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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심문, 예수님의 침묵 15:1~5
1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
2 빌라도가 묻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매
3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로 고발하는지라
4 빌라도가 또 물어 이르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 하되
5 예수께서 다시 아무 말씀으로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빌라도가 놀랍게 여기더라
예수님과 바라바 15:6~15
6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7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 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8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9 빌라도가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10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11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
12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13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14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15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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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빌라도에게 넘겨진 주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 명절 전례에 따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줄지 묻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충동된 무리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빌라도가 무리를 만족시키려고 그들의 요구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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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의 심문, 예수님의 침묵 15:1~5
예수님 당시 사형 집행의 최종 결정권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공회는 신성 모독죄를 적용해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했지만(14:64), 다시 정치 반역죄로 바꾸어 총독 빌라도에게 기소합니다. 로마 관리들이 유대의 종교 문제에 관여하는 것을 기피했기 때문입니다(요 18:30~31).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로마에 대한 납세를 거부하도록 백성에게 가르쳤고, 자칭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라고 백성을 현혹해 폭동을 조장했다는 거짓 기소까지 덧붙입니다(눅 23:2, 5). 대제사장과 온 공회가 정치 반역자로 몰아가자,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예수님께 심문하고 “네 말이 옳도다.”라는 진술을 받아 냅니다(2절). 예수님은 ‘왕’인 자신의 신분만 재판장에서 당당하게 밝히십니다.
● 더 깊은 묵상
공회가 예수님을 정치적 반역죄로 기소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수많은 고발에 침묵하신 예수님 모습에서 내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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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바라바 15:6~15
당시에 명절 때마다 죄수 한 명을 방면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무리가 관례대로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합니다.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을 한 바라바가 갇혀 있었기에, 빌라도는 예수님과 바라바 중 누구의 석방을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공회의 기소가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도, 예수님이 법리적으로 무죄임도 알고 있었습니다(눅 23:4). 예상과 달리 무리가 살인자 바라바를 선택하자 빌라도는 갈등합니다. 무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라고 요구합니다(13절; 요 19:12). 폭동이 두려웠던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승인하고 맙니다(15절).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 빌라도는 유죄입니다.
● 더 깊은 묵상
갈등하던 빌라도가 결국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준 이유는 무엇인가요?
왕이신 예수님이 극악한 살인자보다 멸시받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주님!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려 한 사람들을 보며, 구원의 가치를 모르고 사는 저도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봅니다. 택하신 백성의 구원을 위해 정죄와 조롱과 죽음을 감당하신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다수의 말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결정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05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오늘 본문은 침묵으로 일관하는 예수님을 총독 빌라도가 명절 전례대로 방면하고자 하였으나, 무리의 함성에 그만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넘겨준다는 내용입니다. 빌라도가 바라바라는 살인자는 놓아주고 예수그리스도를 사형시키고자 한 것은 대제사장의 사주를 받아 외치는 군중들을 만족시키고자 그들의 요구에 따른 것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빌라도의 심문, 예수그리스도의 침묵, 특별사면의 제안, 십자가형 언도 등입니다.
‘민란을 꾸미고 그 민란중에 살인하고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 하는 자가 있는지라’ - ‘마침 폭동을 일으키고 살인한 죄로 갇혀 있는 폭도들 중에 바라바라는 죄수가 있었다.‘라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그가 로마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민족주의자인 열심당의 멤버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는 체포되어 사형집행 대기 중이었는데, 그 때 유월절이 다가 온 것입니다. 그 경우 군중들이 선택하는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하는 관례가 있었으니, 통치자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입니다. 삼일절 특사처럼 말입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살인자 바라바보다는 죄가 없으신 예수를 사람들이 선택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사주한 것도 있었지만 학자들의 연구조사에 따르면 그 안에는 바라바의 추종자들이 대거 운집해 있었다고 합니다. 곧 열심당원들입니다. 그 정보를 빌라도가 접수하지 못 했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바라바를 석방하지 않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바라바의 동지들이 폭동을 선동할 것은 뻔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만 군중들의 비위를 맞추는 척 하면서, 그들을 잠재우는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넘겨준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에 넘겨주기 전 산헤드린 공회의의 예수에 대한 판결은 신성모독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는 스데반처럼 돌로 맞아야 합니다. 레위기에 따르면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돌로 치는 ‘투석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충동을 받은 무리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그 까닭은 혹시라도 의인을 처벌했다는 과오를 면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반드시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형벌은 유대의 것이 아니라 중죄인이나 정치범에게 내려지는 로마의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로마의 정치범으로 처형된다면 그들은 후손들에게 아무런 원망 받을 일이 없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매우 음흉스럽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해설과 묵상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 바라바를 놓아달라는 함성을 들은 뒤 빌라도가 군중에게 한 말입니다. 