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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47
1월21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연중 제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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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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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4_3jKOMcB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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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저 당신 눈앞에 고통받고 있는 한 인간 존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신 예수님께서 풍기셨던 매력은 대단했습니다. 그분께서 가시는 곳 마다 수많은 군중이 큰 무리를 이루며 따라다녔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시는 기적 때 모인 군중의 수는 장정만도 5천명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숫자의 여성들, 그리고 어린이들 합치면 적어도 만명, 이만명이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래아 호숫가에 잠시 계셨는데, 소식을 전해들은 군중이 밀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예수님 주변을 뺑 둘러싸 버렸습니다.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더 불어나 제자들의 힘만으로 질서 유지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밀려드는 군중으로 인해 자칫 잘못하면 대형 참사가 벌어질 수 있겠다는 걱정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상 조치로 거룻배 한척을 마련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배 위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후, 안전한 상태에서 가르침과 치유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엄청난 군중의 수효를 확인한 제자들은 신명이 났을 것입니다. 더 큰 욕심도 생겼을 것입니다. 지난 번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신 기적 때는 장정만 5천명이었는데, 다음 신앙대회 때에는 만명을 돌파해야 할텐데,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승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좋을텐데, 스승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각자 마을로 돌아가서 입소문을 많이 내면 좋을텐데...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유난히 자주 사용되고 있는 이른바 ‘메시아 함구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세상 사람들의 인기와 박수갈채에 연연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이나 권위가 만천하에 알려지는 것을 반기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당신 눈앞에 고통받고 있는 한 인간 존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그의 깊은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그에게 치유의 은총을 주시고 자유로워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사람은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 왔습니다.
교통 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운 겨울,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쳐도 교회를 찾습니다. 문밖으로 나서기가 두려운 날씨에도, 꼭두 새벽부터 집을 나서 성당으로 발길을 향하는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참 구도자의 얼굴을 만납니다.
발걸음 옮기기조차 힘겨운 분들, 100미터 걷기 위해 10분 이상 걸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성당 한번 왔다 가면 진이 다 빠지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찾아오십니다. 교회로 향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제들과 수도자들, 봉사자들은 그 옛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백성들이 원 없이 생명의 물을 마시도록 도와주면 좋겠습니다. 마음껏 마셔 평생의 갈증을 채울 수 있도록 동반해주면 좋겠습니다.
그 옛날 예수님으로부터 말끔히 치유 받고 춤을 추며 떠나가던 사람들처럼, 교회에 오는 사람들의 영혼 역시 깨끗이 치유되어 기쁜 얼굴로 교회를 나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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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모두에게 잘할 수 없으면 아무에게도 잘해주지 마라>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eoun3Bapm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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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공동체 리더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이어가겠습니다. 예수님은 리더이십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밀쳐댈 수 있기에 예수님은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시어 그들과 조금 떨어지셨습니다.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중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도 그분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곤 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한 공동체의 리더십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리더는 ‘편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야 합니다. 더 잘 안다는 말은 더 많이 사랑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를 편애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누군가는 그 가정에서 소외되고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공동체 분열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마귀 들린 이들이 당신을 알고 있다고 말할 때 함구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리더를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끔 공동체 분열의 주범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마귀의 입을 막으십니다. 또 뭍에 계시면 당신에게 가까운 사람들만 이익을 보기 때문에 배를 타고 조금 떨어지시는 것입니다. 모두가 당신을 만질 수 없고, 모두가 당신을 알 수 없다면 모두가 당신을 만질 수 없게 하고 모두가 당신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참 리더의 모델입니다.
