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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육체의 일 |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라디아서 5장 19절~21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4절)
정욕과 탐심은 분명한 육체의 일이다..
정욕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할 때.. 주도적이 된다..
탐심은 자신의 이성을 다스리지 못할 때.. 주도적이 된다..
바울은..
음행과 더러운 것(impurity) 호색.. 분쟁..분냄.. 투기.. 술취함..방탕함..등을 정욕에 해당 되는 일로..
우상 숭배와 주술..원수 맺는 것.. 당 짓는 것..분열함..이단..등을 탐심에 해당 되는 것들로 규정한다..
육에 해가 되는 것은.. 정욕적인 것이고..
영에 해가 되는 것은.. 탐심에 속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하나님앞에서 타락하여 돌아서게 되는 일 중에서.. 음행은 제일 범하기 쉽고 가장 빨리 멀어지게 되는 원인이다..
음행은 상대가 있어야 가능하기에 지극히 상대적이다..
특히 간음과 불륜은 가정을 깨뜨리는 일이기에..참으로 아픈 죄악이다..
죄없는 배우자와 자녀들을 파탄의 고통으로 몰아 넣기에.. 정말 해서는 안될 일이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앞에 자신을 두고서 간음을 행했을 때..
하나님의 거룩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그로 인해 하나님까지.. 피해자들의 마음속에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신앙이 누구를 변화시킬 능력이 없는 허탄한 것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믿는 자가 간음을 행했을 때.. 증오와 분노뿐만 아니라
상대의 영혼까지 손상을 받게 되니..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기독교인에 실망을 느낀 자가 어찌 구원에 관한 신앙의 권유를 마음으로 받겠는가..
이러니.. 사탄은 가장 치명적인 무기로서 음행을 사용한다..
요즈음 애인 하나 없는 사람은.. 팔불출에 해당된다는 웃지 못할 말들이 오간다..
믿음의 가르침과 불륜의 상대가 육체를 원할 때..그 순간 선악과는 당장에 앞에 놓여진다..
그리고 벌거벗은 아담과 이브는 주저없이 열매를 따서 먹는다..
심지어 예배드리고 돌아서서도 교회 문앞에서 상대방과 통화를 해댄다..
문둥병은 고통을 못느낀단다..
이미 저주받은 마음의 문둥병자들은 이런 죄악에 익숙하다..
고통조차 못느낀다면 이미 불치이다..
당장에 돌아서야 한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무엇인가를 사악하게 원하는 마음.. 우리는 이것을 탐심이라 부른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라는 십계명은 탐심을 드러내 준다..
이웃의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다른 이의 명예와 자리를 탐하는 마음도..
다른 이들이 받고 있는 존경을 깎아 내리고 싶은 욕망도
수군 거리며 당을 짓고 분열하며 등 뒤에서 칼을 빼드는 비열한 마음속에
분명히 탐심이 자리한다..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는 이유는..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합리화 시킬 영적 정당성을 담보받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자신들 만의 가르침으로 윤색한다..
우리는 그들을 이단이라 부른다..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분명히 탐심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의 주관자는 확실히 사탄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4절)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 중에서 정욕과 탐심이 있다는 말이다..
결코 쉽게 빠져 나올 수 없기에..
우리가 평생을 두고서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 것이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이다..
방언을 하고 신유를 하고 예언을 하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면서도..
마음 속에 정욕과 탐심을 죽이지 못한다면.. 단언하건대.. 거듭난 자가 아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완료형이다..
평생을 통해 이뤄나가야 할 성화인 것도 맞지만..
거듭났다는 것은 새로운 영적 존재로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전혀 다른 거룩한 욕심으로 채워져야만 진정으로 거듭난 자이다..
타인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밀알로 썩혀서 죽을 각오로 다시 태어난 자가
탐심과 정욕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거듭났다는 말이 도덕적으로 완전해 졌다는 말이 아니고..
체질적으로 육적인 소욕에서 멀어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거듭났다는 것은 이와 같이 정욕과 탐심에서 멀어진 자라는 말이다..
소망과 탐욕의 차이는 무엇일까..
거듭난 자의 소망은 오직 천국에 집중 된다
반면에 육에 속한 자의 탐심은 세상에 집중 된다..
아무리 에둘러 변명하더라도..
모두가 그저 스스로 속일 뿐이고..
그 차이는 자명하다..
바울은..
그러기에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라고 못박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나아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 하며
육체의 탐욕과 성령님의 바램을 이분법적 대립항으로 둔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장 17절)
이것이..
성경이 못박아 구분하여 선언하고 있는 진정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면서 육과 영의 치열하고도 곤고한 싸움을 탄식한 바울의 말은 무슨 뜻인가..
그것이 정답이기에 그렇다..
거듭난 자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세상과 담쌓으면서 사는 자가 아니기에 그러하다..
세상에 몸담고 사는 이상..
유혹에 무너지고.. 감당치 못 할 시험에 드는 것이 어쩔도리 없는.. 숙명이기에..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날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지속적이고 치열한 영적 각성외에 도리가 없다..
또한..
자신의 절대적 무능을 드러내어 내려 놓고..
성령께서 행하시기를 위임하는 낮은 자의 겸손밖에는 방법이 없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거룩을 한순간도 체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거듭났다는 말은..
자신의 노력과 능력을 새롭게 지음 받은 천사같은 자로 새로이 지음받는 것이 아닌..
날마다 성령님을 간구하며..그분의 도우심 앞에 자신을 내려놓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육의 소욕을 이길 진정한 능력은 성령님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우리는 단지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을 순종으로 위탁 드리는것 외에 달리 할일이 없다..
거듭난 자란..
성령의 소욕을 이루며 살기를 원하여..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내려놓으며..
순간 순간을 위임하는 자이다../자료ⓒ창골산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