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촌강 전투를 아십니까?
‘일본속의 한국문화’강의시간에 강사가 대뜸 ‘백촌강 전투를 아십니까?’하자 모두들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라면 임진왜란이나 일제식민지나 알지 그 외는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대량 이주한 것은 첫 번째가 가야연맹왕국伽倻聯盟王國)이 망한 후 가야유민들일 것이고 두 번째는 백제가 망한 후 백제유민들일 것이다. 백제는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하자 백제의 지배 권속들은 일본으로 피신했다.
왜로 피신한 의자왕의 아들 풍은 왜의 황극천황(고오교쿠 덴노오-여자천황)에게 구원병을 청하자 천황은 즉각 군선 800척과 병사 2만7천명을 백촌강?(변산반도나 군산부근 금강하류)전투에 투입하고 왜왕은 大宰府다자이후까지 와서 왜군들을 격려 했다는데 그게 667년8월 28-30일경이라 한다.
이 전투는 동아시아의 신라와 당(나당)와 백제와 왜가 한편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 왜는 백촌강 전투에 사활을 걸었지만 왜군들은 대패했다. 백촌강 전투의 패배가 그들의 한으로 남았는지 황극천황, 고오교쿠 덴노오 여자천황의 죽음도 신라인에 의해 암살되었다고 믿고서는 천황의 아들은 5년간 상복 차림으로 군주의 자리에도 오르지 않았다 한다. 그들은 백촌강 전투의 패배를 복수의 심정으로 이를 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백제 유민들은 왜로 건너가 일부는 지배계층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또 그 후손들은 한반도에서 쫓겨 온 백제 유민으로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신라에 대한 원망이나 복수심으로 한반도에 대한 감정과 애증으로 복합되어 있으리.
일본은 전투가 붙어도, 군과 관만 싸우고 백성은 불구경한 듯 있다가 나중에 승리한 쪽으로 따라 가는 것이 그들이다. 일본사관학교에서는 백제 계백장군이 황산벌전투에 출정할 때 가족들을 칼로 베고 출전한 것과 이 순신장군이 백성을 위한 구국충정을 존경해 특정과목으로 정했다 한다. 이게 일본의 ‘칼의 문화’가 아닌지도 모른다. 일본 스모가 단판 승부로 끝을 맺듯 말이다
8월15일, 우리는 광복절로 기념하고 일본은 패전일로 기념하고 있다. 이 날 한일 양국 간에는 미묘한 감정으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두고 있다. 일본 입장에서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자기 나라를 위해 싸운 전사들의 신사라, 총리마다 자기들의 순국선열들을 위한 참배는 당연지사라 내뱉는다.
최인호가 쓴 ‘잃어버린 왕국’에 왜는 백촌강 전투에 패배하자 나당 연합군의 역습을 막기 위해 쓰시마에서 혼슈의 아마구치까지 히로시마와 시코쿠 사이에 이르는 해안에다 기네다성, 나가초토성, 다기이성, 가쿠카성, 야지만성, 다카애성 등, 곳곳에 성을 쌓아 대비하고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다 한다.
일본인들은 죽으면 수구초심으로 한반도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말도 있지만 신라계와 백제계와의 결혼은 금혼이라고 한다. 이게 백촌강 전투가 남긴 잔상은 아닐는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길에 나서고 경복궁이 전소하자 왜군들은 전쟁이 끝난 줄 알았는데 그때서야 조선은 전쟁이 시작되어 전국에서 의병과 승병이 일어나자 왜군들은 의아했다.
부소산고란사 외벽에 낙화암 아래로 뛰어드는 궁녀들과 백제 군사들이 장렬하게 싸우는 벽화를 볼 수 있다. 고란사는 백제의 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을 고려시대에 백제의 후예들이 삼천궁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중창하여 고란사(高蘭寺)라 하지만 백제가 망한 후 300년이 지나서야 지어졌다. 이 또한 지역 간의 깊은 골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키히토 일황은 백제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왜군을 파병한 백천강 전투나 무령왕과 성왕에 대한 흠모, 왕인 등에 의한 문화의 전파인지 몰라도 간무(桓武)천황(737-806)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記)에 기록된 것과 관련해 여러 인연들로 한반도와 깊은 관계를 대변하고 천황의 당숙이 부여를 찾았을 때 무령왕릉을 참배하면서 향불을 피웠다는데 그 향은 일본에서 가지고 온 침향으로 1300년 전 백제 무령왕 시대의 침향목이라 한다. 일본 황실은 백제와의 관계를 땔 수 없는 역사라 보고 있다,
일본은 역사서에 紀를 쓰고 우리는 記로 쓴다. 日本書紀에는 ‘白村江’으로, 三國史記에는 ‘白江’으로, 舊唐書에는 ‘白江口’로 기록되어 있지만 기록상 확실한 장소를 몰라 군산 앞바다나 변산반도쯤에 금강하류로 보고 있다. “한국敎育者大賞 News Letter 제29호”에 당진 백제부흥전쟁 백강진혼문화예술제에 대한 기사가 특집처럼 실렸다. “당진, 백제부흥전쟁, 백강 진혼문화예술제” 눈여겨 볼 단어들이다. 백촌강 전투에서 불귀객들의 진혼제인가 싶다.
1972년, 황선우가 작사 작곡하고 조용필 가수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 가사속의 형제는 재일동포를 가리키며 1970년대 당시 동포애를 강조한 시대의 노래라고 하지만 이 노래가 일본에서 더 히트를 친 것은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재일동포는 물론 그들 심중에는 아직도 백촌강전투(백제부흥전쟁)의 고혼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은 아닐까
‘원한은 되로 주면 말로 갚는다.’는 그들의 말처럼 노랫말의 내 형제는 멀리는 백제유민들의 한도 있을 테고, 가까이는 식민지로 삼았던 한반도에 대한 향수가 아닌지도 모른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 마다
목메어 불러 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일본역사의 반은 백제요, 반은 신라라 했듯 일본을 보면 한국이 보인다는 말이 헛말이 아닌 듯하다. 역사적으로 백제는 어려울 때 일본과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했고, 신라는 어려울 때 고구려와 당의 도움을 청했다. 남북분단, 동서분열은 어디다 구원을 청해야 되나. ‘일본속의 한국문화’ 강좌는 먼 역사의 시간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첫댓글 박윤호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자료 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의자님 댓글 고맙습니다
올한해 강건하시고 형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