‘KBS 안녕하세요’ 프로에 「아홉 살인데 몰래 우는 아들」 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9살, 4살 두 아들이 있는데 지나치게 차별하는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밥 먹으면 두려움과 스트레스로 밥을 토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왜 토하냐고 화를 내고 그 아이와 밥을 먹으면 밥맛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진행자들이 큰아들에게 “아빠가 너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물으니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만약 작은아들에게도 그렇게 물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빤 절 사랑해요. 경상도 사람이라 좀 무뚝뚝해서 그래요.”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경상도 사람이고 아이는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아빠가 말하지만 작은 아이에게는 그렇게 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핑계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교하기 좋아합니다. 자녀는 부모 사랑의 절대적인 양보다 상대적인 양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러니 부모가 사랑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차별해서 주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이 그렇게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편애는 사랑이 아닙니다. 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은 리더가 다른 이에게 하는 사랑의 최대치가 자신에게도 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있고 지금도 쉽지 않습니다. 본당에서 청년들이 서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고집 센 누군가가 물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또 제가 본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청년들이 함께 있는 그 자리에서 다른 편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청년회가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따르는 청년들은 소수였지만 결국 끝까지 둘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항상 본받고 싶은 분이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이 정말 대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잘 해 주어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세금도 많이 걷고 다른 의무도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불만이 없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이 못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 잘해줄 수 없다면 똑같이 못 해주라는 것이 세종대왕의 리더십입니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나라의 리더가 편애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의견에 휘둘린 것입니다. 최순실 씨의 의견이 다 옳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이 보기에는 편애하는 리더일 뿐입니다. 그녀의 파일엔 국가안보 자료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대통령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두를 골고루 사랑하고 모두에게 골고루 자신을 알게 하지 않을 바에야 누구에게도 편파적으로 사랑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조선의 어떤 양반은 하인 둘이 서로 싸우고 왔을 때 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 “자네가 옳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말하자 “자네가 옳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다른 하인이 “주인님, 다 옳다고 하면 어떻게 하십니까? 둘이 싸운 것인데요.”라고 했더니 “너의 말도 옳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분열은 옳지 않고 일치는 옳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들어주면 다른 이들은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옳지 않은 것입니다. 공동체가 분열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애정에 휘둘린다면 좋은 리더는 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서 조금 떨어져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배를 보며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명만의 지도자가 됩니다. 지도자는 오직 하느님께만 흔들려야 합니다. 몇몇 사람에게 휘둘리는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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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7-12 :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용한 곳에 가서 지내려 하시지만 그러실 수가 없는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셨는데 그분의 명성이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이제는 갈릴래아에서만이 아니라,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와 요르단 강 건너편에 사는 사람들, 티로와 시돈 근방에 사는 사람들까지 모여들고 있다(8절).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10절) 많은 군중이 그분을 만지려 했고 또 만졌지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만질 수 있다. 믿음이 없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손으로는 만지지 않아도 믿음으로 만지는 것이 더 낫다.
유대인들은 그분을 붙잡을 때도 만졌고, 결박할 때도 만졌고 매달 때도 만졌다. 만지기는 했지만 악하게 만짐으로써, 자신들이 만진 분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을 만져야 한다. 마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람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는 그분을 땅에서 만진 셈이다. 그러나 그분을 주님이시라고 여기면 그분이 아버지께 올라가는 바로 그때 그분을 만지는 것이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11절) 악마도 하느님의 자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베드로도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말했고 악마도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줄 압니다.”(참조: 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했다. 똑같은 고백이지만, 똑같은 사랑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베드로에게서는 사랑을 보지만, 악마에게서는 두려움을 본다. 그분께 사랑을 느끼면 자녀이지만, 그분이 무서우면 자녀가 아니다.
이것이 악마와는 다른 우리 신앙인의 믿음이다.(참조: 갈라 5,6) 악마들도 “믿고 무서워 떱니다.”(야고 2,19)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가?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루카 4,34)라거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 3,11; 루카 4,41)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마르 5,7; 루카 8,28)라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을 고백하고 생활해 나가는 것을 소명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 사랑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조용히 쉬실 시간이 없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의 삶에는 휴가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계시다. 또한 오늘 복음은 우리가 항상 예수님 안에 산다고 하면 그분을 언제나 잘 알아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둔한 영적 감각과 교만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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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한국천주교주교회의 사무국장)]
체칠리아, 아가타, 루치아 성녀와 함께 초세기 4대 동정 순교자 가운데 한사람인 아녜스 성녀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 온전히 그리스도께 용감히 나아가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두움과 악에 얼마나 잘 대항합니까?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합니까?
우리의 믿음과 형제애를 실천하여 하느님과 참된 친교를 나누어야 함을 알려 주는 요한 1서 저자는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1요한 5,5)라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곧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합니다. 세상의 악과 마주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 있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이 계명은 힘겹지 않고,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모두가 세상을 이긴다.’라고 전합니다. 아녜스 성녀는 자신을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이는 박해자들을 세상의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지만, 용기 있는 신앙으로 세상을 이겼습니다.
