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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 성경이 주는 특별한 축복들 말씀/ 시편 19:1-14 요절/ 시편 19:7 | 2024. 9. 15 | |
특 강 |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안나 선교사와 저는 올해 결혼 50주년을 맞았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받은 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는 안나 선교사와 믿음의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믿음과 인생 목적, 같은 사명과 스피릿을 가지고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넘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 안나 선교사는 저에게 잠언 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을 생각나게 합니다. 31:28-30절을 읽겠습니다. 그의 자식들은 일어나 감사하며 그의 남편은 칭찬하기를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시편 19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6절은 자연 계시입니다. 7-9절은 하나님의 특별 계시, 즉 성경에 관한 것입니다. 10-14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윗의 응답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특별한 축복 몇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자연 계시(1-6절). 오늘날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습니다. 하늘을 바라보아도 오염으로 인해 영롱한 별빛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찬양할 만큼 마음이 감동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며 창조주 하나님의 경이로움에 감동을 받고 시를 썼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1). 여기서 하늘(heavens)은 우주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우주의 모든 것은 우연히 존재하거나 현재의 상태로 진화하지 않았습니다.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총명하신 하나님께서 완벽한 계획에 따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은하가 있으며, 각 은하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과 행성이 있습니다. NASA는 허블 우주 망원경을 통해 1000억 개의 은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 수는 2000억 개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지구가 속한 은하인 the Milky Way는 100조 개가 넘는 별이 있으며, 이보다 훨씬 더 큰 은하도 있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광대한 세상을 보라!고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절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고 쉬지 않고 선포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언어에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3-4a). 어떤 사람은 행동 없이 말만 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없이 조용히, 꾸준히, 신실하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자는 은유를 사용하여 태양을 시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고대인들은 태양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고 태양을 숭배했지만 다윗은 태양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고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4b-6a). 신랑은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인 결혼식을 앞두고 큰 열정으로 기다립니다. 다윗은 태양에서 그런 열정을 보았습니다. 또 태양은 자신의 코스를 기쁘고 활기차게 달리는 챔피언 선수와 같습니다. 만일 태양이 달리기를 멈춘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세상의 끝 날이 올 것입니다. 태양은 지구보다 백만 배 이상 크지만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자신의 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챔피언입니까? 이 충실한 챔피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다윗은 태양의 열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6b). 태양의 중심부는 섭씨 1500만도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게 뜨겁습니다. 엄청난 열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지구에서 약 1억5천만km나 떨어져 있어 우리에게 도달할 때에는 그 온기가 견딜 만합니다. 태양은 은하계를 중심으로 초속 약 220Km라는 엄청난 속도로 공전하고, 시속 약 777,300km의 속도로 우주를 이동하며 지구를 중력으로 끌어당깁니다. 동시에 지구는 시속 107,208 km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며 23.5도 기울어진 채로 자전합니다. 기울기 정도가 조금이라도 변하거나, 공전 또는 자전 속도가 조금이라도 변하거나, 태양과의 거리가 조금이라도 변하면 어떻게 될까요? 지구의 모든 것이 타버리거나 얼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 평형은 매 순간 조금도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태양은 하나님의 완벽한 설계 덕분에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하며 지구에 지속적으로 생명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모든 생명이 유지되고 온갖 종류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이 놀라운 현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주의 신비, 지구의 신비, 생명의 신비는 끝이 없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빅뱅이나 진화론과 같은 인류의 기원에 관한 이론을 들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들이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히 생긴 것일까? 무에서 어떻게 모든 생명체가 생겨날 수 있을까?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이 어떻게 복잡한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을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창조는 비과학적이며 미신에 불과하고, 진화론이 과학적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속고 있습니다. 로마서 1:20절은 분명히 선포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것을 통해 그분의 위엄과 전능하신 능력과 완벽한 지혜, 선하심, 아름다우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둘째, 성경을 통한 특별 계시(7-9). 자연 계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인식할 수 있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존 칼빈은 하나님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자신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주신다라고 했습니다. 7절부터 하나님의 호칭이 '하나님'에서 '여호와'로 바꾸어지는데 이는 성경의 핵심 단어로 6,713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인 엘로힘을 가리키고, 여호와"는 히브리어로 야훼입니다. 야훼"는 출애굽기 3: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昻 晟 昻, I AM WHO I AM) 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누구에 의해 존재되어 지지 않고 항상 현재적으로 영원히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고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십니다(계 1:8).
