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출판되지 않은 김일성 회고록을 어디서 구했는지 읽고는 북한 김일성(김성주) 자신이 쓴 회고록으로 철썩같이 믿고 또한 그를 항일독립투사로 잘못 알고있는 사람들이 있어 유감입니다
남한으로 망명하기전까지 김성주의 측근으로 있으면서 북한 주체사상을 체계화했고 주체사상을 해외에 전파하는 외교업무를 병행했던 황장엽씨가 김일성(김성주)를 왜 항일투사가 아니라고 하는지,또한 김일성 회고록이 어떻게 만들어지게됐는지 다음 글을 읽어보면 알게될것입니다
황장엽씨가 쓴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한 장문의 글 중 일부입니다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의 과장과 위조
우리는 김일성과 그의 전우들이 항일빨치산 투쟁에 참가한 것을 응당하게 평가하고 있다. 항간에는 가짜 김일성이라는 설도 나돌고 있지만, 가짜건 진짜건 항일빨치산에 참가한 것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사실 그대로 밝혀지는 법이다. 앞으로 역사가들에 의하여 진짜 김일성인가 가짜 김일성인가 하는 문제는 반드시 해명될 것이다.
우리가 의견을 가지는 것은 김일성의 혁명활동 역사를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이 1930년 18살 때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주장은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운명 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사상을 창시하려면, 우선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투쟁경험과 민족과 인류의 발전과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1930년 18살 난 김일성은 중학공부도 하지 못하였고 투쟁경험도 없었다. 누에도 뽕잎을 먹고서야 실을 뽑는 법인데 똑똑한 지식과 경험도 없이 어떻게 새로운 지도사상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원래 6.25조선전쟁 이전에는 <주체>라는 말조차 없었다.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소련파와 중국파를 숙청할 때부터이며, 주체사상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므로 1930년 김일성이 18살 때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나는 1958년 초부터 7년 이상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하였지만, 그로부터 해방 전에 주체사상이나 주체를 세 울데 대하여 논의하였다는 말을 한번도 들은 일이 없다. 오히려 그때 내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는 "항일빨치산이 크게 투쟁한 것은 없지만 안한 것보다는 낫다"든 가, "그때 조선의 지도자로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다"든가 하는 따위의 비교적 겸손한 말이었다.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항일빨치산 투쟁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은 김일성 자신보다도 김정일이 앞장서 조작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구호나무>소동은 그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이다. 김정일이 실권을 잡기 시작한 때부터 북한 통치자들은 김일성이 진행한 항일빨치산 투쟁이 중국 동북지방에서 중국공산당의 영도 밑에 진행된 투쟁인 것이 아니라, 주로 백두산 근거지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지방과 조선반도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김일성이 조선국내에서 투쟁하였다는 증거로 나무껍질을 벗기도 거기에 <일본제국주의 타도>, <조선독립만세> 등 여러 가지 반일구호를 붓으로 써 놓은 것이 국내 도처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어느 빨치산 참가자가 회상기에서 자기들이 어느 밀림속에 주둔하고 있을 때 나무껍질을 벗기고 거기에 <조선독립만세!> 와 같은 구호를 써놓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암시를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구호나무가 빨치산 투쟁이 주로 진행된 중국 동북지방에서 많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고 북조선 도처에서 수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가 1만수천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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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위조한 <허위선전의 종합본>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이다.
원래 김일성은 항일빨치산 투쟁을 선전하기 위하여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출판하도록 하고, 당원들과 근로자들 속에서 회상기 학습을 시켰다. 물론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는 예외 없이 기자나 작가들이 사실을 흥미 있게 그리고 특히 김일성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방향에서 각색하여 써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 노동당원들과 청소년 학생들 속에서 김일성과 항일빨치산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자아내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기부터 김정일이 당중앙에 들어와 선전사업을 주관하면서 빨치산 참가자들이 쓴 회상기를 모두 회수하여 버렸다.
그 첫째 이유는, 그 회상기들이 김일성을 우상화하는데 집중되지 못하고 빨치산 참가자들 자신의 공적을 선전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대중 속에서 빨치산 참가자들에 대한 환상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회상기 필자들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한다 하여도 회상내용에는 당시의 진실을 반영한 자료들이 일부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이 김일성의 혁명활동을 대대적으로 과장하는데 방해로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다 회수한 다음부터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빨치산 참가자들의 이름으로 회상기를 발표할 필요성이 제기될 때에는 당중앙의 당역사연구소가 검토하고 개작하여 대중보도기관에 넘겨주기로 하였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빨치산 참가자들이 개별적으로 출판사나 신문사와 교섭하여 회상기를 발표하는 것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김일성의 혁명활동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대대적으로 쓰고 영화를 많이 만들도록 조직 지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예작품과 영화는 김정일이 직접 지도하여 만든 것이라 하여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한 저작과 같은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전당과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엄격한 규율을 세웠다. 예컨대 당중앙에서와 중앙급기관 일군들을 위한 학습반에서는 매주 한번씩 영화를 보게 되어 있는데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등의 혁명활동 주제영화는 <문헌영화>(김정일의 문헌과 같다는 뜻)라고 하면서 당과 국가의 최고위급 간부들도 예외 없이 의무적으로 보아야 하며, 때로는 영화를 본 소감을 당조직에 써내도록 규율을 세우고 있다. 이렇게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학습 대신에 김일성의 혁 활동역사를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를 의무적으로 학습하고, 어떤 것은 학습총화때 시험까지 치기 때문에
회상기를 읽은 기억은 사라지고 소설과 영화의 내용만을 역사적 사실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첫댓글 북에서 말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로 생각하면 된다
이남원씨 세기와더불어라는 책을 어떻게 구해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책 하나 읽고 김일성에 대해 미화 시키지 마세요
이미 고인이된 그 인물이 이야기가 계속나온다는 것이 북에서도 지속적으로 나온다면 그것이 충분히 의심해 볼 만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오늘 보니, 남북 당국자 회담이 열리는 날이로군요. 항상 그 시기가 다가 오면 여러 카페에 옮겨다니면서 이슈를 만드는 그룹이 존재하나 보죠? 특이하게 항상 그 시기가 다가오면 여기 저기서 김일성 이야기가 자주 흘러 나옵니다...