오늘날 신앙의 증거로 목숨을 요구하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피 흘림 없이 신앙을 증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합니다. 작은 불편이나 불이익을 참고 견디며, 세상의 악에 순응하지 않고,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용기를 내어 살아야 합니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은 우리가 이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이 외침은 우리가 바치는 희생과 봉사와 애덕의 실천으로 세상을 이기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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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거리 두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마르 3,7-10)
예수님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것은, 밀려드는 군중과 당신 사이에 ‘거리 두기’를 실행하신 일입니다. (사람들을 밀어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거리 두기’를 실행하신 이유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기만 해도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먼저 손을 대려고 서로 밀치고 다투었는데,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그리고 ‘말씀의 은총’을 주는 일을 먼저 하시려고 뒤로 물러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뒤로 물러나신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의 그런 모습에서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 ‘말씀’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하면서 예수님을 만지려고 밀쳐 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빵’을 주시는데도 그 ‘빵’을 받지는 않고 ‘돌’을 달라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물론 ‘몸의 병’을 고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입니다. 또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받지 않고 자기가 갖고 싶은 것만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먼저 만지려고 서로 다투고 밀쳐 대는 모습은 그들의 ‘이기심’을 나타냅니다. 그 모습은 자기만 생각하고 남 생각은 하지 않는, 양보할 줄도 모르고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사랑 없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거리 두기’는 바로 그 이기심에 대한 ‘거리 두기’이기도 합니다.>
복음서 저자는 사람들이 그렇게 밀쳐 댄 것은,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병자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먼저 가엾게 여기셔서 고쳐 주신 적도 있습니다.(요한 5,5-9)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로 물러나시면서 ‘거리 두기’를 실행하신 것은, 병을 고쳐 주기를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 고쳐 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라는 뜻입니다. (“우선 먼저 나의 설교를 들어라. 그 다음에 모두 고쳐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밀쳐 대는 모습과 관련해서,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자의 이야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로 가시는데 군중이 그분을 밀어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의사들을 찾아다니느라 가산을 탕진하였지만, 아무도 그를 고쳐 주지 못하였다. 그가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즉시 하혈이 멎었다. 예수님께서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모두 자기는 아니라고 하는데, 베드로가 ‘스승님, 군중이 스승님을 에워싸 밀쳐 대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다. 나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나는 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부인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음을 알고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기가 무슨 까닭으로 예수님께 손을 대었으며, 또 어떻게 즉시 병이 나았는지 온 백성 앞에서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8,43-48) 표현만 보면, 그 여자가 예수님 모르게 예수님의 ‘기적의 힘’을 훔쳤고, 예수님께서는 나중에야 그것을 알아차리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여자의 간절함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셨고, 예수님께서 여자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예수님을 밀어 댄 군중 가운데에는 그 여자처럼 병을 고치려고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그런 사람들이 많았던 상황인데, 치유의 은총은 그 여자에게만 내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는 믿음도 없이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의 옷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십니다. (당신의 ‘자비’로, 또 당신의 ‘권한’으로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예수님의 옷만 믿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에게 손을 대는 경우에도, ‘몸의 병’을 고치는 것만 생각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께서 정말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께 청해야 할 진짜 큰 은총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역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을 ‘만병통치약’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은 태도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 가운데에도 어디서 무슨 기적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가서 자기도 기적 체험을 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충실한 신앙생활’은 하지도 않고, 자신의 영혼 상태는 반성하지도 않고, 이웃 사랑 실천도 하지 않고, 그저 기적 체험만 많이 하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신앙도 아니고 신앙생활도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 (신앙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몸의 건강’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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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어머니는 양발이 구멍 나면 기워 주셨습니다. 내복도 무릎이나 팔목이 헤어지면 천을 대고 기워주셨습니다. 가난한 시절이었고, 다들 그렇게 살았습니다. 형들이 쓰던 가방, 책, 옷을 물려받았습니다. 예전보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진 지금은 옷을 수선하거나, 헌옷을 물려 입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자녀가 적기도 하고, 유행 따라 옷을 입기 때문입니다. 예전처럼 살지는 않지만 아끼고, 나누는 검소함은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금이 간 도자기, 흠집이 있는 도자기에 금칠을 하거나, 그림을 그려서 작품으로 만드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자기는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너무 낮은 온도에서 꺼내거나, 너무 높은 온도에서 꺼내면 금이 가거나, 흠이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런 도자기에 마음이 갔고, 작품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다고 합니다. 어릴 때 나환자들을 자주 보았다고 합니다. 얼굴에 흉터가 있는 분, 손가락이 없는 분, 발가락이 없는 분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이 모두 밝게 사셨다고 합니다. 비록 외모는 흉터와 상처가 있지만 마음은 천사와 같았다고 합니다. 건강한 몸으로 노래를 불렀던 자신이 오히려 영적으로 더 큰 상처와 흉터가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나환자들과의 만남을 기억했고,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르는 일을 그만두고 흠이 있는, 금이 간 도자기를 작품으로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상처를 탓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허물과 상처가 있음에도, 어쩌면 그런 상처와 허물이 있기에 우리를 더욱 사랑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앞으로 오실 구원자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픈 사람을 위해서 왔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목은 ‘지나간 다음’입니다.