7-9절에는 성경에 대한 6가지 칭호가 나옵니다.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법입니다. 이 칭호들은 성경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줍니다. 다이아몬드가 어느 각도로 보든지 각각 다른 아름다움을 드러내듯이, 성경은 다양한 측면에서 생명의 빛을 발합니다. 완전(perfect)하다는 것은 완벽한(complete), 흠이 없는(blameless), 진실되고(integrity), 진정한(sincerity)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성경이 인간의 모든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고 의로운 삶을 살기 위한 완벽한 지침을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확실(sure)하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견고한 토대를 제공하고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직(right)하다는 것은 성경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정의롭다는 의미이고, 순결(pure)은 성경이 오염되지 않고 불순물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정결(clean)은 성경의 가르침이 거룩함을 증진시키고 마음과 생각을 정화시킨다는 뜻이며, 진실(true)은 성경은 거짓되지 않고 참되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들은 성경의 권위와 신뢰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진리를 말합니다(요 17:17). 성경은 전적으로 모든 거짓과 사기와 속임수와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무오(無誤)합니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시고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롬 3:4; 딛 1:2; 히 6:18a).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믿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성경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책입니다.
율법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리키는 토라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다(롬 7:12,14). 여호와의 증거는 성경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과거에 있었던 죽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의 역사의 산 증거로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살아있는 교훈이 됩니다(롬 15:4). 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억압하고 얽어 매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축복과 생명을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항상 약속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라고 한 것은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고(잠 1:7; 9:10),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문이라고 하였습니다(전 13:13). 법"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위대한 사상이나 철학을 모은 책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어떤 위대한 인간의 말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 사람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살전 1:9). 성경은 1,5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다양한 배경을 가진 40여 명의 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반에 걸쳐 메시아 사상이 한결같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성경의 실제 저자는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벧후 1:21; 삼하 23:2; 행 1:16). 성경은 철학이나 과학책이 아니라 구원의 책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교리가 아니라 인격인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영웅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시는 살아 계신 분입니다. 성경의 중심 인물은 예수님입니다(요 5:39). 구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해 증거합니다. 구약은 율법, 역사서, 시편,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눅 24:44-45).
예수님은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만 우리 인간을 영원한 파멸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 나라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다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계실 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심으로 인간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심으셨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실제 삶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인간의 최대 원수인 죽음의 권세를 파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영생의 문을 여셨습니다. 세상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값없이 무조건적으로 용서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이야기가 바로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딤후 3:15-17).
10-14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윗의 응답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금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10a). 순금은 세상에서 최고의 부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순금으로 많은 것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 의로움, 평화, 기쁨, 영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 모든 것을 무료로 제공합니다. 꿀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달콤한 것을 상징합니다(10b).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고를 받았고, 그 말씀을 지킴으로써 큰 상급을 받았습니다(11, 창 15:1). 때때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노예가 되어 그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12-13). 또한 그는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14). 다윗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 중에서 오늘 본문을 기초로 몇 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때 창조의 질서 안에서 인간다운 고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반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인간성을 상실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하고 죄를 지어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인간성을 상실할 때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가 성적 부패인데 동성애는 성적 부패의 극에 달한 것입니다(창 19:5; 롬 1:26-27).
