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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예정인 글이므로 함부로 퍼가지 말아주세요.(스크랩,복사는 불허했어요.)
회원이 된 지는 여러해 되었지만 글을 올리는 것은 처음입니다.
이 게시판에 올리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올리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다른 곳에 올리는 것이 옳다면 그쪽으로 옮기겠습니다.
이 글은 제 자신의 견해가 있기는 하나 큰 논쟁거리를 제시한 것은 아니고 제가 그동안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미천왕에 대한 전기를 쓴 것입니다. 유명한 인물이지만 아직 단행본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거든요.
워낙 사료가 없는탓이겠지요. 저도 이부분이 어려웠습니다.
내용은 그냥 시간순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원고는 조금씩 게시판에 올리려고 합니다.
저는 두권의 책을 내었지만 크게 알려진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제 책에 대하여 제 자신이 늘 불만이어서 잠을 못이룬 적도 여러번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글을 쓰는 것은 크게 논쟁적이거나 학문적인 글이 아니면
거의 글을 쓰지 않는 학계에서 이런 책을 내어줄리도 없고 해서
나름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많이 망설였지만
부족한 글은 올리는 이유는 매번 글을 쓸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신중하게 검토한다고 해도 언제나 뒤에 잘못이 발견되고는 해서 출판 이전에 일부의 원고를 공개해서
여러 회원분들의
좋은 의견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잘못된 맞춤법이나 오류같은 고칠 부분이 있다거나
기타 다른 견해가 있다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고구려 중흥의 군주 미천왕(1)
여는 글
불타는 연군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담덕(談德)은 즉위하자마자 활발한 대외원정을 펼치고 있었다. 즉위 원년 9월에는 거란을 깨뜨리고 영락 5년에는 서랍목륜하 부근의 비려를 토벌하였다.
이것은 물론 고구려의 변경을 어지럽히는 유목기마민족의 기세를 꺾고 군사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원정이었으나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후연(後燕)을 압박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후연은 모용선비가 세운 나라로 고구려와 모용선비의 적대관계는 3세기 전반 동천 임금 재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것이었다. 두 세력 사이의 공방전은 1세기가 넘도록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었으나 태왕 담덕의 등장으로 승리의 저울은 고구려 쪽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영락 10년(서기 400), 후연의 임금 모용성(慕容盛)이 태왕의 태도가 거만하다며 고구려를 침공하여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 두 성을 함락하였으나 태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영락 12년(서기 402) 후연을 밀어붙여 숙군성(宿軍城)을 깨뜨렸다.
숙군성은 후연의 도성 용성(龍城)의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후연은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연은 고구려의 군사적 압박에 대항하여 도성 방위에 군사력을 집중하고 있었으나 이것은 태왕 담덕이 노리고 있던 바였다.
영락 14년(서기 404년) 고구려군은 오늘날 하북성의 북경 일대로 추정되는 후연(後燕)의 연군(燕郡)을 기습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신속하게 연군(燕郡)을 유린 점령하고 수백 명의 적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도성 방위에 고심하고 있던 후연(後燕)은 뜻밖에 기습을 당하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허를 찔린 것이다1).
그런데 태왕 담덕이 특별히 연군 공격을 지시한 데에는 또 다른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바로 한 인물의 사당을 찾아내 파괴하는 것으로 이것은 수십 년 전에 이루어진 한 파렴치한 행위에 대한 복수였을 것이라고 한다.
사당의 주인은 모용황(慕容皝), 그는 전연(前燕)의 통치자로 고구려를 침공하여 수많은 고구려 인민을 납치하고 환도성을 불태운 자였다2).
이 때 모용황은 혁혁한 전과를 이루었음에도 고구려의 역습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수 없었고 이에 대한 담보로 당시 고구려의 임금인 고국원(故國原) 임금의 아버지, 미천(美川) 임금의 시체를 도굴해 갔다. 이것은 고구려 사람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야만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미천 임금은 바로 태왕 담덕(談德)의 증조부였다.
