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산나와 다니엘 그리고 …
다니 13,1-62; 요한 8,1-11
2021.3.22.; 사순 제5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은 공통적으로 간음 행위를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독서는 수산나라는 부인에게 성폭력을 저지르려던 이스라엘의 두 원로가 다니엘의 지혜로운 재판으로
들통나서 처벌받은 이야기였고, 복음은 간음하다가 붙잡혀 온 여인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끌고와서
예수님께 판결해 달라는 올가미를 던졌는데 예수님의 기지(機智)로 그들과 군중은 돌아갔고 그 여인은
무사히 풀려났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여인에 대한 성폭력이라는 요소는 형식상의 공통 요소일 뿐이고,
실질적인 공통 요소는 두 원로와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 등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들의 위선적인 행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으로 끌려가게 된 이유도 지도층의 타락 때문이었거니와 끌려가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그 바빌론에서조차도 오늘 독서에 나오는 두 원로는 의로운 판결을 하려들기보다는
자신들의 음욕을 채우려고 지위와 명성을 악용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온 수산나가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을 뻔 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바친 수산나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으셨고,
다니엘이라는 젊은이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거룩한 영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로 강간미수 행위에다가 거짓 증언까지 자행한 그 사악한 원로들의 죄상을 밝혀냈고, 백성들의 동의를
받아서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의 상황에서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묘하게도 초막절 축제에서 생명의 물에 대해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밤에 올리브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가
그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성전에 가서 군중을 가르치셨는데, 이런 예수님의 동선(動線)을 미리 파악해
놓았다는 듯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판결하기를 다그쳤습니다. 평소에 자비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라고 판결하면 군중에게 비웃음을 사게 될 뿐만
아니라 사형권을 독점하고 있는 로마 총독의 권한을 침해하는 일이 될 것이고, 그 반대로 죽이지 말라고
판결해도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어 엄청난 비난 거리를 자초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유다 의회로
끌려갈 수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도 함정에 빠지게끔 파 놓은 올가미였던 것입니다.
원래 간음과 간통죄는 남녀 모두 처벌 대상이었습니다(레위 20,10; 신명 22,23-24).
그런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인만 데려다 놓았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시간에
맞추어 그렇게 했습니다. 초막절 축제 때에 생명의 물에 관련된 논쟁을 벌이다가 성전 경비병들을 보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었으나 무위(無爲)에 그친 전 날의 일을 마저 해치우려는 듯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인질로 삼아 그분을 협박하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이 날조된 조작극의 공범은 어쩌면 저들의
동료였을지도 몰랐습니다. 어찌되었건 예수님께서는 살기등등한 그들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머쓱해진 저들이 줄곧 재촉하자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하시고는 다시 쓰기를 계속하셨습니다.
평소에 율법을 잘 지키기로 자부하던 저들이었으므로 모세 율법을 어긴 그 여인에게 냉큼 돌을 던질 법도
한데, 이상하게도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가
버렸습니다. 저들 중에 죄 없는 자는 없었던 셈이고, 특히 간음죄와 관련하여 무죄한 자는 더욱 없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어쩌면 평소 그 여인의 단골도 섞여 있었을른지도 모르지요.
자격지심(自激之心)이라는 일말의 양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양심을 억누르고 수산나를 모함하려던 원로들이나, 양심에 찔려 감히 돌을 던지지 못한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 지도층의 의식수준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의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취약한 부분이 성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패하고
타락할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성적으로 남용하기 일쑤입니다. 마비된 양심이 드러나는
이렇게 한심한 지경이 소위 하느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의 수준이요 실력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떨까요? 다니엘이 억울한 수산나를 변호하여 살려냈듯이 약자들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의
소리를 잘 듣고 후안무치한 악인들에게서 억울한 약자들을 구해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 자신은 어떨까요? 예수님께서 위험천만했던 여인을 구해주시고도 단죄하지 않으셨듯이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는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과 악의 대결 전투에서는 적진에 사로잡힌 포로를 구출해 내는 작전도 요구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