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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교회갱신성경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정의영
마27:11-25절) 빌라도의 재판 59. 아마 기독교가 없어지지 않는 한, 결코 잊혀 질수 없는 이름은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일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고백을 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볼 수 있지만, 빌라도는 오히려 예수님이 무죄(無罪)임을 알고, 놓으려고 많이 애를 썼다는 사실입니다. 즉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달라고 떼를 쓴 사람들은 유대 지도자들이었고, 유대 백성들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자기가 유대인들의 억지에 예수를 사형에 처하지만, 자기는 죄가 없다는 뜻으로 손까지 씻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에서는‘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바혀 죽으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이렇게 기록된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한 이 사건은 몇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재판이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을 재판한 놀라운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판했던 사람이나, 예수를 기소(起訴)했던 사람들이나, 모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모르고 재판했다고 하지만, 좌우간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형판결을 받고, 죽으셨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둘째는 과연 이 재판과 재판에 따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느냐? 는 것입니다. 물론 법적으로는 총독이 사형을 판결하고, 집행했기 때문에 로마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로마 총독은 예수님의 재판에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유대인들이 거의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서 로마 총독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자신들과 자기 후손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습니다.
셋째는 왜 예수님께서는 이 악(惡)한 정치인들과 군중들에 대하여 제대로 항의조차 하지 않으시고, 묵묵하게 억울한 죽음을 감당하셨느냐? 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순서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문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을 두고서 빌라도와 유대인들이 협상을 벌인 내용입니다. 즉 예수를 내어 줄 것인지, 바라바라는 살인자를 내어놓을 것인지? 를 협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빌라도가 군중의 소리에 져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판결을 내리는 내용입니다.
l.빌라도의 심문 27:11절)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우리에게 무엇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렇게 존귀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죄인의 신분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느냐? 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신 것이라고는 병자들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 것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예수님께서 가장 악(惡)한 자들처럼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안다는 것은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靈的)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가능합니다.
마귀는 이 세상이 자기 세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에게 붙들린 자들을 말씀과 능력으로 하나씩 빼돌려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시니까 화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이 기회에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버려서 온 세상을 마귀가 영구적으로 차지하려고, 모든 사람들을 들쑤셔서 충동질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전쟁(戰爭)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왜 나는 다른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는 데, 저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을 자기들의 영역(領域)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라고 하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을 버리든지, 아니면 이 세상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진 명령은, 사탄이 불법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을 빼앗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의 세력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치열한 전쟁(戰爭)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미신(迷信)을 믿는 집안에서 누군가가 처음으로 예수를 믿으려고 한다면, 집안 식구들이 모두 일어나서 미워하고, 핍박할 것입니다.
즉 온 집안 식구들은 제사를 지내는데, 혼자 제사를 드리지 않거나, 새로 시집온 며느리가 제사 음식을 만들지도 않고, 절도 하지 않을 때, 너무나 미워서 거의 잡아먹을 듯 핍박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충동질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거의 유일한 심문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할 때는‘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죄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로마에 고소할 때는‘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대신에‘로마의 반역자’라는 죄목을 걸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 사람들에게는‘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마‘정신이 나간 광신자 중 하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에 죄가 되려면, 로마에 대한 반역죄라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 이렇게 죄명(罪名)을 바꿀 때는 사실 죄에 대한 증거가 엉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로마에 대한 반역죄라고 하면, 군사를 모으거나, 로마를 욕할 말이 있었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신 적이 전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네가 유대인의왕이냐’는 빌라도의 심문에‘그렇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사실 이 대답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결코 혈통 상 유대인들의 왕(王)은 아니셨습니다. 즉 지금 밖에 몰려와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자들의 왕(王)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진정으로 회개한 영적(靈的)인 유대인들의 왕(王)임에는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빌라도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은 동문서답(東問西答)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빌라도는‘네가 지금 기회만 있으면 로마에 대하여 반역하려는 유대인들의 왕이냐? 고 묻는 것인데, 예수님은‘나는 누구든지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정신적인 왕이다’라는 뜻으로 대답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으로 생각을 하셨습니다. 임신한 여자는 때가 되면, 무조건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아이를 낳기 싫다고 피한다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유대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십자가에 달리셔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위한 모범답안은 유대인들에 대해서는‘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셔서 그들의 증오를 극대화하는 것이고, 또 로마인들에 대해서는‘유대인의 왕’이라고 하셔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처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모범답안을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의 대제사장을 만났을 때는‘하나님의 아들이냐? 는 질문에는 ‘네가 말 하였다’라고 하시고, 또 로마 총독을 만났을 때는‘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는 질문에는‘네 말이 옳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질문이나 공격에 대해서는 일체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너무나도 미련한 것입니다.
