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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1일(성령강림절 후 아홉 번째 주일)
열왕기상 19:13~16
거기에서 당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스토리 유예방식(Suspending the Story)
김규태 목사
*설교 주제: 하나님은 영적 침체에 빠진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설교 목적: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사명을 받아 영적 회복을 경험해야 한다.
갈등
저는 몇 해 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왔었습니다. 그때, 저는 갈멜산 정상에 세워진 엘리야 기념교회당을 방문했었습니다. 기념교회당 맞은편에는 ‘엘리야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대부분 동상이 다소 과장되었듯이, 엘리야의 동상도 다소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한 손에 칼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쪽 발로는 바알 선지자를 밟고 서 있었습니다. 마치 손에 수류탄을 들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윤봉길 의사 동상처럼, 엘리야의 동상도 영웅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넓은 이마와 뚜렷한 이모구비, 높여 쳐든 칼은 엘리야의 용맹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을 기대했다면 아마 여러분은 적잖이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그려지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은 영웅적인 동상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엘리야는 두려워했습니다. 영웅적인 엘리야가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인 엘리야, 마치 자기가 손해를 볼까 봐 두려워 떠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의 엘리야가 우리에게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저는 이 질문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질문에 엘리야의 이름 대신 여러분의 이름을 넣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들 것 같습니까?
엘리야는 왜 그곳에 있었을까요? 지금 엘리야는 호렙산 한 굴 어귀에 서 있었습니다. 왜 그가 거기에 서 있었을까요? 왜 그는 사마리아로부터 아주 먼 길을 떠나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는 호렙산에까지 올라왔을까요?
그가 유대 광야를 떠나 이곳 호렙산에 도착하기까지 그는 사십 주, 사십 야를 쉬지 않고 걸어와야 했습니다. 마치 그의 선조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을 지내야 했던 것처럼, 그도 하나님의 산 호렙에 오르기까지 사십 주야를 걸어야만 했습니다.
왜 엘리야는 거친 광야 길을 걸어야만 했을까요? 그는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해 그곳까지 도망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신경쇠약을 경험하고 있었고, 극도로 탈진해 있었습니다.
과연 호렙산의 엘리야가 갈멜산의 엘리야 맞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홀로 영적 대결을 벌였던 그 엘리야가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합니다. 우리는 때로 영웅도 되었다가, 반역자도 됩니다. 우리는 이타적인 사랑을 드러내는 신실한 사역자가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둘 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때로는 성자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비열한 인간이 되기도 하죠.
문제의 발단이 되었던 건, 이세벨의 도발적인 발언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에 의해 바알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세벨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웠습니다.
평소 엘리야의 모습은 아니었지요. 어쩌면 그가 갈멜산에서 너무나 많은 체력을 고갈했을지도 모릅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교회의 초청 행사를 마치고 탈진한 교역자와 같았지요. 그는 너무나 지쳐 있어서 어디론가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사마리아를 떠나 브엘세바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이 그에게는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자기와 동행하는 사람 없이 홀로 그곳을 찾아간 엘리야는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야 비로소 거친 숨을 몰아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경험이 없었습니까? 너무나 지쳐서 혼자만 있고 싶은 생각을 한 적이 있으셨나요? 꽁꽁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꺼운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서, 몇 날 며칠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거친 록 음악을 들으면서 지내고 싶어 한 적이 있으셨습니까?
지금 엘리야가 그런 상황입니다. 엘리야는 그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엘리야를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으로 이끌어오셨습니다. 그 과정이 어땠을까요? 몸과 마음이 지쳐서 날카로운 엘리야를 잘 타일러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까지 이끌어오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가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굴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말이죠. 그는 아직 굴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햇볕 한 줄기 들지 않는 캄캄한 방안에 틀어박혀 방문을 잠그고 있었던 것처럼, 엘리야도 어두운 동굴 안에 숨어지내며 굴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어두운 베란다 상자 뒤에 발톱을 숨기고 있는 고양이와 같다고 해야 할까요?