아마도 연군의 모용황의 사당은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고 고구려 사람들은 전연의 괴수 모용황의 영혼이 그에 어울리는 심판을 받았다고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고구려의 미천 임금 을불(乙弗)은 낙랑군을 정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모용선비를 공략하여 적극적인 영토 확장을 꾀했던 뛰어난 군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을불이 처음부터 위대한 정복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을불은 비록 임금의 조카였으나 어린 시절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궁궐에서 도망하였다.
궁을 탈출한 이후 을불은 적들의 추적을 피하여 숨어 다녀야 했으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부잣집의 허드레 일을 하는 머슴으로서 때로는 소금장수로서 거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도둑의 누명을 쓰고 소금마저 빼앗겨 굶주림을 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 같은 여러 위기에도 을불은 끝내 살아남아 고구려의 제위에 올랐으나 죽은 뒤에는 외적에게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그 시신이 적에게 탈취당하는 역사상 유래 없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을불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즉위한 뒤에도 임금이라는 지존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여러 업적을 쌓아 장차 고구려가 제국으로 도약하는데 큰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것은 을불이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와 모용선비의 충돌로 시작된 서기 4세기는 고구려가 온갖 역경 속에서도 제국으로 성공적인 변화를 이룩한 시기였다. 때문에 을불의 삶은 고구려의 중요한 고비를 이끌었던 군주의 생애로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1. 고난의 어린 시절
<봉상왕은 처음에
그 숙부 달가(達賈)를 죽이고,
또 그 아우 돌고(咄固)를 의심하여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
화가 자기에게 미칠 줄 알고 달아났다.>
-신채호3)
모반 사건
뒷날의 미천 임금인 을불이 평양성에서 태어났을 무렵4), 고구려는 제13대 임금인 서천(西川) 임금 약로(藥盧)가 다스리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천 임금의 아들인 상부(相夫)가 새로 제1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상부는 곧 봉상(烽上) 임금으로서 을불의 아버지 돌고가 상부의 동생이었으므로 상부는 사사롭게는 을불에게 큰아버지가 되었다. 곧 을불은 고구려에서는 누구나 우러러보는 귀한 신분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이 같은 귀한 신분이 편하고 영화로운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궁궐은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는 곳으로 고구려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특히 이 무렵 고구려에서는 왕족의 모반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서천 임금17년(서기 286), 임금의 두 동생 일우(逸友)와 발소(素勃)의 모반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대담하게도 병이라 핑계대고 온천에 가 모반을 모의했다고 한다. 온천에는 임금의 동생들을 따르는 무리들도 함께 몰려가 절제 없이 유흥까지 벌였던 모양으로 마침내 모반에 대한 정보는 임금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다.
임금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는 재상을 시켜주겠다며 두 사람을 불렀다. 두 동생은 임금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궁에 갔다가 역사(力士)에게 잡혀 결국 살해되었다.
임금의 동생들에 의한 모반사건은 상부의 할아버지인 중천(中川) 임금의 재위 시에도 발생한 적이 있었다. 중천 임금 원년(서기 248), 두 동생 예물(預物), 사구(奢句) 등이 모반의 혐의로 처형되었다. 결국 중천 임금 이래 2대에 걸쳐 임금의 동생들에 의해 모반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던 것이다.
