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학, 식물학, 생태학의 분야에서는 미의 전래 루트에 대해서는 시나 남부로부터 직접 전래했다고 하는 설이 정설이었지만, 고고학, 역사학의 분야에서는 한반도 경유라고 하는 생각이 유력했다.
그러나, 7, 8년 전부터 우선 고고학의 분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 점차 시나 남부로부터 직접 전래한 설이 유력하게 되고, 현재는 거의 모든 학계에서 정설이 되어 있다.또 시나의 벼농사 연구계에서는 오히려수도종은 일본에서 한반도로 전파 했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게 되어 있다.
이 흐름이 가속한 것은 주로 2개의 이유가 있다.
유전자 공학의 분야로부터의 연구의 성과, 또 하나는 시나 정부 기관이 20년 이상 걸치고 만주에서 실시한 품종의 조사다.이 2가 결정타가 되어한반도 경유로 미가 전래한 가능성이 없어졌다.
순서를 쫓아 설명하면, 미에는 품종 특성을 결정 짓는 유전자가 7 종류 있다.이 중 고대부터 현대에 이를 때까지 일본에서 발견된 미의 유전자는 2개 밖에 없다.일본에 존재하는 유전자를 NO.1으로 NO.2로 한다.
NO.1으로 NO.2의 유전자는 각각 온대 쟈포니카와 열대 쟈포니카라고 하는 품종의 특유 유전자다.
다음에 벼농사의 발상지인 시나는 물론 NO.1으로부터 NO.7까지 모두 갖추어져 있다.
한반도의 미는 NO.2로부터 NO.7까지의 6 종류가 갖추어져 있지만, NO.1만은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기온이 낮으면 존재할 수 없는 유전자이기 때문에 시나 북부에서(보다) 북쪽에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근처의 사정은 「재배벼에 관한 타네오태학문적 연구」(마츠오 타카시령저)에 상술되고 있다.
왕래가 활발하게 되면 과연, 많은 종류의 유전자를 가지는 요네가 들어오는 확률이 높아지지만, 일본에는 2 종류 밖에 없는 것이 확인되고 있고, 이것이 벼농사 개시의 초기부터 넓게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미의 전래는 극히 한정된 회수로 특정의 지역으로부터 전래했다고 생각된다.
근년, 탄소 14 연대 측정법이라고 하는 최신의 연대 측정법의 성과로 한반도의 벼농사보다 일본 분이 꽤 낡은 것이 밝혀져 오고 있다.일본의 벼농사 개시는 밭벼 재배로 6700년 정도전까지, 수도 재배로 3200년 정도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판명되어 있다.
이것에 대해 한반도에서는 수도 재배는 1500년 정도전까지 밖에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점, 큐슈 북부와 재배법이 아주 비슷하는 것이나 유전자 학문적으로 일본의 고대미에 만주로부터 들어간 미의 유전자가 교잡한 미가 많은 일등에서, 수도는 일본에서 한반도에, 밭벼는 만주 경유로 한반도에 전해졌던 것이 판명되었다.시나 정부의 연구기관에서도 조사가 진행되어 틀림없다고 하는 결론이 나와 있다.
또, 시나 남부의 일본의 미의 기원과 추정되는 지역은 열대 쟈포니카도 온대 쟈포니카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양자를 1 품종씩 가져왔다고 생각된다.
왕래 회수가 많아지면 별유전자 품종이 섞여 올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고대인이 유전자 선별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은 이 지역만으로부터 유입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또 한반도의 미는 NO.2의 유전자가 70%을 차지하므로, 미가 한반도에 도입된 초기 단계에서 NO.2의 유전자가 많이 전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일본으로부터 2 종류의 유전자를 가진 미가 한반도에 건넜지만, NO.1의 온대 쟈포니카종은 한반도에 뿌리 내리지 않고 NO.2의 유전자만이 퍼져, 거기에 만주로부터 미가 들어 오고, NO.2의 유전자를 가지는 미?`니 교잡했다고 생각하면 한반도의 미에 유전자적인 설명이 붙는다.
시나에게는 모든 유전자가 만편 없게 있으므로, 특정의 종류의 유전자만을 많이 해 한반도에게 전하는 것은 무리이다.
한국의 학계에는 고대 조선인이 유전자를 분별하는 어떠한 방법을 가지고 있고, 구분을 한 다음 일본에 미를 전했다고 하는 설을 주창하는 학자도 있지만, 소망이라고 할까 발표 시에 흥분 기색에 고집에서도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미가 전해졌던 것에 하고 싶게 밖에 안보인다.어떻게 유전자를 분별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무리가 있는 설이다.
한국의 학자는 학술적 견지보다 감정이 먼저 나와 있으므로 매우 상대를 하기 어렵다.실제로 BSE의 연구회를 영국에서 개최했을 때는 한국에서는 초대자 없음이라고 하는 사태도 있었다.
미의 전래는 시나 남부에서 일본에 온 것인 것을 설명했지만 이세징구에는 이것을 증명하는 전승이 있다.
「미는 제의 황실 직할령으로부터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가 가져왔다」(제는 현재의 중국 산둥성)이라는 것으로, 현재의 학계에서는 일본의 미는 시나의 산둥성 부근이라고 하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 동지역에도 일부 부족이 일본에 건넜다고 하는 전승이 있어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층 더 대만의 학자가 우카이에 주목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이것도 일본에의 미의 전래가 시나로부터인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카이의 풍습은 시나의 초의 나라(현재의 호남성과 후뻬이성과 그 주변)와 그 벼농사 문화권인 쓰센성, 윈난성, 광둥성 등 중국 남방의 지방에 잘 볼 수 있다.일본에서도 보통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우카이는 한반도에서는 고래 전혀 볼 수 없다.대만이나 류큐 문화권에서도 우카이의 습관은 없다.이것은 최초로 미를 일본에 가져왔던 것이, 시나 남부의 초에 기원을 가지는 사람들로 경유 없이 직접 일본에 전래시킨 것을 증명하고 있다.그 사람들이 전한 우카이가 일본에 퍼졌다고 하는 것이다.
덧붙여 일본의 품종 개량 기술은 나라~가마쿠라 시대에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아스카 시대에도 인의 선별 기술등이 확립하고 있어, 5 세기무렵에는 단위 수량이 아시아에서 톱 클래스가 되어 있다.
일본이 조선을 병합 했을 때에 조선에 일본의 경작 기술이 이출 되어 단위 수량이 병합전에 비해 2.2배라고 하는 폭발적 증가를 보았지만, 이것은 관개 설비의 외, 식물 방역, 시비법의 전수에 의하는 것이다.단위 수량의 증가는 도전에 있어서의 생활의 안정을 가져와, 식료 계획의 연구자료에 의하면 섭취 칼로리가 하루 쯤병합전에 비해 한 명 당 400칼로리, 섭취 단백질량이 한 명 당 7그램이나 증가했다.영양상태의 큰 개선등에 의해 병합 후의 조선의 인구는 2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시나도 조선과 동일한 정도의 수량인 것 등을 보면 일본의 벼농사 기술은 20 세기 초두의 아시아에서는 뛰어나고 톱이었던 것이 물을 수 있다.
-------------------------------------------------------------------------------------------------------------------
-------------------------------------------------------------------------------------------------------------------
이상이 한 일본인의 주장입니다. 영어 포럼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봤는데요 일본내에서 상당히 널리 퍼진 의견같습니다. 현재 국제학계에서 어떤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지 사정을 잘 아시는 분의 첨언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