북조선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까, 제1의 실권자 이외에 제 2의 실권자로 '최영림'이라는 인물이 나타나더군요. 제 1의 실권자와 제 2의 실권자는 어떠한 관계가 있을까요? 최영이라면 The Spirit of Choi로 해석이 되는데요... 내각총리로 나오는 군요
해묵은 김일성 논쟁이 주기적으로 나오는것 같습니다. 주체사상 이론가이자 북한에서 서열 13위였던 황장엽씨가 쓴 글도 읽어보지도 않고 노동당에서 만든 회고록으로 김일성의 존재를 띄워주는 글들이 정기적으로 나오더군요
네이버에서 검색해보시면 황장엽씨가 쓴 장문의 '북한의 인권문제'에 관한 글이 있습니다. 최영림 얘기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거기에서 해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의문은 제 1의 실권자라고 알려진 인물들이 스스로 자리에 위치하여 기타의 인원들에게 행동지침을 주기적으로 살포하는지? 아니면, 제 2 또는 제 3의 실권자들이 제 1의 실권자를 옹립하여 가시적으로 모든 실권이 제 1의 인물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보이도록 유도를 하고 있는지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죠. 만약 후자라면 현시점에서 North Korea 실제적 실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며, 단지 제 1의 인물을 통해서 항상 이야기를 하고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이죠.
이미 고인이된 인물의 이름이 지속적으로 계속 나온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의심과 의혹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누군가 있다라는 것이죠... 다시말하면 침체된 북의 현상황을 과거 제 1의 실권자에게 모두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그인물이 원래는 달리 있다라는 의혹의 내용을 계속 살포하면서 책임의 소재를 흩뿌리고 있는 것이죠... 만약 그 인물이 별도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 인물의 지시하에 움직였으면, 현재의 참람함은 절대적으로 우리의 책임은 아니죠...
즉, 이미 고인인된 인물의 신격화를 지속적으로 흩뿌려, 남쪽을 감염시킨 후, 그로부터 파생된 절대적 우상화의 시각을 남이 가지게 만든 후, 그로인해 발생된 부작용의 대다수를 그인물 주변으로 모두 촛점을 맞추고 있다라는 것이며, 이성적 시각을 통한 냉철한 분석적 안목을 가지지 못하게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즉, 대남공작의 한 형태이며 그 것은 바로 북의 제 2 또는 제 3의 실권자와 분명한 관련성이 있을 것이다라는 이야기 입니다..
남한에 존재하는 고정간첩의 집단이 195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있었왔다라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상당히 높은 곳까지 줄을 대고 있다라는 이야기가 있었죠. 꾸준히 남파간첩과 접촉을 하여 정보를 교류한다라는 내용이죠...
5.18때 북한특수군이 잠입해서 광주시민을 학살한 내용을 다룬 책이 나왔더군요. 화려한 사기극이라는 책인데 북한자유연합이라는 북한을 탈출한 특수군인 단체에서 쓴 책입니다. 그 사건 당시에 북한방송에서 학살장면이 방송됐다는 내용도 있더군요. 북한군이 5.18 학살을 알고 그 참혹한 장면을 바로 방송을 했다는것이야말로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합니다
1950년이후 지금도 간첩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진보단체들은 간첩이 없다고 생떼를 쓰지만 60년가까이 대남투쟁, 유언비어와 소요를 발생시켜 남한을 불안한 정국으로 만들고 있는것같습니다.
가만히 우리의 가까운 역사의 자취를 돌아보면 1979년-80년 쯤, 박대통령 사후, 최규하라는 분이 당시 국무총리 였다고 나오는데, 바로 대통령을 잠깐 하신 적이 있으시더군요... 군부와 신군부 사이의 기간을 맡아서 일사천리로 사태 수습을 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왠지 북의 '최영림'이라는 인물과 남의 '최규하'라는 인물의 역할이 유사하다고 보여지기고 하는 군요... 2인자의 역할이라...
^^
저에 대한 관심 고맙습니다.
다른 말은 안할게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는 법이죠.
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머라 표현할 수 없는
서글픔이 느껴지는군요.
누군가 공부는 평생하는거라더군요.
저와 님들의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