“어느 날 나에게
큰 고난이 왔습니다.
나는 너무나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며
한탄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고난이 지나간 다음
그때 비로소 나는 알았습니다.
나의 고난은
인생을 깨닫고
더욱 성숙하라는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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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설득’이라는 말을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에는 3가지 요소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로고스’입니다. 이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와 증거를 이야기합니다.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했으니 우산을 준비하라고 하면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실적이 올랐으니 상여금을 준다고 해도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로고스만으로는 설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깁니다.
설득에는 두 번째 요소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파토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에게는 논리적인 설명은 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담아서 보듬어 주는 것이 더욱 큰 위로가 됩니다.
지금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이 우리 몸에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시원한 물을 한 잔 주는 것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논리적인 설명보다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설득에는 더 유용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설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설득의 3번째 요소는 ‘에토스’입니다. 예전에 미국제품이라면 튼튼하고 좋다는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힘과 권위를 믿기 때문입니다. 삼성제품이라면 좋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 역시 삼성이라는 기업이 가진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곧 정치의 계절이 올 것 같습니다. 논리와 이성을 가지고 국민을 설득하는 지도자가 있을 것입니다. 지친 국민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지도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저 사람이면 이 나라를 맡길 수 있겠다.’라는 신뢰를 줄 수 있는 지도자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우리는 ‘히브리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베들레헴에서는 위대한 예언자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대사제’라고 설명을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바오로 사도의 논리적인 설명,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마음에 이끌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지녔던 진정성, 바오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율법에 대한 열정, 바오로 사도가 지녔던 인품을 보았을 것입니다.
신자분들이 원하는 사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사목을 하는 신부님들도 필요할 것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신자들을 위로해 주시는 신부님들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분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제는 신뢰와 사랑을 드릴 수 있는 덕과 인품이 있는 사제라고 생각합니다.
교구의 사제가 곧 1,000명이 됩니다. 모두가 맡겨진 직무에 충실하면 좋겠지만 어떤 분들은 건강 문제로, 어떤 분들은 성격 문제로, 어떤 분들은 과도한 음주 문제로, 어떤 분들은 정신적인 문제로 ‘휴양’을 하게 됩니다. 본인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들은 ‘휴양’을 통해서 아픈 것들을 치유하고 사목의 현장에서 다시 신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아픈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것을 설득하는 것도 힘들고, 휴양을 했어도 다시금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근본적인 치유를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은 신자 공동체와 함께 지내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줍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에게는 건강한 사제가 필요합니다. 아프고 지친 사제들을 위한 ‘치유센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덕망이 있는 원로 사제가 함께 지내면서 전문적인 심리치료사, 상담가들이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부끄러워하거나, 감추는 것이 해결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주님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방법을 따라 하기보다는, 나를 위해서,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움켜진 손을 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명예, 권력, 자존심, 욕심’ 이런 것들을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움켜쥐면 쥘수록 우리는 세상에서 덮쳐오는 풍랑을 이겨내기 힘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가면 우리들 또한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버리는 삶입니다. 주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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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들을 위한 한걸음>
마르코 3,7-12 (군중이 호숫가로 모여들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벗들을 위한 한걸음>
곁에
벗들이
가득하니
마냥 좋지만
허나
벗들을
하나하나
알기 힘들어
왠지
벗들께
미안하기
그지없으니
하여
벗들을
하나하나
품고 싶어서
잠시
내 곁의
벗들에서
한걸음 뒤로
다만
하나씩
마음 깊이
벗들 새기면
이제
한걸음
따뜻하게
다시 벗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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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예수님을 추종해야 할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시자(3,7ㄱ) 갈릴래아와 유다인들이 사는 모든 지방에서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듭니다.(3,7-8)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만 모여들었던 세례자 요한과는 달리 온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그분을 따라온 것입니다.(3,10)
여기서 예수님 곁에 있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았기에’ 그분을 따라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메시아 신원'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깊이 체험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 신분을 온전히 인식한 것은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뒤였습니다.