심화
이제 여러분은 왜 엘리야가 그곳에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엘리야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엘리야를 굴 밖으로 이끌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쉈습니다. 그러나 굴 안에 숨어 있던 엘리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산을 흔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굴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불이 일어나 모든 것을 태울 기세였지요. 그런데도 엘리야는 굴 안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신비로운 자연현상이 엘리야를 굴 밖으로 나오게 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후, 세미한 음성이 엘리야에게 들렸습니다. 그 음성은 엘리야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신비로운 자연현상에 반응하지 않던 엘리야가 세미한 음성에는 반응합니다. 그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굴 밖에 나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엘리야가 지금 그곳에 있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런 질문을 엘리야에게 던지셨을까요?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4절).”
여러분은 하나님과 엘리야 사이의 대화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목사님이 축도를 마치고 예배당 입구에서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한 성도가 목사님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는 정말 은혜로웠습니다. 귀한 말씀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그 성도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도님, 지난주에 유등천이 범람해서 유천교가 붕괴했다는 소식을 들으셨나요? 나는 그 소식 듣고 지난 간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여러분은 목사님과 성도가 나눈 대화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왜 엘리야가 호렙산에 있는지를 물어보셨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질문과는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열심이 특심 하잖아요? 내가 그동안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어요. 오직 나만 남았다고요!”
아마 저 같으면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래서? 나 보고 어쩌라고!”
애초에 엘리야에게서 좋은 대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왜 하나님은 반복해서 그가 호렙산에 서 있는 이유를 물어보셨을까요? 하나님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반복해서 말하는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셨을까요?
그런데 저는 엘리야의 대답에서 무언가를 느낍니다. 여러분은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는 엘리야의 대답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설이 어머니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녀가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결정했을 때, 집에서는 영 반기는 눈치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던 그녀는 가난하고 무능력한 아버지와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리는 어머니의 하나뿐인 희망이었습니다.
그녀는 바쁘고 고단한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과 동생을 돌보며 자랐습니다. 그녀는 명문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줄곧 과외를 하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평생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해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설이를 낳고 집에 있을 때도 온전히 아이와 마주 보며 놀아줘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엄마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 어린 설이는 엄마에게 더 매달리며 보챘습니다. 그럴수록 설이 어머니는 자신만 바라보는 것 같은 딸 아이를 보며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이 어머니는 어린 딸을 양육하면서 ‘누가 나에게 기대고 바라는 상황’이 다시금 펼쳐지자 부담감에 짓눌렸습니다. 여러분은 설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출처: 오종은, 「너무 사랑해서 아픈 부모에게」(두란노, 2022);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5월호), 201쪽에서 재인용.
노아는 의인이었습니다. 더구나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온 땅이 부패하였고, 그들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 하자, 하나님은 물로써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의로웠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은 구원하시기로 하셨습니다. 노아는 주변 사람들의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의 나이가 600세가 되던 해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 안에 들어갔던 노아와 그의 가족들과 짐승들만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노아의 일생에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대합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세 아들은 땅에서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 있었습니다. 어떻게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장막 안에 누워 있을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러한 노아의 행동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비록 노아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방주를 지었지만, 노아가 느낄 수 있었던 부담감은 없었을까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동네 소꿉친구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노아에게는 없었을까요? 노아가 구원 선의 선장 역할을 하면서 흔들리는 배 안의 가족과 동물을 돌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책임감과 부담감은 없었을까요?
노아가 새로운 땅에 정착해서 포도나무를 심었을 때, 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새로운 인류의 가장 역할을 감당해야 했던 노아의 어깨에 무거운 짐이 지어져 있는 것을 여러분은 느낄 수 있나요?
왜 의인이요 완전했던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누워 있어야 했을까요? 어쩌면, 노아도 우리처럼 방문을 꼭꼭 잠그고 햇볕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두운 장막 안에 머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귀에 두꺼운 헤드폰을 쓰고 전설적인 록 밴드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음악을 듣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죠.