빌라도가‘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라고 물었을 때,‘네가 지금 밖에서 소리를 지르는 저 사람들의 왕으로 보인단 말이냐? 라고만 했더라도 빌라도는 말문이 막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왕(王)같이 생기지도 않으셨고, 로마에 대하여 반역한 일도 전혀 없으면서도 빌라도에게 자신을 처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질문에는 일체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12-14절)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빌라도가 지금까지 보아온 사람들은 모두 세 치의 혀로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어도 혀를 기가 막히게 놀려서 전혀 죄가 없는 사람으로 둔갑하는 사람들만 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들을 묵묵히 다 듣고 계셨고, 마치 그 모든 비난들이 타당하다는 양, 그것들을 다 뒤집어쓰시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은 죄가 없는 예수님을 반역자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거짓된 죄의 항목들을 다 생각해서 고소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죄들은 모두 자신들의 죄였지, 예수님의 죄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을 보면, 모두 자기 문제를 가지고 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혀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비난들을 다 묵묵히 듣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그 죄들을 다 지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욕을 얻어먹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도 묵묵하게 가만히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더 많은데, 저 무지한 자들을 통해서 조금만 욕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실이 아닌 욕을 먹을 때, 참 억울한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생각하면, 그런 욕은 천분의 일, 만분의 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낱낱이 다 밝힌다면, 아마 십자기에 못 박혀 죽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그 모든 비난을 우리를 대신해서 마땅히 여기시고, 묵묵히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는 이 모든 비난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모든 비난을 통하여 우리를 믿는 자들은 다시는 정죄 받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보통 다른 사람들의 무지막지한 욕을 얻어먹으면, 그 욕이 우리 영혼을 갉아먹고 들어갑니다. 나중에는 그 욕 때문에 속이 시커멓게 타버리고, 영혼이 곪아서 썩은 고름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그 모든 욕을 다 가져가셨기 때문에 우리 영혼은 결코 손상을 입지 않는 것입니다.
Ⅱ.바라바냐 예수냐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이 재판이 아주 이상한 재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반역하는 자라고, 한 사람을 잡아와서 고소를 하는데, 이 사람은 전혀 반역할 성질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피고는 유대인들이 그렇게 고소하는데도 전혀 자기변명도 하지 않고, 침묵만 지킵니다.
원래 유대인들 자신이 아주 반역적인 자들인데, 이들이 잡아온 자라면, 결코 반, 로마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무죄라고 딱 부러지게 선언하고, 밀고나가지는 못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업신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유대 사회에서 유력한 분이었더라면, 빌라도가 이런 식으로 재판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님은 유대에 전혀 연고가 없고, 지지 세력도 없는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가 보기에 예수님을 너무나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전에도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섞어서 자기 제물에 바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을 어떤 종교적인 신념은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를 이용해서 유다를 통치하는 데, 약간 덕을 보고 싶었던 욕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즉 유대인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를 이렇게 미워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의 기대를 좀 들어주면, 그들도 빌라도를 지지해 줄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께 전혀 사형이나, 중죄에 해당하는 죄가 없는 줄 알면서도 재판을 질질 끌면서 유대인들을 설득해 보기도 하고, 협상을 해보기도 하고, 자극을 하기도 하다가 결국 유대인들의 요구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선 빌라도는 바라바라는 한 죄수를 가지고, 유대인들과 협상하려고 했습니다. 15-17절)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바라바’가 어떤 사람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단지 그가 살인한 사람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어떤 사람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테러를 저지른 살인자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강도짓을 하다가 살인한 사람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아무든 대개 파렴치(破廉恥)한 살인범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판과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라바는 이미 죄가 확정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지금 막 고소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비교가 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즉 예수님이 무죄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사람과 이미 죄가 확정된 사람을 비교해서 둘 중 하나를 풀어주겠다는 것은 결국 빌라도의 정치적 장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얼핏 보기에 빌라도가 그 당시 풍습을 이용해서 죄 없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라바를 이용해서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빌라도가 지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시기(猜忌)하고, 미워해서 잡아온 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풀어놓을 것처럼, 제스처(gesture)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을 더욱 더 자극해서 자기에게 더 매달리도록 하려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사실 바라바 같은 사람은 로마나 유대인들에게나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살인자는 죽어도 상관이 없고, 살아 있는 것은 더욱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오히려 바라바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라바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예수님 때문에 아무 쓸모없는 자신의 인생이 건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라바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바라바는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유대인들이 절대로 풀어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살려주도록 요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라바에게는 엉청난 복(福)이었습니다. 사람이 놀아도 예수님 부근에서 놀아야 무엇인가 복(福)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강도는 십자기에 매달려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만났더니,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인생은 홈런 한 방으로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홈런 한 방이 돈 방석에 앉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만나기만 하면 아무 쓸데없는 내 인생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빌라도의 부인(婦人)의 간청이 있었습니다. 19절)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의 부인(婦人)은 클라우디아 프로클라 인데,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믿는 아주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는 예수님이 의인(義人)인 줄 알았고, 절대로 인간이 재판해서는 안 되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녀는 꿈에 아마 예수님 문제로 애를 많이 태웠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잘 모르는 이방인은 이 의인(義人)의 재판을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 재판에 상관하지 말라고 충고를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역사상 가장 추하고 탐욕스러운 정치인이었는데, 그의 부인(婦人)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 부인(婦人)은, 남편이 유대 총독으로 오면서 하나님의 종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고, 아마 예수님의 설교를 듣거나, 소문을 듣고, 마음속으로 믿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남편은 가장 악(惡)한 자였지만, 그의 부인(婦人)은 가장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 부인(婦人)의 마음에 갈등이 많았겠습니까? 