상부의 성격에 관한 후세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상부는 어렸을 때부터 교만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가 모두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부가 결국 정변에 의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자살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러한 기록이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서천 임금 17년의 모반 사건을 직접 경험했을 상부에게는 이러한 위협이 다른 이들보다 심각하게 여겨졌을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또한 할아버지인 중천 임금 즉위년에 일어난 모반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상부가 이른바 ‘의심이 많았다’고 하는 것을 나쁘게만 볼 수는 없다. 이는 그의 타고난 성격이었다기보다 당시의 시대적 환경 탓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5).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
따라서 상부가 즉위했을 때 가까운 피붙이에게 의심과 경계의 눈길을 보낸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상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이는 안국군 달가였다. 달가는 서천 임금의 동생으로서 상부에게는 작은 아버지였다. 달가는 서천 임금의 재위 시절에 숙신(肅愼)을 격파하여 고구려 인민들에게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서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서천 임금 11년(서기 280), 숙신이 침공하여 변경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숙신의 침공은 당시 고구려가 부여 견제 등의 목적으로 연해주 지역에 자리한 숙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자 숙신이 반발하여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6).
임금이 사태의 해결을 위해 여러 군신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신하들은 한 목소리로 달가를 추천하였다. 달가는 용기와 지략을 겸비하여 숙신의 침공을 막을만한 인재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를 보면 달가는 이미 숙신 침공 이전부터 나라 사람들의 기대를 받고 있는 재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달가는 숙신을 격파하여 그 우두머리를 죽이고 그 세력 일부를 오히려 부용으로 삼는 성과를 올렸다. 이에 임금은 크게 기뻐하고 동생 달가를 안국군에 봉하여 군사에 관한 업무를 맡기고 양맥(梁貊)과 숙신의 여러 부락을 다스리는 특권을 부여하였다. ‘나라를 편안히 했다(안국군)’는 영예로는 칭호가 달가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존경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후 달가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몇 년 후에 일어난 약로(藥盧)의 다른 동생들 일우(逸友)와 발소(素勃)의 모반 사건에도 달가는 별다른 영향을 받지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만큼 달가에 대한 군신과 인민들의 믿음이 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달가의 죽음
그러나 상부는 작은아버지인 달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가는 임금의 자리를 차지할만한 신망도 실력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달가에게 만약 추호라도 야심이 있다면 상부의 어좌도 위태로운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 상부에게는 달가의 진심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달가가 임금인 상부 자신과 맞먹는 세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 자체가 상부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부가 달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미 상부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큰 것 같다. 왜냐하면 달가 제거가 상부의 즉위 원년에 신속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상부는 달가를 죽임으로써 가장 위협적인 정적을 제거한 셈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민들의 신망은 크게 잃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인민은 달가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제 큰 위기가 발생했을 때 나라를 구할 인재가 사라졌음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당시 중국의 서진(西晉) 정권은 쇠퇴하고 있었고 각지에서 주위의 여러 민족들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동북아시아가 혼란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고구려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달가와 같은 인재가 필요한 시기였다. 나라를 걱정하는 고구려 사람들의 마음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그것은 머지않아 상부 자신의 위기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모용선비(慕容鮮卑)의 기습
봉상(烽上) 임금 재위 2년(서기 293) 8월, 고구려 서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모용선비(慕容鮮卑)가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고구려는 모용선비의 침공을 거의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고구려는 모용선비의 일부 군사가 영토 내로 침입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것이 고구려와 모용선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7). 하지만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보다 앞서 모용선비가 부여를 침공했을 때 고구려와 모용선비가 처음으로 전쟁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모용외(慕容廆)의 부여 침공과 고구려
모용외는 야심이 큰 모용선비의 젊은 지도자였다. 모용외는 약 8년 전인 태강(太康) 6년(서기 285)에 부여를 침공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힌바 있었다. 이 사건으로 부여의 임금 의려(依慮)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임금의 자제들은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모용외는 1만여 명이나 되는 부여사람을 잡아 돌아갔다8).
그 다음해 의려의 아들 의라(依羅)는 서진에 사신을 보내 나라를 회복하는 데 서진이 도와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에 서진은 동이교위 하감(何龕)의 수하인 독호 가침(賈沈)을 파견하여 모용외의 장수 손정(孫丁)의 목을 베었고 부여가 다시 나라를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9).
