진보해간다는 것, 말하자면 점점 발전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소위 현대성의 담론이라면 바로 여기에 똑같이 탈전통성과 분화 과정 그리고 그 새로운 것이라고 하는 운동 속에 같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예술운동으로서의 그런 그 현대가 과연 진보이냐 하는 회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는 다 진보가 되어 가고 있다고 믿고 있는 역사적 과정 전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그 현대예술의 운동은 이 진보가 과연 진보인가 아니면 오히려 진보의 가면을 쓴 바로 그 어떤 퇴보인가라고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현대예술 혹은 근대예술운동의 요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아방가르드 운동의 문제점이 생겨나게 된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몇 개의 단계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최초의 아방가르드 운동들은 그 현대 근대가 제공하고 있는 여러 가지의 새로움을 구축해낼 수 있는 그런 재료들을 통해서 근대 이전의 전통예술과는 완전히 다른 어떤 예술을 구축하려고 하는 그런 그 프로젝트 기획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했다.
▲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목적과 수단의 전도
그러나 그 아방가르드 운동은 점점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성을 잃어버리고 왜 새로움을 추구해야 되는가라고 하는 목적성을 잃어버리고 수단과 목적의 도취가 이루어지는 그 운동으로 변해버린다는 거죠. 즉 새로움이라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예술운동은 현대성이 진보의 이름으로 사실은 억압하거나 폐기하고 있는 요소들을 복원하기 위한 그것들을 지향하기 위해서 이 새로움을 예술운동의 중요한 기획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 새로움 진보를 수행하기 위한 수단이 되면서 목적을 잃어버리고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가져 오는 현상들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왜 새것을 만들어야 되는지도 모르고 그저 새것을 위한 끊임없는 새것 만들기라고 하는 그러한 그 자기모순성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형식들이 태어나고 그리고 또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예술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들이 근본적으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끊임없는 새것들의 확대재생산이 이루어지는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문제를 읽을 수 없게 만드는 그러한 상황이 이루어진다.
▲ 예술의 종말 혹은 예술의 탈예술화
바로 이러한 그 예술의 위기라고 하면 위기다. 그 바로 사실 아도르노가 미학이론을 관통하고 있는 오래된 예술의 역사를 응시하는 하나의 관점이 있는데, 그건 헤겔로부터 오고 있는 예술의 종말이다. 그래서 예술이 종말을 이루게 되는 즉 예술이 종the end of art말이라는 명제가 있는데 헤겔에게는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가 감각적으로 현현하는 어떤 그런 영역이다. 그래서 그 진리가 정신이 계속 변증법적인 운동을 거쳐서 최종적 단계인 절대정신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진리가 예술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자체로 구체화되는 그런 영역에 도착하게 되지만 그 이전까지는 진리라고 하는 것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한 유일한 방식은 바로 이 미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 유명한 그 말이 바로 그 예술은 그런 진리가 감각적으로 현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한다. 그런데 바로 그 헤겔의 미학에서 궁극적으로 얘기될 수밖에 없는 것은 만일 정신이 끊임없는 변증법적인 진보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진리의 상태에 스스로 도달하게 된다면 예술의 기능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다. 그래서 예술은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예술의 행복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다. 그래서 왜냐하면 예술은 진리를 위해서 봉사하고 죽는 것이 예술의 임무였고 그래서 그 진리가 실재로 정신에 의해서 구현되는 상태가 되게 되면 예술은 기꺼이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되고 그 완수하게 된 상태에서 스스로 끝나버리는 까뮈의 말을 우리가 좀 빌려서 얘기하게 된다면 행복한 죽음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술은 자기가 완성되면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원한다. 그것이 예술의 종말이라고 한다면 그런 예술의 종말이라는 관점에서 아도르노가 상당히 문제시하고 굉장히 회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예술이 끊임없이 새것을 위한 새것을 계속 만들어내는 과정 속에서 헤겔이 얘기하는 바 행복한 자기완성 속에서 자기가 사라져 가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실현하는 것 없이 다만 새것을 위한 새것의 새것의 운동으로 자기를 스스로 무력화시키는 과정인가를 물어보고 있다.