군중들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질병과 가난과 고통을 겪는 비참한 상황에 있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 능력을 보고 자석에 끌리듯 그분을 찾아온 것이었지요.(3,10)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그들을 끌어내시어 자신을 다시 보도록 하십니다.(3,9)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지릅니다.(3,11)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은 그분을 거부하는 몸짓이지요. 그들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긴 하지만 믿음에 이르지 못한 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함구령을 내립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계시되고(1,11), 하느님의 아드님(3,11)으로 고백되며, 놀라운 권능을 보여주셨지만 그 뜻은 수난을 겪으시고 목숨바쳐 죽는 그때에야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참모습은 구마나 치유처럼 사람들 눈에 영광스럽게 보이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하느님의 뜻과 일을 이루는 데서 드러나는 까닭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제자들처럼 그저 부르심에 따르거나, 군중들처럼 하느님과 무관하게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알아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더러운 영'처럼 정확하고 심오한 인식만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적 인식만으로는 믿음에 이를 수 없고, 그분과의 일치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수난의 여정에 동참하고, 그 수난의 사랑으로 목숨 바쳐 이웃을 사랑할 때에만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고 살아낼 때만이, 그리고 살아내는 만큼만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삶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한 함구하고, 아는 체 하지 않는 정직함이 우리다운 겸손한 모습이 아닐까요? 세상의 힘이 아니라 철저히 다른 이들을 섬김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는 우리이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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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형제님께서 “저도 운동을 좀 해야 할 텐데요….”라고 말씀하십니다. 운동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수록 운동 없이는 지금을 잘 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중에 첫 번째는 ‘운동 좀 해야 하는데’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책 좀 읽어야 하는데’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필요성은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운동해야 한다고 하셨던 형제님을 향해서 곧바로 “운동하세요.”라고 했습니다. 필요성만을 기억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의 기억보다는 몸으로 하는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지만 가능성이 현실로 변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할 수 없는 이유만을 늘어놓고 있어서 소망만 가지고 있을 뿐 실제로는 하지 못합니다.
또 한 가지는 대단하다는 것만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매일 2시간씩 해야지만 만족할 수 있을까요? 책은 하루에 한 권씩 읽어야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아주 적은 시간이나 양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습관으로 내 안에 자리 잡아서 매일 멈추지 않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단 한 번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는 그 뒤로는 주님을 잊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매 순간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씩이라도 실천할 수 있을 때,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은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지 손으로만 예수님을 만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해서 단지 손으로만은 만질 수 없게 하셨던 것입니다.
악마의 세력마저 예수님을 뵈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에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리시지요. 왜냐하면 악마의 세력이 외치는 말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 없이 예수님을 만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믿음과 사랑 없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도 소용없음을 보여주는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사랑을 간직하면서 조금이라도 변하려고 노력한다면 분명히 주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으며,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 역시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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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시간, 나만의 삶>
미국 주간지 ‘타임’ 칼럼니스트 마이클 시몬스는 에디슨, 아인슈타인, 벤저민 프랭클린 등 저명인사의 공통 습관을 찾았습니다. 대단한 공통점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공통점은 어쩌면 너무 작고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낮잠, 일기, 산책 등....”