그러나 서진이 모용외의 군사를 격파하여 부여가 나라를 되찾는데 절대적인 기능을 하였다는 기록을 글자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견해가 있다. 모용외가 부여를 침공할 당시 서진은 오나라를 무너뜨리고 삼국을 통일한 이후 군축을 단행하고 있었고 흉노나 강족에 대해서는 방임으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진이 홀로 부여에 대해서만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또한 모용선비가 부여 사람들을 서진에 팔았다는 기록을 볼 때 서진과 모용선비 사이에 심각한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도 않고 서진이 비록 군사를 파견하였다고는 하지만 동이교위가 직접 출전한 것도 아니어서 직접적인 무력개입의 가능성도 낮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사람 모두루(牟頭婁)의 무덤 묘지문에 따르면 모두루의 선조 염모(冉牟)는 모용선비가 북부여를 침공했을 때 큰 공을 세운 것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을 모용외의 부여 침공 당시 고구려와 모용외의 군사가 전투를 벌였던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10).
현재 남아있는 고구려의 기록에는 고구려가 부여와 모용선비의 전쟁에 개입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역사 기록은 매우 간략하기 때문에 현존하는 기록만으로 당시 고구려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것이다.
부여와 고구려는 국경을 남북으로 맞대고 있으므로 부여가 모용선비에게 멸망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면 고구려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였을 것이다. 또한 고구려의 사료에 보이는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고구려가 부여와 모용선비의 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고구려는 모용외가 부여를 침공하기 약 5년 전인 서천 임금 11년(서기 280)에 변방의 골칫거리였던 숙신(肅愼)을 쳐 그 일부를 부용으로 삼았다. 그 때 고구려는 그 우두머리(酋長)를 죽이고 6백 여가(家)를 부여 남쪽 오천(烏川)이라는 곳으로 옮겼다.
숙신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중국의 역사 기록에 나타나고 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성격이나 위치가 변화하고 있다. 서천 임금 당시 숙신이라고 부른 세력은 읍루의 거주지로 알려진 오늘날 러시아 연해주에 자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읍루와 숙신은 호시(楛矢)라는 서로 비슷한 화살을 사용하였으므로 후대에 흔히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숙신은 읍루의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11).
그런데 숙신이 있었던 연해주는 한(漢)나라 때부터 위(魏)나라 초까지 부여의 영토였던 곳으로 바로 부여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12). 따라서 고구려가 숙신을 부용으로 삼았다는 의미는 부여의 동쪽 측면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숙신의 포로를 부여의 남쪽으로 옮겼다는 것도 고구려가 당시 부여와의 접경 지역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부여의 정세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면 고구려도 신속히 대응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부여 임금의 자제들이 달아난 곳이 옥저라는 것도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당시 옥저는 남북으로 나누어져서 오늘날 함경도와 러시아 연해주에 걸쳐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곧 숙신 남쪽에 남과 북 두 옥저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곳은 고구려의 영역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북옥저는 이미 동명성제 시기에 병합되었으며 남옥저(동옥저)는 태조임금 때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고 한다.
만약 부여 임금의 자제들이 옥저에 망명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부여가 고구려에 보호를 요청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13).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부여와 모용선비의 전쟁에 고구려도 자동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이미 서천 임금 시기에 고구려와 모용선비가 무력 충돌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매우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용외가 이 해에 고구려를 갑자기 침공한 목적은 고구려에 대한 무력시위를 벌임으로서 고구려의 서진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것은 모용외가 이미 부여와의 전쟁 때 고구려와 충돌한 후 고구려의 위험성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모용외는 뒤에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였을 때 봉상 임금의 아버지인 서천 임금의 무덤을 파헤치려다 실패하였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연한 사건이 아니고 지난날 서천 임금이 부여를 지원한 데 대한 보복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모용선비의 추격
임금 상부는 서울이 불안했는지 신성(新城)으로 거처를 옮기고자 하였다. 신성(新城)은 고구려에서 나라의 큰 진(大鎭)으로 여겨졌다고 하는데 그만큼 전략적으로 중요하고 방어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는 매우 훌륭한 성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달가의 죽음으로 뒤숭숭한 분위기도 도성을 떠나도록 만든 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달가 살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상부 자신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부는 도성을 나와 곡림(鵠林)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즈음 추격자가 있음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을 알아차린 모용외의 군사였다.