▲ 아도르노, 예술의 탈예술화 비판
그래서 아도르노가 질문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 상황은 바로 헤겔이 얘기하는 바 예술의 종말현상인가 아니면 예술의 탈예술화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하고 있다. 예술의 완전히 새것을 위한 새것이라고 하는 운동을 일으키면서 그 어떠한 외부의 그런 그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나가고 있는 이러한 상황이 소위 헤겔이 얘기하는바 점점 정신 사회 세계가 유토피아의 상태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예술도 그 운동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스스로 자기의 그런 그 완성된 죽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는 전혀 어떤 완성상태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지 않는데도 예술이 자기 혼자서만 자기구현의 운동을 실현해내어가고 있는 과정인가 예술과 진리의 관계 속에서 보면 진리는 날이 갈수록 실현될 가망성이 없는데 예술 자기 혼자서만 계속 자기의 실현을 구현해 나가고 있다면 진리와 완전히 동떨어져 나간 예술일 뿐이고 그래서 자유를 구가하면 할수록 예술이 스스로 자기의 예술됨을 포기하는 과정이다 하는 식으로 아도르노가 보고 있다. 그것을 바로 예술의 탈예술화라고 보는 거다. 그래서 미학이론 첫 줄을 보게 되면 지금은 그 누구도 예술에게 책임을 묻지도 않고 그리고 예술의 존재 근거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있다. 엄중한 위기의 상황을 얘기를 하고 있다. 예술은 도대체 왜 존재하는지 그 존재 이유 자체를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라고 얘기를 할 때 그 전제는 예술이 원래 진리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진리를 현현시키는 임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그러한 임무와 무관하다. 그야말로 자기 좋은 어떤 그런 위시만 계속하고 있는 상황일 때 예술은 어쩔 수 없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리고 그 어떠한 목적성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 것도 실재로는 주장할 내용도 갖고 있지 못한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그것을 예술의 종말이 예술의 탈예술화로 바로 바뀌어나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바로 이 상황에 대해서 아도르노는 바로 이념적으로 비판 작업을 가하려고 한다. 비판라는 것은 그것 하나의 현상이 가지고 있는 부정태를 확실히 드러내면서 부정태의 계기를 통해서 어떤 긍정적인 상태를 동시에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 비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탈예술화라고 하는 위기상황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론작업을 펼치고 있는 걸 알 수가 있다.
▲ 위기에 처해있는 현대 예술의 상황
그래서 이 아도르노가 바로 이 위기로 보고 있는 예술의 운동 예술의 현상을 위기로 읽고 있다. 그러한 당대 그런 예술의 예술운동의 특징들을 몇 개로 좀 정리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거는 무엇이냐 하면 소위 예술의 상황인데, 현대예술의 상황 예술이 어떠한 상황에 지금 처해 있느냐 하나는 재료들의 파편화를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또 뭐 동일한 얘기지만 소위 명목주의라고 하는 그런 명목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다. 또 하나는 얘기할 수 있는 것은 이 가상이라고 하는 것 샤인이라고 하는 것인데, (schein)이 샤인이라고 하는 것을 해체하려고 하는 운동이 일어난다. 일단 재료들의 파편화다.
풍경이 더 아름다울까, 아니면 그림이 더 아름다울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풍경이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 “그림 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제시하고 그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고 제안하면, 당혹감이 찾아들 것이다. 우리의 선입견은 풍경을 더 아름다운 것으로 말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에서는 그림이 풍경의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근거의 노릇을 하고 있다. 예) 플라톤에 따르면, 현실세계는 이데아의 모방이며, 그림은 현실의 모방이다. 현실은 이데아보다 열등하며, 그림은 현실보다 더 열등하다. -플라톤의 예술배격론
플라톤 이래로 ‘미메시스’는 서양 예술론의 중심이론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연보다 열등한 예술을 창조하려는 인간의 이상한 열망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근대에 이르러 예술작품이 가지는 고유의 형식미를 강조하는 헤겔과 칸트의 정연한 이론적 성과에 맞닥뜨리게 되자 모방론을 더욱 힘을 잃게 되었다.
