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에서 쓴 단풍이야기
단풍은 어쩌면 시간의 얼굴일지 모른다.
한 계절의 끝을 알리며, 사라지는 빛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붉게 타오르는 존재.
그 빛은 덧없지만, 그 덧없음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진실이라는 것을
나는 슬로바키아의 가을에서 배웠다.
타트라 산맥의 능선 위로 바람이 흘러간다.
노란 잎과 붉은 잎이 뒤섞여 하늘로 날리면,
그 속에서 들려오는 건 바람의 노래이자,
어쩌면 지난 세월의 고백 같기도 하다.
낯선 도시 브라티슬라바의 돌길을 걸으며,
나는 내 안의 낙엽 소리를 들었다.
바쁘게 흘려보냈던 시간들, 미뤄둔 그리움들이
가을빛에 물들어 조용히 나를 스쳐갔다.
단풍은 결국, 자신을 태워 남에게 색을 남긴다.
그처럼 사람도 삶의 어느 순간엔 자신을 태워야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따뜻한 온기로 남을 수 있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순환의 법칙이다.
떠남 속에 머무름이 있고, 끝남 속에 다시 시작이 있는 법.
그리움은 바로 그 순환의 다른 이름이었다.
슬로바키아의 가을은 말이 없다.
낙엽진 산책로, 강가의 벤치, 오래된 성의 벽 틈 사이에서도
그저 바람만이, 시간의 손끝처럼 부드럽게 흐른다.
나는 그 속에서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내 안에서 색을 품고 있던 이름,
그리움은 그렇게 계절을 따라 다시 피어났다.
단풍이 지고 나면 겨울이 오겠지.
하지만 그 겨울을 견디게 하는 건,
바로 이 찬란했던 단풍의 기억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결국 사라지기 위해 피어나지만,
그 사라짐의 순간조차 누군가의 마음에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지 않을까.
슬로바키아의 가을은 오늘도 그렇게 흐른다.
빛나지 않아도 따뜻하고, 다하지 않아도 완전한 계절처럼.
그리고 나는 그 길 위에서 배운다.
인생도 결국 단풍처럼,
한순간이라도 아름답게 타오르다 흩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첫댓글 여행이란 삶에 쉼표를 찍는 일이다
바람이 말을 걸고 하늘이 대답하는 시간
익숙한 것들로부터 잠시 멀어져 나를 새로이 마주한다
길 위에서는 나이도 직함도 모두 벗겨지고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진짜가 된다
돌아보면 그 짧은 여정 속에
오랜 시간의 위로가 숨어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여행자이자 관찰자다.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한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길을 천천히 걸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마음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바람 끝에 담긴 햇살은 의외로 포근했다.
작은 찻집에서 마신 유자차 한 잔이 참 좋았다.
말없이 바라본 가을 하늘은 참 깊었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바람 따라 흩어졌다.
가을은, 이렇게 조용히 마음을 안아준다.
여행을 하면, 나도 모르게 속도가 느려진다.
시간표 없이 걷고, 계획 없이 머문다.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나를 돌아본다.
매일 쫓기듯 살던 날들 속에서 잊고 있던 마음이 조용히 깨어난다.
여행이 주는 진짜 선물은, 결국 그런 ‘잠깐의 멈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