임금의 행차는 아무래도 그 이동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용외의 군사에게 따라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자칫하면 적에게 볼모로 사로잡힐 수도 있는 위기일발의 상황이었다.
이 때 마침 신성(新城)의 재(宰)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백여 기병을 이끌고 상부를 마중 나왔다가 모용외의 군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고노자는 모용외군을 격퇴하였고 상부는 크게 기뻐하며 그 보답으로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주고 소형의 관위를 대형(大兄)으로 높여 주었다.
기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고노자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임금을 마중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고노자가 제 때에 임금의 행차를 만나 모용외의 군사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었던 것이다. 고노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당연히 상부 자신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임금의 이동로는 분명 극비 사항이었을 텐데 모용외 쪽에서 어떻게 그 정보를 알고 상부의 뒤를 쫓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 째는 모용외의 정보망이 매우 치밀했을 가능성이고 두 번째는 고구려 쪽에서 정보를 일부러 흘렸을 가능성이다. 이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어느 쪽이 사실에 가까운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상부는 두 번째 가능성에 무게를 두지 않았을까?
앞서 본 것처럼 상부가 살해한 달가는 인민의 영웅이었고 따르는 이도 많았을 것이다. 상부로서는 그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의심은 한 번쯤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애초에 상부가 도성을 떠나 신성(新城)으로 향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안국군 달가의 죽음으로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대외적인 위기 상황을 치르는 것은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모용외군의 추격은 적어도 상부 자신에게는 그러한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주위 사람들에 대한 상부의 의심을 더욱 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돌고(咄固)의 피살과 을불의 도망
곡림의 위기가 있은 그 다음 달(9월), 상부는 동생 돌고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며 살해하였다. 이는 분명 곡림에서의 사건이 상부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돌고에게 정말 의심을 살만한 점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당시의 여론은 돌고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혹 돌고에게 야심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중요한 점은 돌고가 결국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는 돌고가 공식적으로 모반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돌고는 다름 아닌 을불의 아버지였다.
을불은 이제 임금의 조카에서 모반자의 아들이 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을불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궁을 벗어나 도망쳤다. 을불은 살기위해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서천 임금)의 3년상14)이 끝나기도 전에 형제 사이에 참혹한 살육이 벌어진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궁을 탈출한 을불은 음모라는 사람의 집에서 1년 정도를 머슴으로 일했다고 한다. 사서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을불(乙弗)은 처음에 수실(水室) 마을 음모(陰牟)라는 사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다. 음모는 을불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으므로 을불을 심하게 부렸다.
그 집 옆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개구리가 울어 시끄럽다며 을불에게 밤마다 기와조각과 돌을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하도록 하였다. 낮에는 나무하게 하고 밤에는 연못을 지키게 하여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15).
이 이후에도 을불은 소금 장수 등을 하면서 수 년 동안이나 더 떠돌이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을불은 본래 임금의 조카였지만 어느 날 권력 투쟁에 휘말려 목숨을 건지기 위해 궁을 탈출했다. 을불은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때문에 을불은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머슴이든 소금장수이든 을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기록을 통해 추정하건데 궁을 빠져나온 그 해 을불의 나이는 5~6세 정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루아침에 고구려 최고 신분에서 최아래 신분으로 곤두박질치게 된 운명은 아직 어린 소년에게는 매우 가혹한 일이었다16).
주
1) 이인철, 2000, <<고구려의 대외정복 연구>>, 백산자료원(서울), 191~192쪽; 郭沫若 主編, 1996, <<中國史稿地圖集 上冊>>, 中國地圖出版社(北京), 61쪽. 한편 연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요령성 의현 남쪽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姜仙, 2003, <高句麗와 北方民族의 관계 연구 -鮮卑 ․ 契丹 ․ 柔然 ․ 突厥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한국사전공 박사 학위 논문, 69쪽.