이는 명백한 직무유기입니다. 한 나라의 총독으로서 할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내가 어떻게 하랴?’,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한결 같이 고발자의 눈치를 보는 말로, 총독으로서 자격도 없는 자기 주관도 인생 신조도 없는 발언입니다. 그는 총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식민지 백성들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예수가 고발되었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써 외면합니다. 말썽 많은 유대인들을 벌집 쑤셔놓듯이 해서 폭동이라도 일어난다면 자신의 정치생명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는 소신 있는 정치가도 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로마황제가 보낸 통치자로, 그의 권한은 막강합니다. 곧 사형집행권, 대제사장 임명권, 성전과 헌금의 통제권, 더 나아가 산헤드린 공회의 인준 권까지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만약 그 권위로 일을 바르게 처리했다면 즉, 무죄인 예수를 놓아주고 바라바를 처형했다면 그가 우려한대로 민란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더 심하면 군중들이 봉기하여 반란으로 번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르지 자신의 영달을 위한 결정을 내리고 맙니다. 거기에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선과 악보다는 자기 유익을, 정의와 불의보다는 자기 행복을, 진실과 거짓보다는 자기만족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의 결정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사람들은 결코 선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부하뇌동하면 우리 판단과 결단은 그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설령 손해가 나더라도, 비록 행복에서 멀리 떨어질 지라도, 정의롭고 선한 판단의 잣대와 결정의 기준을 확고히 세워야 할 것입니다. 평소 신념과 자기 신조대로 사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주변을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황에 끌려 다닐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활어역수 사어유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맑은 물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살지만, 죽은 물고기는 더러운 물에도 그냥 떠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절대불변의 진리를 갖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그것으로 꿋꿋하게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우리 주님이 가신 길입니다. 우리가 갈 사명자의 길입니다. 천 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 년 같이! 깨달은 말씀으로 사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한 내용대로 사는 사람들이 신앙인이고, 결단한 신앙신조대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신앙양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과감하게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절 결박당한 채 빌라도 앞에 끌려오십니다. 그들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일부러 결박하여 악범처럼 취급하고, 그분을 정치범으로 몰아 로마 총독의 사형선고를 이끌어내려 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하룻밤 사이에 산헤드린의 종교 법정과 빌라도의 군사 법정에 서십니다. 주님은 우리 죄 때문에 고난받으셨고(사 53:5), 우리 죄인들을 위해 스스로 범죄자 중 하나(사 53:12)가 되신 것입니다.
2-5절 많은 고발에 침묵하시지만, ‘유대인의 왕이냐?’ 하는 한 가지 질문에는 ‘네 말이 옳다’고 답하십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정죄했지만, 이 죄목은 종교적 범죄를 다루지 않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효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이유로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죄목에 전부 침묵하십니다. 이러한 태도는 빌라도를 매우 놀라게 만듭니다. 주님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범죄자가 되어 죽음의 길을 자청하십니다. 공회의 재판과 마찬가지로 빌라도의 법정도 빌라도에게 모든 것이 달린 듯 보이지만, 실상 모든 것을 주도하는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3,11절 종교 지도자들은 반대 여론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식일 전에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움직입니다. 혹시라도 빌라도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나오지 않도록 여러 가지 항목으로 고발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무리를 선동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합니다. 지금 나와 우리 공동체가 의욕을 가지고 서둘러 행하는 일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인지, 혹은 제 욕심을 이루는 일인지 살펴봅시다.
6-15절 빌라도는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군중의 요구에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줍니다. 그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선한 재판관이 아니라, 군중을 만족시켜 제 이익을 도모하는 탐욕스러운 통치자였습니다. 자신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무관하다 여기겠지만, 가룟 유다처럼 그도 불법과 타협한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오해하고, 말씀을 왜곡하는 세대에 침묵한다면 우리도 빌라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기도
제 욕심을 따르지 않게 하시고, 오직 참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만 따라 살게 하소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지만, 그는 예수님께 죄가 없고 시기하여 넘긴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명절특사로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불과 몇일 전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다수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석방되기를 바랄 것이라고 추측한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죄와 내란죄로 잡힌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누가 석방되기를 바라느냐 물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이 충동하니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괴성을 질러댔고, 빌라도는 그들에게 굴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넘겨 준 자의 죄가 더 크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놓을 권한도 죽일 권한도 있었던 빌라도의 죄도 큰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빌라도는 이렇게 큰 죄에 빠진 걸까요?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달래려고 불법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면 함정에 빠집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잠29:25)
사람이 두려워 불의와 타협하고 거짓을 행하면, 주께서 엄히 심문하실 것입니다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 말미암아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하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아니함은 내가 오랫동안 잠잠했기 때문이 아니냐"(사57:11)
그러나 이제 곧 주께서 사람이 두려워 하나님을 버린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50:21~22) 그래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눅12:4~5) 이 마지막 때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겠지만,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우리는 안전할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18:10)
❝진정한 왕으로 모셔 드리는 삶❞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그 어떤 변호도 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
✔ 왕 되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1~5절).