일에서 비켜나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언뜻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취의 원동력이었다고 마이클 시몬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갖지 못하면 자기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만의 시간을 산다면 자기만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래서 더 의미 있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부정적인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나만의 시간을 갖지 못해서 나만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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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은 염불을 할 때입니다>
소문은 발 없이 천 리를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문은 퍼지는 과정에서 불어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져서 큰 무리가 몰려왔는데 그들은 어떻게든 자기 삶의 무게를 덜어보겠다고 마지막 희망의 끈을 예수님께 두었습니다. 배불리 먹게 하고 병을 낫게 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 탓이기도 하지만 그들에겐 현실적인 위로와 희망도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세상 속에서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반 서민들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받았고, 당시 유다의 지도자층에 속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그리고 헤로데 사람들에게는 완강히 거부되었습니다. 결국 악의를 품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릴 방법을 모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골치덩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속을 꿰뚫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한적한 호숫가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러 지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제 군중과 일정한 거리를 두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들의 치유만을 바라며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의 참된 구원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호기심과 욕구에 따라 바라보고 밀쳐댔습니다. 거기에다 악령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보고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은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었으니 예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통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룻배를 준비하는 몫은 제자들에게 맡김으로써 그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도 그렇습니다. 인기가 좋을 때 한발 물러서지 않으면 인기에 빠져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며 자기 본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껍데기만 화려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밑바닥에 떨어져 모든 것을 잃고 후회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거룻배를 준비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르3,12).하는 신앙고백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와야 할 터인데 악령에게서 먼저 나왔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악령들은 아부하느라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들먹였지만, 그 속을 알기에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마르3,12) 사람들이 눈을 떠 당신을 제대로 알아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면 그분이 보이지 않고 은총의 결과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심을 버림으로써 은총덩어리 보다도 언제나 은총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제대로 만나야 하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잿밥에서 눈을 돌려 염불을 할 때입니다. 기도하며 갈망하다 보면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받기 위해 매달리게 되면 참 주님을 만나는 것이 그만큼 어렵게 됩니다. 기도의 즉각적인 응답이 없어도 그 안에 주님의 뜻이 담겨 있고, 나와 거리를 두시는 것 같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말고 늘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면 삶의 현실 안에 함께하고 계신 그분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발은 땅을 디디고 삽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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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방향方向, 예수님 중심中心의 삶>
-일치와 평화, 치유와 구원-
삶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잃어 극심한 방황이요 혼란이요 분열입니다. 개인이나 공동체나 사정은 똑같습니다. 정말 삶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이나 불행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방향은, 삶의 중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겠습니까?
두 말할 것 없이 예수님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방향이자 중심입니다. 오늘도 이런저런 풍성한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오늘은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4세기 초 14살 어린나이에 순교한 동정녀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성녀가 보여준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고,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합니다. 아녜스는 그리스어로 ‘순결’ 또는 ‘양’을 뜻하며, 성녀는 자주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성녀는 어려서부터 한결같이 주님 방향이, 주님 중심이 확고한 사랑과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한 순교임을 깨닫습니다.
2.요즘 교황님의 세계 영적 지도자로서의 활약이 참 눈부십니다. 한결같은 열정과 사랑의 관심이 놀랍습니다. ‘일치는 언제나 갈등보다 위대하다’, ‘일치는 오직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이뤄진다’등 말씀하시며 요즘은 부쩍 ‘일치’에 대해 많이 강조하십니다. 대통령 선거후 1860년대 남북전쟁이래 최대 분열의 위기에 직면한 미국에 대해 크게 우려하시는 교황님은 ‘지금은 상처를 치유할 시간’이라며 인내하며 일치를 위해 힘쓸 것을 권고합니다. 이런 모든 불행의 원인은 미국민이 삶의 궁극의 ‘방향’, ‘중심’을 잃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3.어제는 저에게 참 잊지 못할 역사적 날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요셉 수도원의 부원장이자 주방장인 75세 최고령자 김 스테파노 수사님이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25세 청년 나이에 첫 서원을 한 후 75세 되기까지 만 50년을 한결같이 주님 방향으로, 주님 중심으로 살아온 참 성공적 행복한 인생을 사신 수사님이니 생각할수록 감동이요 감격입니다. 50년 서원 금경축을 통해 환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또 한분은 20년 이상(1998-2021) 제 강론집과 시집을 교정 제본해주며, 한결같이 주님 방향으로, 주님 중심으로 살아온 한 깊은 믿음의 자매님이 나이 60에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직장 생활 중에는 매달 거액을 수도원에 봉헌금으로 바쳤던 수도원의 은인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명예 퇴직전 몇 년 전부터 공부를 시작하였고 가정과 직장 생활의 바쁜 일과중에도 대학에서 강의하고 교회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한결같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노력한 결과 거의 10년만에 박사학위로 결실을 맺었으니 참 놀랍고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매님의 한결같은 주님 방향, 주님 중심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환히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4.오늘 말씀중 문득 떠오른 성가 445장입니다. 지금부터 32년전 1989년 7월11일, 제 사제서품식 미사때 입당성가입니다. 입당성가를 들으며 서품 받기위해 성전에 입장할 때 주르르 흘렸던 눈물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그분만을 따릅니다.(1절)