2) 池培善, 1998, <<中世 中國史 硏究 慕容燕과 北燕史>>, 연세대학교 출판부(서울), 1998, 303~304쪽.
3) 申采浩, 1990, <<조선 상고사 Ⅰ>>, 일신서적출판사(서울), 197쪽.
4) 을불이 태어난 곳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을불은 궁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시 고구려의 서울은 평양성이었다.
5) 김용만, 2001,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서울), 190쪽.
6) 김용만, 1998, <<고구려의 발견 새로 쓰는 고구려 문명사>>, 바다출판사(서울), 146쪽.
7) 池培善, 1986, <<中世東北亞史硏究>>, 一潮閣(서울), 40쪽. 이 책에서 저자는 김육불(金毓黻)의 태흥(太興) 2년(서기 319)설을 비판하고 고구려와 모용선비의 최초의 충돌을 건흥원년(서기 313)으로 보았으나 이는 착오이다.
8) <<資治通鑑>> 卷第81 <晉紀>3 世祖武皇帝中 太康6年.
9) <<資治通鑑>> 卷第81 <晉紀>3 世祖武皇帝中 太康7年.
10) 金俊秀, 2004, <모용선비의 초기성장과 한족(漢族)의 수용 - 유목제국 전통의 연속성과 관련하여 ->,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 30-31쪽. 한편 염모가 전투를 벌인 것은 모용외가 부여를 침공한 서천 임금 때가 아니라 고국원(故國原) 임금 때라는 견해도 있다(한국역사연구회, 2004, <<고대로부터의 통신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 푸른역사(서울), 44쪽.).
11) 손영종, 1999, <고구려의 령토확장에 대하여>, <<조선고대 및 중세초기사 연구>>, 백산자료원(서울), 75쪽.
12) <<三國志>> 卷30 <烏丸鮮卑東夷傳> 第30 挹婁.
13) 김용만, 1998, <<고구려의 발견 새로 쓰는 고구려 문명사>>, 바다출판사(서울), 143~144쪽.
14) <<北史>> 卷94 <列傳> 卷82 高麗. 고구려는 사람이 죽으면 3년 후에 묻으며 부모가 죽으면 3년 동안 상복을 입는다.
15) <<三國史記>> 卷 第17 <高句麗本紀> 第5 美川王 元年. “始就水室村人陰牟家 傭作 陰牟不知其何許人 使之甚苦 其家側草澤蛙鳴 使乙弗 夜投瓦石禁其聲 晝日督之樵採 不許暫息.”
16) 을불의 나이는 을불의 아버지 돌고가 우수의 딸인 왕후의 친아들, 상부의 동생으로서 서천 4년(서기 273)경 탄생하였으며 중국 고대 의서인 <<黃帝內經素問(황제내경소문)>>의 남자는 16세에 아기를 가질 수 있다는 기록(卷第1 <上古天眞論篇> 第1)에 의거 돌고가 을불을 17세(서천 20, 서기 289)에 낳았다는 가정 하에 추정한 것이다.
상부가 왕후의 태생임은 거의 확실한 것으로 보이나 상부와 을불의 출생연도는 기록이 없으므로 모두 추측해야 한다. 그런데 김용만은 을불의 출생연도를 284년으로, 을불이 궁을 도망쳐 나온 해를 9세로 추정하였다. 김용만은 서천 임금과 왕후 우씨가 1월에 혼인하여 이 해(서기 271년)에 상부를 낳은 것으로 가정하였는데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혼인 직후에 임신이 되었다고 가정하는 것보다는 약간의 터울을 두어 그 이듬해를 상부의 출생연도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상부가 서기 271년에 태어났다고 하면 을불의 아버지인 돌고는 그 동생이므로 상부가 태어난 그 다음해에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김용만은 여기서 을불의 출생연도를 284년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렇다면 돌고가 을불을 낳았을 당시 돌고의 나이는 우리나이로 13세가 된다. 임신기간을 생각하면 돌고가 12세 즈음에 을불을 가졌다는 것인데 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 몰라도 지나치게 무리한 추정이다.
