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분홍은 내게 꽤 애증이다. 향기롭고 달콤한 분홍은 꽃의 색이고, 디저트의 색이다. 더불어 여성을 떠올리지만, 20세기 초까지 분홍은 단호하고 강한 남자아이 포지션으로 취급됐다. 예수 그리스도의 색이며 피, 열정, 에너지를 뜻하는 작은 빨강이었으니까. 베이비 컬러 유행의 전복은 20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유력한 유래는 크게 두 가지다. 적색 군복이 청색으로 바뀌면서 푸른 계열이 남성성을 얻으며 반전됐다는 설, 세계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인인 마이미가 입은 핑크 드레스 설이 있다. 전쟁 기간 칙칙한 검정과 파랑 노동복만 입던 여성들은 그 화려함에 매료되어 블랙과 블루를 벗어던지고 핑크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 일화대로라면 여성의 주체적인 선택이었지만, 마케팅은 상술로 이용하고, 사람들은 핑크에 점점 소극적 이미지를 결합했다.
여자아이들은 자라면서 분홍을 멸시한다. 정확히는 그에 깃든 속성을 기피한다. 꿋꿋이 분홍색을 좋아하며 나이를 먹으면 핑크 공주라며 놀림을 받는다. 사실 좋아하면서도 뽀얗지 않아서, 날씬하지 않아서, 우스꽝스러운 취급을 받을까 봐 멀리한다. 내 경우 분홍에 무관심했다. 디즈니 공주나 바비 인형은 취향이 아니었고, 미취학 아동 때까지 남자아이로 이뤄진 또래집단에서 노느라 영향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런데 중3 때, 친구 따라 간 명동에서 예산에 맞추느라 선택의 여지없이 고른 베이비 핑크 티셔츠를 대봤을 때 초췌했던 피부에 급격히 화색이 돌아서 깜짝 놀랐다. 탁한 체크무늬 교복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나은 건가 고민했는데 착각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 만난 분홍은 웬만해서는 날 배신하지 않았다. 딸기우유 색, 수박바 색, 솜사탕 색. 또 벚꽃, 철쭉, 복숭아꽃, 장미 등 각종 꽃잎 색. 말갛고 밝은, 전형적인 분홍일수록 잘 어울리는 걸 부정할 수 없었고, 볼수록 정이 들었다.
분홍색이 어울린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이 나를 판단하는 시선이 달라졌다. 과하게 여성스러우며 몽상적인 사람처럼 보는 게 아닌가! 색을 더 깊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하늘색이나 민트색을 입은 모습으로는 함부로 파악하지 않는데, 분홍색을 입은 첫인상에는 일반화가 따라왔다. 참 소녀다우세요, 여리하고 피부가 하얘서 여자여자한 색이 잘 받네요. 딱히 비하가 아니더라도, 젠더이분법적 발언을 계속 듣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렇다고 모처럼 잘 어울리는 색을 포기할 수도 없고, 딜레마에 빠졌다. 색에는 죄가 없다. 상징색이 바뀌었을 뿐, 과거나 현대나 고착된 이미지와 편견은 그대로다. 색에 어떤 사회적 인식을 학습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