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표범은 열다섯시간을 잡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잠자기에 좋은 장소를 물색하는 데 쓰죠 목소리를
끝으로 라디오는 끝났고 그건 디제이가 물러났다는 것
누군가 자러 갔다는 것
잠 그래 좋은
잠 나도 자야지
잠, 하며 따라 누웠는데
잠은 움직임의 서랍
잠은 움직임의 기쁨
내 기쁨 서랍이 곤궁하여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러나 내 서랍 깊숙이 잘 정리해둔 춘곤과 식곤 눈꺼풀 속의 여름빛 그리고 깊은 곳에 웅크린 동면의 습성……이 있어, 그중 하나를 꺼내어
잠 그냥 잠
속에 빠지길 기다렸다 길고 상심한 시간을
주무르다 한마리 바다표범을 빚어낼 때까지
시간 점토로 빚어낸 바다표범이 자거나
자기 좋은 장소를 찾아낼 때까지 그리하여 나는,
바다표범을 따라 하거나
따라가며
온 잠을 다 누리고
잠으로 무한 목욕을 한 후
누적된 피로와 권태 관절의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운 몸이 되겠지 바라니 바라나니 이 잠 이후에 나는 지난날의 실례와 책망 좌절로부터 무관한 새 몸이 되기를
새 옷만큼 기쁜
새 몸 갖기 그러나
시간이 주물렀다 나를 잠은 바다표범처럼
혼자 자러 떠났고 한참을 지켜보던 내
서랍은 무언가 포기한 듯 오늘을
간곡히 잠 청함 그러나……라고
정리한다
- 탕의 영혼들, 창비시선 488 -