16세에 남성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황제내경소문>>의 기록은 제쳐두더라도 영양 상태나 보건환경이 좋은 현대에도 남성의 평균적인 가임연령이 15세임을 생각할 때 돌고가 을불을 13세에 낳았다는 추정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김용만, 1998, <<고구려의 발견 새로 쓰는 고구려 문명사>>, 바다출판사(서울), 132쪽.
첫댓글 여는 글에서 평소에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광개토왕의 연군 공격을 소개한게 인상적이네요..^^
첫 댓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연군의 위치는 널리 알려진대로 요서지방이라 하고 베이징 부근 설은 주석에서 언급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요서지방 설이 통설의 위치에 있는듯 하더군요. 모용선비사에 통달한 지배선 교수가 요서지방 설을 따르다가 최근에 연군 공격 이유가 모용황 사당 파괴라는 주장을 하며 연군의 위치가 베이징 부근이라 언급하는걸 보면 베이징 부근 설도 타당한 근거가 있긴 한 모양인데 해당 논문을 확인해보지 못해서 모르겠네요.
일단 베이징설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를 소개한다는 의미에서 본문에서 언급했어요. 님이 말씁대로 지배선님이 견해를 바꾸었고 이인철님의 견해나 곽말약이 주편한 지도책에도 연군을 베이징으로 표시한 것 등으로 해서 본문에서 언급하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좋은 취지입니다. 모용황 사당 파괴 설을 소개하신 것도 그렇구요.^^ 지배선 교수가 모용황 사당 파괴설을 주장했단 것을 보고 흥미가 가 논문을 읽어보고 싶었습니다만 복잡한 사정으로 결국 읽지 못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모용황 사당 파괴설의 대강의 근거를 알려주실수 있으신가요?
아쉽지만 지배선님은 논문에서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지배선님은 전연이 모용황의 사당을 단 두곳, 법양과 연군에 설치했다는 사실에서 연군 공격이 모용황의 사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추론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정도면 그런 가설을 생각해보는것도 충분히 가능하겠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지배선 교수가 작년에 백산학보에 올리신 논문은 꽤 논란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저도 논문을 읽어본 것이 아니라 어떤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신지는 짐작이 가질 않는데 그에 대한 반론입니다. http://cafe.naver.com/booheong/37637
대략 보면 396년 북위와 후연간의 전쟁으로 이미 병주를 상실했고 399년에 연군태수가 주민들을 이끌고 북위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이 사실이 북위의 연군 점령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고 하기에는 좀 미약할 수도 있습니다. 땅을 점령한게 아니라 이주 투항을 한 것일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본다면 말이죠.
하지만 북위 침공의 결과로 모용희는 유주자사를 영지에, 청주자사를 신성에, 병주자사를 범성, 영주자사를 숙군성, 기주자사를 비여에 각각 교치했습니다. 유주에 속했던 연군 역시 북위에 의해 점령당하여 대릉하 어딘가에 교치되었다고 봐야하는 것이 맞지요. 광개토태왕이 연군을 기습했던 404년 때라면 말입니다.
일단 당시의 지명이 잦은 교치로 언제나 논란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연군태수의 투항과 진소의 이동이 어느정도의 영토변화를 초래했는가 또한 확실하지 않습니다. 유주를 옮긴 영지는 난하 유역이고 난하는 베이징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후연의 영토는 당시 하북성 일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연군이 옮겨갔다고 해도 그 지역이 대릉하유역이다 단정할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대략 하북성 북경 일대라는 표현이 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