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을 품은 마을 용운동 마을길 답사 후기
* 일시:2024년 9월 7일(토) 10:00~12:30
* 만나는 곳: 스타벅스 대전 용운점(용운동 251)
* 점심 및 헤어지는 곳: 얼큰이칼국수(용운로 27, 용운동 451-5
* 답사 동선: 용운동새마을비 -> 용운도서관 박팽년시조비-> 문충사 -> 용운동 장승까지 3㎞
* 참가 인원: 8명
용운동의 역사
1789년 <호구총수>에 모오리, 초동리, 선암리, 용방리의 이름이 보이며, 1914년부터 용방리와 초동리를 합해 대전군 외남면 용방리가 되었다. 1940년 대전부 용운정으로, 광복 후 대전시 용운동으로 개명되었다.
용운동의 지명 유래
용운동은 대전대학교를 가운데 두고 서쪽으로는 용수천, 동쪽으로는 용운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특히 용수골은 옛날 이곳에서 용이 등천했다해서 용수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용방리는 용수골 아래에 생겼다해서 용방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모리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 골짜기만은 난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해서 모리라고 불렀다고 하며, 새울은 약 300년 전 봉곡 송주석이라는 분이 자리를 잡아서 봉곡 즉 새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답사기
스타벅스 대전 용운점에서 모여 인사를 나누고 주변을 둘러보며 용운동의 역사와 옛 마을 선량, 새울, 모리, 용방리의 지명 유래 등 개략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답사길에 나섰다.
* 새울새마을사업비
처음 찾아간 곳은 새울새마을비. 새울새마을비는 1970년대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던 새마을운동이 각 마을에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 새마을운동의 내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전략) 우리 부락민들도 73가구 400여 주민이 남녀노소 없이 기꺼이 참여하여 아래의 사업을 하였다.
국기 게양대 설치, 부락민 정신 계발운동, 생활교량 및 하수도 시설 18개소, 담장개량 연 2km, 지붕개량 63동, 포도단지 조성 개선 사업, 과학적인 영농개선, 회관건립, 전기가설73가구,전화가설 3대, 마을안길 확장 2km, 간이 상수도 시설 46호, 3정보, 양돈, 양계 등 소득증대 사업 추진, 신흥 협동조합 창설 등 자산 730만원등 총 32종목, 755개의 사업을 하였다.
1976.4.22
* e편한세상대전에코포레아파트
새울새마을비를 앞에 두고 담장 너머에 34층의 e편한세상대전에코포레아파트가 우뚝 서있어서 용운동의 도시 변화를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지금 e편한세상대전에코포레아파트는 1985년 6월 1,130가구가 입주한 용운동 주공1단지 아파트를 재건축한 것이다. 이 아파트는 1984년 11월에 동호수 추첨이 있었다는데 분양대상 213가구에 943명이 신청을 해 4.4대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으며, 이 아파트 분양을 받으려고 서울에서 3백여명이 주민등록을 이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추첨 후 1백만원~2백만원의 프리미엄까지 붙었고, 이 아파트의 투기 바람에 영향을 받아 중촌동과 탄방동의 주공아파트 가격이 급상승하여 분양 가격의 곱절 이상으로 호가되고 있다는 신문기사가 날 정도였다고 하니 1980년대 중반 대전에서도 불기 시작한 아파트 분양 열풍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용운1단지 주공아파트는 재건축 대상이 되어 2020년 34층의 고층아파트가 되어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 용운도서관 박팽년시조비와 뒷면의 송가
용운도서관에 들르기로 한 것은 도서관 앞 화단에 있는 박팽년시조비를 보기 위해서다. 박팽년유허지와 유허비는 가양2동에 있지만 이곳 용운동에 단종복위운동에 참가하여 수양대군의 회유를 받을 때 자신의 의지를 밝힌 그 유명한 시조를 새긴 비석이 있다. 그 아래에는 박팽년을 소개하는 글이 적혀 있다.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절의정신 및 문학적 공덕을 기리고자 유허지 부근에 이 시조비를 세운다’고 적혀 있다.
이 비석을 보면서 용운동이야말로 용을 품은 동네라는 생각이 든다. 절의를 지키고자 하는 뜻을 세워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세상에 우뚝 선 용이 아니겠는가?
박팽년시조비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이 뒷면에 적힌 송가다.