이 땅위에서 산다하여도/이 땅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그분만을 따릅니다.”(3절)
삶의 방향이자 중심이신 주님 만을 따르겠다는 다짐의 성가입니다. 참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주님 방향의, 주님 중심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방향을, 주님 중심을 잃어버릴 때 방황과 혼란, 분열과 표류, 무질서로 인해 안팎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아무도 도와 줄 수 없으니 백약이 무효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참으로 한결같이 주님 방향의,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일치와 평화요 치유와 구원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지도층 인사들 소수일뿐, 좌우사방에서 무수한 병자들이 죄인들이 구름떼처럼 예수님 방향으로, 예수님 중심으로 몰려 들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무지와 허무의 어둠 속에서 방향없이, 중심없이 표류하며 무질서하게, 무의미하게 살다가 갖가지 영육의 질병으로 무너져 내리던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 방향을, 주님 중심을 항해 밀물처럼 몰려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병고에 시달리던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고 더러운 영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그분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며 도주하니 만나는 사람마다 영육의 치유와 구원입니다. 참으로 빛이나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 방향을, 주님 중심을 회복했을 때 온전한 영육의 치유와 구원이요 일치와 평화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에서처럼 공생애로 끝난 예수님의 활동이 아닙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느님 곁에 초월자超越者로 계시며 어디에나 편재遍在하신 내재자內在者로 계시는 파스카의 대사제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끊임없이 끝까지 일치와 평화, 치유와 구원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히브리서의 고마운 증언입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우리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1.거룩하시고 2.순수하시고 3.순결하시고 4.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5.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다.”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우며 든든하신 대사제 예수님이십니까! 바로 이 대사제 예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 삶의 방향이, 우리 삶의 중심이, 우리 삶의 의미가 되어 주시니 온전한 영육의 치유와 구원을, 일치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 가게 된 우리들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대사제 예수님이 계십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 은혜로운 미사가 거행되는 거룩한 성전이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대사제이신 예수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에게 일치와 평화, 치유와 구원의 열매를 선사하시며 우리 모두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이 당신 방향, 당신 중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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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대사제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부각됩니다.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히브 8,4)
율법은 레위 가문에 사제 직무를 맡깁니다. 하느님이 그들의 유산이 되어주시기 때문에 거룩함에 봉직하는 아론의 후예 사제들을 포함한 모든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는 따로 상속 재산이 주어지지 않았지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다 가문, 다윗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그러나 인간 대사제들이 바치는 제사와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한 제사를 바치신 대사제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우십니다.
인간 대사제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히브 8,5). 반면 예수님은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히브 8,2)이십니다. 그리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히브 8,6)라고 증언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로 군중이 몰려드는 모습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
"큰 무리가 따라왔다. ...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 들었다. ... 그분을 보기만 하면 ... 소리를 질렀다."
참으로 역동적인 광경이 펼져지고 있습니다. 이제 신앙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변방으로 이동됩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이 곧 중심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여전히 사제들이 자신의 죄와 백성의 죄를 위해 예물과 제물을 바치며 예식을 거행합니다. 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레위인들은 성전을 관리하지요.
예수님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 치유와 구마가 절실한 이들, 중심 기득권층에서 소외되고 외면당하는 이들이 모입니다. 주로 온도와 핏기 없이 형식과 제도로 이어가는 예식 안에서는 도무지 위로와 안식을 얻기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비록 배운 것도 적고 가진 것도 없는 투박하고 단순한 이들이지만 구체적인 삶의 자리 깊숙이까지 생생하게 침투하는 실질적인 구원이 그리웠던 것입니다. 곧 예식 안에서만이 아니라 삶이 곧 제사인 구원자 사제의 모습을 예수님에게서 보았고 체험한 것이지요.
지금 예루살렘 성전이 "성막의 모상이고 그림자"라면, 예수님께서 계신 이곳이 곧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요 참성막"입니다. 진정한 희생제사와 예배, 찬미와 찬양이 이루어지는 영의 도가니가 기쁨과 희망과 찬양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마르 3,9)
군중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몰려드는 통에 예수님께서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게 하십니다. 지금 당장은 마구잡이로 몰려드는 군중과 예수님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 질서를 찾고 또 말씀으로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장치가 됩니다만, "배"는 곧 교회의 표상입니다.