최근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패러디한 공연이 펼쳐져 전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동성애자인 드래그 퀸(drag queen)이 예수님 역을 맡았고, 트랜스젠더 모델과 가수들이 제자들 역할을 하며 도발적으로 활보하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은 점점 더 인간성을 상실해가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최근 갤럽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 13명 중 1명(7.6%)이 성소수자(LGBTQ+)라고 밝혔으며, 이 중 Z세대는 22.3%에 달합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버릴 때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과 존엄성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동물보다 못한 인간으로 추락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노아 시대와 같이 폭력과 부패, 부도덕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참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창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고귀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시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인간 간의 갈등, 건강 문제, 경제적 부담, 자녀와의 문제, 자신의 죄와 실패 등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특히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직장 내 갈등, 심지어 교회 내에서 생기는 인간 간의 갈등은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하며 우리의 영혼을 고갈시킵니다. 이때 우리가 어디서 위로와 격려를 찾고 우리의 영혼이 소성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갈등 문제는 자존심이 상한 데서 발생합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용서를 구하면 갈등이 해결되고 영혼의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럴 힘이 없기 때문에 먼저 용서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용서를 깊이 덧입을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1만 달란트이지만 형제에게 진 빚은 100데나리온에 불과하다고 하셨습니다(마 18:21~35). 1만 달란트는 우리가 16만년 동안 매일 벌어 한 푼도 안 쓰고 갚아야 할 엄청난 금액입니다. 그러나 100데나리온은 약 1,300만원입니다. 하나님은 1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신음하며 고통하고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빚을 다 탕감해 주셨습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기억할 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한 잘못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고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I am sorry. Please forgive me"라고 말하며 화해를 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에 놀라운 평화를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느 9:17, 단 9:9).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용서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탕자처럼 진정으로 회개하면 주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히 10:17-18).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참된 자유와 평화와 위로를 경험하고 영혼이 소생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7b절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지혜는 지식과 다릅니다. 지식은 연구, 리서치, 경험을 통해 얻은 사실과 아이디어로 구성되는 반면, 지혜는 지식의 어떤 측면이 진실되고 옳은지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참된 지혜를 줍니다. 우리는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인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혜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선택하는 데서 잘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장성하였을 때,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과 영광의 자리였습니다. 반면 노예 백성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은 모든 특권을 상실하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보화를 얻기 위해 이 세상에서의 부와 명성과 권력을 포기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상급을 얻기 위해 눈에 보이는 순간적인 쾌락과 유혹을 부인했습니다(히 11:24-26). 그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어린 시절 부모가 그에게 심어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분명한 영적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출 2:9-10). 당시에 사람들이 보기에 모세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 같이 보였지만 후에 그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음을 보게 됩니다. 저는 모태로부터 크리스천이 되어 교회에 다녔지만 말씀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알지 못해 방황했습니다. 그러다가 1966년 대학입시에 실패하여 방황할 때 친구의 인도로 배사라 선교사님의 영어 성경공부에 참석하기 위해 UBF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이사무엘 선교사님을 만나 창세기 말씀을 공부하면서 3:9,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말씀공부를 통해 일생 내가 해야 할 사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졸업 후, 당시는 이름도 없고 장래가 불투명한 UBF 풀타임 목자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모한 일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계산하지 않고 믿음으로 평생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목자의 길을 가고자 결단했습니다. 안나 선교사도 입시 실패로 좌절하고 있을 때 고려 의대에 다니던 언니 테레사 선교사의 인도로 대학 1학년 때 UBF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31절 말씀을 통해 인생의 분명한 목적을 발견하고 평생 성경을 가르치는 목자의 삶을 살고자 결단했습니다. 우리는 1974년 6월에 마가복음 10:45절을 기초로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1976년 9월에 안암 개척역사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안암 사역을 섬기면서 그 어떤 것보다도 말씀 연구와 예수님의 제자양성과 세계선교에 전념하고자 결단했습니다. 30년간의 사역을 섬긴 후60세의 젊지 않은 나이에 선교사로 나아간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선교 명령에 순종하여 2006년 3월에 미국에 선교사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로 왔을 때 우리는 미국 한 캠퍼스를 개척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2008년 9월 어느 날 안나 선교사가 마더 베리 목자님으로부터 personal assistant가 되어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저희는 두 방향을 놓고 갈등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사무엘상 15:22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희는 역사의식을 갖고 이 말씀에 순종하여 결단했습니다. 