-미적 가상, 미적 진보, 미적 취향, 미적 의무
1. 개념 정의
미적 가상이란 일차적으로 예술을 말한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일종이다. 이에 따라 예술은 미적 가상이라 일컬어진다.
2. 진리이면서 허위
예술은 현실세계가 구현하지 못하는 참된 세계를 꿈꾼다는 점에서 – 진리,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참된 세계를 가상 속에서만 꿈꾼다는 점에서 – 허위
예) 신데렐라의 행복
-우리가 바라는 참된 행복이지만 결코 그런 행복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허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3. 진리로서의 예술과 허위로서의 예술
1) 진리로서의 예술 –헤겔
인간정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자연보다 인공미 즉 예술미를 더 아름답다고 봄.
어지럽게 늘브러져 있는 천연 그대로의 자연보다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가공된 미적 가상이 더 아름답다고 봄.
인위적 행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우리의 무의식은 헤겔에서 유래한다. 헤겔은 플라톤과는 정반대로 자연을 오히려 불완전한 것으로 평가한다. 인위적 노력으로 자연을 가공할 때 자연은 발전하고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림은 인위적 행위가 개입된 창작물로서 본래의 자연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예) 그림 같은 풍경
풍경보다 그림이 더 아름답다는, 즉 자연미보다 인공미가 더 아름답다는 우리의 무의식적 판단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인공미로 탄생하는 미적 가상으로서의 예술은 참된 진리를 구현하고 있다.
2) 허위로서의 예술 –현대 예술가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의 현대예술은 예술이 무언가 진리를 담고 있으리라는 우리의 기존 상식, 즉 헤겔이 주장하는 진리로서의 예술관을 철저히 파괴한다. 사용하던 변기를 갖다놓고 예술작품이라고 우기며, 기괴하게 일그러뜨린 모습으로 사람의 얼굴을 묘사하며 예술이라 주장한다. 미적 가상은 말 그대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이처럼 무모하게 진리를 담고 있다고 추겨세워지는 가상은 차라리 무시하는 게 낫다.
4. 아도르노의 예술론
1) 미적 가상의 이중적 의미를 해명
-미적 가상을 참된 진리라 보는 헤겔을 비판, 반면 미적 가상을 허위라 보는 현대예술가들을 비판
-예술의 진리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헤겔을 비판
(헤겔이 묘사하는 진리로서의 예술은 실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거친 자연의 모습 가운데 아름다운 부분을 인위적으로 발췌하고 재구성해 표현한 풍경화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위의 모습을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데렐라의 행복은 현실 속에서 결코 실현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도르노가 예술의 허위적 측면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분명 허위를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없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아직 있지 않은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해설) 즉 완벽하게 아름다운 풍경은 아직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존재할 수 있는 풍경이며, 신데렐라의 행복 또한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언젠가 실현될 수 있고, 또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헤겔 예술론의 문제점
-예술을 통한 진리의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예술을 통한 진리 구현이 이미 완료되었다고 파악한 점에 있다.
2) 아도르노의 예술론 –비판정신을 동반한 예술론
헤겔이 묘사하는 예술은 세계를 긍정하고 세계와 타협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헤겔처럼 세계를 긍정하는 예술은 현실의 모습을 부질없이 미화할 뿐이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현실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데서만 발견된다. 세계에 대한 비판을 담음으로써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절대적 진실을 주장하지 않고 현실의 극복을 주장한다.
5. 아도르노의 현대 예술
거대한 아우슈비츠처럼 관리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할까. 아도르노는 예술이 사회와 비동일성을 주장하며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기에 예술은 스스로 추해져야 한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아름다운 가상으로서 보충한다면 그것은 기만이 된다. 색깔이 없어진 세계에서 예술은 검은색이어야 한다. 이 세계는 지금 '동일성의 폭력'이 자리잡고 있으므로. 예술은 사회의 타자로 남기 위해 계속 새로워져야 한다. 끝없는 탈주.