새벽이 되자마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빌라도는 뇌물을 좋아하고 난폭하며 강탈을 일삼고 무례하며 정의롭지 못한 자로 역사가들에 의해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흉악범을 다루듯 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아무런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을 고발하였지만 예수님은 빌라도가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아무런 답변도 변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무감이나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인들을 향한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순종의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죄가 있어서 형벌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내 자신을 향한 크고도 놀라운 사랑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나와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의 예수님의 침묵은 나를 향한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많은 말을 하기 보단 행동으로 받은 사랑을 나눔으로 예수님이 진정한 왕 되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용서를 보여주셨습니다(6~11절).
빌라도는 명절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 주곤 하였습니다(6절,새번역). 여러 죄수들 중에 바라바라고 하는 살인을 저지르고 갇혀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전례대로 죄수 한 명을 풀어 줄 것을 요청하자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시기하여 넘겨준 유대인의 왕을 놓아 주기를 원하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예수님의 죄보다는 대제사장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그를 바라보는 부정적 시각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예수님을 거역하고, 예수님에게 몹쓸 행동들을 하며 대적했던 사람들까지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까지 더 나아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나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 주셨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용서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더 이상 과거의 습관 그대로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변화된 나의 삶 그 자체가 사람들에게 신앙의 간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므로 예수님이 진정한 왕 되심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12~15절).
빌라도가 다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12절). 그때 사람들은 소리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한 번 더 물었음에도 사람들은 더욱더 크게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흉악범죄자였던 바라바는 풀려나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와 사망에 묶여 있던 나에게 참 된 자유를 안겨 주었습니다. 죄인 되었던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달리셔서 나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하여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유함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세상의 불안과 염려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며 걱정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나 역시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 말씀에 비춰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만유의 왕 되신 주님의 통치 아래서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평안과 안식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생명까지 내어 주신 예수님이 사랑으로 나의 삶을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믿고 확신하여 예수님이 진정한 왕 되심을 자랑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 보여주신 사랑과 용서와 자유를 깊이 묵상하고, 무엇보다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그 놀라우신 사랑을 영원히 찬양하며 풍성한 은혜들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막 15:1~15절).
1.고발당하신 예수님(1-5절)
로마서 16장 19절에 보면 선한데는 지혜롭고 악한데는 미련하라고 하였지만 오늘 대제사장들의 모습은 전혀 반대입니다. 자신들이 정적으로 여기는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너무나 기민하게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받아 들이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옳았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여러가지 말로 고발하며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처벌하여 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고발에 대하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함을 보고 빌라도는 많아 놀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고발하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싸워야 할 원수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진정한 원수인 사단의 계획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계셨으므로 끝까지 영적인 전쟁에서 실패하지 않으시고 승리하는 모습을 지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도된 우리의 싸움은 육의 싸움이 아니라 사단의 권세와 싸우는 영적인 싸움인 것을 바로 알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맛보며 사는가?
2.빌라도의 그릇된 선택(6-15절)
오늘 성경에서 빌라도가 얼마나 사람의 인기를 구하는 사람인지를 쉽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님에게서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음을 선언하고 석방하는 것이 옳은 행동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두려워한 빌라도는 잔꾀를 통해서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악한 계략에 휘발려서 결국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는 불의한 재판의 결과를 내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에게 권력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다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역시 빌라도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며 내 삶의 높고 낮음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음을 확실하게 믿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다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늘 분별력을 가지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힘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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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1~15 예수 그리스도를 판결하는 빌라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불법으로 체포하여
대제사장이 내가 찬송 받으실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 질문하고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4:62)하는 한 가지 대답을 듣고
저희가 다 예수를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하고 죽이고자 하나
로마의 지배아래 있는 상황이였으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죽일 수도 있는 사법권을 가진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온다.(1)
빌라도가 심문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2)
예수님이 네 말이 옳도다(2) 대답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들에게 자신이
내가 찬송 받으실 자의 아들 그리스도(막14:61)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이를 '유대인의 왕'으로 바꾸어서 고소를 한다.
앞뒤를 따져보면 이것도 엉터리 고소로구나.