마더 베리는 결혼도 하나님께 바치고 한국 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제자를 키우는 것보다 이 한 분을 섬기는 것이 더 중요하며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3년 동안 마더 베리와 함께 살면서 그분의 삶 자체에서 예수님을 본받는 아름다운 믿음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은혜였습니다. 또한 Ron Ward, Mark Vucekovich, Teddy Hembekides 미국 목자들과 함께 성경교제 연구팀을 만들어 섬기며, 특히 란워드 목자님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안나 선교사와 저는 선택의 기로에서 어찌해야 할바를 모를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희에게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만납니다. 어떤 선택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선택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선택을 할 때 우리에게는 지식보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혜는 가치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공부를 할 때 올바른 가치관을 쌓기에 힘써야 합니다. 모세는 시편 90:10,12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넷째,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눈을 밝게 합니다(8).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축복 중 하나는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 주신다는 것입니다(요 1:12).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고 이 땅에서 선한 일에 힘쓰며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롬 8:17; 벧전 1:3-4). 이 소망으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쁨으로 자신의 생명과 소유를 주께 드릴 수 있었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는 마음의 참된 기쁨을 잃고, 세상의 쾌락과 유혹, 그리고 탐욕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어두워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축복을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이 영적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과 소감과 성경 읽기와 성경 쓰기를 통해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 전권을 필사함으로 가보로 남기기도 합니다. 말씀 암송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척 스윈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경 암송보다 더 도움되는 훈련을 알지 못한다…기도 생활은 강화될 것이며 증거는 더 날카롭고 효과적이 될 것이다. 태도와 세계관이 바뀔 것이다. 생각은 깨어 있고 주의력은 높아질 것이다. 담대함이나 확신은 높아지며 믿음은 견고해질 것이다. 또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성경을 읽을 때 문단을 짧게 나누어 제목을 붙이면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데로 기도형식으로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를 신앙 고백적인 사실 연구(confessional factual study)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고 영적으로 어두워진 우리의 눈을 밝게 해줍니다. 이때 우리는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끝으로, 가장 큰 축복은 참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예배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4~5장은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만이 모든 피조물로부터 예배를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합니다(계 4:11; 5:12). 우리가 누구를 예배하느냐 하는 문제는 인생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참된 예배 대상을 찾지 못하면 사마리아 여인처럼 방황하며 우리의 고귀한 삶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배는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돈과 직업을 가장 중히 여기고 우선적으로 추구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우상이 됩니다. 또한 자녀들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자녀들이 우상이 됩니다. 고대인들은 해, 달, 자연을 숭배했지만 현대인은 팀 켈러가 지적한대로 돈, 권력, 섹스를 숭배합니다. 우리가 이런 우상들을 숭배할 때 그 결과는 항상 비참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유진 피터슨은 예배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삶이 편향적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 수 있도록 중심을 잡는 모임이다. 우리는 중심이 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대한 응답으로 살아가기 위해 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우리는 모든 광고와 유혹의 소리에 흔들리며 멍청한 삶을 살게 된다. 예배가 없으면 우리는 조작되고 조종 받는 삶을 살게 된다... 중심이 없으면 둘레도 없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안정된 방향이나 지속적인 목적이 없이 세상의 끝없는 불안의 전염병에 휩쓸리게 된다. 오늘날 한국에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과 극심한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이 힘들고, 취직을 해도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조기 은퇴로 인해 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사람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불안과 두려움과 쉼이 없는 것은 공통점입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이 분명치 않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사람들은 그 원인이 부모나 지도자나 자신이 처한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비난합니다. 어느 정도는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삶의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예배는 일요일에 교회에 오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사는 자들은 분명한 삶의 목적과 방향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주는 불안의 전염병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염려가 엄습할 때마다 하나님께 맡기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주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기 때문에 그 마음에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깊은 평화가 있습니다(빌 4:6-7).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남을 탓하거나 불평하기보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합니다(살전 5:16-18). 오히려 어려움에 부딪칠 때마다 믿음으로 도전하여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갑니다. 이 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봐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인가?"(What is my life centered arou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