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칼럼] 조세희, '뫼비우스의 띠' 지금을 질타하다
민병식
소설가 조세희(1942~ )는 1979년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산업화 시기에 접어든 한국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다루기 시작,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최대 과제였던 빈부와 노사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제시한 작가로 유명하다.
뫼비우스의 띠는 직사각형의 종이를 한 번 비틀어 양쪽 끝을 붙였을 때에 생기는 곡면, 이 면은 안과 밖의 구별이 없어, 곡면 이상의 어느 한 점에서 면 위를 더듬어 한 바퀴 돌면, 그 뒤쪽으로 오게 된다. 이 띠의 폭을 반으로 가르면, 원래의 크기보다 2배가 되는 둥근 고리가 된다.
소설 뫼비우스의 띠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12편의 연작소설 중 하나다. 이야기는 고3 수학 담당 교사가 학생들에게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뫼비우스의 띠'를 통해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시작된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같이한 뒤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와 깨끗한 아이 가운데 어느 쪽이 얼굴을 씻을 것인가?'
라고 교사가 학생들에게 묻자 잠시 후에 한 학생이 일어서서 "얼굴이 더러운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그러자 교사는 "그렇지가 않다"라고 대답한다.
교사가 한 번 더 학생들에게 묻는다.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같이한 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는다. 똑같은 질문이었다. 이번에는 한 학생이 바로 일어나 대답했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씻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교사는 "그 답은 틀렸다."라고 말한다
" 두 아이는 함께 똑같은 굴뚝을 청소했다. 따라서 한 아이는 얼굴이 깨끗한데 다른 한 아이의 얼굴은 더럽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교사는 분필을 들고 칠판 위에다 '뫼비우스의 띠'라고 썼다. 교사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을 한다.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깨끗한 얼굴의 아이를 보고 자기도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깨끗한 얼굴을 한 아이는 상대방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자기도 더럽다고 생각해서이다.
두 번째는 앉은뱅이와 꼽추의 이야기이다.
몸도 생활도 어려운 앉은뱅이와 꼽추의 집은 아파트 재개발 때문에 무너져 버리고 만다. 대신 입주권과 이주보조금을 받는데 둘은 입주권을 16만원에 부동산 업자에게 판다. 이후 둘은 입주권 시세가 38만원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분노한 앉은뱅이와 꼽추는 부동산 업자에게 복수할 결심을 하게되는데 결국 앉은뱅이가 부동산 업자를 죽이게 된다. 그러나 부동산 업자에게서 돈을 되찾은 후 꼽추는 앉은뱅이를 떠난다. 돈이 생기면 동업해서 강냉이 기계를 사고 모터가 달린 자전거와 리어카에 끌고 다니며 강냉이를 튀기기로 약속했던 앉은뱅이와 꼽추는 함께 하지 못한다. 꼽추는 앉은뱅이에게 이 말을 하고 떠난다
"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자네의 마음이야"
꼽추는 함께 복수를 했지만, 부동산업자를 차에 태운 채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살인을 한 앉은뱅이가 두려웠던 것이다.
사람의 행동을 이분법적 사고로 전부 나눌 수는 없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결과로만 봤을 때 살인을 한 앉은뱅이가 살인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살인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보면 꼽추도 아무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드는 가장큰 의문을 살필 필요가 있다. 왜 둘은 입주권과 이주보조금으로 새로 짓는 아파트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답은 쉽다. 이 두가지 만으로 새 아파트에 들어가기엔 돈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지역 사람들이 입주권과 이주보조금 만으로 그 자리에 생길 아파트에 들어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텐데 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몰아내고 도시개발이라는 강제로 원주민을 몰아내는 것이 정당한가. 앉은 뱅이는 부동산 업자에게 입주권을 판 돈으로 전세들었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남은 돈이 없다고 했다.
20세기의의 소외된 계층, 사회적 약자 들이 21세기대를 살아가는 선진국인 대한민국에서 모두 사라졌을까. 1970년대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다.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어느 아파트 지구의 원주민들도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쫓겨났을 것이다. 그들은 그동안 정들었던 삶의 터전을 떠났을 것이다. 벌이가 시원찮거나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나마 살던 집을 빼앗기고 받은 보상금으로는 살던 집 근처에 사는 것을 꿈도 못꾸는 외곽으로 밀려났을 것은 자명하다.
작품을 통해 현실을 조망한다. 누구의 잘못인가. 말로만 소외 계층, 사회적약자를 위한다고 하지 말고 가난한 사람 다 내 쫓고 쫓겨난 것이 억울해서 잠못자는 사람들을두고 국민들에게 이익을 돌려줬다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진 네이버
첫댓글 인간이 지닌 양면성
언제나 그로 인한 갈등을 합니다.
특히 질문에 대한 근본이 잘못된 것에
굳이 답을 달려고 애를 쓰는 무지몽매한 일들도 많습니다.
주도권이 없는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늘 쪼달리고
끌려가는 삶이지요...... 조세희 작가이 예리하게 삶의 현실을 잘
파헤쳤다는데 공감을 합니다.
민병식 선생님의 칼럼을 읽다보면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물씬 풍겨져 나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