대제사장들이 여러가지로 고소를 한다.(3)
여러가지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1. 백성을 미혹하여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눅23:2)
2.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 납부를 거부한다.(눅23:2)
3.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눅23:2)
4.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 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한다(눅23:5) 라고 하는 내용들이다.
이런 대제사장의 고소에 대하여 빌라도가 심문을 하지만(4)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4,5)
왜 주님은 침묵하셨을까?
대답 할 값어치가 없는 질문이였기 때문일까?
공평하신 하나님이 정의롭게 판단하시리라 믿기 때문일까?
털 깍는자 앞에 어린 양 처럼 침묵하시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려 함일까?
아무튼 간에 때때로는 침묵이 변명보다 더 훌륭한 웅변 일 수 있다.
허위와 날조된 불의한 자들의 참소 앞에 침묵하신 주님
그 침묵이 나의 침묵이 되게 하옵소서. 아멘.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 뿐만이 아니라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의 고소가 부당하고 터무니 없음을 알고
명절이 되면 백성이 구하는 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6)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하여 백성들에게 물어 본다.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는냐?(9)
당연히 환영하고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랄줄 알았는데
백성들은 빌라도의 예상과 전혀 다른 뜻 밖의 제안을 한다.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나바를 놓아 달라(11) 요구한다.
바나바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서 살인하고 포박 된 자(7)이다.
빌라도가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자는 내가 어떻게 하랴(12) 묻는다.
백성들이 소리 지르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13) 한다.
빌라도는 내가 어떻게 하랴? 백성에게 물을 필요없이
법관의 양심에 따라 죄가 없으면 석방을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를 외면하고 무지한 군중의 어리석음에 눌려 버렸다.
하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이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할 때마다
불명예스럽게 거론되는 이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불쌍한 빌라도여!!!
주님 나의 양심의 소리를 거역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도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양심을 속이는 자 빌라도
결정할수 있는 권위자 이면서도 책임을 회피해 버리는 비겁한 자 빌라도
다수결에 의하여 진리를 결정해 버리는 어리석은 자 빌라도
정의를 행하려 하나 행할 능력이 없는 빌라도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없었던 눈먼자 빌라도
빌라도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주여 도와 주옵소서.
결국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최악의 선택을 한다.
못 박아야 할 바라바는 놓아주고 석방 해야 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준다.(15)
인류 역사상 최악의 선택이다.
오늘의 말씀요약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님은 아무것도 답하지 않으십니다. 빌라도가 명절 전례대로 물으니,
대제사장의 충동을 받은 무리는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릅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그대로 합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끝까지 침묵하시는 예수님(15:1~5)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에 침묵으로 일관하십니다. 생사가 걸린 중대한 문제였지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을 뿐,
각종 억울한 누명과 악의적인 고발에 대해 어떤 변명이나 반박도 하지 않으십니다. 왜 예수님은 불법 재판에
이의를 제기하시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의 침묵은 약자의 절망적인 체념이 아닙니다. 이는 도리어
십자가 죽음을 주님이 주도하신다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대항할 능력이 부족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 계획에 따라 스스로 인류를 위해 대속 제물이 되셨습니다.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잠잠히 십자가의 길을 수용하셨습니다(사 53:7).
- 묵상 질문: 예수님이 여러 고발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하나님 뜻을 이루고 진정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침묵해야 할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예수님을 못 박게 내준 빌라도(15:6~15)
대가를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소신을 지킬 수 없습니다.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한,
세상의 압력과 유혹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확신했고, 예수님을 시기한 대제사장들이억지 명분으로 고발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기득권과 권력을 포기할 수 없었기에, 강하게 유대인들의
의사를 거부하며 예수님의 석방을 추진하지 못합니다. 그는 명절에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제도를 이용해
우회적으로 예수님을 풀어 주고자 했지만, 이 또한 유대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됩니다.
우유부단한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장본인이 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절대성에 대한 확신 없이는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합니다.
- 묵상 질문: 결정적으로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라고 여겨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바른 선택과 결정을 하기 위해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오늘의 기도
십자가 길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고 묵묵히 걸어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군중처럼 무지하게 행동하거나 대제사장들처럼 자기 유익만 고집하거나 빌라도처럼
자기 자리 지키려 눈치 보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얼마나 많이 넘어졌고 얼마나 삶 가운데 주님을 부인했는지
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들어 그 사랑의 눈을 바라보고
다시 엎드려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구해봅니다.
저희의 연약한 심령 가운데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아버지의 길로 다시 돌이키고 걸어가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아버지의 은혜의 날개로
덮어 주시고 이 나라와 백성이 모든 미움과 다툼,
악독과 죄악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며 이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