만약 노아가 콧노래를 부를 때 장막 앞을 지나던 세 아들이 그의 노랫소리를 듣는다면, 그를 모른 채 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노아에게 필요한 것은 부담감이 아니라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아까 소개해 드렸던 설이 어머니에게도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남편에게 위로받고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녀의 더 깊은 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멍든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지친 부모의 마음을 알아줄 이가 하나님 말고 또 있을까요? 징글징글하게 말 안 듣고 힘들게 하는 자식들을 견뎌 오신 분이 하나님이 아시십니까? 하나님만큼 부모의 마음을 잘 알아주실 분이 없으니, 그 지친 마음을 아버지 앞에 내려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출처: 오종은, 「너무 사랑해서 아픈 부모에게」(두란노, 2022);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5월호), 201쪽에서 재인용.
“내가 만군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 14절).”
저는 엘리야에게서 부담감이 느껴집니다. 이제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 그래서 이제 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부담감이 그에게서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엘리야에게 무엇이라고 말해 주고 싶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전환/복음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안식년을 보내며 주민이 2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외딴 지역에 있는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 교회에서 15년 이상 담임 목회를 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성도 간의 분쟁으로 현재 남은 교인이 일곱 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주중에는 다른 일을 하며 생활비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예배 후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하잖아요. 나는 못생긴 나무니까, 어디 갈 생각도 못 하고 이곳을 지키고 있답니다.”
자신을 못생긴 나무라고 지칭하는 말이 억지 겸양이 아닌 진심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겸손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못생긴 나무이기에 교회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목사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종이기에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사명을 주셨기에 그 어려운 교회를 지키는 것입니다.
보이는 현상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어려운 재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명의 사람이 교회를 지킵니다.
-출처: 이국진, 「사람이 여물어 교회가 꽃피다」(홍성사, 2015); 「생명의 삶」(두란노, 2024년 7월호), 97쪽에서 재인용.
하나님께서는 부담감에 짓눌려 있던 엘리야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15~16절).”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좌절의 자리, 절망의 자리, 무거운 부담감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은 장차 엘리야를 통해 세워질 사람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이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 하나님께 구해야 할 기도의 제목은 무엇입니까?
해소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나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마이클 토머스는 사업상 바쁜 약속으로 급히 차를 몰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교통 체증이 심한 시간이라 교차로에 들어서자마자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습니다.
정지선에 멈춰 선 토머스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신호가 바뀌면 제일 먼저 쏜살같이 달려야지.’ 이 순간 토머스의 최대 관심사는 조금이라도 빨리 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신호가 깜빡이기 시작한 순간, 교차로에 시각장애인 부부가 나타났습니다. 남편은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아내는 갓난아이를 업은 상태였습니다. 부부가 뭘 착각했는지 차들이 맹렬하게 달려들려는 찰나에 교차로에 들어선 것입니다.
토머스는 마음속으로 탄식했습니다. ‘큰일 났다. 보나 마나 달려드는 차들은 급정거하면서 브레이크를 밟느라 요란할 테고, 차에 있는 사람들은 비키라고 아우성을 치겠구나.’
그런데 토머스가 염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모든 차가 일시에 멈춰 선 것입니다. 누구도 소리를 지르지 않았습니다. 앞 못 보는 가족을 위해 교차로 일대만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말합니다. “오른쪽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부부에게 방향을 일러 준 것입니다. 그러자 다른 차에서도 “오른쪽, 오른쪽” 합창이 이어집니다. 장애인 가족이 합창을 따라 인도 위에 올라서자 운전자들은 손뼉을 쳐 줬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가족을 위해 바쁜 시간에 차량들이 멈춰 선 광경은 마이클 토머스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출처: 박성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용기」(두란노, 2015); 「생명의 삶 플러스」(두란노, 2024년 5월호), 29쪽에서 재인용.
혹시 여러분에게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수많은 믿음의 선진 들이 여러분을 향해 “오른쪽, 오른쪽으로” 합창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혹시 하늘의 천군 천사가 여러분을 위해 박수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힘내라, 힘내라”
만약 제가 그 소리를 듣게 된다면,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큰소리로 외칠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힘을 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