그래도 이 부인(婦人)은 결정적인 순간에 남편에게 올바른 말을 했고, 그 기록이 성경에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때 부인(婦人)이 남편이 무서워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더라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힘이 없어도 성경에 비추어서 도저히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 물론 그 말이 결과를 뒤집지는 못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귀한 믿음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가시나무새 라는 새가 있다고 하는데, 죽기 전에‘가시에 목이 찔리면서 큰 소리를 낸다’해서 가시나무새 라고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한번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불의(不義)를 보면서도 영구적으로 꾹 입을 다물고 있으면, 불의(不義)와 같은 편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비록 불의(不義)의 결정을 뒤집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한 번은 소리를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이런 용기(勇氣)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祝福)이 이방인에게 넘어가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즉 진리(眞理)를 보고서도 죽으라고 소리를 지르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진리(眞理)를 빼앗기게 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할 말을 했던 이방인들이 이 진리(眞理)의 주인공으로서 축복(祝福)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Ⅲ.빌라도의 재판 빌라도가 바라바를 내놓고, 협상하려고 할 때, 이미 유대인들의 마음을 자극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충동질을 받아서 바라바를 달라고 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22-23절)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해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유대의 군중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고, 빌라도가 무죄를 주장하자,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찍이 라인홀드 니버 라는 학자는⟪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 보면, 집단은 항상 비도덕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군중 속에 숨을 수 있기 때문에 개인은 양심의 가책을 덜 받고, 부도덕한 것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히 유대인 개인이 감히 로마 총독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억지를 부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군중들 속에 모여 있을 때는 총독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억지 주장을 해서 관철을 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군중을 교묘하게 조종한 사람들이 유대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이 아니더라도 군중은 쉽게 최면에 걸리거나, 감정적으로 동화가 될 수 있습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쉽게 사람들은 흥분하게 되고, 어떤 사람의 주장에 동화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집단 최면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서‘반 지성주의를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라고 했는데, 모든 것을 지성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집단주의를 이용해서 억지를 부려서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군중심리를 이용하는 자들은 언젠가는 자신도 그런 군중심리에 의하여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소리를 지르니까 빌라도는 결국 그 군중의 소리에 져서 예수를 십자가의 극형에 처하도록 판결을 내렸습니다. 24-25절)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다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좋은 의도로 왔는데, 인간들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고, 의심하고, 미워해서 극형으로 죽이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자기는 이 피에 책임이 없다고 손을 씻었고, 유대인들은 그 핏 값을 자기와 자기 후손들에게 돌리라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
그 책임은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있습니다. 일단은 로마 총독과 유대 지도자들과 그들의 사주(使嗾)를 받은 군중들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이 인간 세상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그 책임은 모든 인간들에게 다 공동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역시 유대인들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죗값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祝福)을 빼앗기고, 이스라엘의 축복(祝福)은 이방인 교회에 넘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 죗값으로 로마와 전쟁하게 되고, 결국 어마이마한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들의 말대로 그 핏 값이 자기들의 머리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우리 인류가 예수님의 핏 값에서 벗어나려면,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죄를 대신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살인자 바라바가 새로운 삶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죄 없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로마인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든지 예수님의 죽음이 내 죄를 대신한 죽음이라는 것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무조건 죄를 다 용서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나쁜 의도로 예수님을 죽였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빌라도와 같은 통치자나, 억지로 예수님을 죽게 했던 군중과 같은 사람들이 사는 이 세상을 어떻게 믿고, 살아가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세상의 문제를 영적(靈的)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이 세상의 정치는 권력에 의하여 왔다 갔다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때는 큰 죄가 되었던 것이, 시대가 흐르면서 뒤집어지는 것을 우리는 실제로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정치가 세상을 쥐었다, 폈다, 하지만, 속으로는 하나님께서 진리(眞理)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어마어마한 해일(海溢)이 서부 아시아를 덮쳤는데, 놀랍게도 바다 속에서는 몰랐다고 합니다. 즉 바다 속에서 스킨스쿠버 다이빙을 하던 사람들은 해일(海溢)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죽은 곳에서 야생 동물들의 시체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야생동물들은 육감(肉感)으로 지진(地震)을 미리 느끼고, 대피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이는 세상일들은 정치인들의 야망과 군중들의 욕심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속으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이 더욱 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 세상의 정치적인 결정을 뒤집지 못할 약(弱)한 존재들이지만, 그래도 빌라도의 아내처럼‘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수많은 사람들의 뜻보다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2018년 새해에는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한 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아무리 자기가 옳다고 생각을 해도‘그 죗값을 나와 내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니까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과 그 자손들이 비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면, 본인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손 대대로까지 망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讀者)여러분,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무지(無知)와 허물을 회개하고, 결코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을 따라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231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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