교회는 심연을 헤치고 파도를 넘어 지상 순례길을 항해하는 배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대한 희망"은 이 배를 단단히 고정해 항구인 "저 휘장 안"(히브 6,19)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영혼의 닻이지요. 그리고 이 배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성전에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중심이 이동되고 있음을 봅니다. 신앙의 주인은 저 멀리 하늘에서 온갖 권리를 행사하며 섬김만 받으시는 존재가 아니라, 고통받고 슬퍼하는 이들 곁으로 내려와 보살피고 회복시키는, 종래에는 그 고통을, 죽음까지도 떠안는 분이심이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지금 어디쯤 존재하고 있는지 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신약시대를 지나 성령의 시대를 살면서도 두려우신 하느님은 그저 멀리 계셔야 편하다며 적당선에서 신자 신분만 유지하고 구약 율법에 안주하며 살지는 않은지요? 오늘 예수님께 몰려들어 그분을 만지고 싶어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열정이 일어나며 가슴이 뛰는지요? 그분 곁에 머물고 싶어 간절히 종종걸음을 치는지요?
예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은 어디에서나 드러나고 발휘되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 신자 공동체와 사회 안에서 예수님을 닮으려 애쓰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아녜스 성녀께도 우리의 신앙과 사랑을 위해 빌어주십사 청합니다.
성녀 아녜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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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내가 나의 모습 그대로 이곳에 온전히 현존하면 비로소 나는 참으로 살아간다.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종종 존재한다.” 이 말로 폴 발레리는 깨달음을 얻은 많은 사람들의 체험을 정리하여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경이로운 통찰을 제시했다. 우리는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고 이것을 활용해야 한다. 인식능력은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가 동경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나는 나의 삶을 고찰하는 동안 삶에서 약간 벗어나 거리를 유지한다.
♣삶에 대해 생각하지만 삶으로부터 떠나 있는 것이다. 나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지만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나는 삶을 직접 느끼지 못한다. 폴 발레리는 다른 종류의 체험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그냥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삶을 있는 그대로 감지한다. 내가 나의 모습 그대로 이곳에 온전히 현존하면 비로소 나는 참으로 살아간다. 그러면 내가 지금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 고찰할 필요가 없어진다. 나는 단지 나로서 온전히 현존한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 안젤름 그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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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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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은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엄하게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마르 3,12 참조)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 일까?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오히려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십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이사야 예언자에게는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10)라고도 말합니다.
대체 왜 일까?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직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곳에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집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고백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야,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비로소 당신의 진면목(참된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그분의 찢어진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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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마르 3,12)
주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고 진정한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게 하소서.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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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마르3,8)
오늘은 동정과 순교의 두 개의 영적 빨마를 지니신 성녀 아녜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신 모든 자매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오고, 큰 무리가 예수님께로 몰려옵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이신 예수님! 도대체 그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로 나아갔을까?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갔는데, 우리는???
그리고 그분의 뒤를 온전하게 따라가고 있는 성직자들의 모습은 어떤가???
과연 많은 사람들이 성직자들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그리고 그들은 왜 나아가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으려고 애쓰는 자녀들, 그리고 나의 회개를 위해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오늘은 왠지 자꾸 이런 물음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이름을 힘차게 그리고 자주 부르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면, 나의 모습 안에서 예수님께서 잘 보이질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예수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은 많아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고 제가 당신께 왔나이다."(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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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_Uz07Exe2qE&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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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다."(마르 3, 10)
가지를 흔드는
바람이 세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골짜기가
꽤나 깊다.
영원한 것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부서진다.
부서지는 것이
맑아지는 것이다.
맑아지는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이다.
은총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부서짐도
아픈
은총이었다.
순교란
부서져서
한 줄기 맑은
빛이 되는 것이다.
믿음의 잔치는
부서짐의
잔치다.
동정 순교자
성녀 아녜스
축일이다.
하느님밖에
모르는
삶이 있었다.
아름다운 삶이
있기에
세상이
아름다운 것이다.
사랑의 무게만큼
아픔도 향기가
된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것또한
내 것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믿음은
부서짐의
봉헌이었다.
가장 아팠던
곳에서
그리스도는
승리하신다.
그 어떤 것도
하느님 사랑을
가릴 순 없다.
하느님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는
오늘이다.
인생의 의미는
믿음의
의미이며
믿음은
영원한 것을
향한 부서짐의
사랑이다.
자아가
부서지는 것이
영적인 삶의
참기쁨임을
믿는다.
성녀 아녜스여,
기쁨이 없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느님 사랑에
다시 집중하는
신앙의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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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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