김용재
사람마다 슬픈 가슴
벙벙한 그리움 심어 놓고
청사(靑史)의 갈피갈피
속우린 영혼의 꽃 피는가
어진 뜻 곧은 절개여
천년을 더 희게 빛나리
600년 뒤에도 그 삶의 의미를 잊지 않고 노래한다는 것, 더구나 그 시를 노래한 시인 김용재도 1961년 3.8민주의거시 대전고등학교 학생으로 3.8민주의거에 참여하여 민주의 정신을 소리 높여 외쳤던 시인이다. 정신은 정신으로 이어진다. 박팽년시조비에서는 뒷면에 적힌 송가를 놓치고 가면 안될 것이다.
용운도서관 옆길로 연결된 용운근린공원을 따라 올라가면 용운동 주택단지가 한 눈에 보인다. 이 용운동 주택단지도 1980년대 택지개발이 되어 들어선 단독주택들이다. 볕이 환하게 들어 온 동네가 환하고 밝다.
새울로를 건너 용운동이 품은 또 다른 용을 찾아 문충사로 갔다.
* 문충사
문충사는 연재 송병선(1836~1906)을 기리는 사당이다. 송병선은 송시열의 9대손으로 조선 말기 은둔 선비로서 중앙 조정에서도 송병선의 높은 학문적 경륜을 얻고자 24차례에 걸쳐 벼슬을 내렸으나 한 번도 실직(實職)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운을 바로잡고자 조정에 올리는 쓴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26차례에 걸쳐 글을 올렸으니 이만하면 선비의 곧은 정신으로 나라의 기운을 바로잡고자 한 노력을 알 수 있다.
송병선의 일생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그의 죽음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소식을 뒤늦게 듣고 늑약의 폐기와 늑약의 체결에 앞장선 간신들의 처단을 주청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고종 황제에게 독대를 청했다. 독대를 하였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자 다시 황제를 만나려 했으나 경무사 윤철규가 송병선을 가마에 태워 고향으로 되돌려보내고 말았다. 이에 송병선은 1906월 1월 24일(음력 12월 30일) 을사조약에 항거하기 위해 음독 자살하였다. 선비로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한 의지를 보이기 위한 마지막 선택을 한 것이다. 송병선의 죽음 후 문충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1914년 영동에 송병선과 송병순을 기리는 문충사를 건립했다가 송병선 사후 60주년이 되던 1966년 송병선을 따르던 선비들이 모여 지금의 용운동에 문충사를 이전하였다.
송병선의 생가지는 동구 성남동이다. 그런데 사후 송병선을 기리기 위한 사당은 용운동에 자리잡고 있다.
용운도서관의 박팽년시조비와 문충사를 둘러 보며 용운동은 그 시대의 정신을 지켜내고자 애쓴 큰 용을 품은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용운동은 지금도 대한민국의 이름을 세계에 드높인 젊은 용도 품고 있다.
2024파리올림픽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과 개인전 2관왕을 한 오상욱이 용운동에 있는 대전대학교에서 실력을 갈고 닦아 세계에 두각을 드러낸 젊은 용이다.
* 용운동 장승
용운동 장승 앞의 안내문을 보면 ‘이 장승은 연산군 광해군 때 경기도 광주지방에서 내려와 이곳에 터 잡은 임씨 일가들이 세운 것이라고 전해 오는데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제사를 지내어 잡신을 막고 재앙을 물리쳤다고 한다. 최근에는 사라져 가는 민속신앙을 되살리기 위하여 용운동 주민들이 재를 올려 마을의 태평을 기원하고 있다. 장승에 천하대장군을 새기지 않고 장신을 새기는 것은 경기도 광주지방에 많이 보이고 있어 그 흐름을 알 수 있다.’고 안내되어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 장승은 용방마을 아파트 담벽에 기대어 마치 펜트하우스처럼 멋진 집에서 넉넉하게 자리잡고 있어 여유가 있어 보인다. 반면 건너편 용운동 고층아파트 담에 기대어 있는 할머니 장승은 작년까지만 해도 철창에 열쇠가 걸린 채 가두어져 있어 마치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여 안타까웠었다. 이번에 가보니 할머니 장승을 가둬 놓은 것처럼 보였던 철창이 사라지고 앞에 제단도 갖추고 깔끔히 정리되어 보기에 좋아 기분이 상쾌했다.
용운동을 지키는 할머니 할아버지 장승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9월 초인데도 30도를 훌쩍 넘긴 무더위를 얼큰이칼국수와 냉콩칼국수로 달래며 답사를 마쳤다.
첫댓글 답사후기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용운동 마을여행 알차게 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