그래서 예술은 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게 되는데, 새로운 예술의 창작은 내용에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그 누구도 아직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형식은 침전된 내용이기에 진리는 재료를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에 있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미적 진보’에 참여하지 않고 과거의 형식 언어를 고집하는 예술가는 미적으로만 퇴행적일 뿐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반동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매번 새로운 것을 평균적 코드로 규준화해서 대중에게 제공해버린다는 점에서, 계속 새롭다는 게 가능할까 의문이 든다. 결국 새로운 방식도 익숙한 형식으로 해석되지 않는가. 또한 예술이 끝없는 탈주를 하게 되면 남아있는 대중은 누가 위로하는가. 예술마저도 화해를 꿈꾸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을까.
여기서 아도르노는 화해의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예술이 진실하려면 그것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화해적이고 적대적이며 분열된 파편들의 모습으로 드러내야 한다. 다른 한편 그 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예술은 그렇게 갈가리 찢겨진 것들을 비폭력적인 구성으로 다시 종합함으로써 현실을 화해의 빛 속에 드러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예술은 비화해적인 것을 증언해야 하며 그것을 화해시키려는 경향을 가져야만 한다.] [예술은 현실의 단편을 받아들이고, 이 단편들을 별자리처럼 구성함으로써 거기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드러낸다. 이로써 예술 속에선 ‘존재하는 것’에 대한 탄핵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대가 서로 결합된다. 단편들의 별자리가 폭발할 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불꽃처럼 순간적, 찰나적으로 나타난다.]
삶의 희망, 유토피아로서의 예술
“예술은 유토피아를 향하여 부정성의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한다. 예술의 상품화에 맞서 투쟁해야 하며, 지식과 비판적 성찰로써 예술의 낯섦에 접근해야 한다.” – 아도르노
아도르노는 예술의 유토피아적인 성격을 강조하였다. 예술은 기존 세계의 불완전함을 드러내 보여야 했으며, 그럼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직접 불러올 수는 없지만 좀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을 암시해야 했다. 그것은 어떤 행복도 지속될 수 없는 경험적 현실의 덧없음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예술은 손상되지 않은 삶을 버텨내는 파수꾼이 되는 것이다.
II. 로그아웃
-악마가 되지 않는 길은 예술에 있다.
여기서 바로 예술은 단지 미적 가상에만 머물지 않고 상상적 가상으로 승화된다. ‘아직 있지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비판이 필요하다. 사회적 비판 기능은 미적 가상으로서의 예술이 상상적 가상으로 승화되는 지점에서 필수적이다.
아도르노는 이 무서운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실마리를 인문학과 예술에서 찾았다.
<세상을 바꾼 질문>의 저자 권재원은 아도르노의 생각을 이렇게 풀어놨다.
[인문학이란 인간의 삶 곳곳에서 그 의미를 따져 묻고 다른 대안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사실 인문학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의 인문학 지식은 실용적으로는, 즉 도구적으로는 별 가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인문학을 하는 과정에서 몸에 배기 마련인 의미를 따져 묻는 성찰과 탐구의 자세다. 이렇게 의미를 따져 묻고 성찰하는 자세가 이미 도구적 이성의 반대편에 서 있는 객관적 이성의 참모습인 것이다.
예술은 경험을 크게 확장시키고 공감 능력과 상상력을 길러 준다. 아우슈비츠에서 예술적 소양이 있는 사람은 가스실 안의 풍경이 보이지 않더라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역사상 예술은 현재 보이는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역할을 해왔다. 예술적 소양이 높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하나의 대상, 수치로 대하지 않는다. 그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로 대한다. 모든 사람은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많이 접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기 쉽다. 서로의 이야기를 공감하고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잔혹해지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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